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단편 영화를 찍었을 때가 생각난다. 8mm필름으로 5분짜리, 4명이 같이 찍은 조별 과제였다. 어땠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환장의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


  각자 개성이 강한 4명이 다들 한마디씩 하면서, 이거하자 저거하자 난리를 치는 동안에 찍으려는 영화는 어느새 산으로 가고 있었다. 나중에 편집실에서 러프 컷(rough cut, 편집 이전의 현상본)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필름을 잘라서 이어붙인 기억이 없으니 나는 편집도 안했다. 촬영을 했던 K가 아마도 했을 텐데, 아직도 K의 이죽거리는 말투가 떠오르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도 K를 싫어하고 있는가 보다. 아무튼 수업 시간에 시사회를 했는데, 정말이지 남들 눈에 안띄게 바닥을 기어서라도 강의실 밖으로 탈출하고 싶었다.


  그때 느낀 것은 그랬다. 영화를, 특히 감독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영화적 재능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능력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 배우들과 스탭들과의 소통을 비롯해서, 이런저런 일들이 생기면 최종 결정권자로서 감독은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그것을 얼마나 잘 해내느냐가 바로 좋은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를 판가름한다.


  영화 공부할 때 봉준호 감독이 어떻게 작업한다는 것을 건너건너 듣기만 했을 뿐이지만, 그가 뛰어난 영화적 재능과 함께 소통 능력도 '달인'의 수준이라는 점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자신이 생각한 영화적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해, 감독은 현장의 모든 일들을 중재하고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도 어떤 면에서는 재능의 영역이다. '친화력'이야말로 감독이 가져야할 중요한 조건이다. 그런데, 그게 누구나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참 힘든 문제다. 특히 다큐멘터리 감독에게 그것은 더 중요하다. 촬영 대상과 어느 정도의 라포(rapport, 사람과 사람사이에 생기는 상호신뢰관계를 뜻하는 말)를 형성했느냐가 다큐의 성패를 좌우한다. 자신이 찍고 싶은 이야기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어느날 갑자기 카메라 들이댄다고 자세히 말해줄 사람은 세상에 그 어디에도 없다. 


  1995년 시카고 대폭염으로 인해 739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당시 사회학과 대학원생이었던 에릭 클리넨버그는 그것이 단순한 자연 재해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폭염 사망자가 다수 나온 시카고 흑인 주거지역을 조사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백인 남성인 그가 돌아다니면서 이런저런 것을 묻는데, 아주 친절하게 답해줄 주민이 있었을까? 천만에, 그래서 그는 1년 2개월 동안 그 지역 사회를 그냥 돌아다니면서 주민들과 친분을 쌓는데 주력한다. 그런 시간들이 쌓인 후에야 주민들은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학문적으로 정리해서 책을 써냈다. 그렇게 2002년에 나온 'Heat Wave'는 에릭 클리넨버그에게 여러가지 명예를 안겨주었고, 그의 학자로서의 경력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현재 그는 뉴욕대 사회학과 교수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촬영하려는, 또는 연구하려는 그런 대상에 접근하는 일은 그렇게 쉽지가 않다. 매우 까다롭고 힘들다. 단지 시간만 들인다고 그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친화력 갑인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아주 쉽게 해내기도 한다. 다큐 'Cobra Gypsies(2015)'를 찍은 라파엘 트레자가 그런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3개월 동안 인도 북부 라자스탄 지방에 머물면서 토착 유목민 부족인 캘벨리야(Kalbeliya) 부족의 일상을 담아냈다. 이 다큐를 보면, 이 부족 사람들이 얼마나 감독 라파엘을 편하게 대하는지 잘 알 수 있다. 마치 친구, 가족처럼 여기며 자신들의 생활을 보여준다.


  오늘날 유럽 집시들의 기원이라고 추측되는 인도 북부 원주민 부족 가운데 하나인 캘벨리야 부족은 춤과 코브라 공연으로 유명하다. 코브라 공연은 야생동물 보호 협약 이후로 금지되었지만, 이 부족에게 그 독을 채취하는 일은 허용되고 있다. 주로 인도 전통 의학인 아유르베다에서 쓰인다. 감독 라파엘의 친화력과 실험정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인도 아유르베다 의사를 찾아가 직접 코브라 독을 눈에 대보기까지 한다(아니, 라파엘, 너 왜 그러니?) 잠깐 깜짝 놀라더니, 눈이 시원해졌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래도 친절하게 화면에 '검증되지 않은 의학이니 따라하지 마세요'라고 자막을 넣었다.


