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낮에 무얼 하시면서 시간을 보내느냐고 어머니께 여쭈었다. 


  "전원 일기가 케이블 여기저기서 계속 나와서 그거 돌려가면서 본다. 아주 재미있어."


  주로 MBC의 자회사 케이블 방송에서 나오기는 하지만, 그 밖에도 국민방송(KTV)이나 다른 예전 드라마 전문 방송 채널에서도 전원일기가 나오고 있다. 저녁에 유선방송 채널을 계속 돌리다 보면 전원일기가 여기저기서 나오는데, 방영순서가 제각각이라 때론 우습기도 하다. 어린 복길이와 영남이가 다른 채널에서는 어른으로 나오고, 김회장 집 부엌은 아궁이에서 현대식 부엌을 왔다 갔다 한다. 그 드라마를 계속 봐왔던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여러 가족의 얽히고 설킨 일화와 비밀들을 잘 알지못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도 있다. 


  재미있게 보신다는 어머니와는 달리, 나에게는 그 드라마 한 회를 온전히 시청하는 일이 쉽지 않게 느껴진다. 그 드라마의 초창기부터 종영때까지 대부분의 내용을 꿰고 있기는 하다. 그 당시에는 꽤나 재미나게 보았던 기억도 있다. 도시화가 한창 가속화되던 1980년대에 전원일기는 도시사람들의 정신적 휴식처같은 드라마이기도 했다. 집필 작가가 여러번 바뀌기도 했지만, 그 드라마가 강조하던 주된 가치는 비합리적인 공동체 의식, 가부장제, 남존여비, 혈연주의, 도시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 젊은 세대의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 그런 구시대적인 모든 것의 집합체였다.


  김회장의 말 한마디는 양촌리의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고, 복길 할머니의 고약한 성미와 강짜 때문에 시집살이를 호되게 하는 복길 엄마의 괴로움은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다. 대학을 나온 영남 엄마는 자신의 꿈과 희망을 가부장제 안에다 억지로 욱여넣으며 살고 있고, 배움은 짧은데 성정까지 제멋대로인 수남 엄마는 늘 자잘한 사건들을 일으킨다. 그런가 하면 가진 것도 없고, 불 같은 성미 때문에 가정에 충실하지도 못한 노마 아빠는 자신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를 노마 엄마의 탓으로 돌린다. 부인에게 손찌검을 하고도 당당하고, 그렇게 버르장머리를 가르쳐놓아야 한다고 버젓이 말하는 이른바 동네 청년들의 의식 수준은 참 보기 딱할 정도다. 그렇게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의 대부분이 하는 행동들은 지금의 세대들이 보기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꼭 재미있다기 보다는, 저 시대에는 다 저러고 살았구나. 지금보면 참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데 그때 생각이 나서 그런 거지."


  그 드라마가 그렇게 재미있으시냐고 묻자 어머니는 그렇게 답하셨다.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방영된 전원일기는 어쩌면 오늘날의 기성세대가 살아온 그 시대의 여러 모습들과 가치관들을 여실히 보여주는 문화사회학적인 영상자료인지도 모르겠다. 그 드라마가 급변하는 농촌의 모습을 담아내지 못하고, 구시대적인 가치들을 더이상 칭송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 드라마는 자연스럽게 폐지되었다. 나중에는 연기하는 배우들조차 개연성 없고 별다른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는 드라마 내용에 부끄러움까지 느꼈을 정도였다. 배우 김혜자가 전원일기를 끝내면서 '신동아'에 그런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난다.


  "권태롭고 챙피해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


  김회장 부인 역을 그만 두고서 김혜자 씨도 자유로움을 느꼈을 것 같다. 2009년에 개봉된 봉준호의 영화 '마더'를 보고서,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배우 김혜자를 새롭게 재발견했을 것이다. 내게는 특히 극중에서 김혜자가 담배 피우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34년동안 골초였다가 담배를 끊었던 그가 보여준 그 장면은 오랫동안 연기했던 김회장 부인 역이 그 배우에게 정말 맞지 않은 옷 같았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어쩌면 더 좋은 작품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을 '전원일기'를 찍느라 다른 감독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복길이 할머니 역의 김수미는 세월이 흘렀어도 아직도 예능에서 맹활약 중이다. 전원일기에서도 때론 슬랩스틱 같은 몸연기와 뛰어난 애드립을 선보이기도 한 복길이 할머니를 떠올려 보면 배우는 천상 배우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억척스러운 종기 엄마 역으로 나왔던 배우 이수나는 4년 전,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호전되었으나 근황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의 쾌유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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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9-23 21:15   좋아요 0 | URL
어느 시대 어느 순간이든 모순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고 본다면, 총체적으로 어떤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좋을 수 있는지 개인적 판단과 기준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