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평론 제6호] 마르크스의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과 월러스틴, 푸코

 

 

서관모(충북대 교수/ 사회학) 

 

 


1.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으로서의 맑스주의


과거 ꡐ정통ꡑ 맑스주의에서 말하던 ꡐ지배적 세계관ꡑ(레닌), 곧 절대지식으로서의 맑스주의는 죽었다. 이 죽음은 이러한 절대지식의 담지자인 당과 대중의 분리의 다른 표현이다. ꡐ현실 사회주의ꡑ의 붕괴는 이미 완료된 이러한 맑스주의의 죽음을 재확인하였을 뿐이다.


ꡐ세계관ꡑ으로서의 맑스주의의 죽음, 당 형태의 역사의 종언이 맑스주의 자체의 소멸을 뜻하는 것일 수는 없다. 지금 소멸한 것은 맑스주의의 지배적 형상이다. ꡐ계급투쟁의 조건들, 형태들, 효과들에 대한 이론으로서의 맑스주의ꡑ(알튀세르) 내지 ꡐ착취 분석으로서의, 국제주의적 강령으로서의, 분업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민주주의적 봉기의 윤리와 정치의 특수한 표현으로서의, 계급투쟁의 효과들에 대한 가설로서의 맑스주의ꡑ(발리바르)는 전혀 죽은 것이 아니다. 맑스주의가 세계관이 아닌 이상 말하듯이 ꡒ내일의 사회적, 정치적, 지적 문제들 중 어떤 것도 맑스주의의 자원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을 것ꡓ이지만, 계급투쟁이 역사 운동의 유일한 ꡐ동력ꡑ은 아니라 해도 화해불가능한 보편적 적대로 남아 있는 한 ꡒ어떤 문제도 맑스주의 없이 진지하게 대처될 수 없을 것ꡓ*주)이라 할 수 있다.


*주) {{에티엔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문화과학사, 1995, 15쪽.}}


그렇지만 지금 계급적대가 그 어느 때보다 세계를 분열시키고 있는 가운데 맑스주의는 거의 존재하기를 멈추다시피 한 상태이다. 그 일차적 이유는 이론외적, 정세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론내적인 것들, 즉 그 모순들과 한계들이다. 이 모순들과 한계들이 근원적인 것인 만큼 맑스주의는 근원적인 비판적 개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개조는 어디까지나 맑스주의의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요소들을 살리고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요소들의 가장 핵심을 이루는 것, 그것 없이 맑스주의는 있을 수 없는 것, 그것은 사회적 유대의 문제설정과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이다.


맑스주의 이론, 즉 역사유물론의 대상은 사회적 관계이다.*주1) 그러나 대상이 사회적 관계라는 것만으로는 맑스의 사고의 독창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맑스의 사고의 독창성은 사회적 관계 일반이 적대들에 의해 구조화된다고 파악한다는 데 있다. 맑스가 공동체적 관계로 이해되는 ꡐ사회적 유대ꡑ와 구별하여 개념화한 ꡐ사회적 관계ꡑ는, ꡒ공동체의 제거로부터 생겨난ꡓ, 또는 ꡒ공동체의 부재라는 인과성으로부터 생겨난 갈등적 관계이다.ꡓ*주2) 이 같은 사회적 관계 개념을 토대로 하여 구축되는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은 계급투쟁의 문제설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사실 맑스 자신은 이 점에서 동요한다. 그에게는 계급투쟁을 총체화하고 그리하여 사회적 적대를 계급으로 환원시키는 경향과 그 반대의 경향이 공존한다. 한 예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ꡐ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ꡑ이라는 개념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맑스는 여기서 지적 차이(intellectual difference)에 대하여 근본적인 관심을 보이지만 그것을 계급적대로 환원되지 않는 별개의 보편적 적대로 이론화하는 데에는 실패한다.*주3)


*주1) {{이와 관련된 맑스의 많은 테제들, 언명들 중에서 몇 개만 들어보자: ꡒ인간적 본질은 어떤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의 총화(ensemble)이다ꡓ(ꡐ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ꡑ 6); ꡒ한 사회는 개인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ꡓ(『그룬트리세』); ꡒ자본의 의인화로서의 자본가ꡓ(『자본』Ⅰ); ꡒ나의 분석방법은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주어진 경제적 시대로부터 출발한다ꡓ(아돌프 바그너의 정치경제학 교과서에 대한 난외 평주).}}


*주2) {{에티엔 발리바르, 『사회주의와 근대의 정치적 범주들』, 에티엔 발리바르 외, 윤소영 엮음, 『맑스주의의 역사』, 민맥, 1991, 272쪽. 발리바르는, 맑스가 자본주의가 공동체를 파괴했다는 반진보주의적 이념을 그 결론들을 전도시킴으로써 나름대로 다시 채택하고 이 이념으로부터 ꡐ사회적 관계ꡑ라는 자신의 개념을 도출한다고 한다.}}


*주3) {{에티엔 발리바르,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분할」, 『맑스주의의 역사』, 앞의 책; 「육체노동과 지적 노동의 분할ꡑ에 대하여」, 에티엔 발리바르, 서관모 엮음, 『역사유물론의 전화』, 민맥, 1993 참조.}}


오늘날 맑스주의 이론의 개조작업의 기본은 맑스 자신이 발전시키지 못하고 닫아놓은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의 모든 비판적 함의를 온전히 발전시키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맑스주의에서 기각해야 할 것은 프롤레타리아 당을 절대지의 담보자로 만들어 ꡐ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ꡑ가 ꡐ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ꡑ로 전화하도록 한 계급투쟁 또는 계급적대의 총체화이지 계급투쟁의 문제설정 자체가 아니다. 맑스주의의 계급투쟁의 문제설정을 유효화시키기 위한 조건은 계급적대를 성적 차이와 지적 차이라는 여타의 보편적인 사회적 적대들과 절합(節合)하는 것, 다시 말해 계급의 분할과 성의 분할, ꡐ육체와 정신의 분할ꡑ을 절합하는 것이다.*주) 이러한 방향으로 맑스주의 전체를 개조하는 데에는 비맑스주의적 요소들의 활용이 필수적이다.


*주) {{이러한 방향으로 중요한 이론적 진전을 보이는 문헌으로는 에티엔 발리바르, 「ꡒ인간의 권리ꡓ와 ꡒ시민의 권리ꡓ: 평등과 자유의 근대적 변증법」, 『맑스주의의 역사』, 앞의 책을 보라.}}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맑스주의의 개조는 맑스주의의 핵심인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과 사회적 관계 개념을 기각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 없이는 혁명적 정치로서의 대중정치를 사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하에서는 국가권력 문제와 관련하여 맑스주의에 발본적인 비판을 가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미셸 푸코의 이론화의 예를 들어 그들의 이론화가 맑스주의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맑스주의의 개조에 어떻게 활용가능하고 또 불가능한지를 보이고자 한다.

 



2. 월러스틴: 대중정치의 사고불가능성


계급투쟁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와의 영원한 대결 속에서 발전하였으나 민족주의를 모방하는 것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계급적 공동체의 논리가 경합하던 민족적 공동체의 논리에 복속한 것이다. 종래 맑스주의는 계급투쟁과 계급구성의 영역이 국민적 공간이라는 것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회구성체 개념 자체가 이러한 관점에 매여 있었다. 맑스주의가 이러한 관점과 개념에 머물러 있는 한 반민족주의적, 반인종주의적 보편주의는 공염불이 되기 쉽다. 오늘날 맑스주의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계급투쟁의 형세가 의존하는 경제-정치적 과정의 유기적으로 초민족적인 성격을 잘 표현하는 어떤 개념이다. 브로델, 월러스틴의 ꡐ세계경제ꡑ 개념은 맑스주의가 잘 활용할 수 있는 그러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월러스틴의 세계경제 개념은 그의 이론체계 속에 유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의 세계체계 이론이 맑스주의의 사회구성체 이론과 근본적으로 다른 만큼 그의 변혁이론, 즉 반체계운동론 역시 맑스주의의 변혁이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맑스주의 측에서 그의 이론화의 어떤 긍정적 요소들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의 변혁이론 체계의 특성과 문제점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우선 맑스주의에 대한 월러스틴의 평가를 보자. 그는 ꡒ자유주의의 근대성 이론을 따라 발전해온 근대성 이론으로서의 맑스주의ꡓ, 즉 ꡒ개량주의 전략으로서의 맑스-레닌주의ꡓ는 죽었으며, 죽지 않은 것은 ꡒ근대성과 그 역사적 현현인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맑스주의ꡓ, ꡒ실질적인 사회세력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던 반체계적 추동력ꡓ이라고 본다.*주) 그는 ꡐ맑스-레닌주의ꡑ가 된 주류 맑스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다섯 가지 강령을 ① 공산주의 사회 성취를 위한, 혁명을 통한 국가권력 장악, ② 국가권력 장악 및 유지를 위한 잘 조직된 정당 건설, ③ 프롤레타리아 독재(권력을 노동자계급에게만 양도하는 것), ④ 사회주의의 불가역성, ⑤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ꡐ사회주의의 건설ꡑ(=국가발전 추구)로 요약한다. 이러한 강령에 입각한 정치적 프로젝트가 시효만료한 것은 사실이며, ꡒ맑스-레닌주의 운동에서 사용되었던 용어로서의 ꡐ혁명ꡑ은 이제 더 이상 생명력 있는 용어가 아니ꡓ라는 그의 판단 역시 현실적이다. 국가주의적이고 따라서 민족주의적인 발전전략 내지 이행전략에 대한 월러스틴의 비판은 타당하며, 이러한 비판은 사실 공산주의의 세계성(ꡒ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ꡓ)이라는 맑스의 사상에도 전적으로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주) {{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이후』, 당대, 1996, 305-311쪽.}}


또한 ꡐ구좌익ꡑ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그의 다음과 같은 언명 역시 전적으로 타당하다: 즉 ꡐ구좌익ꡑ 운동의 사회적 토대는 세계인구의 협소한 부류, 세계경제의 가장 근대적인 부문 중에서 덜 부유한 층들, 숙련 및 반숙련 도시 노동자계급, 세계의 인텔리겐차 등이었다. 구좌익 운동은 강력한 소수, 억압된 소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인구 중 수적으로 소수인 집단들이 지지하는 세계운동이었고, 이러한 현실은 구좌익의 정치적 선택의 폭을 제한했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구좌익은 합리주의적 개혁주의라는 자유주의 프로그램을 가속시키고자 했고 보편주의적 언어로 말했지만 실제로는 특수주의적 정치를 실행했다(『자유주의 이후』, 369-370쪽).


월러스틴은 해체의 시대를 위한 분명한 반체계전략을 뚜렷하게 공식화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20년이 걸릴 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그는 ꡒ역사적 대안들에 대한 진지한 평가이며, 가능한 대안적 역사체계의 실질적인 합리성에 대한 우리의 판단 행위ꡓ*주)로서의 ꡐ유토피스틱스ꡑ를 제출한다. 그러나 그의 유토피스틱스는 그가 주장하듯이 ꡒ냉철하고 합리적이고 현실주의적ꡓ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주) {{이매뉴얼 월러스틴, 『유토피스틱스』, 창작과비평사, 1999, 12쪽.}}


그는 ꡒ끊임없는 자본축적의 우선성의 극복을 위한 제언ꡓ을 하고자 한다. 그는 ꡒ비교적 평등하고 충분하게 민주적인 대안적 체계의 가능한 기초ꡓ로서 ꡒ체계내 생산의 기초양식으로서 탈집중화된 비영리 단위들의 설립ꡓ을 든다. 이러한 비영리적 생산단위들을 세계체계의 성격이 달라질 정도의 규모로 설립하고 운영하는 것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혁명적 변혁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의 제언은 공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ꡒ계급 차이의 세 가지 가장 큰 결과물인 교육과 의료 및 평생동안 보장된 적당한 수입에 각각 접근할 기회의 불평등을 극복할 수 없는 어떠한 근본적인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세 가지 필요 모두를 비영리기구가 제공하고 그 비용을 집단적으로 부담하도록 하여 상품화의 외부에 놓는 것이 어려울 리 없다. 우리는 이미 상수도 공급에서 그런 식으로 하고 있으며, 많은 나라에서 도서관도 그렇게 한다ꡓ(『유토피스틱스』, 114-115쪽). 여기서 ꡐ적당한 수입ꡑ이 최저임금 수준의 수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의 변화를 말할 수 있게 하는 수준의 수입을 뜻한다면, ꡐ비영리기구에 의한 적당한 수입의 제공ꡑ은 사회생활의 핵심영역에서 상품관계가 폐절됨으로써만, 사회적 관계들의 혁명적 전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에서 보면 상품관계의 부재란 계급 착취관계와 국가 지배관계의 부재를 뜻한다. 그런데 월러스틴은 그것을 상수도의 공공 공급과 같은 수준의 문제로 이해한다. 그의 제언의 공상성은 비영리 생산단위들 간의 교류를 ꡒ현체계에서 우리가 가진 독점적으로 통제되는 세계시장이 아닌 진정한 시장ꡓ(『유토피스틱스』, 110쪽)에 맡기는 데에서도 볼 수 있다. 계급적 착취와 국가적 지배와 무관한 시장이 있을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브로델에 연원을 둔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경제적 이데올로기에 속한다.


월러스틴은 맑스의 사상에서 죽지 않은 것, 여전히 유효하고 필수불가결 것으로 계급투쟁, 양극화, 이데올로기, 소외라는 핵심사상 내지 개념들을 든다. 이 중에서 다시 가장 중요한 것일 계급투쟁의 분석에서 월러스틴의 커다란 기여는, 맑스가 기술한 경제적 양극화과정이 자본주의 세계경제 수준에서 전개되며, 분석단위를 세계경제로 취할 때 양극화 테제가 전적으로 타당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주) 계급투쟁의 장이 세계경제라는 사실에 대한 그의 강조, 반인종주의적 반민족주의적 보편주의의 필연성에 대한 그의 강조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포로가 된 맑스주의의 지배적 형상의 해체에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계급투쟁과 따라서 변혁에 대한 고유하게 맑스적인 기여의 핵심은 그의 사고와 이론 속에 수용되지 못한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이론의 문제점은 경제와 정치의 관계의 문제, 결국 국가권력의 문제로 집약된다.


*주) {{마찬가지로 세계체계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른바 ꡐ노동사회ꡑ의 종언 및 ꡐ지식사회ꡑ 또는 ꡐ문화사회ꡑ로의 이행이라는 테제는 전적으로 기만적이다.}}


ꡒ개별나라에서 국가의 장악을 통해 사회를 변혁하려는ꡓ 구좌익의 프로젝트에 대한 그의 비판에는 정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그가 ꡒ우리가 살고 있는 전체 세계체계의 거대한 이행에 중대한 영향을 끼쳐서 그 체계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자 할 때 국가가 그 주요수단은 아니다. 오히려 국가는 주요한 장애이다ꡓ라고 일반화할 때*주1) 사태는 복잡해진다. ꡒ정부의 권위는 유용할 수 있지만 거의 변혁적이지 못하다. … 국가권력은 기존 세계질서를 재정당화해주는 위험을 항상 내포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ꡓ(『자유주의 이후』, 344쪽)는 언명이 보여주듯이 그는 국가와 정부, 국가장치와 ꡐ억압적 국가장치ꡑ를 사실상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자신의 공격대상인 자유주의의 ꡐ법적 이데올로기ꡑ(맑스)의 관점이요, 이러한 권력 개념은 ꡐ권력에 대한 법적 개념ꡑ(푸코)이다. 맑스의 입장에서 국가장치는 접수해서 이용할 수 있는 것, ꡐ수단ꡑ이 아니다. 그것은 파괴되고 다른 종류의 대중적 정치조직 등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권력의 폐절은 계급 착취의 폐절의 이면일 뿐이다.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ꡐ소멸하는 국가ꡑ*주2), 레닌의 용어를 쓰자면 ꡐ동시에 비국가인 국가ꡑ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해답이라기보다는 거의 문제의 제기일 뿐이지만 말이다.


*주1) {{『자유주의 이후』, 12쪽. 물론 그가 ꡒ어떤 당면한 필요를 위해 국가권력을 이용ꡓ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가 ꡐ국가ꡑ 개념의 자유주의적 대당인 ꡐ시민사회ꡑ를 대안적 수단으로 간주하는 것 역시 아니다. ꡒ이것[ꡐ시민사회ꡑ를 건설하고 확장하고 재건하자는 것]은 국가에 관한 얘기만큼이나 공허하다. … 시민사회란 본질적으로 국가의 틀 안에 있는 시민조직을 뜻한다.ꡓ 같은 책, 13-14쪽.}}


*주2) {{국가의ꡐ소멸ꡑ에 대한 맑스의 입장에는 종말목적론적인 면이 분명히 있지만 이러한 면은 경향적으로 교정되어 감에 유의하자. 「고타강령 비판」에서 국가 ꡐ소멸ꡑ의 종말목적론은 이렇게 정정된다: ꡒ국가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어떤 전화를 경험하는가? 환언하면 국가의 현재의 기능들과 유사한 어떤 사회적 기능들이 그 곳에서 유지되는가? 과학만이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ꡓ}}


ꡒ국가권력에 집중하는 쉬운 목표ꡓ를 설정해온 구좌익에 대한 월러스틴의 비판은 정당하지만, 이론적 정치적 진전을 위해서라면 맑스의 사상과 구좌익의 ꡐ맑스-레닌주의ꡑ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는 어떤 내적 모순이 해방의 사상으로서의 맑스의 사상으로 하여금 반대물인 ꡐ국가 이데올로기ꡑ로 전화하게 하였는지를 질문하여야 할 것이다.


