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세상이 싫어!"

  두 딸들 앞에서 이렇게 악다구니를 쓰는 엄마 베아트리스(조안 우드워드 분)는 결코 좋은 엄마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집안은 정리되지 않는 물건들로 가득하고, 제대로 청소를 하지 않아서 더럽기 짝이 없다. 술과 담배를 입에 달고 사는 정서불안의 이 엄마는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도 버겁다. 그런 엄마를 부끄러워하고 경멸하는 첫째 딸 루스는 타고난 불안한 성정에 뇌전증(간질)까지 앓고 있다. 막내 마틸다(넬 포츠 분, 폴 뉴먼의 딸)는 조용하고 침착한 성품으로 그런 어두운 집안 분위기 속에서도 과학 과제에 흥미를 붙이며 스스로 마음을 다독인다. 영화의 제목 '감마선은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The Effect of Gamma Rays on Man-in-the-Moon Marigolds, 1972)'는 마틸다가 해낸 과학 과제물에서 따왔다. 퓰리처 상을 받은 폴 진델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만든 이 영화는 폴 뉴먼이 자신의 부인 조안 우드워드와 함께 본 연극에 깊은 감명을 받고나서 제작되었다.

  영화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여성이 딸들과 함께 살면서 일으키는 현실의 파열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경제적으로 곤궁한 베아트리스는 집안에 병든 노인들을 보살피는 하숙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자식들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이 여자가 노인 환자들이라고 제대로 보살피겠는가? 노환으로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려운 내니 할머니는 마치 생기없는 인형처럼 그 집안에 자리하고 있다. 첫째 루스는 죽어가는 노인들이 거쳐가는 자신의 집과 엄마를 부끄럽게 여길 뿐만 아니라, 학교 수업시간의 연극에서 조롱거리로 흉내내기까지 한다. 정신없는 엄마와 불안한 언니 사이에서 오직 마틸다만이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키우는 토끼와 금잔화 과제가 마틸다에게는 질식할 것 같은 집에서의 작은 숨구멍이 되어준다. 그러나 베아트리스는 그런 마틸다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퍼붓고 상처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조안 우드워드는 베아트리스 역을 미친 여자처럼 연기하지 않았다. 우드워드는 불안정한 삶 속에서 어긋나 버린 마음 때문에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될 수 없는 여자의 비애에 촛점을 맞추었다. 이 영화의 연기로 우드워드는 칸느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정작 우드워드는 베아트리스 배역이 지닌 어둡고 이그러진 면들 때문에 그 역을 진저리나게 싫어했다. 아내가 싫어하든 말든 폴 뉴먼은 뚝심있게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 자신이 연극 배우로도 여러 작품에 참여했던 뉴먼에게 연극은 인생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고, 이 영화 제작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문제는 이 영화가 대중성을 확보하기에는 상당히 동떨어진 지점에 있었다는 데에 있다.

  같은 배우 출신의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상업성에 놀라운 감각을 보여준 것에 비해, 뉴먼은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감마선은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의 인물들은 어둡고, 흔들리며, 현실의 괴로움 속에서 몸부림친다. 그나마 마틸다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희망의 느낌이 그 칙칙하고 무거운 영화의 분위기를 상쇄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너무나 약하다. 관객이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을 이해하기도 쉽지가 않은데, 이는 캐릭터의 불명확성에서 기인한다. 혹시 원작 희곡에 단서가 있을까 해서 희곡까지 찾아서 읽어보았지만, 희곡은 영화 보다 더 암울하다.

  다시 처음 대사로 돌아가 보자. 마틸다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렇게 혼자 답한다. 

  "엄마, 난 세상을 싫어하지 않아요."

  원작 희곡에서는 이 부분이 다르게 나온다.

  베아트리스: 난 세상이 싫어, 이런 내 기분을 너도 알지?
  마틸다: 응, 엄마.

  마틸다는 감마선을 쬔 금잔화가 피어난 다양한 모습을 보면서 먼 우주에서부터 쏟아진 원소에 대해 생각한다. 그 심원한 기운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에 대해 자각한 마틸다는 세상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세상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마틸다의 대사는 마틸다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힘을 얻었음을 보여준다. 폴 뉴먼이 돈 벌 생각하지 않고, 이 영화를 제작하고 감독한 데에는 삶의 불안정성을 견디는 힘으로서의 희망을 말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사진 출처: fromthefrontrow.net 베아트리스 역의 조안 우드워드와 마틸다 역의 넬 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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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1-04-09 16:39   좋아요 1 | URL
아, 저 이거 정말 아끼고 좋아하는 영화인데 여기서 또 만나네요.
원래 연극으로 공연되었다는 것도 영화를 보고나서 훨씬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암울한 환경 속에서도 토끼키우기와 금잔화 실험으로 자기 세계를 지켜나가던 마틸다를 보면서 이 영화가 희망을 말하는가 절망을 말하는가 혼란스럽기도 했었어요.

푸른별 2021-03-30 18:57   좋아요 1 | URL
hnine님은 이 영화를 보았군요. 전체적으로 무거운 분위기의 영화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마틸다가 세상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마지막 장면은 희망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