해외의 다큐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마치 패키지로 보이는 다큐들이 있다. 산악 다큐인 'Free Solo(2018)', 'Meru(2015)', 그리고 'Man on Wire(2008)'.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암벽산 엘 캐피탄(El Capitan)을 맨손으로 등반한 알렉스 호놀드의 이야기를 담은 'Free Solo'는 정말이지 나름의 충격 같은 것이 있었다. 목숨을 걸고 하는 도전의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 호놀드가 엘 캐피탄 등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도전하다 사망한 동료 산악인들 소식을 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정말로 그가 하는 일이 목숨을 걸고 할 만한 일일까? 호놀드와 비슷하게 목숨을 걸고 도전을 했던 이가 있었다. James Marsh의 2008년작 다큐 'Man on Wire'는 1974년에 뉴욕 세계 무역 센터의 쌍둥이 빌딩에서 외줄타기 도전을 시도한 필립 프티트(Philippe Petit)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큐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프티트와 당시에 프티트의 도전을 도왔던 이들의 증언, 기록 영상과 사진, 재연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티트가 어느 날 갑자기 미국으로 건너가 최고층 빌딩에서 외줄타기를 선보인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는 17살 때 세계 무역 센터의 착공 소식을 읽은 후 당시 세계 최고 높이의 건물로 기록될 그 곳에 매료되었다. 저글링과 줄타기 같은 거리 공연을 하며 자신만의 외줄타기(high-wire walk) 기술을 연마해 나갔다. 파리의 노틀담 대성당, 호주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선보인 외줄타기 공연의 성공으로 그는 고무되어 있었다. 물론 그런 시도 자체는 모두 허가받지 않은 것이었고, 매번 체포되어 일시적인 구금을 겪어야 했다. 마침내, 프티트는 자신이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꿈에 도전한다.

  영웅 신화에서 영웅이 조력자 없이 위업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결같은 정서적 지지를 보낸 여자 친구 애니, 사진 작가, 자금 담당, 장비 설치를 돕는 이들... 모두 다 프티트가 가진 열정과 놀라운 재능에 사로잡힌 이들이었다. 이미 성공한 모험이었음에도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는 이들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떨림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전이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프티트의 죽음에 일조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릴 터였다.

  어쨌든 이 20세기 돈키호테 필립 프티트는 무작정 창 하나 들고 풍차에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가 가진 재능은 단지 외줄타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뤄내기 위한 놀라운 집중력과 실행력까지 갖추었다는 점에 있었다. 프티트는 자신이 도전할 빌딩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철저히 조사했다. 헬리콥터 빌려서 항공 사진으로 빌딩 외부를 촬영했고, 빌딩의 구조적 측면을 알아내기 위해 가짜 기자로 위장하고 건축가와 인터뷰를 하기까지 했다. 당시에도 세계 무역 센터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으므로 필요한 신분증을 위조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프티트와 친구들은 여러 시일에 걸쳐 필요한 장비들을 빌딩 최상층부까지 나르고, 결전의 날을 기다렸다.
     
  마침내, 그는 외줄에 몸을 맡기고 세계 최고층 빌딩 사이를 여러 번 왕복했다. 당시의 장면은 스틸 사진으로 제시되는데, 그 사진 속의 프티트는 충만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장면은 관객들이 그를 외줄타기 모험가가 아니라, 예술가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경이로움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이후에 예술가의 정체성을 갖고 high-wire walk에 대한 공연을 이어갔다. 24살에 달성한 위업은 그를 단번에 유명인사로 만든다. 프티트는 온갖 찬사와 각광을 받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조력자들에게 인간적인 신의는 갖추지 못했던 모양이다. 다큐는 프티트가 가진 인간적 약점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유명세를 즐기던 프티트는 미국에 정착했다.

  다큐의 마지막은 희끗희끗한 머리의, 살이 붙은 중년의 프티트가 잔디밭에서 외줄타기 연습을 하면서 들려주는 조언으로 마무리 된다.

  "인생이란 벼랑 끝에 선 것과 같아요... 당신을 얽어맨 규칙, 성공, 반복되는 일상에 저항해야 합니다. 도전만이 살 길이에요. 당신은 당신 삶의 외줄을 타야하는 겁니다."

  아, 그냥 한숨이 나왔다. 저런 사람이나 되니까 저렇게 살아가지, 보통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재능이 없는 열정은 무모한 시도를 반복하게 할 뿐이며, 결국에는 패가망신의 지름길에 접어들 뿐이다. 내가 너무 늙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이런 다큐를 보고나면 그냥 심드렁해진다. 어쩌면 이 다큐는 그저 1시간 34분 동안 감자칩을 먹으며 시간 때우기 좋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 같다. 상업 영화적 감각이 뛰어난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는 바로 그 점에 주목했다. 그는 이 이야기를 영화 '하늘을 걷는 남자(The Walk, 2015)'로 만들어 냈다. 말 그대로 영화 같은 인생, 필립 프티트는 그렇게 자신의 전기 다큐와 영화 작품을 가지게 되었다.



*사진 출처: ny.curbe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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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8-19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른별님, 저는 Philippe Petit 가 주인공인 그림책을 십수 번 외울만큼 읽다보니 이 분이 제 기억에는 젊은 모습 그대로 콕 박혀 있어요. 중년의 그가 외줄타기 하며, 저런 지혜로운 이야기를 전하다니! 다큐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푸른별 2021-08-19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군요. 이 다큐도 나름대로 재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