맑스의 권력 이해는 사실은 맑스 사상의 가장 독창적이고 혁명적인 부분의 하나이다. 권력에 대한 명목론의 입장, 관계론적 이해는 푸코의 것이기에 앞서 맑스의 것이다. 맑스의 이러한 입장은 정치에 대한 부르주아적인 계약론적 문제설정을 근원적으로 무효화시킨다. 맑스에게 계급은 ꡐ사회학적 집단ꡑ이 아니라 관계적 범주이다.*주) 일종의 ꡐ투쟁의 존재론ꡑ이라 할 입장을 택하는 맑스에게는 계급들이 먼저 있어서 서로 투쟁하는 것이 아니다. 계급들은 투쟁 속에서만 존재하고 전화하며, 이 투쟁을 통하여 계급들 간의 세력관계는 변화한다. 그럴진대 맑스의 논리는 ꡒ권력 장악ꡓ의 논리(푸코)와 거리가 멀다. 그러나 권력 ꡐ장악ꡑ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용어법은 얼마간 불가피한데, 이는 그것이 법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대중적인 의사소통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주) {{에티엔 발리바르, 「잉여가치와 사회계급」, 『역사유물론 연구』, 푸른산, 1989.}}


맑스주의가 ꡒ국가권력에 집중ꡓ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ꡒ쉬운 목표ꡓ가 아니다. 계급권력으로서의 국가권력은 국가장치의 물질성 속에서 실존하며 행사된다. 결국 맑스주의에서 국가 또는 국가권력의 ꡐ장악ꡑ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이른바 계급관계의 전화 및 따라서 ꡐ비국가ꡑ를 향한 국가형태의 전화를 위한 하나의 조건이라는 데에 있다. 따라서 국가권력을 ꡐ장악ꡑ한다는 것은 단순히 정부기관의 장악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계급투쟁을 통한 국가형태의 전화 과정, 얼마든지 가역적일 수 있는 과정의 개시를 뜻할 뿐이다. 정부기관의 장악은 국가권력 ꡐ장악ꡑ의 한 계기일 뿐이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ꡐ맑스-레닌주의ꡑ에서 맑스의 사고의 이러한 측면은 전도된다. 1930년대에 스탈린은 소련에 계급들은 존재하지만 계급적대는 소멸했다고 선언한다. 노동자계급, 농민계급, 인텔리겐차라는 세 계급간의 관계는 적대관계가 아니라 유대관계가 된다. 국가의 계급적 성격은 부정되고, ꡐ프롤레타리아트만의 국가가 아닌 전인민의 국가ꡑ인 사회주의 국가는 ꡐ소멸ꡑ시켜야 할 국가가 아니라 발전시켜야 할 국가로 선언된다. 사회주의는 독자적인 생산양식이 되며, 계급적대가 소멸한 이 사회에서 이행의 동력은 ꡐ과학기술혁명ꡑ이 된다. 맑스의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 자체를 근저에서 폐기하고 맑스주의를 기술주의적 경제주의로 둔갑시키는 이러한 ꡐ맑스-레닌주의ꡑ의 노선에 대한 월러스틴의 비판은 정당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 내에서 전부터 제기되어온 것이다.


그러면 변혁 또는 해방에서 왜 국가권력 문제가 중요한가? 그것은 착취관계와 지배관계가 서로 불가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한 맑스의 비판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ꡐ경제의 자동성(自動性)ꡑ이라는 관념으로 요약될 수 있는 ꡐ경제적 이데올로기ꡑ에 대한 비판이다.*주1)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소유와 노동을 국가와 계급투쟁에 연관시킴으로써 경제적 이데올로기가 분리하는 경제와 정치라는 두 개의 현실을 단락(短絡)시키며,*주2) 정치적이지 않은 ꡐ경제적ꡑ인 착취라는 관념은 노동력 매매의 계약적 형태로부터 초래되는 법적 환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국가에는 계급 착취관계의 재생산이라는 기능이 귀속된다. 알튀세르는 이와 관련하여 ꡒ상부구조의 존재의 본질과 본성을 생산조건들(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재생산의 관점에서 사고해야 한다ꡓ는 테제를 제출한 바 있다.*주3) 재생산의 관점은 필연적으로 ꡐ국가 개념의 확장ꡑ을 요구하는데, 이 확장 방식에는 국가로 하여금 사회의 영역을 잠식해 가도록 하는 그람시의 방식과 ꡐ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ꡑ 개념을 도입하는 알튀세르의 방식이 있다.


*주1) {{발리바르는 법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는 ꡐ경제적 이데올로기ꡑ가 부르주아지의 국가 이데올로기라 한다.}}

*주2) {{맑스의 ꡐ이론적 단락ꡑ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맑스의 계급정치 사상」, 『역사유물론의 전화』, 앞의 책, 231-41쪽을 보라. 본래 단락(short circuit)이란 전기 회로의 두 점 사이를 작은 저항으로 접촉시키는 것을 말한다.}}


*주3) {{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 1991.}}


월러스틴은 맑스가 수행한 경제와 정치의 단락, 그리고 맑스 이후 그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진 국가 개념의 확장을 무시함으로써 국가 개념을 부르주아적인 법적 이데올로기, 경제적 이데올로기에 내맡겨둔다. 그리하여 사회적 관계의 변혁 또는 전화를 위한 ꡐ국가형태의 전화ꡑ의 문제설정, 국가의 발본적 민주화의 문제설정은 그의 이론체계 속에서 설자리가 없다. 그가 계급투쟁에 대한 맑스의 사상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하더라도,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적 관계의 혁명적 전화라는 고유하게 맑스적인 문제설정 및 그에 입각한 맑스의 핵심적 이론작업들은 그에게 의미를 갖지 못한다.


월러스틴 자신이 독창적으로 제시하는 반체계운동의 무기는 ꡒ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슬로건을 진지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체계에 과부하를 주는 전략ꡓ(『자유주의 이후』, 302쪽), ꡒ지배세력들이 받아들이기를 희망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체계의 위선과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체계에 과부하를 주는 전술ꡓ, 즉 ꡒ구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게 문자 그대로 자신의 보편적인 목표를 완수하도록 요구하는 것ꡓ(『자유주의 이후』, 346쪽)이다. 이러한 전략 또는 전술은 알튀세르, 발리바르의 ꡐ이데올로기적 지배의 잠재적 모순ꡑ 및 ꡐ대중의 이데올로기적 반역ꡑ의 논리*주)와 상통하는 바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에서와 달리 월러스틴의 경우에는 역사적 과정에서 ꡐ대중ꡑ이 특권적 지위를 갖지 못한다. 자연히 ꡐ대중과 계급의 변증법ꡑ이, 요컨대 대중운동의 힘과 동시에 그 위험, 그리고 이 운동의 조건인 대중과 혁명적 지식인의 결합의 모순이 사고될 수 없다. 그에게는 맑스적인 사회적 관계 개념, 그리고 ꡐ관계의 존재론ꡑ 위에서 구축되는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이 없기에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주) {{ꡒ역사의 피지배자들이 ꡐ위로부터ꡑ 그들에게 보내진 … 그들 자신의 가상의 요구들[예컨대 자유, 평등, 인권 등]에 부응하여 행동하고 그 결과들을 도출해내려고 집단적으로 시도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기존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에 반대하여 반역하는 것이다. 결국 주어진 역사적 정세 속에서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해후할 때, 그것이 혁명인 것이다. … ꡐ역사의 주체ꡑ인 계급은 없지만 … ꡐ역사를 만드는ꡑ, 즉 정치적 변화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대중들임은 결코 의심할 바 없다.ꡓ 에티엔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윤소영 엮음,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이론, 1993, 187-88쪽.}}


월러스틴은 추구해야 할 ꡒ민주적이고 평등한 체계ꡓ를 ꡒ벤섬적 자유주의의 이상ꡓ과 동시에 ꡒ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의] 이상ꡓ을 실현해 주는 구조로서 그린다(『유토피스틱스』, 102-110쪽). 자유주의의 종언을 선언하는 그의 변혁 노선이 ꡒ일종의 세계적인 사회적 자유주의ꡓ(?자유주의 이후?, 301쪽)의 유토피아로 귀결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주의에 대한 발본적 대안일 이러한 ꡒ세계적인 사회적 자유주의ꡓ가 유토피아적이라 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근본적인 면에서 자유주의와 논리적 상동성을 갖기 때문이다.


월러스틴은 ꡐ개인ꡑ과 대비하여 ꡐ집단ꡑ을 세계체계의 변혁의 주체로 설정한다. ꡐ세계적인 사회적 자유주의ꡑ가 ꡐ사회적ꡑ인 이유는 새로이 건설되어야 할 보편주의의 토대가 ꡒ원자론적 개인이 아니라 무수한 집단들ꡓ(『자유주의 이후』, 301쪽)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모든 개인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 것과 상동적으로, 월러스틴은 ꡒ집단의 비(非)배제성을 동시에 인식하면서 재편된 세계체계에 참여하는 모든 집단의 평등한 권리를 인정하는ꡓ 대안적 이데올로기(『자유주의 이후』, 342쪽)를 제시한다. 반체계세력을 구성하는 이 집단들은 ꡐ민주집중제ꡑ가 아니라 ꡒ집단 차원에서 투쟁상에 어떤 전략적인 우선순위도 존재하지 않는다ꡓ는 인식 위에 결집력이 있는 비통일적인 연대를 형성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전략적 우선순위가 배제된다면 어떠한 유효한 의식적인 집단적 실천이 가능한가? 각 집단들 내의 각종 대립 내지 적대와 집단들 간의 각종 대립 내지 적대는 어떻게 되는가? 개인 ꡐ주체ꡑ들 사이의 적대와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자유주의적 보편주의가 실제로는 엘리트주의적 특수주의이듯이, 집단 내의 개인들 사이의 적대와 차이, ꡐ집단 주체들ꡑ 사이의 적대와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ꡐ사회적 자유주의ꡑ의 추상적 보편주의 역시 또다른 종류의 엘리트주의적 특수주의로 귀결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ꡐ주체ꡑ들 간에 지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한, 개별 집단과 연대집단들을 이끌어 가는 것은 역시 개인적, 집단적 엘리트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월러스틴이 그렇게도 비판하는 ꡐ국가를 통한 개혁ꡑ이라는 ꡐ자유주의적ꡑ 이데올로기야말로 이러한 엘리트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 월러스틴의 ꡐ세계경제ꡑ 개념은 맑스주의의 비판적 개조와 따라서 유효화에 불가결하다. 그러나 그의 세계체계의 문제설정은 계급투쟁과 사회적 갈등들에 대한 맑스의 혁명적 관점 및 이론화 속에 적절히 배치될 때에만 그 해방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민족국가 내에서 완결되는 것으로서 사고되고 실천되는 계급정치가 필연적으로 반혁명적 개량주의로, 그의 용어를 쓰자면 ꡐ자유주의적ꡑ 정치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잘 입증해 주지만, 맑스의 ꡐ이론적 단락ꡑ에 대한 그의 이해의 결여는 혁명적인 정치로서의 대중정치에 대한 사고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3. 푸코: 또다른 역사유물론


국가권력 문제와 관련하여 월러스틴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맑스주의의 입장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이론가들 중에 미셸 푸코가 있다. 월러스틴이 맑스주의가 ꡒ국가권력에 집중ꡓ하는 것을 비판하지만 권력에 대한 자신의 독자적인 이론을 제시하지는 않음에 비해 푸코는 맑스주의와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권력 이론을 제시한다. 이와 상관적으로 월러스틴이 맑스주의의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을 형식적으로는 수용하는 반면 푸코는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 자체를 기각하고 그것에 미시권력/미시정치의 문제설정을 대치시킨다.


맑스주의 이론에 대한 푸코의 문제제기는 ꡒ총체적인(global) 또는 전체주의적인(totalitarian) 이론의 금지 효과ꡓ, 또는 ꡒ총체화하는 담론의 전제지배ꡓ*주1)로 집약될 수 있다. 총체적 이론화, 즉 사회의 한 부분의 총체화는 권력과 관련하여 ꡒ단 하나의 위대한 거부의 처소ꡓ를 설정하게 한다. 여기에 푸코는 ꡒ권력망 도처에 존재하는ꡓ ꡒ다양한 저항점들ꡓ을 대치시킨다.*주2)


*주1) {{Michel Foucault, Power/Knowledge: Selected Interviews & Other Writings 1972-1977, Pantheon Books, 1980, pp. 80, 83.}}


*주2) {{미셸 푸코, 『성의 역사 제1권: 앎의 의지』, 나남, 1990, 109쪽.}}


그러면 맑스주의 이론과 푸코의 이론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은 종말론적 이행론으로 이르게 하는 맑스주의의 ꡐ총체화적ꡑ 이론화는 억압적인 것이고 푸코의 반(反)총체화적 이론화는 해방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주1) 만약 맑스주의가 국가이데올로기로 전화한 맑스주의로서의 ꡐ맑스-레닌주의ꡑ와 동일한 것이라면 이렇게 보는 데 별로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맑스주의는 진지하게 고려해 볼 대상이 되지도 못할 것이다. 맑스의 이론화에는 역사적 과정을 총체화하는 측면, 목적론적 역사철학적 측면이 강력하게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정수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부터 유증받은 이러한 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발본적인 반총체화적인 면에 있다면, 우리는 맑스주의의 내적 모순들, 무엇보다도 맑스의 이론화의 내적 모순과 동요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주2) 그리고 ꡒ관념은 계급투쟁 속에 채택된 대중 이데올로기적 형태를 취하게 될 때만 역사적으로 능동적일 수 있다ꡓ*주3)고 한다면, 모순들의 존재는 어떤 면에서 맑스주의 이론의 오류의 지표라기 보다 그 위대성의 지표일 터이다. 이는 맑스주의가 완전히 무모순적이었다면, 즉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면, 그러한 맑스주의라면 대중을 장악하는 것, 대중 이데올로기로 전화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1) {{어떤 이들은 총체화적인 것을 근대적인 것과 동일시하여 맑스주의의 ꡐ근대적 문제설정ꡑ에 푸코, 들뢰즈의 ꡐ탈근대적 문제설정ꡑ을 대치시키기도 한다. 한 예로 이구표는 ꡒ탈근대적 담론들은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거대 담론들에 의해 공유된 근대적 개념 범주들의 적실성에 의문을 제기ꡓ한다고 하면서 ꡒ탈근대적 문제설정 안에서야 비로소 권력과 저항의 문제를 볼 수 있고 사고할 수 있다ꡓ고 한다(이구표, 「일상적 권력과 저항: 탈근대적 문제설정」, 『진보평론』, 제4호, 2000년 여름, 15쪽). 그가 맑스주의의 ꡐ근대적인ꡑ 계급투쟁의 문제설정이 권력과 저항의 문제를 볼 수 없게 한다고 말하려 한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러한 표현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논지에서 벗어나지만, 거시권력, 거시정치에 대한 담론은 거대담론이고 미시권력, 미시정치에 대한 담론들은 미시담론인가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푸코, 들뢰즈의 담론들이 맑스의 담론보다 덜 거대하다고 보지 않지만, 문제는 거대/미시가 전혀 아니다. ꡒꡐ큰 이야기들ꡑ(grand recits)이란 흥미롭게도 ꡐ포스트모더니즘ꡑ이 가장 고전적인 실증주의와 공유하는 암호인데, 이 사실은 미국에서 양자가 함께 번창하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ꡓ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말(「ꡐ세계ꡑ는 변화하였는가?」, 『이론』, 제11호, 95년 봄/여름, 200쪽)이나 ꡒ큰 이야기들의 종말을 통고한다는 것은 큰 이야기만큼이나 겸허하지 못한 것ꡓ이라는 알랭 바디우의 말(『철학을 위한 선언』, 백의, 1995, 27쪽)은 참고할 가치가 있다.}}


*주2) {{맑스의 이론화의 내적 모순과 동요에 대한 가장 중요한 분석으로는 에티엔 발리바르, 「맑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의 동요」, 『역사유물론의 전화』, 앞의 책을 보라.}}


*주3) {{루이 알튀세르, 「오늘의 맑스주의」, 서관모 엮음, 『역사적 맑스주의: 비판적 재평가』, 새길, 1993, 54쪽.}}


요컨대 맑스의 이론화에는 푸코의 이론화 이상으로 반총체화적인 면이 있기도 하며, 따라서 양자는 단순하게 대립하는 것,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푸코 자신이 이렇게 말한다:


ꡒ이는 총체적(global) 이론들이 꽤 수미일관한 방식으로 국지적(local) 연구를 위한 유용한 도구들을 제공해 오지 않았다는 것도, 계속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이 그 증거들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러한 도구들은 다음과 같은 조건, 즉 이 담론들의 이론적 통일성이 어떤 의미에서 미결의 상태에 두어진다는 조건, 또는 최소한 삭감되거나, 분할되거나, 전복되거나, 희화화되거나, 연극화되거나 한다는 등의 조건하에서만 제공되어 왔다고 믿는다.ꡓ*주)


*주) {{Michel Foucault, Power/Knowledge: Selected Interviews & Other Writings 1972-1977, Pantheon Books, 1980, pp. 80-81. 푸코의 권력이론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이 책의 국역본(『권력과 지식: 미셸 푸코와의 대담』, 나남, 1991)은 유감스럽게도 거의 창작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온통 오역 투성이며, 심지어 멋대로 말을 만들어 붙이거나 생략하고 있다. 여기 인용된 부분도 이 번역본에서는 정반대로(즉 ꡐ제공한다ꡑ는 내용을 ꡐ제공하지 않는다ꡑ는 내용으로) 번역하고 있을 뿐 아니라 원문에 없는 그럴 듯해 보이는 말을 만들어 붙이고 있다. 필시 이 번역본은 푸코뿐만 아니라 맑스의 ꡐ권력 이론ꡑ에 대한 대중적 오해를 유포시키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맑스주의가 총체적인 이론이라 해서 국지적 저항을 분석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 맑스주의 이론의 통일성은 해체되어야 하는데, 푸코의 이러한 주장은 ꡐ맑스주의 이론의 허구적 통일성ꡑ에 대한 알튀세르의 부단한 강조와 상통한다. 어떤 점에서 푸코는 맑스주의의 오류에 대해서라기보다 그 내적 모순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볼 수조차 있다. 푸코의 이름을 들어 맑스주의의 권력 이론을 비판하는 논자들이 흔히 맑스의 권력 이론과 자유주의적 권력 이론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무시함에 비해 정작 푸코는 자유주의의 법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맑스주의의 비판을 무시하지 않으며, 자유주의의 권력관과 맑스주의의 권력관의 커다란 차이를 인정한다.*주)


*주) {{ꡒ정치 제도들에 대한 다른 유형의 비판 - 실제적 권력이 법의 규칙들을 벗어난다는 것뿐만 아니라, 법체계 자체가 폭력을 행사하고, 일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폭력을 전유하며, 일반적인 법의 겉모습 아래 지배의 불균형과 불의를 작용하게 하는 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이 문제였기 때문에 훨씬 더 철저한 비판 - 이 19세기에 나타났다.(『앎의 의지』, 103쪽).}}


물론 푸코는 즉각 두 권력관의 공통점을 부각시키지만 이 때 그가 문제삼는 것은 흔히 오해되는 바와 달리 맑스주의의 실체론(substantialism)이 아니라 ꡐ경제주의ꡑ이다.


ꡒ내 의도는 [자유주의 권력관과 맑스주의 권력관 사이의] 수많은 거대한 차이들을 추상하려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렇지만 … 나는 정치권력에 대한 … 법적이고 말하자면 자유주의적인 관념(conception)과 맑스주의적 관념, 어쨌든 현재 맑스주의적이라 주장되는 특정한 관념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간주한다. 나는 이 공통점을 권력이론에서의 경제주의라 부르고자 한다. 이는 고전적, 법적 이론에서는 권력은 상품과 같이 소유할(possess) 수 있는, 그리고 … 이전하거나 양도할 수 있는 하나의 권리로 간주된다는 것을 말한다. … 다른 한 사례[ꡐ일반적인 맑스주의적 관념ꡑ]에서는 우리는 이러한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이 후자의 관념에는 다른 어떤 것, 즉 권력의 경제적 기능성(functionality)이라 부를 수 있을 어떤 것이 본래적으로 존재한다. 이 경제적 기능성은 일차적으로 권력이 생산관계들의 유지에서, 동시에 생산력들의 발전 및 특정한 형태가 가능하게 해 주는바 계급지배의 유지에서, 수행하는 역할의 견지에서 파악되는 한도 내에서 존재한다.ꡓ(Power/Knowledge, pp. 88-89).


