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페이지 지나 또 한페이지
멈춰 읽는다.

최은영을 읽는 긴 밤 .

 나는 떠나야 해.
그날 밤 내내 증조모는 잠들지 못하고 고조모를 안고 있었다.
어마이, 누군가 어마이를 돌보러 온다 기랬어. 아니, 기러지 않는다고 해도, 아무도 어마이를 돌보지 않는다고 해도 내는 어쩔 수가 없어. 기래, 내는 벌을 받겠지. 아마 평생 벌을 받겠지만 어쩔 수 없어. 어마이 내는 군인들을 따라갈 수 없어. 어마이. 어마이. 우리는 이제 다시 볼 수 없십니다.… - P44

열일곱은 그런 나이가 아니다. 군인들에게 잡혀갈까봐 두려워하며잠들지 못하는 나이, 아침마다 옥수수를 삶아 한 광주리를 이고 팔러다녀야 하는 나이, 죽음을 목전에 둔 엄마의 공포와 노여움과 외로움을 지켜봐야 하는 나이, 영영 자기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예감을 하는나이, 백정이라는 표식 때문에 길을 지나갈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조롱당하고 위협당하는 나이, 엄마를 버려야 하는 나이, 엄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멀리서 소식을 들어야 하는 나이. 그렇지만 증조모의 열일곱은 그런 나이였다. 할머니는 증조모가 그 나이의 자신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붙들고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야 그녀는 열일곱 살의 자신으로 돌아갔다. 일평생 입다물고 죽은듯이 살았던 열일곱의 증조모가 마지막 나날에야 자유로워졌다. - P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