  1시간이 좀 못되는 이 다큐의 내용은 별 게 없다. 라파엘은 부족 사람들이 코브라 뱀 잡으러 가면 그거 따라다니고, 또 야생 벌꿀 채취하러 간다고 하면 카메라 들고 나선다. 부족 최대의 축제도 찍는다. 그 부족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나본 외국인은 진짜로 라파엘이 처음이다. 간혹 관광객을 본 이들도 있다고 하지만, 이 부족에게 카메라를 가지고 나타난 이는 그가 처음이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이런 거 찍어봤자 돈이 안되니까 그랬겠지 싶다. 이 다큐도 결코 유명한 다큐가 아니다. 이걸 본 어떤 사람은 '깊이도 없고 지루하다'는 평을 쓰기도 했다. 어느 부분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캘벨리야 부족을 친밀하게 담아내는 그 어떤 작품이 있기는 했을까? 문화인류학자가 카메라 들고 3개월 동안 그들과 지냈다고 해도 이 정도 수준으로 찍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다큐가 그래서 인기있는 지점은 의외인데, 바로 학교다. 주로 문화인류학과 수업에서 자료로 쓰이는 모양이다. 수업시간에 봤다는 이야기부터, 이걸 논문의 참고 자료로 쓴 미국 학생도 있었다(그 학생이 쓴 논문은 읽어보니 그저 그랬다).


  감독 라파엘 트레자는 'Cobra Gypsies'를 진짜 자기 맘대로, 멋대로 찍었다. 이 친구는 프랑스 태생으로 그 자신이 음악가라서 이 다큐의 음악도 자신이 다 했다. 굉장히 비트가 강한 음악들이 다큐 내내 흐르는데, 화면과 아주 잘 어울린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작업하느라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다. 혼자 작업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괜찮다. 좀 힘들고, 시간이 더럽게 많이 걸려서 그렇지. 이 친구 작업들 보면 '보르네오 독침 사냥꾼'을 찍은 것도 있던데, 그냥 카메라 하나 짊어지고 낯선 곳을 떠돌면서 찍고 싶은 거 하면서 그렇게 사는 모양이다. 참 자유로운 영혼이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다큐들을 보면, 소재나 주제와 함께 감독이 얼마나 대상에 밀접하고 진정성있게 접근했는가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에서 다큐 감독의 역량을 평가하게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 가까운 곳에서 터를 잡고 함께 생활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두면서 친분을 쌓아가고 그들이 '말'을 하기까지 기다린다. 물론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초기 문화인류학자들도 써먹은 방법이다. 동물 다큐를 찍을 때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북극곰에 관한 다큐를 본 적이 있다. 나중에 메이킹 필름을 따로 보았는데, 그 다큐를 찍은 감독은 1년 반동안 카메라를 가져다 놓고 멀리서 북극곰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곰들이 자신의 존재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2년째 되던 해의 겨울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내가 본 1시간짜리 다큐는 그가 5년의 시간 동안 담아낸 결과물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다. 마음을 다하고, 노력을 다해야 겨우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때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설 때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시도가 헛된 것은 아니다. 다음의 시도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이란 것이 덧셈 뺄셈하듯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갈수록 깨닫게 된다. 실패했다고 여겨지는 다큐를 보게 될 때도 그렇다. 누군가는 그와 비슷한 주제로 찍을 때 참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Cobra Gypsies'는 완전한, 아주 좋은 다큐는 아니다. 캘벨리야 부족의 일상을 친밀하게 담아낸 점에서는 성공했지만, 성찰의 깊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민속지학에서 쓸 법한 자료 화면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앞으로 캘벨리야 부족을 촬영하게 될 때, 또는 그러한 소수 토착 부족을 담아내는 작품을 하려고 할 때에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 같은 작품이다. 친밀함, 솔직함, 개방성, 그것을 바탕으로 낯선 이들과 그들의 문물에 접근하는 다큐 감독의 좋은 자세를 라파엘 트레자는 아주 잘 보여준다.



*사진 출처: facebook.com/cobragyps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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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1-20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읽어내려가면서 [괴짜사회학],[플로팅 시티] 책을 낸사회학자 수디르 벤카테시가 생각났습니다. 그분이 민속지학 방법으로 연구하신 분이시거든요. 다큐와 친하지 않은 사람이고 한번도 감독의 입장에서 영상을 본적이 없어서인지, 푸른별님의 글이 저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지네요. 이 다큐 한번 보고 싶네요.^^

푸른별 2020-11-20 0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50분 정도 되는 길지 않은 다큐여서 보기도 괜찮습니다. 아, 그리고 저는 ‘감독‘ 아닙니다. 영화를 전공했고, 지금은 이 블로그에 주로 미디어와 영화 관련 글을 쓰고 있습니다. 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