푸코는 권력이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관념을 맑스주의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푸코가 권력을 영유되는 ꡐ물ꡑ로서 이해하는 실체론과 대립하는 권력에 대한 ꡐ명목론ꡑ의 입장에서 ꡒ권력은 제도도 아니고, 구조도 아니며, 일부 사람들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하는 특정한 권세도 아니다. 그것은 주어진 한 사회에서 복잡한 전략적 상황에 부여되는 이름이다ꡓ라고 할 때(『앎의 의지』, 107쪽) 그의 비판의 과녁은 자유주의이지 맑스주의가 아니다.


그리고 맑스주의의 권력이론에서의 경제주의에 대한 비판은 푸코에 의해 처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여러 방향에서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비판들이 근거 없는 것들이 아니고 맑스는 분명히 경제주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경제주의에 대한 가장 발본적인 비판이 존재한다.*주)


*주) {{에티엔 발리바르, 「맑스의 계급정치 사상」, 앞의 글, 231-41쪽 참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적 공간은 국가/사회, 정치/경제, 국가/자본, 속박/자유, 위계/평등, 공적 이해/사적 이해, 계획/시장과 같은 일련의 대립쌍들에 의해 전체적으로 구조화된, 근본적으로 이원적인 공간이다. 이러한 고전적 이항대립은 사회적 관계가 사람들 사이의 유대라는 것을 전제한다. 반면 맑스는 사회적 관계 일반이 적대들에 의해 구조화된다고 파악한다. 구체적으로 맑스의 착취 분석은 모든 사회적 관계가 물질적 제약의 성격에 따라서 정의되는 사회집단들에 대한 물질적 제약의 조직화라는 것을 함축한다.*주) 순수히 경제적인 착취란 없는 것이며, 비대칭적으로 분배된, 권력의 기술 및 수단이 없는 적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분석 속에 나타나는 맑스의 입장은 발본적인 반경제주의이다. 경제와 정치를 단락시키는 맑스의 분석은 나아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이항대립들 전체를 무효화시킨다. 따라서 맑스주의 권력이론에서의 경제주의에 대한 푸코의 비판은 정당하지만 동시에 부당하다.


*주) {{이에 대해서는 루이 알튀세르, 『자본론을 읽는다』, 두레, 1991, 제8장 「마르크스의 비판」을 보라.}}


실제 푸코는 맑스의 이론과 공식 맑스주의를 구분할 뿐 아니라 자신의 분석에서 맑스주의적 분석을 원용한다. 예컨대 『감시와 처벌』에서 그는 『자본』에서의 매뉴팩추어적 분업에 관한 맑스의 분석들을 원용하여 규율적 절차들이 어떻게 인간의 축적과 자본의 축적이라는 두 개의 과정을 통일시켜 육체의 효용을 증대시키는가를 증명하는데*주) 이것은 맑스가 수행한 ꡐ이론적 단락ꡑ에 정확히 상응하는 것이다. 『앎의 의지』(106-110쪽)에서 그가 수행하는 정치권력, 계급, 혁명에 대한 논의 역시 맑스주의의 이론 및 전략적 분석들과 양립불가능한 것이 결코 아니며, 물론 알튀세르의 ꡐ과잉결정ꡑ의 관념과 전혀 대립하지 않는다.


*주)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나남, 1994, 321-25쪽. 푸코와 맑스의 관계에 대한 이하의 논의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푸코와 마르크스: 명목론이라는 쟁점」, 『이론』, 제3호, 1992년 겨울, 302-309쪽의 난해한 논의를 이해하기 쉽게 주석한 것이다(이 번역본은 윤소영 엮음, 『알튀세르와 라캉: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서』, 공감, 1996에 재수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맑스와 푸코 사이의 감축불가능한 상위점은 어디에 있는가? 근본적인 상위점은 ꡐ국지적인 것ꡑ과 ꡐ총체적인 것ꡑ의, 말하자면 권력의 미시물리학과 거시물리학의 양자택일에 관한 것이 아니다. 푸코 자신이 맑스주의 이론이 국지적 연구를 위한 유용한 도구들을 제공해 왔다고 했듯이 맑스주의는 미시권력을 분석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푸코가 거시권력을 분석할 수 없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상위점은 사회적 갈등의 구조에 대해 맑스와 푸코가 제시하는 대립적인 관념에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맑스의 모순의 논리와 푸코의 세력관계의 논리의 대립이다. 맑스의 모순의 논리 속에서는 세력관계란 ꡐ모순의 전략적 계기ꡑ일 뿐인 반면, 푸코의 세력관계의 논리 속에서는 모순이란 기껏해야 ꡐ세력관계의 특수한 배치ꡑ일 뿐이다.


푸코가 권력에 대한 명목론적 입장에서 제출하는 다음과 같은 테제들은 맑스에게도 전적으로 타당하다: 권력은 점유할 수 있는 사물이 아니다; 권력관계는 다른 사회적 관계들에 외재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이다; 권력은 아래로부터 나온다; 권력관계는 의도적이고 동시에 비주체적이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앎의 의지』, 108-109쪽). 중요한 점은 이 테제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푸코와 마르크스』, 304쪽).*주) 푸코는 그것들을 순수히 외부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즉 전략적 갈등 속에서 갈등의 항(項)들은 서로 파괴하고 상쇄하고 강화하고 수정하지만 ꡐ대립물의 통일ꡑ에 의한 것과 같은 어떤 통일물을 형성하거나 상급의 개체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맑스의 모순의 논리 속에서는 갈등의 발전은 갈등관계 그 자체의 내재화를 조건으로 하고, 그 결과 적대적인 양항(兩項)은 이 관계의 담지자들이 된다. 즉 계급관계들은 피지배자들이 예속관계 그 자체를 파괴하고 그럼으로써 그 관계가 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개인들로 스스로 전화함으로써만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뿐인 화해불가능한 관계들이 되는 것이다.


*주) {{이 번역본에는 ꡒ이해되지는 않는다ꡓ가 ꡒ확장되지는 않는다ꡓ로 되어 있다. sꡑentendent(이해되다)를 sꡑetendent(확장되다)로 잘못 본 것이다.}}


푸코와 맑스의 이러한 상위는 실천에 대한 파악에서의 상위와 연관된다. 맑스적 관점에서는 실천은 ꡒ실천 자신의 외부에 주체화(subjectivation)의 효과들을 생산하는 외부적 생산ꡓ이다. 계급투쟁이라는 실천에 대해 말하자면, 계급들이라는 ꡐ주체들ꡑ이 존재하고 이어 이들이 서로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들의 동일성이 계급투쟁의 효과이다. 계급적 주체성은 계급투쟁의 효과(주체화)로서 생산되는 것이다. 반면 푸코에게 권력은 우선적으로 육체들 그 자체에 대하여 작용하며 우선적으로 주체화를 겨냥하는, 그 결과 지식 효과들을 생산하는 생산적 실천이다. 결국 푸코적인 세력관계 논리는 ꡒ삶의 어떤 가소성(可塑性)ꡓ*주)이라는 관념에 의해 지지된다(『푸코와 마르크스』, 304쪽). 반면 맑스주의적인 모순의 논리는 ꡒ구조의 어떤 내재성ꡓ과 분리될 수 없다. 맑스에게 모순은 세력관계들에 내재적인 구조이기 때문이다.


*주) {{번역문에는 ꡐ가소성ꡑ(plasticite: 造型가능성)이 탄력성(elasticite)으로 잘못되어 있다.}}


맑스와 푸코의 이론은 각각 고유한 곤란을 내포한다. 맑스의 ꡐ역사유물론ꡑ은 물질성 속에서 또는 물질적인 것으로서 역사적인 것을 사고하는 하나의 시도이다. 그것은 ꡐ사회적 관계의 물질성ꡑ과 ꡐ모순의 역사성ꡑ이라는 테제들에 입각해 구성된다. 이 테제들은 결합되어 ꡐ모순의 효과에 의해 사회적 관계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적 전화의 필연성ꡑ이라는 하나의 테제를 형성한다. 여기서 곤란은 ꡐ모순들의 종언에 대한 상상적 예상ꡑ으로서의 변증법 즉 목적론적인 변증법과 구분되는, 모순들의 현실적(actual) 운동의 분석 내지 ꡐ현실적 모순ꡑ의 분석으로서의 변증법이 어떻게 사고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순수히 형식적인 모순(정의상 양립하지 않는 추상적 항들)이나 단순한 현실적 대립(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고 그 합력이나 균형점이 계산될 수 있는 서로 외재적인 힘들, 즉 모순의 양항의 관계가 대칭적인 종류의 ꡐ모순ꡑ)과 동시에 구별되는 ꡐ현실적 모순ꡑ을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마르크스주의적 변증법의 시금석이다.*주1) 맑스는 착취 분석에서 이러한 변증법의 요소를 제출하지만 그의 이러한 변증법은 공산주의 속에서의 모순들의 최종적인 화해를 예기하는 헤겔적인 변증법에 압도된다.*주2)


*주1) {{에티엔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앞의 책, 139-40쪽.}}


*주2) {{ꡐ현실적 모순ꡑ의 재정식화는 알튀세르의 작업 대상 자체였다. 알튀세르의 구조적 인과성 도식 자체는 주체(구성적 주체)를 근원적으로 추방하고자 한다. 문제는 어떤 ꡐ부정성ꡑ 개념이 없이는 구조적 적대를 발본적인 저항의 형태들을 취하는 화해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정식화시킬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가 해결할 수 없었던 곤란은 ꡐ주체 없는 부정성ꡑ을 사고하는 것이었다. Etienne Balibar, ꡒStructural Causality, Overdetermination, and Antagonismꡓ, A. Callari et al. eds., Postmodern Materialism and the Future of Marxist Theory, Wesleyan University Press, 1996, p. 119. 발리바르는 생산양식의 문제설정과 주체화양식의 문제설정의 절합에 입각한 시빌리테(civilite)의 정치를 정식화하면서 ꡒ그 효과성이 자신의 반대물을 통하여 작동하는 원인ꡓ으로서의 경제와 이데올로기라는 새로운 인과성 도식을 제출함으로써 나름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Etienne Balibar, ꡒThe Infinite Contradictionꡓ, Yale French Studies no 88, Yale University Press, 1995; ꡒ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Emancipation, Transformation, Civiliteꡓ, La crainte des masses, Galilee, 1997). 그 귀추를 더 지켜봐야 할 발리바르의 정식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는 서관모,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진보평론』, 제2호, 1999년 겨울, 274-80쪽을 보라.}}


푸코의 역사이론 역시 물질성 속에서 역사적인 것을 사고하는 하나의 시도라는 점에서 또하나의 ꡐ역사유물론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ꡐ유물론ꡑ과 그 자신이 말하는 ꡒ역사주의ꡓ는 맑스의 테제들과 조목조목 대립하는 테제들로 구성된다. 푸코는 ꡐ사회적 관계의 물질성ꡑ 테제 대신 ꡐ육체들에 대해 행사되는 것으로서의 권력의 배치들 및 실천들의 물질성ꡑ 테제를, ꡐ모순의 역사성ꡑ 테제 대신 ꡐ사건의 역사성ꡑ 테제를 제출한다. 여기서 곤란은 ꡒ삶의 변형(metamorphoses)의 지평*주)이라는 또다른 형태의 목적론 속에 역사적 사건을 각인하지 않고 육체의 물질성에 입각해서 역사성의 범주들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ꡓ 하는 데에 있다(『푸코와 마르크스』, 307쪽). 맑스의 역사유물론이 역사적 시간의 논리로서의 모순이라는 역사철학의 ꡐ유심론ꡑ에 시달리고 있다면, 푸코의 ꡐ유물론ꡑ과 ꡐ역사주의ꡑ에 대해서는 ꡐ생기론ꡑ의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맑스가 사회적 관계들의 물질성에서 변증법의 관념성(idealite)으로 부단히 이행하고 있다면, 푸코는 육체의 물질성에서 삶의 관념성으로 이행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주) {{이에 대해서는 『앎의 의지』, 155쪽의 다음과 같은 언명을 참고하라: ꡒ … 권력에 대항하는 세력은 … 삶과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버팀목으로 삼았다. … 요구되고 목표의 역할을 하는 것은 근본적인 욕구, 인간의 구체적인 본질, 인간이 지닌 잠재성의 실현, 풍부한 가능성으로 이해된 삶이다. … 그리하여 정치적 투쟁이 법의 확립을 가로질러 표명된다 할지라도, 그러한 투쟁의 쟁점이 된 것은 법이라기보다는 삶이다. 삶ㆍ육체ㆍ건강ㆍ행복 그리고 욕구의 만족에 대한 ꡐ권리ꡑ, 모든 탄압이나 ꡐ소외ꡑ를 넘어 인간의 참모습과 모든 가능성을 되찾을 권리 … 그 모든 새로운 권력 절차들에 대한 정치적 반응이었다.ꡓ 물론 이러한 ꡐ삶ꡑ은 바로 푸코 자신의 정치적 투쟁의 목표이기도 했다. 푸코의 이러한 삶의 변형(완전한 실현)의 목적론을 맑스의 ꡒ총체적 인간ꡓ의 실현(『자본』, 제1권)의 목적론과 비교해 볼 수도 있겠다.}}


문제는 푸코의 ꡐ유물론ꡑ의 모호성 또는 내적 한계에 있다. 푸코는 육체에 행사되는 것으로서의 권력의 관계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러나 충분히 명목론적(=관계론적)이기 위해서는 육체 자체를 사회적 관계들의 견지에서, 무엇보다도 계급적 관계, 성적 관계, 지적 관계의 견지에서 사고해야 한다(『푸코와 마르크스』, 308쪽). 즉 계급적대, 성적 적대, 지적 적대가 관통하는 것으로서의 육체를 사고해야 한다.*주1) 그러나 적대에 의해 구조화되는 것으로서의 사회적 관계 개념을 기각하는 그는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리하여 말년에 『성의 역사』 제2권, 제3권에서 그가 탐구하는 것은 ꡒ개인을 도덕적 행위의 주체로서 성립하게 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양식의 완성으로 이해된 ꡐ윤리ꡑ의 역사ꡓ*주2)이다. 푸코의 관심은 이제 육체에 행사되는 것으로서의 권력과 그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ꡒ자기에의 배려에 의해 지배되는 삶의 기술ꡓ, ꡒ존재의 기술ꡓ 또는 ꡒ자아의 테크닉ꡓ*주3)으로 이행한다. 이제 그에게는 세계의 변혁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산/전화가 문제이다. 그의 역사이론은 여전히 ꡐ역사주의적ꡑ이겠지만 그것이 여전히 ꡐ유물론적ꡑ이라 말하기는 곤란할 것이다. 따라서 미시ꡐ정치ꡑ도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된다.


*주1) {{물론 육체를 관통하는 것은 이 세 가지 보편적인 적대적 관계들만이 아니다.}}


*주2) {{미셸 푸코, 『성의 역사 제2권: 쾌락의 활용』(1984), 나남, 1990, 267쪽.}}


*주3) {{미셸 푸코, 『성의 역사 제3권: 자기에의 배려』(1984), 나남, 1990.}}


물론 말년의 푸코의 이러한 이론적 진화는 예정된 것이 아니다. 『감시와 처벌』(1975)과 『앎의 의지』(1976)에서 제출되는 그의 역사이론은 이후의 그의 이론화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 중요한 거대한 성과, 역사이론에서 새로이 개척된 하나의 대륙이다. 푸코 덕분에 우리는 하나의 ꡐ역사유물론ꡑ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대립하는 두 개의 ꡐ역사유물론ꡑ을 갖게 되었다. 역사유물론, 즉 ꡐ물질성 속에서 역사적인 것을 사고하는 시도ꡑ는 역사관념론으로 반전될 수 있는 필연적으로 모호한 시도이다. 맑스의 유물론도 푸코의 유물론도 이러한 모호함 내지 내적인 모순들을 지니고 있다. 맑스주의가 그 유효화를 위하여 근원적으로 개조되지 않으면 안 되는 오늘날 우리가 맑스의 작업에만 준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대립하는 푸코의 작업에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따라서 커다란 이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맑스주의를 위한 푸코의 활용과 관련하여 이 두 개의 유물론의 대립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푸코의 활용은 맑스의 이론과 푸코의 이론의 단순한 결합이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이해가능해지고 적용가능해지기 위해서 이론은 어떤 지점에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론의 고정점이 맑스에게는 사회적 관계요 푸코에게는 육체이다. 따라서 맑스와 푸코의 입장들 사이에서 하나를 택하고, 택한 그 입장에서 상대편의 이론화의 요소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방식으로, 푸코가 맑스를 활용하였듯이 맑스주의자들은 푸코를 활용할 수 있다. 양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맑스주의자로 남아있으면서 푸코주의자일 수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거나 남을 미혹시켜서는 곤란하다. ꡐ내적으로 모순적인 맑스ꡑ에 ꡐ무모순적인 푸코ꡑ를 대립시키고 이 대립을 ꡐ틀린 맑스ꡑ를 버리고 ꡐ맞는 푸코ꡑ를 선택하는 데 알리바이로 사용하는 것은 더욱 곤란하다. 중요한 것은 이론적 및 따라서 정치적 입장의 채택이지 이론들 간의 수미일관성의 비교가 아니다.


 



4. 결론


맑스주의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가들 중에서 월러스틴과 푸코는 특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을 맑스주의와 공유하면서 변혁적인 거시정치를 사고하고자 하는 월러스틴과,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 자체를 기각하고 그것에 미시권력/미시정치의 문제설정을 대치시키는 푸코 사이의 거리는 멀다. 그러나 그들의 작업에 대한 이상의 검토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맑스주의의 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맑스의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과 사회적 관계 개념의 중요성이다.


사회적 관계의 혁명적 전화 이외에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압제의 형태들을 역사적으로 폐지하는 다른 수단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적 관계의 혁명적 전화를 위한 실천은 조직된 집단적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조직된 집단적 실천 속에서 맑스가 주장했듯이 ꡐ대중이 역사를 만든다ꡑ. 그러한 실천이 실질적 해방을 낳을 수도, 새로운 야만을 산출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맑스주의에 고유한, 적대에 의해 구조화되는 것으로서의 ꡐ사회적 관계ꡑ 개념의 모든 중요성과 모든 곤란은 역사적 과정에서 대중들에게 부여되는 특권적 지위와 관련된다. 엘리트들이 아닌 대중들이 역사를 만든다는 입장, 만들어갈 수 있고 만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이 아니라면 왜 저 ꡐ유물론적(=비목적론적) 변증법ꡑ의 모험이 문제가 되겠는가.


월러스틴과 푸코의 작업에 대한 검토는 오늘날 여전히 해방의 정치로서의 대중정치를 사고하고자 하는 맑스주의자들에게 이론적 겸허의 미덕을, 즉 맑스주의의 한계들과 곤란들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해 주는 것 같다. 역으로 착취 및 착취에 관련된 압제 이외의 다른 종류의 억압들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다른 이론들 역시 맑스주의 앞에 겸허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억압에 저항하고자 하는 이론이 오만하다면 그것은 또하나의 억압의 원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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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 데이비스(Natalie Zemon Davis: 1928- )




 구미의 학계는 그 층위가 대단히 두텁다. 역사학의 경우도 시대별, 나라별로 학자들이 즐비하며, 그 내부 또한 연구의 주제나 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세분되어있다. 그렇듯 잘게 가지를 친 영역마다 대가의 칭호를 받을 자격을 가진 권위자들이 있어 엄정한 학문적 성과물을 통해 학풍을 주도하며 존경을 받고 있다. 유명세를 탄 학자들의 저작만이 시장성을 검증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거의 독점적으로 소개되며 독서 대중의 편식을 강요하는 우리의 풍토에 견주어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학문의 폭과 깊이가 모두 보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학문의 분과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대에 '유럽 근대사'와 같이 방대하면서도 모호한 영역을 대표하는 역사가가 존재할 수 있을까? 만일 그 대답이 긍정적일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나탈리 데이비스와 같은 인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나탈리 데이비스에 비견될만한 다른 역사가들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미국 출신의 그녀는 유럽 근대사에서 여러 분야를 새롭게 개척하며, 근대사를 넘어서 역사학 자체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그런 연고로 많은 전문적 역사가들은 유럽 근대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녀를 꼽음에 주저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유럽 근대와 관련하여 '문화사', '여성사', '인류학적 역사' 등등의 개념을 어느 정도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까닭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녀가 닦아 놓은 길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탈리 데이비스는 단지 예전에 이룩해놓은 업적 덕분에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만은 아니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녀는 영화가 역사의 전망을 더 환하게 밝혀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물론, 유럽사를 넘어 미국과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로 연구 대상의 지리적인 확충까지 꾀하며 선구자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학자로서 그녀의 뛰어난 업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마르탱 게르의 귀향』(The Return of Martin Guerre)이라는 영화와 같은 제목의 책이 번역 출간됨으로써 그녀의 역사적 혜안의 편린이 소개되긴 했지만, 역사가로서 그녀의 총체적인 역량을 음미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초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저서를 따라가며 선구적인 영역 개척의 의미를 되짚어볼 것이다.


 때로 이 글의 논조는 초연한 관찰자로서 나탈리 데이비스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 객관적이고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넘어서, 그녀의 삶 자체에 대해 존경심을 갖는 사람에게서 우러나오는 송사(頌辭)처럼 들리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 불가피하다. 첫째로, 그녀는 유태인으로서,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가정을 꾸려나가는 여성으로서 학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지극히 어렵던 시기에 그 학문의 기준을 높여놓은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 과정에서 그녀는 매카시즘의 선풍이 불던 시기에 '미국 하원의 비미국적 활동조사위원회'(House Committee of Un-American Activities, 이하 HCUA로 약함)에 의해 내려진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에 맞서 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녀의 학문적 진취성의 밑바탕에는 실제 삶에서 부딪치는 여러 장애물들을 단순하게 극복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그런 개인적 어려움을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역사의 요인으로 파악하려는 태도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태인으로서 나탈리 데이비스가 비우호적인 기독교 사회 속에서 적응해야 한다는 실제적 문제는 그녀의 주요 연구 대상인 종교개혁과 관련된 시기에 있어 훨씬 더 현실적이면서도 미묘한 방식으로 종교와 사회와 문화 사이의 관련성을 검토할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또한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담당함과 동시에 학자의 위치에 오르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시대에 그녀는 그 일을 해냈을 뿐 아니라, 여성 학자들에 대한 편견에 대항하며 여성사라는 분야를 실제로 확립시켰다. 실로 그녀의 삶은 그녀의 학문과 분리되지 않았다. 그녀의 인간적 삶에 대한 찬사는 그녀의 학문적 업적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인 것이다.

 



 나탈리 데이비스는 1928년 디트로이트에서 유태인인 아버지 줄리안 제먼(Julian Zemon)과 어머니 헬렌 램포트(Helen Lamport)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여자 대학교인 스미스 칼리지에 입학한 그녀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문학에도 심취하고, 미국과 유럽의 위대한 시기를 다룬 역사 수업을 들으며 1차 사료를 읽어야 할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는 등 인문학의 교양을 폭넓고 깊이 있게 쌓았다. 그런 한편 이상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대안으로 마르크스주의에 물들며 토론회와 독서회를 조직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력은 훗날 그녀의 학문적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만 그녀의 삶 전체에 가장 큰 의미를 갖게 되는 대학 시절의 사건은 3학년 당시 챈들러 데이비스(Chandler Davis)라는 수학 전공의 남학생을 만난 일이었다. 하버드 대학에서 여름 학기를 수강하던 나탈리는 그곳에서 해군 출신의 복학생 챈들러를 만났다. 그는 수학 외에도 과학, 음악, 시에 조예가 깊었고 나탈리와 이념적 성향이 같았다. 만난 지 3주만에 챈들러는 청혼했고, 6주만에 그들은 결혼했다. 나탈리 제먼은 비로소 나탈리 데이비스가 된 것이다. 그 때 챈들러는 22세, 나탈리는 19세였다. 기독교도인 챈들러와 유태인인 나탈리의 만남은 스캔들로 여겨질 정도로 주위의 반대가 많았지만, 그들은 인생의 동반자이자 이념의 동지로서 평생의 고락을 같이 했다. 나탈리가 학문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도 여성이 스스로 나아갈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명분에 찬동하던 챈들러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출판한 여러 책의 머리말에는 남편인 수학자 챈들러에 대한 애정 어린 헌사가 실려있다. 그것은 동반자에 대한 겉치레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학문의 길을 가면서도 비판적 제안과 논의를 통해 책의 수준을 높여준 사람에게 합당한 예우이다.


 나탈리 데이비스는 본디 역사학의 박사학위 과정을 이수한 뒤 그와 관련된 자료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챈들러와 결혼한 뒤 아이를 갖고 가정을 꾸려야 할 일을 고려할 경우, 챈들러를 따라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이 더 수월하리라는 생각이 그녀의 인생의 진로를 바꾸게 만들었다. 또한 하버드 대학교와 미시간 대학교의 대학원 생활은 역사학에 대한 그녀의 태도도 바꾸게 만들었다. 원래 사상사에 관심을 갖고 있던 그녀가 사회사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녀는 특히 16세기의 리용(Lyon)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론(Rhone) 강과 사온(Saone) 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그 도시는 16세기에 곡물 폭동, 인쇄공들의 파업, 프로테스탄트 봉기 등 이른바 '작은 사람들'(menu peuple)의 소요가 자주 일어난 곳이었다. 리용은 그녀의 학위 논문 주제가 되었다. 그곳은 물질적 경험이 종교와 같은 상부 구조의 변화를 좌우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는 물론, 신교가 자본주의 정신을 배양하였다는 막스 베버의 명제를 역사적으로 증명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나탈리는 1952년 리용으로 연구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6개월 동안 머물렀던 그곳의 풍광과 사람들을 사랑했지만, 그녀가 가장 큰 애정을 쏟아 부은 곳은 문서보관소였다. 지금은 유럽사를 연구하는 미국 역사가들이 문서보관소를 찾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고 있지만, 실지로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생긴 새로운 현상이었다. 그 이전까지 미국의 역사가들은 유럽의 역사가들에 의해 이미 발굴되어 인쇄된 자료를 갖고 연구했다. 2차 대전 직후 툴루즈(Toulouse)의 문서보관소를 뒤졌던 존 먼디(John Mundy)와 함께 나탈리 데이비스는 자료를 발굴하며 유럽사를 연구한 최초의 세대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16세기 프랑스 공증인들의 글씨체를 읽는 법에 대한 어떤 실질적인 도움도 얻지 못한 채, 나탈리 데이비스는 리용 주민들의 신분, 종교, 직업, 숙소, 세금 등등에 관한 자료를 어렵사리 수집하였다.


 그렇게 수백 장의 카드에 빽빽하게 필사한 자료를 갖고 귀국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FBI 요원들이었다. 왜냐하면 나탈리 데이비스는 프랑스로 떠나기 전 HCUA의 위헌적 행위를 공격하기 위하여 미시간 대학교의 '인문학, 과학 평의회'에서 비밀리에 발간한 팜플렛을 작성하였고, 챈들러는 그 평의회의 총무를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매카시(Joseph McCarthy)의 선풍이 몰아치던 당시 그 팜플렛으로 말미암아 젊은 부부에게는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챈들러는 미시간 대학교의 교수직을 내어놓는 것은 물론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나탈리 데이비스의 회상에 따르면, HCUA의 평결 과정과 근대 초 유럽의 사법 체계 사이에는 닮은 점이 있었다. 부부가 함께 기소되었다면 그들 모두는 남편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간주하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의 남성중심주의적인 사고 방식과는 상관없이, 그러한 평결이 나탈리 자신에게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챈들러처럼 해임되고 옥고를 치르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뿐, 나탈리의 삶 자체는 훨씬 고달파졌다. 가계를 꾸려나가는 일부터가 어려운 상황에 첫 아이를 임신했다. 더욱 나쁜 것은 FBI에서 여권을 압수하여 리용으로 연구 여행을 떠날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 최악의 상황을 헤쳐나갈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그녀는 당시 살고 있던 뉴욕 지역의 공공 도서관과 대학의 도서관을 모두 뒤져 16세기 리용에서 출판된 모든 책을 섭렵했다. 책의 내용 뿐 아니라 제본 방식에서부터 책 첫머리의 그림, 간행과 관련된 기록, 책장의 가장자리에 기록한 메모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검토했다. 그것은 책의 역사가 사회사를 위해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생각해볼 계기를 그녀에게 제공해주었다.


 나탈리 데이비스는 세 자녀를 키우며 1959년 박사 학위 논문 "신교와 리용의 인쇄공들"(Protestantism and Printing Workers of Lyon)을 완성시켰다. 이 논문은 몇 가지 점에서 근대 초 종교개혁의 연구에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종교개혁 연구는 연구자들의 신앙 고백과 비슷했다. 이를테면 신교도들은 신교의, 카톨릭교도들은 카톨릭교의 편에 서서 연구를 진행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객관적인 연구가 될 수 없었고, 교리와 관련하여 신학자들의 논쟁을 다루는 내용으로 그치기가 일쑤였다. 종교와 사회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도 카톨릭 교회의 재산에 대한 불만이 신교도들의 봉기를 일으켰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논의되었을 뿐이다.


 나탈리 데이비스가 유태인이었다는 사실은 최소한 이 문제에 있어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만들었다. 신교, 카톨릭 어느 측에도 충성을 보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로지 리용의 남성 신교도들의 직업과 사회적 위상에 관한 자료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남성 신교도들은 어떤 사회 계급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경제적인 적이 종교적으로는 동료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신교도들은 특정의 직업과 선택적 친화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기술 이용과 문자 해독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직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인쇄공들은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신의 말씀을 전파한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평신도들이 성직자의 개입이 없이 신앙만으로 신과 직접 접할 수 있다는 신교의 교리가 그들에게 더 호소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사회적 차원을 고려할 때는 경제적 계급뿐 아니라 평신도와 성직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영적 계급 사이의 투쟁도 그 배경으로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경제적 결정론이라는 단선적인 축에서 벗어나 다양한 개념의 틀을 사회사 연구에 도입시킨 선례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960년대는 나탈리 데이비스가 사회사가로서 역량을 키워나간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녀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에 의해 FBI로부터 여권을 되돌려 받아 리용과 제네바로 여러 차례 연구 여행을 떠나 많은 자료를 축적하였다. 그녀는 이 당시에 모은 자료를 아직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또한 이 시기에 그녀는 대학의 강단에 서게 되었다. 컬럼비아 대학교와 브라운 대학교에서 강사 생활을 하던 그녀는 남편 챈들러가 교수직을 얻은 터론토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것은 생활의 안정뿐 아니라 학문 공동체 속에서 많은 조언과 교감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동료들을 얻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빈민 구제, 휴머니즘과 이단"(Poor Relief, Humanism, and Heresy)과 "16세기 프랑스의 한 노동 조합"(A Trade Union in Sixteenth-Century France)은 이 시기에 나탈리 데이비스가 추구하던 사회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논문이다. 전자의 논문에서는 리용의 자료를 이용하여 기업의 가치관과 기독교 휴머니즘의 신조와 프로테스탄티즘이 결합되어 복지 개혁이 이루어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후자의 논문에서는 제네바의 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재판 기록을 이용하여 유럽 도제들의 비밀 결사가 운용되는 방식 및 그들의 의례와 전략을 밝혔다. 그녀는 비밀 결사에의 입문 의례와 처벌의 형식이 도제들을 결속시키는 데 기여하였고, 그러한 결속 아래 그 '작은 사람들'은 능동적으로 임금을 비교적 높게 유지할 수 있었음을 지적했다.


 이렇듯 사회사를 실행하면서도 종교적 신조나 입문 의례 등을 다루는 그녀의 주제는 경제적 계급만을 분석의 틀로 사용하는 종래의 사회사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날 학파가 한 대안이 될 수는 있었지만, 당시까지 아날 학파는 주로 농촌 지역의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의 노동자와 관련된 종교사를 다루는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인구통계학과 물질 문명의 발견에 치중하던 아날 학파의 '전체사'(histoire tatale) 대신 그녀가 찾은 다른 길은 인류학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성'을 하나의 변수로 역사에 포함시킬 수 있는 여유까지도 제공했다.


 인류학적 대안의 모색은 1969년 "무질서의 이유"(The Reason of Misrule)라는 논문 집필을 시작하며 굳어진 생각이기도 하다. 성직자들이 후원하는 도시의 축제에서 벌어지는 청소년 집단의 요란스러운 소동을 다룬 이 논문에서 나탈리 데이비스는 관행적인 사회사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의미를 캐낼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한 관행들에 대해 역사가의 관심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소한 놀이로 치부해버릴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지방의 청소년 집단의 행태를 조사한 아놀드 반 헤넵(Arnold Van Gennep)의 『프랑스 민속 편람』(Manuel de folklore fran ais)을 읽으며 해결되었다. 또한 이 당시 영어로 번역되었던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의 『라블레와 그의 세계』(Rabelais and His World)에서 제시되고 있는 카니발레스크(carnivalesque)의 개념에서 도움을 얻기도 하였다. 즉, 축제는 일상 생활의 일시적인 전도라는 것이다.


 1970년대에 나탈리 데이비스는 인류학과 민속학의 저서를 섭렵했다. 그녀는 에번스-프리처드(E. E. Evans-Pritchard), 빅터 터너(Victor Turner),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 시드니 민츠(Sidney Mintz) 등등의 저서를 읽으며 인류학과 민속학의 성과를 역사학에 접합시킬 방안을 추구하였다. 이 시기는 역사가 키스 토마스(Keith Thomas)와 피터 브라운(Peter Brown)이 각기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Branislaw Malinowski)와 메리 더글라스(Mary Douglas)에게서 영감을 얻으며 선구적인 저작을 완성시켜 나가던 시기와 일치한다. 인류학의 저서에 익숙해진 결과 나탈리 데이비스의 역사 연구는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당시 신교도와 구교도의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배경을 구분시키는 범주에 '연령'을 포함시키기도 했고, 의례 행위가 갖는 상징적 의미를 캐려 시도하기도 하였으며, 구전 문화에도 더 큰 관심을 두게되었다.


 1975년 나탈리 데이비스는 이전에 발표된 논문들과 이러한 관심사에서 출발한 논문들을 『근대 초 프랑스의 사회와 문화』(Society and Culture in Early Modern France)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어냈다. 이 제목은 오늘날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인류학의 냄새가 풍기는 신선한 것이었다. 이 책에 포함된 논문 "폭력의 제의"(The Rites of Violence)는 16세기 프랑스의 종교 폭동에 뒤따르던 살인이나 신성모독과 같은 극단적인 형태의 폭력이 단지 악마성의 표출이 아니라 의례와 축제 행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논지를 펼치고 있다. 그밖에도 이 책에는 특히 여성을 다룬 두 개의 논문 "도시 여성과 종교적 변화"(City Women and Religious Change)와 "위에 있는 여성"(Women on Top)이 들어있다. 앞의 논문은 신교도가 된 여성들은 누구였는지를 밝히고 있고, 뒤의 논문은 축제 때 남성과 여성이 옷을 바꿔 입으며 성별을 전도시키던 풍습이 갖는 의미를 추적하고 있다.


 여성사에 대한 열정은 나탈리 데이비스가 역사학에 발을 담그기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그것은 교수가 된 이후에도 남성은 '아무개 교수'라고 불리지만 여성은 '아무개의 부인'이라고 불리던 학계의 관행에 대한 저항 의지 때문에 더욱 강렬하게 바뀐 열정이기도 하다. 그녀는 미국 여성사의 선구자인 질 커 콘웨이(Jill Ker Conway)를 만났다. 1971년 그들은 함께 캐나다 최초의 여성사 강좌를 개설하였다. 여성사를 개척한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점에서 실행에 옮기기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첫째, 여성사를 수행하려면 생물학에서 법학과 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 분야에 대한 학과교류적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일이 큰 난관이었다. 둘째로 여러 시대와 장소에서 여성의 역할 및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가 갖는 의미를 검토한다는 일은 종교개혁이나 프랑스 혁명과 같은 거대한 사건에 대해서도 재평가해야 한다는 어려움을 수반했다. 1971년부터 6년 동안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분교에서 재직하였던 기간에 나탈리 데이비스는 여러 동료들과 함께 여성학 연구 프로그램을 개발하였고, 그와 동시에 역사와 문학과 예술사의 학과교류 잡지인 『표상』(Representations)을 창간하였다.


 이 시기에 나탈리 데이비스는 학문의 생애에 있어서 또 다른 변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 계기는 버클리 시절 말년에 한 대학원생이 장 드 코라스(Jean de Coras)라는 16세기의 법관이 쓴 책을 보여준 것이었다. 피레네산맥의 한 마을에서 3년 이상에 걸쳐 다른 사람의 아내에게 남편으로 받아들여졌던 사람에 대한 잘 알려진 재판 기록을 담은 그 책에 대한 그녀의 첫 반응은 "이것은 영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려는 젊은 날 소망의 반영일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의미에서 그것은 오래도록 인류학적 역사를 실행해온 경험의 자연스러운 결말이기도 했다. 인류학의 세례를 받은 역사를 서술하면서 나탈리 데이비스는 서유럽 전역의 문서보관소에서 수집한 문서 자료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죽은 사람들을 다루기 때문에, 인류학자들처럼 현장 작업을 하면서 원주민들과 인종지학적인 의견 교환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녀에게 못내 아쉬운 점이었다.


 1978년 프린스턴 대학교로 적을 옮긴 나탈리 데이비스는 코라스의 기록 『잊을 수 없는 판결』(Memorable Decree)을 읽으며 그 내용을 영화로 만든다면 인종지학적인 현장 조사 자체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와 흡사한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이를테면, 피레네의 산간 마을에서 철저한 고증을 통해 16세기 초와 같은 환경을 만들어놓고 배우들로 하여금 감정이입을 통해 재판 당사자들의 처지에 서도록 한다면 역사를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1980년 나탈리 데이비스는 영화의 감독을 맡을 인물을 찾기 위해 파리에 있었다. 우연히도 바로 그 때 저명한 시나리오 작가 장클로드 카리에르(Jean-Claude Carri re)와 젊은 감독 다니엘 비뉴(Daniel Vigne)는 그 재판에 얽힌 사건을 영화화하기 위한 기획을 시작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합류했고 1982년에 영화 『마르탱 게르의 귀향』(Le Retour de Martin Guerre)이 나왔다.


 그 영화는 영화 제작자들과 역사가의 협력이 빚어낸 훌륭한 결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지만 나탈리 데이비스는 그 영화의 제작 단계 초기부터 같은 주제에 대해 책을 써야 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영화에서는 특히 여주인공 베르트랑드의 행동이 수동적으로 묘사되었고, 이야기의 여러 요소들이 생략되거나 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어떤 면에서 표현력이 대단히 뛰어나긴 하지만, 2시간 이내에 모든 것을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생략이나 왜곡이 불가피했다. 나탈리 데이비스는 그 마을의 생활과 관련하여 자신이 찾을 수 있던 모든 자료를 이용해서 마르탱 게르의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납득이 갈 수 있도록 책을 쓰려 했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었던 간접적인 이유 중 하나는 이미 1975년 에마뉘엘 르 루아 라뒤리(Emmanuel Le Roy Ladurie)의 『몽타유』(Montaillou)와 1976년 카를로 긴즈부르그(Carlo Ginzburg)의 『치즈와 벌레』(Cheese and the Worms)라는 미시사의 걸작이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 책은 영화가 초연된 것과 같은 1982년에 최초로 프랑스에서 발간되었고 이듬해에 미국에서 선을 보였다. 나탈리 데이비스는 자신의 미시사적 기술을 '인종지학적 기술'(ethnography)이라고 말했다. 나탈리 데이비스는 그 놀라운 이야기를 이중적으로 서술하였다. 첫 번째는 사건 자체가 전개되며 마을 사람들에게 비쳐진 단계에 따라 서술했고, 두 번째는 법관 코라스와 몽테뉴(Montaigne)를 비롯한 기록자들이 이야기를 풀어나간 방식에 따라 서술했다. 그 의도는 사실과 기록 사이의 차이를 독자들에게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성 방식은 당연히 역사 서술에 내재하는 문학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렇듯 나탈리 데이비스는 영화를 통해 역사와 문학의 접점에 도달했다. 프린스턴 대학교는 영화나 문학에 대한 관심을 구체화시키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이야기체 역사의 부활을 강조하던 노대가 로렌스 스톤(Lawrence Stone), 유럽의 문화 연구를 주도하던 칼 쇼스케(Carl Schorske)와의 만남으로 또 다른 종류의 지적 자극을 얻은 것은 물론,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와 공동으로 강의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역사가 갖는 문학성에 대한 관심은 나탈리 데이비스가 미국 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던 1987년에 출간된 『문서보관소 속의 창작』(Fiction in the Archives)이라는 저서로 결실을 보았다. 이 책도 『마르탱 게르의 귀향』과 마찬가지로 법률에 관한 텍스트로부터 출발하였다. 그 텍스트는 살인에 대한 국왕의 용서를 탄원하는 수많은 편지였다. 그러한 진정서의 원작자는 모든 사회 계층 출신의 인물들이며, 여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진정서가 갖추어야 할 법률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국왕과 그의 대신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편지를 써야 했다. 이러한 편지들은 서기관에 의해 씌어졌고, 그 편지의 내용을 구술하던 사람들은 글을 읽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편지는 중세 말과 근대 초의 유럽의 사회상을 풍부하게 전해주는 자료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나탈리 데이비스가 특히 초점을 맞추었던 것은 그 탄원자들이 여러 가지 다른 상황 속에서 용서를 탄원하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나, 그들이 구사하던 전략이었다. 그들은 모두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며 구명 운동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에 '창작'(fiction)이라는 단어를 넣은 것은 그러한 진정서의 이야기가 지어낸 '허구'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그 탄원자들이 말하고 행동할 때 고안해내 사용하는 '기지'나 '술책'을 가리킨다. 따라서 나탈리 데이비스는 『문서보관소 속의 창작』을 통해 그 편지들을 그 시대의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에 대한 증거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 증거를 읽는 신뢰할만한 방안까지도 제공하였던 것이다.


 사회사, 인류학적 역사, 인종지학적 기술, 여성사, 역사의 문학성 등등 나탈리 데이비스가 갖고 있던 다양한 관심사는 1995년에 출판된 『주변부의 여인들』(Women on the Margins)이라는 저서로 결집되었다. 이 책은 17세기를 살았던 세 명의 도시 출신 여인들의 특이한 삶을 주제로 하고 있다. 유태인 상인 글리클 바스 유다 라이프(Glikl bas Judah Leib)는 함부르크(Hamburg)에서 메츠(Metz)로, 카톨릭 장인이자 교사인 마리 귀아르(Marie Guyart de l'Incarnation)는 투르(Tours)에서 퀘벡(Quebec)으로, 신교도 예술가이자 곤충학자인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Maria Sibylla Merian)은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서 뉘른베르크(Nuremberg)와 암스테르담(Amsterdam)을 거쳐 남미의 수리남(Suriname)으로 이주하며 삶의 기록을 남겼다.


 불어가 아닌 유럽의 언어로 연구의 영역을 확대한 이 책은 여러 모로 의미가 깊다. 이 책은 단일한 미시사가 아니라 여러 삶을 비교하며 그 속에서 성별에 따른 위계질서가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를 보이고 있다. 퀘벡과 수리남으로 건너간 마리와 마리아는 신대륙에서 비유럽인들을 만난다. 그들과의 접촉은 유럽에서도 특히 프랑스에 초점을 맞춰 연구하였던 나탈리 데이비스에게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들의 삶은 다른 종류의 결혼 생활과, 다른 종교와 다른 직업에 의해 특징지어진 이색적인 것이다. 그러한 삶들을 한 책에 묶을 수 있도록 엮어준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주변부'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종교적, 사회적, 지리적으로 주변부에 살고 있었으며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특히 더 큰 창의력을 갖고 살아가야 했다는 것이다. 그 주변부는 그들에게서 새로운 삶을 발견하기 위한 개척지가 되었다. 수녀원을 건설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넜던 여인에게서, 애벌레와 나비를 찾기 위해 수리남의 강을 노 저어 탐사했던 여인에게서 나탈리 데이비스가 발견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여성으로, 유태인으로, 공산주의자라는 당시로서 치명적인 비난으로, 어머니로 온갖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며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만든 자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70세를 넘어 새로운 밀레니엄에 들어서도 나탈리 데이비스는 『16세기 프랑스의 선물』(The Gift in Sixteenth-Century France)과 『영화 속의 노예』(Slaves on Screen)라는 두 권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마르셀 모스(Marcel Mauss)가 1925년 『선물』(The Gift)이라는 대작을 발간한 이후 선물은 마샬 살린스(Marshall Sahlins), 레비-스트로스(Claude L vi-Strauss), 말리노프스키 등등 많은 인류학자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16세기 프랑스의 선물』에서 나탈리 데이비스는 선물을 주고받는 방식의 변천을 통해 16세기 프랑스에 대한 또 하나의 인종지학적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영화 속의 노예』는 1980년대와 1990년대를 통해 '역사와 영화'라는 제목으로 펼쳐졌던 세미나에 바탕하여, 노예 수용소와 대농장과 반란과 해방에 관한 드라마를 펼치고 있다.


 이 노역사가는 아직도 우리에게 어떤 놀라움을 남겨놓고 있을까? 기다려볼 일이다.


 

 


<주요 개념>


◎ 카니발레스크: 미하일 바흐친이 『라블레와 그의 세계』에서 고안해낸 개념이다. 중세까지 만연하던 축제의 장터는 근대로 들어서며 사라졌지만, 그것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라블레의 소설과 같은 텍스트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런 소설을 가리키기도 하는 이 용어는 축제에서 위와 아래, 남성과 여성 등등 모든 것이 전도된 상황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를테면 가상의 혁명과 같은 상황으로서, 민중의 불만을 해소시키는 안전판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 인종지학적 기술: 인류학자들이 현장에서 원주민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서술하는 방식에 대해 나탈리 데이비스가 붙인 명칭이다. 본문에서 밝힌 것처럼, 나탈리 데이비스는 이른바 미시사의 기술이 인종지학적 기술과 흡사하다고 논한다.


◎ 주변부: 왕권이건 시민권이건 정치적 권력의 중심부에서 벗어났고, 문화적으로도 학문과 제도의 중심부에서 벗어난 지역을 가리킨다. 주변부는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유럽의 많은 남성들도 출신 성분, 재산, 직업, 종교 등등의 이유로 권력의 중심부에서 빗겨 있었다.

 

 



<어록>


◎ 아주 부유하고, 권력이 크고, 학식이 높고, 성직에 있는 사람들은 "소박한 사람들"의 삶과 관련될 때에만 기술하였다.
(『근대 초 프랑스의 사회와 문화』에서)


◎ 역설적으로 내가 영화 창조 작업을 음미하면 할수록, 그것을 넘어서는 무엇을 향한 나의 욕망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마르탱 게르의 귀향』에서)


◎ 과거의 연구는 도덕적 감수성과 비판적 이해를 위한 도구를 보상으로 제공합니다. 시절이 아무리 사악하고 냉혹함이 아무리 엄청나다 할지라도, 저항의 요인 혹은 친절과 선의의 요인이 나타납니다. 상황이 아무리 황량하고 억압적이라 할지라도, 어떤 형태의 임기응변적인 대응 방식이 생깁니다.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미래에 물려줄 것입니다. 현재가 아무리 정태적이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과거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최소한 사태가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과거는 끊임없는 흥미의 원천이며, 희망의 원천까지도 될 수 있습니다.
(1997년 미국철학회 초청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행한 연설에서)


◎ 역사 영화는 과거를 과거로 놔두어야 한다.
(『영화 속의 노예』에서)

 

 



<저서>


Society and Culture in Early Modern France, Stanford University Press, 1975.


The Return of Martin Guerr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3. 『마르탱 게르의 귀향』, 양희영 옮김, 지식의풍경, 2000.

Fiction in the Archives,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7.

Women on the Margin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5.

The Gift in Sixteenth-Century France,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2000.

Slaves on Scree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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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도반 2006-12-05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나탈리 지먼 데이비스의 학문적 생애와 그의 주요 저작에 대한 설명이 잘 어우러진 글이다. 한길사에서 출판된 『월경(越境)하는 지식의 모험자들』에 수록되었다.

출처는 http://home.knue.ac.kr/~hocho/board/wwwboard.cgi?db=lecture&mode=read&num=301&page=4&ftype=6&fval=&backdepth=1
 

한길사에서 2002년 5월에 출판될 <지식의 최전선>에 실릴 글입니다.




미시사


 미시사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작은 것의 역사' 혹은 '작은 것을 통해 보는 역사'일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역사학의 이 새로운 영역의 본령에 대한 오해가 많이 있다. 이를테면 '연필의 역사', '설탕의 역사', '유방의 역사', 그리고 결정적으로 '먼지의 역사' 등등 작은 물체의 역사를 미시사와 동일시하는 일반적인 통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학의 새로운 대안이 될 것인지 논란이 되고 있는 미시사는 특수한 발생 배경과 연구 방법을 갖고 있는 고유의 분야로서, 그 일반적인 통념과는 거리가 멀다. 미시사란 과거에 실재했던 평범한 '작은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을 규범화시킨 연구의 경향을 말한다.


 실상 역사학은 그 목적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려는 것이라 할지라도 연구의 출발점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실의 천착에 달려있는 종합적 학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시사'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라 하여도 세부적인 사실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존재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관심에 '미시사'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이고, 거시사와의 관련 속에서 미시사의 개념을 이론적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1960년대에 독일의 사회학자인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미시사를 동반하지 않은 거시사는 이상적인 의미의 역사가 될 수 없다"고 말하며 미시사를 위한 변론을 내세웠다. 그에게 있어서 거시사와 미시사를 나누는 기준은 "시간·공간적 단위의 크기"였다. 거시사가 "극단적인 일반성의 통합으로서의 세계사"를 다룬다면, 미시사는 "원자와도 같이 미세한 개별 사건에 관한 연구"를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으로 본다면 방대한 사료에 대한 세밀한 분석에 의존하여 서양 예술에 있어서 르네상스의 독창성을 논증하려 한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저작이나, 18세기 영국 하원의 의석 구성과 선거 과정 등에 대한 세부적인 연구로 18세기 영국의 정치적 구조를 서술하려 하였던 루이스 네이미어의 시도는 대표적인 미시적 역사 연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고전 저작에 주석을 다는 것과 같이, 사료나 사실에 근거하여 아주 미세한 사항까지 철저하게 밝히려고 하는 노력은 모두가 미시사적인 접근 방식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말부터 의식적으로 '미시사'라는 이름 아래 확고한 연구 방법과 지향점을 찾으려던 일단의 이탈리아 역사가들은 단지 작은 시간·공간적 단위에 대해 세부 사항까지 치밀하게 밝히려는 노력으로서 미시사를 바라본 것만은 아니었다. 역사적 단위를 축소시키려는 그들의 시도에는 단지 인식론적 이유뿐 아니라 정치적, 이념적인 이유도 있었다. 1970년대로부터 시작하여 산업자본주의를 개선시킴으로써 소외된 대중을 해방시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산업화된 세계 속에서 정치 제도와 대기업과 대중매체는 새로운 기술적 혁신을 받아들이면서 변화무쌍하게 연계하여, 핍박받던 사람들을 구제한다기보다는 그들을 더욱 억압하는 방식으로 작용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근대화라는 세계사적인 과정은 인간의 희생을 대가로 이루어졌으며, 더구나 그것은 이른바 '작은 사람들'의 등 뒤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렇듯 장기적이고 대규모적인, 즉 거시적인 과정이 해방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억압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그것에 초점을 맞추었던 사회사가 갖는 함축적 의미란 무엇인가?


 이러한 종류의 문제를 제기하던 이탈리아의 역사가들이 『콰데르니 스토리치』라는 학술지를 중심으로 하여 곧 미시사라는 이름으로 확립될 연구의 경향을 닦아나가기 시작했다. 1976년에 발간된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저작 『치즈와 구더기』에는 미시사라는 용어가 나타나지 않지만 이 책은 미시사의 새로운 연구 방향을 결정하였다. 1977년 에도아르도 그렌디는 "미시 분석과 역사"라는 논문을 통해 "이례적 정상"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미시사를 위한 이론적 근거의 하나를 확립시켰다. 1978년에 나온 『콰데르니 스토리치』의 한 권은 "농업 경영과 미시사"라는 특집호로 꾸며졌고, 1979년 1월 로마에서 "아날 학파와 이탈리아 역사서술"이라는 주제로 열렸던 학술대회에서 긴즈부르그와 카를로 포니가 공동으로 발표하였던 "이름과 방법: 불평등 교환과 역사책 시장"이라는 제목의 논문 말미에서도 그들은 미시사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1981년 카를로 긴즈부르그와 조반니 레비는 "미시사들"(Micro-storie)이라는 미시사 총서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미시사의 전통은 확립되기 시작한 것이지만, 이탈리아의 미시사가들이 어떤 통일된 방향으로 나아갔던 적은 없다. 그들은 "역사 서술의 실제"이자 "실험적인 작업"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서 어떤 정통적인 학파를 수립하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활발하게 의견을 교환했지만, 미시사의 선언문 같은 것은 없었다. 독일의 미시사가인 위르겐 슐룸봄이 지적하듯, 이탈리아 "미시사의 경계는 열려 있으며, 미시사의 개념이 엄격하게 정의된 적도 없"지만, "바로 이와 같은 다양성이야말로 오히려 미시사 연구가 갖는 생동감과 생산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미시사가들이 지향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대표적인 저작이 제기하는 문제점들을 살펴보는 것이 아직도 유용한 방안이다. 물론 그 대표작이란 긴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이다.


 『치즈와 구더기』는 16세기 북부 이탈리아 프리울리 지역의 방앗간 주인이었던 메노키오라는 인물의 전기를 그리고 있다. 메노키오에 대한 이단 심문 기록에 근거하여 씌어진 이 책은 메노키오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16세기 당시의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갈등을 논하고 있다. 1532년에 태어난 메노키오라는 방앗간 주인은 읽고 쓸 줄 알았으며 마을에서 면장을 지내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는 치즈 속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듯 천사나 신도 우주의 초기 물질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었다는 이단적인 주장을 하며 신이 삼라만상을 만들었다는 기독교의 창조론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발당한 그는 1583년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심문 받은 뒤 2년 동안 복역하다가 다시는 그런 이단을 유포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풀려났다. 그러나 그는 풀려난 뒤에도 다시 이단적인 생각을 말하다가 1598년 다시 고발당한 뒤 이단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다.


 이 이야기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먼저 이 이야기에는 메노키오라는 실제 이름을 가진 평범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바꾸어 말하면 미시사란 하나의 마을, 가족, 또는 개인과 같이 경계가 잘 구획된 현상에 초점을 맞추어 실제 존재하던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다루고 있으며, 그 방법은 마치 인류학자가 현장조사를 하듯 면밀히 추적함으로써 그 현상이 지니는 역사적인 의미를 복합적인 사회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구체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치즈와 구더기』는 역사 연구의 방법론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즉 메노키오의 심문 기록을 해독할 때, 우리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기록은 엘리트 문화의 대표자인 심문관에 의해 작성된 것이므로 그 심문의 대화 속에 담긴 권력구조를 파악하려고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시사가들이 평범한 개인의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세계를 복원하려고 시도할 때 부딪히는 가장 큰 난관은, 사료가 별로 없을뿐더러 얼마 되지 않는 사료마저도 질적으로 왜곡되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층의 농민이나 여성이 연구의 대상일 경우에 이러한 사료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쓴 글을 거의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화는 대체적으로 구전문화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시사가들은 사료를 찾기 위하여 민담, 설화, 재판기록, 특이한 사건기록 등에 관심을 기울인다. 문헌 자료에 의존하고 있는 종래의 실증적인 방법이 엘리트 문화에 접근하는 데 유용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를 남기지 못했던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통로는 되지 못한다. 또한 이것은 미시사가 인류학이나 민속학과 같은 인접 학문과 밀접한 교류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회성을 지니는 특이한 사건의 기록이 어떻게 그가 속한 집단이나 사회를 대표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은 남는다. 이런 질문에 대해 에도아르도 그렌디는 '이례적 정상'이라는 개념으로 대답한다. 모순어법처럼 보이는 이 표현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 질문에 대응한다. 먼저, 범죄자나 이단처럼 주변부에 속하는 사람들은 지배계층에 의해 '비정상'이라고 규정되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환경이나 계급문화를 '정상적'으로 대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지배계층은 피지배계층의 사회적 현실을 조직적으로 왜곡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하층계급에 대한 기록을 조작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지배계층에 의해 만들어진 많은 양의 공식적 자료보다는 하층계급 출신의 목격자나 피의자가 직접 남긴 말의 기록은 예외적이고 양이 많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사회현실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기록에서 많은 것을 얻으려는 과정에는 또 다른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다. 즉, 메노키오의 심문기록처럼 지배계층의 문화와 민중의 문화 사이의 심각한 불일치가 드러나는 기록에서 민중문화의 실마리를 찾아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다. 긴즈부르그는 이른바 '실마리 찾기'라는 독특한 방법을 제시하였다.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이 방법의 핵심은, 역사가의 해석과정은 수학자나 물리학자보다는 의사의 진단에 가깝다는 것이다. 역사학은 마치 의사가 사소한 임상적 징후에 대한 진단을 통하여 파악하기 어려운 환자의 병을 간파하는 것처럼, 겉으로는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조그마한 실마리를 통하여 그 뒤에 놓인 역사적 실재를 식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다각도의 면밀한 관찰에 근거한 추론으로서, 지배 엘리트의 문화에 가려진 민중문화의 의미를 읽기 위해서는 사료의 해석방식도 엘리트의 사료를 읽는 것과는 다른 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시사적 관심사가 이탈리아에만 존재하였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라뒤리와 뒤파키에 같은 역사가들은 긴즈부르그와 포니 등 이탈리아 미시사가들이 나아가려던 방향이 자신들의 지향점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러한 미시사적 관심이 체계적으로 구체화된 곳은 독일이었다. 1980년대에 일단의 독일 역사가들은 거시적 구조를 강조하는 '역사적 사회과학'에 반발하며 일반 대중이 경험하고 있는 일상 생활의 조건으로 관심을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상생활사'(Alltagsgeschichte)나 역사인류학(Historische Anthropologie)을 옹호했다.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면서 거대한 역사의 발전 과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마르크스를 부정한 것이지만, 근대화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점을 비판하였다는 점에서는 마르크스의 감수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시사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중에는 그것이 종래의 전기와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시사 역시 개인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전기와 다를 바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시사에서 대상으로 삼는 개인은 역사의 그늘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져갔던 인물들로서, 그들의 삶을 복원시키려는 이유는 그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삶을 미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시사가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상층의 지배문화와 하층의 민중문화 사이의 간극을 밝히며, 그 사이의 갈등과 대립과 절충의 관계를 밝히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즉, 개인들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이되, 그것 자체에서 목적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추적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한편 미시사는 지역의 단위에서 벌어지는 사례의 연구와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다. 물론 연구의 단위가 소규모의 지역이라는 점에서 그 둘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둘은 본질적인 면에서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사례의 연구는 거시적이고 인과적인 틀에 근거하고 있는 주어진 설명에 증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미시사가들은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단계에서 벌어지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역사의 과정에 있어서 실지로 사실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시사가들은 이미 주어진 설명에 부합하는 예를 제공한다기보다는 하나의 개인적 차원에서의 이야기를 통하여 과거의 세계관을 추적해 가는 방법을 지향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례의 연구는 '증거'의 역사인 반면 미시사는 '가능성'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역동적으로 미시적인 수준으로 축소시켜 보려는 시도에도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시적인 안목을 적용시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영역이 있는 반면, 거시적인 관점으로 접근해가야 해결될 수 있는 분야도 있다. 미시사의 접근은 역사의 전체적인 모습을 그려내는 데 한계를 갖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가 미시사에서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그런 한계가 아니라 그것이 역사학에 가져다 줄 수 있는 잠재력이다. 미시사는 궁극적으로 개인들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역사 자체를 흥미롭게 만들고 있다. 미시사를 한 축으로 둠으로써 이야기체의 역사가 부활하였다. 한동안 역사학은 단지 학자들을 위한 역사로 바뀜으로써 대중들에게서 멀어져갔다. 이제 이야기체 역사의 부활은 독서대중의 관심을 역사학으로 되돌려줄 것이라고 여겨진다.

 




주요 개념 및 학자


실마리 찾기, 혹은 추론적 패러다임(paradigma indiziario) 다각도의 면밀한 관찰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추론해 나가는 방식으로서, 미시사가들의 기본적인 방법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탐정 셜록 홈즈의 방식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위르겐 슐룸봄(J rgen Schlumbohm) 독일의 미시사를 대표하는 학자 중 한 사람. 독일 막스 플랑크 역사연구소에 재직하면서 올덴부르크 대학교의 교수로 있음. 그는 1977년 페터 크리테 및 한스 메티크와 『산업화 이전의 산업화: 자본주의 형성기 시골에서의 상업적 상품 생산』을 발간하였고, 최근에는 주로 출산의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례적 정상(eccezionalmente normale) 1977년 에도아르도 그렌디에 의해 "미시 분석과 역사"라는 논문에서 제시된 개념이다. 미시사의 저작에서 언제나 논란이 되는 사료의 대표성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론으로서 미시사에서 사용되는 사료는 이례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지배층의 문화로 봤을 때 이례적일 뿐, 그것은 민중 문화의 시각을 정상적으로 표출하고 있다는 것.


조반니 레비(Giovanni Levi) 카를로 긴즈부르그와 함께 미시사의 대표자의 한 사람. 그러나 긴즈부르그의 저작이 일화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데 반하여, 1985년에 출간된 그의 대표작 『무형의 유산: 근대로 가는 문턱에서 본 농민의 세계』는 전통적인 사회사의 방법에 더욱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 그의 미시사는 '체계적 미시사'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대학교 교수.


카를로 긴즈부르그(Carlo Ginzburg) 1976년에 간행된 『치즈와 구더기』를 통해 미시사의 구체적인 성과를 제시한 이탈리아 출신의 역사가. 그 책에서는 기독교의 오랜 지배에도 불구하고 오래 살아남은 농민들의 민중 문화의 존재를 상정한다. 미시사가 마르크스주의와 결합될 수 있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미국 UCLA 대학교 교수.


『콰데르니 스토리치』(Quaderni Storici) '역사 노트북' 혹은 '역사 연습장'이라는 의미를 갖는 이 학술지는 1966년에 창간되었다. 미시사가들은 이 잡지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고, 따라서 미시사가들의 의견을 교환하고 종합하며 그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는 역할을 하였다.


한스 메디크(Hans Medick) 1984년에 발표된 "보트에 탄 선교사들"이라는 논문을 통해 '일상생활사'의 기본적인 입장을 규정한 독일의 역사가. 클리포드 기어츠로 대표되는 문화인류학의 방법을 모델로 삼았다. 이후 막스 플랑크 역사연구소의 원산업화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라이힝 지방에 대한 지역 연구를 수행하였다.

 

 




추천 도서 목록



곽차섭 엮음, 『미시사란 무엇인가』, 푸른역사, 2000.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 『마르탱 게르의 귀향』, 양희영 옮김, 지식의 풍경, 2000.
로버트 단턴, 『고양이 대학살』, 조한욱 옮김, 문학과지성, 1996.
리햐르트 반 뒬멘, 『역사인류학이란 무엇인가』, 최용찬 옮김, 푸른역사, 2001.
안병직 외, 『오늘의 역사학』, 한겨레신문사, 1998.
위르겐 슐룸봄 엮음, 『미시사와 거시사』, 백승종 외 옮김, 궁리, 2001.
이진모,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평범한 독일인들," 『역사비평』, 1998 봄.
조지 이거스, 『20세기 사학사』, 임상우·김기봉 옮김, 푸른역사, 1999.
조한욱, 『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 책세상, 2000.
카를로 긴즈부르그, 『치즈와 구더기』, 김정하, 유제분 옮김, 문학과지성, 2001.
클리포드 기어츠, 『문화의 해석』, 문옥표 옮김, 까치,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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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도반 2006-12-05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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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단턴의 역사 세계

 

조한욱(hocho@cc.knue.ac.kr

 


<이머지 새천년> 3월호에 실립니다.



1. 개인적 이야기


미국의 텍사스 주립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의 막바지를 보내던 시절에 내가 가졌던 많지 않은 즐거움 중의 하나는 학교 주변의 서점들을 순례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의 후반에 속하는 어느 날 나는 한 중고책 서점의 역사책이 꽂힌 서가에서 <고양이 대학살>(The Great Cat Massacre)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중고책 서점이라 하지만 새 책도 간간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 규모는 웬만한 도서관에 맞먹을 정도로 컸다. 결코 역사책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제목이기에 탐정소설이 잘못 배치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책을 빼들었다. 몇 페이지를 읽으면서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나는 그 책을 사들고 서점에서 나왔다. 그 뒤 샅샅이 읽어 내려간 그 책에서 찾은 흥미는 추리소설에서 얻는 것과는 종류가 달랐지만, 그에 못지 않게 진진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 책은 흥미에 더해 역사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내게 전달해주며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 흥미와 감동을 잊지 못해 책을 번역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면서 그 책의 저자인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에게 편지를 보내야 할 일이 생겼다. 판권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의 출판계 사정을 감안해달라는 문학과지성사의 부탁을 그에게 전해야 했던 것이다. 1996년 3월 25일 나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저는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의 교수로서 서양사의 여러 강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1980년대를 오스틴(Austin)에 위치한 텍사스 주립대학교에서 공부하며 보냈습니다. 그 수련기간에 저는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하였고, 그 속에 담긴 모든 것에 매료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 특강을 위해 오스틴을 방문하셨을 때 저는 청중 속에 있었습니다. 특강도 매력 그 자체였으며, 저는 그때 당신의 책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알려야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학위 논문을 마친 뒤 저는 한국교원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야 나의 소원을 실현시킬 위치에 서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당신의 책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의미를 만들어줄 수 있도록 번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저는 그 과업을 거의 마무리짓는 단계에 있으며, 당연히 이 책의 출판에 관심이 있는 출판사를 접촉했습니다. "세상 물정에 밝아지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으로서, 저는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끝나기만 한다면 책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한국의 출판사 중에서도 특히 역사책을 취급하는 출판사는 곤경을 맞고 있습니다. 역사책의 시장은 아주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 출판업자들은 만일 <고양이 대학살>의 판권이 지나치게 높을 경우 출판을 포기해야 한다고 제게 알려줬습니다. 이 책이 아직도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러한 상황에 대한 하나의 증거입니다. 제가 접촉한 문학과지성사는 양심적이고 안정된 출판사이지만, 그들 역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책이 좋다면 시장의 조건에 맞지 않더라도 그들은 출판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국의 독서 대중이 당신의 목소리를 듣기 원합니다. 극동지역의 미래 독자들에게 당신의 사상을 전달함에 걸림돌이 될 장애물의 일부를 교수님께서 제거해 주신다면 저는 최선을 다해 당신의 섬세한 언어의 가장 미묘한 부분까지도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속하게 답장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답장은 신속하게 오지 않았다. 약간의 서운함과 함께 세계적인 학자는 역시 바쁜가 보구나 하고 생각하며 체념하고 있던 차에 4월말에 다음과 같이 대단히 호의적이고 친절한 편지를 받았다.

 


당신의 대단히 친절한 편지는 프린스턴(Princeton)으로부터 이곳 옥스퍼드(Oxford)로 전달되어 방금 도착했습니다. 나는 <고양이 대학살>을 기꺼이 번역하겠다는 당신의 의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것이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책을 한국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만들려는 당신의 노력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한국어 판이 나올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꺼이 하려 합니다. 거기에는 내 몫의 저작권 사용료를 모두 포기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 책은 원래 베이직 출판사(Basic Books)에서 출판되었다가 지금은 판권이 하퍼 콜린스(Harper Collins)로 넘어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번 학기에 옥스퍼드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해 누구를 접촉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베이직에 이 편지의 사본을 보내 <고양이 대학살>의 판권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전해달라고 요청하겠습니다. 나는 한국 출판업계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판권을 절대적인 최저로 낮추어야 할 필요성과 내 몫의 저작권을 완전하게 포기하겠다는 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선수금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배려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문제는 출판사와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당신으로서는 베이직 출판사의 외국 판권 담당자에게 편지를 보내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어떤 배려가 있을 것입니다. 모든 어려움을 무릅쓴 당신에게 감사드리며, 당신 자신의 작업이 훌륭한 결실을 맺기 바랍니다.


결국 문학과지성사에서는 판권에 관한 모든 것을 위임하겠다는 미국 출판사의 대답을 듣게 되었다. "판권 문제가 이렇게 쉽게 마무리된 적이 없었다"는 문지 측의 말을 들으며 나는 번역에 박차를 가했고, 책은 빛을 보게 되었다. 물론 로버트 단턴의 세심한 배려도 고마운 일이지만, 베이직과 같은 대출판사에서도 의견을 존중해야 할만큼 로버트 단턴의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확인한 일이기도 했다.


 

2. 로버트 단턴의 초기 저작들


로버트 단턴이 자상하게 신경 써준 것에 보답하기 위한 마음이 번역에 더 큰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는 자극이 되긴 했지만,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책을 번역하려는 근본적인 추진력은 그 책 자체가 역사학에 대해 갖는 신선한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단턴이 이 책을 통하여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중반 <뉴욕타임스>에서 잠시 기자 생활을 하였던 그는 1968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의 교수로 부임한 이래 1984년 <고양이 대학살>을 출판하기 전까지 <메스메리즘과 프랑스 계몽주의의 종말>(Mesmerism and the End of the Enlightenment in France, 1968), <계몽주의의 사업: "백과전서" 출판의 역사>(The Business of Enlightenment: A Publishing History of the Encyclop die, l775-l800, 1979), <구체제의 지하문학 세계>(The Literary Underground of the Old Regime, 1982) 등 세 권의 책을 이미 내놓은 바 있었다. 이 책들은 계몽의 시대인 18세기를 다루고 있지만 18세기를 연구하는 당시의 주류 방식에서는 벗어나 있고, 그러한 성격은 <고양이 대학살>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메스메리즘>에서는 18세기의 계몽주의를 이끌었던 중요한 사상가를 다루고 있지 않다. 그 책에서 단턴은 '동물의 자기'(animal magnetism)가 있어 그 기운이 영속적인 흐름을 반복하고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의학에 적용시켰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츠 안톤 메스메르(Franz Anton Mesmer)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대상으로 삼아, 그 신비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요소가 계몽주의의 쇠퇴와 갖는 관련성을 추적하고 있다. 단턴은 1780년대 파리에서 메스메르가 동물 속에 있는 자기에 의한 치료회를 열어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던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처럼 돈벌이가 되는 협잡이 사회 개혁의 희망을 구체적으로 만들며 대중화시켰다는 것으로서, 메스메리즘은 정부의 관변에서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에 반대하는 문단의 주변인들의 정치적 관심사와 결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메스메리즘이 유행되며 환영을 받았다는 것은,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프랑스 혁명을 주도하게 될 급진주의 작가들의 사회 비판이 계몽적 이성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것에 근거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고 단턴은 논한다.

 


한편 <계몽주의의 사업>에서는 계몽사상의 집대성이라고 일컬어지는 <백과전서>를 연구의 주제로 삼았다. 그렇지만 그 내용을 다룬 것이 아니라, 사업의 측면에서 <백과전서>의 판매를 연구함으로써 대량의 인쇄 문화와 서적 유통의 역사가 대중의 여론을 형성함에 끼친 영향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것은 연구의 대상에 있어서는 종래의 사상사나 지성사와 다르지 않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구체제의 지하문학 세계>에서는 그러한 구분선을 한결 명확하게 하고 있다. 그 책의 첫머리에서 단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8세기 지성사를 꼭대기에서 본 관점은 너무도 자주, 너무도 훌륭하게 기술되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새로운 방향을 타진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즉 계몽사상의 밑바닥에 도달하도록 시도하고 그 지하의 세계까지 침투하여, 최근에 프랑스 혁명이 연구되고 있는 것처럼 계몽사상도 '밑으로부터' 검토해봐야 하리라는 것이다. 지성사를 밑으로 끌어내린다는 것은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자료를 찾아, 철학적 논문에 대해 명상하는 대신에 문서보관소를 뒤져야 할 것을 요구한다." 바꾸어 말하면, 주도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계몽사상의 '고급' 문화가 밑으로 전달한 영향력이라기보다는 밑으로부터 만들어진 영향력이 프랑스 혁명 이전의 사회에서 작용하던 방식을 연구하고자 하는 의도를 확실하게 밝히면서, 그 의도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그 방법과 자료 역시 새로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내용보다는 그 인쇄와 유통 과정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회사에서 주로 사용하는 통계적 방법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한 그를 종래의 사상사가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는 '관념의 사회사'를 실행하고 있는 역사가이다. 물론 그의 방식에 선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선례는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Les Origines intellectuelles de la R volution fran aise 1715-1787)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다니엘 모르네(Daniel Mornet)에게서 찾을 수 있다. 모르네는 단지 '18세기에 프랑스 사람들은 무엇을 읽었는가'를 질문함으로써 계몽사상이 실지로 프랑스 혁명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 밝히려 했다. 모르네는 그 질문에 대해 1750년부터 1780년 사이에 경매를 위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이는 사설 도서관의 카탈로그 500여 개에 수록된 책제목의 숫자를 셈으로써 하나의 대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루소(Jean-Jacaues Rousseau)의 <사회계약론>(Contrat Social)은 단 한 부만 발견되었고, 계몽사상가들의 위대한 저작은 그 비율이 놀라울 정도로 낮음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그라피니 부인(Mme. de Graffigny), 리코비니 부인(Mme. de Ricobini) 등등 이제는 이름이 잊혀진 사람들의 저작이 그 서가를 채우고 있었다.

 


다니엘 모르네의 이러한 발견은 계몽사상을 받쳐주던 버팀목 몇 개를 제거시킨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급의 계몽사상가들보다는 이류급, 삼류급의 작가들이 더 많은 독자층을 확보했다는 것은 계몽사상의 중요성을 삭감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 주장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쨌든 모르네는 계몽사상과 프랑스 혁명의 관계에 대해 논하려는 역사가라면 반드시 직시해야 할 문제점들을 제기한 것이었다. 그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다: 구체제 문필 문화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가? 18세기에 책을 생산하던 사람들은 누구였으며 읽는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의 직업은 무엇이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 주어지기 전에는 계몽사상의 문화적, 사회적 맥락 위상을 논할 수 없으며, 그것은 전통적인 연구 방법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구체제의 지하문학 세계>는 바로 그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단턴은 오늘날 역사학계의 성과를 받아들여 모르네가 내렸던 결론의 일부를 수정하고 있다. 예컨대, <에밀>(Emile)의 제5권에 <사회계약론>의 내용이 훨씬 이해하기 쉽게 제시되어 있어 대중들이 굳이 <사회계약론>을 읽을 필요가 없었으며, 모르네가 제시한 카탈로그에 있는 <루소 전집>에 <사회계약론>이 포함되어 있어 그 책이 단 한 권밖에 없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며, 모르네는 많은 판본이 쏟아져 나온 구체제의 마지막 10년 동안을 연구 대상에서 제외했기 때문에 그의 자료는 결함을 갖고 있다는 여러 근거에서 모르네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계몽사상가 루소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제의 지하문학 세계>는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이 남겨놓은 틈새를 메우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틈새를 메우기 위해 단턴은 단순히 통계 자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한 텍스트 분석이나 상징의 해석도 함께 시행하고 있다. 이 책이 1983년 미국 최우수 도서상의 후보에 올랐던 사실은 책의 출판과 관련된 문학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실존의 모습들을 포괄적으로 그려내려 한 새로운 시도에 주어진 합당한 평가일 것이다.

 

 

 

 

3. 새로운 역사학으로서 <고양이 대학살>


그러나 정작 역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학자로서 단턴의 모습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저작은 <고양이 대학살>이다. <구체제의 지하문학 세계>에서 "계몽사상의 밑바닥"과 그 "지하의 세계"까지 침투하려고 한 시도가 아무리 참신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고양이 대학살>에서 "계몽사상의 시대에 계몽되지 못했던 사람들의 정신 세계"까지 되찾으려던  노력이 갖는 선구적인 전망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이류급, 삼류급 작가들의 밑바닥 세계를 넘어 이 책에서는 대다수가 문맹이었던 농민과 노동자들이 18세기의 프랑스에서 생각하며 살아가던 방식을 복원시키려는 시도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여섯 편의 논문으로 구성된 이 책은 발간되었던 1984년에 선정 역사학 부문 최우수도서상을 받는 등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 논문들은 18세기의 프랑스라는 시간적, 공간적 공통점 이외에는 각기 동떨어진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농민들의 민담, 파리의 한 인쇄소에서 벌여졌던 고양이 죽이기 소동, 몽펠리에(Montpellier) 시의 한 부르주아 주민이 쓴 도시 설명서, 서적 검열 담당 경찰 수사관의 조서, <백과전서>의 서문, 한 시민의 서적 주문서 등등 역사책을 쓰기 위한 좋은 문서라고 볼 수 없는 자료를 이용하여 쓴 여섯 편의 글들은 서로간에 연관성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그 내막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 논문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서로를 보충하거나 혹은 한 사물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 글들은 하나의 책을 이루기에 충분한 일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제1장의 농민들의 민담과 제2장의 직공들의 이야기는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밑바닥 층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던가를 말해준다. 농민들의 민담과 직공들이 전래의 관습을 이용하여 고양이 죽이기 소동을 벌이고 그것을 "복사"라는 이름으로 흉내를 내며 즐거워했던 사실은 어떻게 혁명까지 이르지 않으면서도 '작은 사람들'이 '큰 사람들'에 대해 저항할 방편을 제공하였는가를 보여준다. 한편 제3장의 부르주아는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해 정반대의 관점에서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다. 스스로 귀족층에 편입하는 것은 열망하면서도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의 경계를 침투하던 것에 대해서는 위협을 느끼고 경계하던 평범한 부르주아의 모습에서 우리는 제2장의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에 대해 느꼈던 반감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만족스럽게 자신의 도시에 애착을 느끼며 몽펠리에의 안내서를 서술하였던 그 부르주아의 여망은 현상 유지에 있었을 것이다. 제4장의 주인공으로서 서적과 저자들을 감시하던 경찰 수사관의 목표도 종교와 왕정에 위협이 될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왕국을 지탱시키려는 현상 유지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보던 바의 세계는 제3장의 부르주아가 보던 것과는 달리 모호한 정신의 영토에 있었고 명확한 정체도 파악할 수 없는 지식인의 세계였다. 그 경찰 수사관은 '지식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개념도 정의도 갖지 않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시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 한 계층으로 그들이 서서히 등장하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것이 지식인들에 대한 외부의 관점이었다면, 제5장에서는 지식인들 내부에서 그들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던 자신들의 사명감과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백과전서>의 서문과 지식의 나무에 대한 정교한 분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경찰 수사관에게 지식인들의 정체가 아무리 모호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와 디드로(Denis Diderot) 같은 계몽사상가들에게 있어서 지식인들의 역할이란 군주제의 이론적 존립 근거를 제공한 기존의 계시 종교의 악폐를 일소하는 진보적인 추진력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당위였고, 그들은 그 목적을 위하여 때로는 모순적으로 보이는 모든 논리를 동원하였다. 제6장에서는 한 시민이 남겼던 서적 주문서의 분석을 통하여 독자들이 루소에 대해 반응하던 방식을 설명한다. 전반적으로 그것은 책을 통하여 저자와 지식인들의 영향력이 사회 전체에 점차 크게 자리잡던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제5장과 제6장은 맥락을 같이하고 있지만 그 접근 방식에서는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즉 제5장이 이른바 텍스트 분석을 통하여 텍스트의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의 통일성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면, 제6장은 그 텍스트를 독자들이 어떻게 읽었는가를 추적하여 그 의미가 어떤 방식으로 다양하게 전달되었는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여섯 편의 논문들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유기적인 관련을 맺으며 18세기 프랑스의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제2장의 고양이 죽이기 소동을 예로 들어 단턴의 접근 방식이 왜 새로운 종류의 역사학인지 이야기해보자. 1730년대 파리의 한 인쇄소에서 벌어졌던 고양이 때려잡기 소동을 니콜라 콩타(Nicolas Contat)라는 인물이 기록으로 남겼고, 단턴은 그것을 입구로 하여 18세기 노동자들의 정신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먼저 그 소동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자.

 


기록자인 콩타 자신을 허구화한 인물로 보이는 제롬과 레베이예라는 두 명의 견습공은 고된 삶을 살았다. 그들은 더럽고 추운 방에서 잤고, 학대를 받으면서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들은 고양이에게 주어도 거절당하는 음식을 먹어야 했다. 주인들에게 환대 받던 고양이들은 밤이면 견습공들의 침실 지붕 위에서 울어대 그나마 부족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이 견습공들은 복수를 모의했다. 흉내를 잘 내는 레베이예가 주인의 침실 지붕 위로 올라가 고양이 울음을 흉내냈다. 며칠 동안 이런 처사에 시달리며 잠을 자지 못하던 주인은 마침내 고양이를 죽이라고 견습공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단 여주인이 총애하던 고양이인 그리스만은 놀라지 않게 하라는 당부를 곁들였다. 그러나 견습공들은 그리스부터 시작하여 모든 고양이들을 때려잡고, 모의재판을 벌이며 고양이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소동을 안 여주인이 나와 보고 기겁을 했다. 직공들은 주인집에 대한 존경심이 너무 커서 그리스에게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뒤늦게 나온 주인은 단지 직공들이 일을 하지 않는 것에 화를 냈다. 여주인은 단순한 태업 정도가 아니라 주인집과 여주인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주인에게 설명할 방도가 없다. 주인과 여주인은 물러가고, 그들은 남아서 무질서와 환희 속에 즐겼다. 그 뒤에도 인쇄공들은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마다 이 모든 장면을 "복사"라고 불렀던 무언극으로 재생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그들은 환희에 빠져들었다.

 


단턴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이 소동에 대한 기록을 통해 18세기 노동자들의 의식을 복구시키려했다. 그의 시도가 어떤 점에서 새로운 종류의 역사학을 구현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간략하게라도 그가 극복하려고 혹은 해체하려 했던 전통적인 역사학의 모습을 살피고 대조해 보아야 한다.

 


객관적인 사실의 세계를 전문적으로 탐구해야 할 필요성과 방법론을 확립시킴으로써 역사학의 이론적 기반을 확립시켰던 사람들은 19세기의 역사주의자들이었다. 랑케(Leopold von Ranke),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 리케르트(Heinrich Rickert), 딜타이(Wilhelm Dilthey)등 역사주의의 확립에 공헌한 역사가나 역사철학자들은 주지하듯 방법․목적․대상 등에 있어서 역사학의 고유성을 논리적으로 확립시킴으로써 역사학을 학문의 한 분야로서 존경받을만한 위치로 격상시킴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랑케는 사실의 객관적 탐구라는 원리를 정립하여 역사학에 실증적인 방법을 정착시켰다.

 


역사가의 임무란 사실을 "과거에 있었던 그대로" 기록함으로써 "사실이 제 스스로 말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말은 가장 유명한 랑케의 말이다. 랑케가 그 말을 했던 이유는 모든 시대가 신의 입장에서는 동등하고 따라서 인간의 지혜로서 어떤 판단을 내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모든 시대는 신에 직결"되어 있고, 각 시대는 "영원으로부터 같은 거리"로 떨어져 있다. 각 시대는 그 자체의 독자적인 가치와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서 있는 그대로 파악되어야 한다. 역사가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판단은 여기에 개입되지 말아야 한다.

 


그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엄정한 사료의 비판에 근거하여 원사료를 엄밀하게 연구하는 것이다. 역사가는 사료의 진위를 가리고, 그 내용의 신뢰도를 측정한 다음 자신의 감정이나 신념 같은 것들을 소거하여 개별적인 과거의 사실에 도달해야 한다. 그런 한편, 그 개체에 대한 사랑이 단편적인 사실들을 무의미하게 쌓아놓은 것에 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역사가는 "보편을 향해 눈을 열고 있어야 한다." 랑케는 "특수한 것으로부터 보편적인 것으로 나갈 수 있고, 보편적인 이론으로부터는 특수한 것을 볼 수 있는 길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개별적 사실들을 인과적 연관성에 의해 파악하여 그것으로부터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질서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방식으로 역사학은 랑케에 의해 과학성을 얻게 되었다.

 


랑케의 이런 생각은 그의 국가관에 반영되고 있다. 그는 각 국가마다 고유의 특징과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므로, 독일이 프랑스식의 혁명 이념을 받아들이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독일의 특색을 다원주의에서 찾으며 "각 민족은 그 자신의 고유한 정치를 갖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독일인의 과제는 독일 민족 정신과 일치하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그는 독일이 갖는 지방분권적인 성격을 옹호하긴 했지만, 그것을 국가의 권력보다 앞세우지는 않았다. 단적으로 랑케와 그의 후계자들은 국민국가의 역사가 연구의 중심 대상이라고 확신했다.

 


랑케의 사학은 19세기 후반에 막강한 파급 효과를 지니며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으로 전파되었다. 많은 역사가들이 "과거에 있었던 그대로"를 되뇌며 과학화된 역사학의 규범을 따르려 했다. 사료 비판을 위한 세미나의 방식은 여러 나라의 대학원에서 정규적인 수업법으로 채택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국가'가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비록 이념적, 학문적 진영이 다르다 할지라도 국가가 역사 속에서 갖는 역할이 역사학의 중요 주제로 부각된 것이다. 민족주의 사학이 역사 속에서 민족국가의 표상을 찾고자 했던 것에 못지 않게, 실증주의 사학은 실증의 이름 아래 외교사와 정치사에서 국가 권력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 주력했다.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며 줄여 말해, 랑케에 따르면 역사학이란 '객관적 진리'를 찾는 학문이며, 그 방법에 있어서는 제도화된 규범을 따라야 하며, 그것을 통해 연구해야 하는 것은 '국가'와 같은 거대한 체제에 대한 '보편사'라는 것이다.

 


단턴은 랑케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학에 대한 정의의 대부분을 전도시키고 있다. 먼저 단턴은 '제롬'과 '레베이예'라는 실명을 가진 노동자들을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국가는 물론이거니와 국왕이나 위대한 정치가를 통해 보편사를 쓰는 것을 목표했던 랑케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우연히 우리에게 이름이 남겨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권력 구조나 지배 관계를 살피려고 한 이 시도는 이른바 소우주를 통해 대우주를 엿보려 하는 '미시사(微時史)'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 대상의 설정은 계속 문제를 발생시킨다. 일회적이고 별로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이 소동을 통해 어떻게 노동자들의 문화로 침투한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단턴은 역사학의 제도화된 규범을 넘어 민속학, 인류학, 문학비평 등 인접 학문에서 자유로이 도움을 요청한다. 그는 사회사가들이 꼼꼼하게 복원시켰던 인쇄공들의 생활상은 물론 민속학자들이 밝혀놓은 민속 속에서 대중의례와 고양이가 갖는 의미를 고양이 죽이기 소동의 배경으로, 즉 컨텍스트로, 설명하면서 그 틀 속에 인쇄소에서의 소동을 위치시킨다. 이것은 상징인류학자인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가 말하는 '두꺼운 묘사'(thick description)의 뛰어난 예이다. 이를테면, 고양이를 비롯한 짐승을 학대하는 행위는 유럽의 전역에 널리 퍼져있었고, 단턴이 말하는 고양이 죽이기 소동 역시 외견적으로는 그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껍데기(기표)에 담긴 내용(기의)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 두꺼운 의미의 층위로 파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상징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일회적인 그 소동은 문학비평가들이 말하듯 담론의 질서 속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일회적인 소동은 노동자들의 정신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훌륭하게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단턴은 원래의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읽기를 시작한다. 왜냐하면 컨텍스트에 대한 지식을 얻고 난 다음에 읽는 텍스트는 새로운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렇게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에 일종의 변증법이 이루어지며, 텍스트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달라진다. 단지 문학적인 표현에 불과하리라고 여겼던 '마녀' '사바트'와 같은 단어들은 물론, 노동자들이 고양이에게 가했던 모의재판과 같은 것들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다가오게 된다. 그리하여 단턴이 도달하게 된 결론에 따르면, 고양이 대학살이란 노동자들의 주인에 대한 상징적인 공격이었다는 것이다. 즉, 노동자들은 고양이 죽이기라는 정교한 의식을 통하여 주인들을 조롱하고 비난하였으며 유죄라고 판결하였다는 것이다. 그 죄란 주인들이 인쇄업 초기의 목가적인 '공화국'을 떠나 다른 세계로 물러가면서 인쇄소의 직공들을 혹사시켰다는 죄이다. 궁극적으로 단턴은 그 소동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객관적 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턴 스스로가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또 하나의 허구(fiction)일 것이다. 그는 각 논문마다 그가 해석한 텍스트를 부록으로 첨부하였다. 그 목적은 "독자들이 나름대로 해석하여 나와 견해를 달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렇듯 단턴은 문학적 방식을 통한 접근이 역사학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입증하고 있다.

 


이렇듯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은 19세기 이래로 역사학이 안주해왔던 규범을 하나하나 해체시키며 새로운 역사학의 한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그에 더해 단턴의 시도가 갖는 의미는 역사학의 자료를 확대시키고 그 서술의 방식을 문학적으로 실험할 토양을 마련하여 역사서술이 풍요롭고 다양하고 흥미로워질 수 있는 하나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4. 논쟁과 학문 공동체


새로운 시도에는 언제나 비판이 뒤따른다. 그것은 새로운 시도에 대한 기존 전통의 반발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새로운 만큼 허점이 많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고양이 대학살>이 출간된 다음 해인 1985년 미국의 시카고 대학교에서 발간한 <현대사 잡지>(Journal of Modern History)에는 '역사가들 중에서 이론적으로 가장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로제 샤르티에(Roger Chartier)의 신랄한 비판이 실렸다.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현대사 잡지>는 몇 년에 걸쳐 <고양이 대학살>과 관련된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1986년에는 샤르티에의 비판에 대한 로버트 단턴의 반박 논문이 실렸고, 1988년에는 커넬 대학교의 도미니크 라카프라(Dominick LaCapra)와 시카고 대학교의 제임스 페르난데즈(James Fernandez)가 각기 그 논쟁에 대한 장문의 논평을 기고했다.

 


샤르티에는 단턴이 프랑스 역사학계의 경향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제시하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단턴의 해석이 갖는 문제점을 장황하게 열거하였다. 샤르티에의 여러 비판 중 본고에서 예를 든 제2장과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이 압축될 수 있다: '단턴은 고양이 죽이기가 부르주아에 대한 상징적 공격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는 상징은 엄밀하게 개념 정의가 내려지지 않았다. 그는 클리포드 기어츠를 따라 "개념 전달의 수단이 되는 모든 물체, 행위, 사건, 특성, 혹은 관계"라고 규정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포괄적인 정의라서 오히려 효용성이 의심된다. 더구나 18세기초 프랑스에서 발간된 앙투안 퓌르티에르(Antoine Furti re) 사전을 보더라도, 표상(representation)을 포함하는 상징(symbol)은 단순한 기호(sign)와는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상징의 개념을 엄밀하게 사용해야 한다. 상징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며, 따라서 그 의미는 그 전달의 과정에서 다중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턴은 18세기 초 파리에 일관성이 있고, 폭넓은 공감대를 갖고 있는 통일적인 상징 체계에 의해 규정되는 인쇄공의 문화가 존재한다고 상정했다. 18세기 프랑스 사회는 연령, 성별, 지위, 직업, 종교, 주거지역 등등에 따라 단턴의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하게 분기된 복잡한 사회였다.' 궁극적으로 샤르티에의 비판은 단턴이 니콜라 콩타가 남긴 기록을 투명한 텍스트로 생각하면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으로서, 그 글을 남길 때 집필자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 동시대인의 입장에서 더 심도 깊게 파악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단턴은 샤르티에의 상징 개념을 문제 삼는다. 샤르티에가 상정하는 상징이란 18세기의 앙투안 푸르티에르 사전에서 제시한 "사자는 용감성의 상징이다"라는 예에서 보이는 것처럼 기표와 기의 사이의 직접적인 "표상의 대응관계"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턴은 지적인 엘리트에 의해 단어에 부여된 의미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18세기의 사전이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문맹의 노동자들 사이에 퍼져있던 상징의 개념을 알기 위한 "원주민 정보제공자"의 역할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단턴은 샤르티에의 논지를 조목조목 반박한다기보다는 역사 속에서 상징이 이용된 여러 경우를 열거함과 동시에 고양이 죽이기 소동의 기록을 다시 검토하고 해석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가 도달한 결론은 상징에는 다중성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징을 이용하는 의식(儀式)은 이미 정해져 내재화된 제약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식의 행위들은 고정된 유형은 물론 이미 정해진 범위의 의미를 따른다. 그러나 모든 참가자들이 의식에서 모든 의미를 모두 똑같이 얻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가 하는 일은 그 의미의 범위를 탐색하고,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그 의식을 이용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가능한 한 정확하게 그 범위의 윤곽을 그리는 것이다.

 


상징의 개념이 모호하다는 샤르티에의 비판에 대해 단턴의 오히려 그 상징의 의미는 확실하다고 대응한다. 그러한 반박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단턴이 예로 들고 있는 역사 속의 상징적 요소까지 찾아볼 필요도 없다. 단턴은 샤르티에에 대한 반박 논평의 초두에서 그가 보았던 조그만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 도서관 C층 구석의 개인 독방 문 앞에 "피지 $499"라는 신문의 광고 문안이 붙은 것을 보았다. 그것은 기호이다. 그 내용은 피지까지 왕복 비행기 요금이 499달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상징적 의미는 다르다. 그것은 한겨울 도서관의 폐쇄된 개인 독방에서 논문을 쓰며 골머리를 앓고 있는 학생이 "나는 이곳으로부터 탈출하고 싶다. 공기, 태양, 더 많은 빛을 다오!"라고 외치고 있는 농담처럼 보인다. 다른 여러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독방이란 학생이 논문을 쓰기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고투하는 장소이며 프린스턴의 겨울은 축축한 수의처럼 학생들에게 드리워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 그 광고 문안의 상징적 의미는 명백하다.

 


이렇듯 신랄하게 서로의 논지를 논박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단턴과 샤르티에는 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 둘은 절친한 친구이자 학문적인 동료이다. 단턴은 샤르티에가 재직하고 있는 사회과학고등연구소(EHESS)에 세 차례에 걸쳐 객원교수로 초빙되었으며, 샤르티에가 편집한 여러 책에 논문을 기고하기도 하였고, 그 둘은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와 함께 문화사의 전망을 논하는 대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논쟁을 통하여 상대방의 장점을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논지를 더욱 세련되고 강력하게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동일한 학문 공동체에 속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그런 풍토는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다.

 

 



5. 경계를 넘나드는 로버트 단턴


로버트 단턴은 여러 가지로 경계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미국 태생으로서 1968년 이래 프린스턴 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그는 한 나라의 울타리를 넘어서, 학문의 국제화를 개인 속에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71년 파리의 사회과학고등연구소 객원교수로 유럽에 상주하였던 것을 시작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는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지의 연구소나 대학교에서 연구 책임자나 학술지의 편집인, 혹은 객원교수와 명예교수로 활약하며 유럽에 머물렀던 기간이 미국에서 활동하던 시간보다 더 길었다. 그것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서적과 서적유통이 갖는 의미를 주요 연구 대상으로 하였던 그의 저서들이 다소간 협소하게 보이는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초월하는 공감을 얻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가 명망 높은 "국제18세기학회" (International Society for Eighteenth-Century Studies)에서 1983년부터 1987년까지는 부회장을 1987년부터 1991년까지는 회장을 역임하였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는 다니엘 로슈(Daniel Roche), 미셸 보벨(Michel Vovelle) 등의 프랑스 역사가들과 책을 공동으로 편집하거나 집필하기도 하였으며, 유럽 여러 나라에서 발간되는 학술지의 편집진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11개국 언어로 번역된 <고양이 대학살>을 필두로 그의 책들은 여러 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되어 있다. 그는 주로 영어로 글을 쓰지만 불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등으로 씌어진 그의 책이나 논문의 일부가 아직도 영어로 번역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를 단순히 미국의 프랑스사가로 간주할 수만은 없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그는 역사학 내부의 영역들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앞서 소개한 초기의 저작으로 출발하여 <고양이 대학살>을 거쳐 <라무레트의 키스>(The Kiss of Lamourette:  Reflections in Cultural History, 1990), <출판과 선동: 18세기 비밀 문학의 세계>(Edition et s dition: L'Univers de la litt rature clandestine au XVIIIe si cle, 1991), <혁명 이전 프랑스의 금서 베스트셀러>(The Forbidden Bestsellers of Pre-Revolutionary France, 1995), <프랑스 비밀문학 대계>(The Corpus of Clandestine Literature in France 1769-1989, 1995) 등에 이르기까지 그의 주요 저서들에 관통하고 있는 주제가 있다. 그것은 '관념의 사회사'라고 말할 수 있다. 지식의 보고인 책을 대상으로 설정한 그의 연구는 전통적인 사상사나 관념사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의 내용보다는 대량 인쇄의 문화와 서적 유통의 역사가 대중의 여론을 형성함에 끼친 영향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회사에서 주로 사용하는 통계적 방법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있는 그를 종래의 사상사가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는 '관념의 사회사'를 실행하고 있는 역사가이다. 그의 접근 방법을 통해 계몽 사상의 고급 문화가 '밑으로' 전달한 영향력뿐만 아니라 '밑에서' 만들어진 영향력이 프랑스 혁명 이전의 사회에 작용하던 방식이 연구될 수 있는 한 통로가 뚫리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학의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그에게 있어서 연구 대상 사이의 경계도 모호하게 만들었다. '밑에서' 만들어진 영향력도 '밑으로' 전달된 영향력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라면, 새롭게 부각되어야 할 연구의 대상은 민중의 삶과 그들이 영향력을 만들어가던 방식임이 확실하다. 이리하여 단턴은 <고양이 대학살>에서 밑바닥에 사는 사람들도 "철학자만큼이나 지성적일 수 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농민과 노동자가 어떻게 그들에게 전승된 문화를 전유하며 외부의 세계에 대처하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민중의 문화가 귀족들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던 길도 있었음을 논증함으로써, 고급문화와 민중문화의 구분도 임의적일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더구나 같은 책 속에서 그는 '백과전서파'로 대변되는 계몽사상가들이 <백과전서>의 집필을 통해 기존의 체제를 변혁시키려던 방식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민중들의 사유체계와 사상가들의 정신세계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은밀히 보여주려 하고 있다. 그것은 <혁명 이전 프랑스의 금서 베스트셀러>에서 그가 밝힌 바, 금서는 여론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사건의 의미는 철학자들의 저작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의사 소통망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결론과 유사하다.

 


그러나 민중의 정신세계를 복원시킨다는 작업은 그들에 의한, 그들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다는 이유에서 실제적인 난관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단턴은 인접 학문 분야에서 도움 얻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 결과 단턴은 역사학과 타학문 사이의 경계까지도 흐리게 만들고 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의 선배이자 동료 교수인 클리포드 기어츠로부터 배운 상징인류학의 방법이나 민속학의 방법을 거리낌없이 사용하여 농민들의 민담이나 노동자들의 고양이 죽이기 소동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두껍게' 캐내고 있고,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로부터 얻은 영감을 이용하여 달랑베르의 글을 분석하기도 하며, 문학비평의 이론을 원용하여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를 오가며 사소한 역사적 자료로부터 중대한 의미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최근 그의 연구 작업이 포르노그라피를 비롯한 금서와 그것의 검열에 관계되는 문제들에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은 지식/권력/담론 사이의 불가분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현금 인문학계의 전반적인 동향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97년 그가 미국 역사학회의 회장으로 피선된 것은 그러한 선구적 업적에 대한 정당한 평가일 것이다.

 


그의 경계 흐리기 작업은 하나의 중심적인 논리, 혹은 거대한 논리를 무너뜨리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 전략과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위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을 서술 대상으로 삼고,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오만한 자세를 유지했던 역사학이 다른 학문으로부터 기꺼이 배워야 한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인 그의 태도는 종래의 역사학과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것은 린 헌트(Lynn Hunt),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 카를로 진즈부르그(Carlo Ginzburg) 등 이른바 '신문화사'의 주창자들이 내세우는 논지와도 일치하고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의 여러 층위를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그들의 시도가 궁극적인 성공을 거둘지 아직은 예측하기 이르지만, 그들로 인하여 이미 역사학이 풍요롭고 흥미로워졌다는 사실은 그 전도가 유망함을 가리키고 있다.

 


3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일관적인 주제를 천착하며 역사가로서 중요한 업적을 쌓고 명성을 올린 로버트 단턴은 행복한 학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책이라는 매체를 통한 의사 소통의 구조'라는 그가 선택하였던 연구 주제가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서 지속력을 가지며 새로운 의미를 계속 창출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보의 시대'라고 일컫는 오늘날 그러한 역사가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 단턴은 미국 역사학회의 회장으로서 2000년에 행한 연례 연설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새로운 세기에 역사학이 나아가야 할 바를 진지하게 고려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경청해야 할 것이다.

 


2000년의 문간에 서니 새로운 밀레니엄의 길은 실리콘 밸리를 통과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정보의 시대에 돌입하였고, 미래는 미디어에 의해 결정될 것처럼 보입니다. 실지로 어떤 사람들은 현대 세계의 추진력으로서 의사소통의 양식이 생산 양식을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하곤 합니다. 저는 그 관점을 논박하고 싶습니다. 그 주장은 예언으로서 가치를 가질지는 몰라도 역사로서 작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늘날이 과거와 결별하고 있다는 그럴싸해 보이는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모든 시대가 나름의 방식을 갖고 있는 정보의 시대였으며, 그 의사 소통의 체계가 언제나 사건을 결정해왔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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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도반 2006-12-05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 대학살』의 번역자인 자신의 이야기를 서두로 삼아,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의 저작들의 주요 내용과 그에 따른 논쟁들, 단턴의 학문적 삶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좋은 글이다.

출처는 http://home.knue.ac.kr/~hocho/board/wwwboard.cgi?db=lecture&mode=read&num=204&page=8&ftype=6&fval=&backdepth=1이다.
 

2001년 9월 15일 충북대학교에서 있었던 호서사학회의 논문발표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사회사와 신문화사


 최근 신문화사와 관련된 저작이 여러 권 출판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전반적으로는 국내의 사학계에 불고 있는 "새 바람"으로 반기는 분위기에서 그 책들이 받아들여졌지만, 신문화사가 갖고 있는 시각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에서 비롯된 따끔한 지적도 없지 않았다. 물론 그 비판은 신문화사가 "넘어서려" 하였던 사회사의 방법론을 고수하는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경우가 많았다. 그 비판 중의 일부는 신문화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경청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있고, 다른 일부는 신문화사의 논지에 대한 오해에서 출발한 것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창하게 내세운 제목과는 달리 본고는 사회사와 친화력을 갖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비판 중 신문화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할 몫과 근본적인 오해에 연유하는 몫을 구분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는다. 물론 그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사와 신문화사 사이의 건전한 상호 이해나 상호 비판이 역사학 자체에 가져다 줄 건설적인 효과를 증진시키려 함에 있다.

 


 첫 번째로 제기되는 신문화사 주창자들의 주장에 대한 비판은 그들이 사회사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희생양 만들기 식의 논리"에 빠져들어가지 않았는가 하는 지적이다. 한국 근대의 민족운동을 연구하였던 대구대학교 사회학과의 김영범 교수의 그런 지적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 아날학파에 대한 연구서인 『아날학파의 역사세계』를 최근에 출간시켰던 충남대학교의 김응종 교수의 비판이다. 그는 그 책의 머리말에서 지난 10년 동안 아날 학파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모던' 역사학으로 밀려나고 말았다고 탄식한다. "'새로운' 역사학은 속죄양을 필요로 하며 '낡은' 역사학을 단순화시킨다. 이제는 어제의 '새로운' 역사학을 책임지고 있던 아날학파가 그런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김기봉 교수가 브로델을 단순화시켰고 곽차섭 교수가 아날학파와 전체사를 동일시한 결과로 나타난 현상일 뿐, 아날 학파는 브로델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아날학파가 아니라 아날학파들이 있으며, 브로델이 아니라 브로델(들)이 있는 것"이기에 아날학파 역시 그 역사가들의 다양성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있다.

 


 신문화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사회사나 아날학파를 단순화시킨 것은 확실하다. 아날학파는 변모를 거듭하며 문제의식을 확장시켜 나갔다. 전수연 교수가 지적하듯 "변화는 변함없는 아날의 명제"였으며, "인간 삶의 모든 양상과 그 상호작용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전체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브로델은 페브르와 블로크를, 르 루아 라뒤리 등은 브로델을 넘어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화사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아날학파가 지리적 결정론이나 인간이 매몰된 구조주의인 것으로만 인식되도록 사람들을 오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본인이 집필한 『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의 경우에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즉, 신문화사의 출현 배경으로서 사회사를 넘어서야 한다는 과제를 설정하고, 사회사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아날학파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만을 상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지 이거스가 상세하게 밝혀놓았듯, '사회사'라고 이름할 수 있는 영역에는 프랑스의 아날학파와 마르크스주의 역사과학 이외에도 '독일의 사회경제사'와 '역사사회학', '미국의 사회사 전통', 서독의 '역사적 사회과학'과 같은 조류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신문화사나 미시(문화)사의 출현과 그 이론적 뒷받침을 설명하는 책에서 그것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상정된 사회사는 어느 정도 단순화되어 설명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그 약점이 부각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전략적인 필요와 책의 분량을 고려해야 한다는 실제적인 상황에 의해 촉발된 것일 뿐, 엄정하게 학문적인 태도는 아닌 것으로 비쳐진다. 그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처럼 다양하게 변모해간 아날학파나 사회사가 어떤 단계에서 그런 변화의 과정을 겪었는가를 이해하고, 그 변화의 계기가 신문화사의 등장과는 어떤 맥락에서 관련을 맺는지 파악하려 할 때 오히려 신문화사는 진정 사회사를 '넘어서는' 대안으로서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의 비판은 신문화사가 별로 새로울 것이 없지 않은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교수신문』에 의해 "역사학의 신조류 신문화사--사회사의 보완인가 새로운 대안인가"라는 기획 대담이 있었고 거기에서 본인은 신문화사를 대변한 일이 있었다. 그 대담에서 사회자는 "신문화사가 주장하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이미 사회사가들이 갖고 있던 문제의식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역사학은 무엇이 새로운지에 대한 문제제기도 가능하지 않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졌고, 사회사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선정된 이영석 교수는 그에 대해 "평민이나 하층민의 삶에 대한 연구는 신문화사가 등장하기 전부터 시도된 것 아닙니까?구조를 특권화하는 오늘날의 사회사와는 거리가 있지만, 태동기의 사회사 연구에서는 이미 사회적 일탈자나 여성, 특수집단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여성사 분야를 제외하면, 신문화사의 스펙트럼 내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습니다"라고 답하며 신문화사에 별로 새로운 것이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런 비판은 김영범 교수에 의해 더욱 신랄하게 바뀐다. 그는 신문화사가 미국에서 뒤늦게 등장해서 오히려 새롭게 보이는 것일 뿐, 넓은 의미의 신문화사적 방법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각국 고유의 지적 풍토와 문화적 조건을 매개로 형성되어 점차 파급, 확장되어왔다고 논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문화사는 이미 오래 전에 아날학파 또는 '사회과학적 역사학'의 구조적 패러다임과 경합하기 시작했던 것인즉, 그 '새로움'은 지나치게 과장된 게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문화사의 대극에 '사회사'가 세워질 때 그 정체성이랄까 의미는 일관성도 없고 두루뭉수리로 매겨지면서 많은 혼란과 오해를 유발하고 있다"고 자신의 논지를 연장시키며, "향후 역사학의 바람직한 진로가 '아래로부터의/밑으로부터의 역사'가 내세워졌을 때, 그것은 사회사에 속하는가 아닌가?"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거의 대부분의 주장이 그러하듯 이 두 번째의 비판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신문화사에서 말하는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출발시킨 것이 사회사인 한, 신문화사가 하나의 거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사에 새롭게 제시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역사를 보는 방식이나 접근 방법을 새롭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즉 통계에 의존한 수치의 해석보다는 미시적인 자료에 대한 상징적 해석을 통해 역사의 실체에 다가서려 하였다는 점에서 그것은 종래의 사회사와는 다르다. 신문화사가 사회사와 비교하여 새로운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위상에 따라 달리 정해질 수 있는 상대적인 문제일 것이며, 미국에서 뒤늦게 나왔기 때문에 오히려 새롭게 보이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역사학계에서 그런 경향이 뒤늦게 나왔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의 사실적인 확증은 차치한다 할지라도, 미국의 학계에서 그 여러 경향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신문화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확실하다. 그렇듯 여러 가지 경향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새롭게 정의를 내렸을 때 그것이 새로운 시도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 역시 신문화사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친근하게 혹은 소원하게 느끼는가 하는 정도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실로 이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해질 소지를 안고 있다. 그것은 김영범 교수가 말하듯 미국의 신문화사가 존재하기 오래 전부터 각국의 다양한 종류의 '신문화사'가 아날학파나 '사회과학적 역사학'의 구조적 패러다임과 경합을 벌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를 진술했을 때, 그것이 오늘날의 신문화사가 나아가려는 방향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사가인 라파엘 새뮤얼은 '사회사'가 무엇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는가를 꼽고 있다. 그가 꼽은 대상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속한다. '가정 생활의 본질', 추상적인 것보다는 실제적인 생활, 특권적인 엘리트보다는 '보통' 사람들, 센세이셔널한 사건보다는 평상적인 일, 하부 문화, 군중 심리, 성(性)적 정체성, 영화, 팝 아트, 등등. 이러한 목록은 오늘날 신문화사에서 다루려 하는 대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바로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신문화사와 사회사의 관계를 상호배제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논법은 이제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김영범 교수의 논지가 갖는 설득력은 배가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같은 문제에 대해 사회사의 측면에서 출발하는 사람과 신문화사에서 출발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접근 방식과 문제 의식에 대한 정밀한 비교분석이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문화사에 대해 제기되는 세 번째의 비판은 우리 나라의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앞서 언급하였던 대담에서 이영석 교수는 "한국사회는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가 공존하는 사회"이며, "위기와 고난으로 점철된 시간대를 통과해 오면서 우리세대의 역사가들은 자연스럽게 무겁고 견고한 근대성에 집착"했다고 언급하였다. 그러한 인식의 논리적 귀결점은 다음과 같다: '이른바 신문화사에서 주장하는 논지에는 공감이 간다. 그렇지만, 식민지 지배와 분단의 현실을 겪은 우리에게는 아직도 민족이나 계급과 같은 거대 담론이 제기하는 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은데, 이미 그런 문제를 해결된 혹은 한물 간 것이라고 치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학 및 그와 맥락을 같이 하는 신문화사를 우리가 적극적으로 수용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이 아닌가?' 확실히 이것은 신문화사를 수용하려는 사람들로서 경청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김영범 교수는 "신문화사가 거대담론을 너무 쉽게 비판만 한 것이 아닌가 자문하고, 거대담론을 다시 포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를 원하는 본인의 책의 논지에 공감하면서도 그 논의가 진지한 문제제기로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이 모든 문제는 신문화사가 사회사를 대체하는 패러다임인가 아닌가 하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문화사가 등장하였다고 해서 사회사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김기봉 교수가 제기하였듯 우리의 역사에서 '부드러운' 근대를 통해 개화기 한국인들의 한 단면을 들여본다고 하여, 그것이 '단단한' 근대에 대한 연구의 가치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실지로 사회사의 성과가 축적되어있지 않을 경우 신문화사적인 자료의 해독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신문화사에서 제기하는 문제점들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우리의 근대사에 있어서도 기존 사회사의 방식으로는 들여다 볼 수 없는 문제점들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며, 그에 따라 새로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서발턴, 혹은 하위주체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식민지 경험의 역사를 풀어나가려고 하는 인도 지식인들의 고민과 해결책을 잠시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어떤 역사에서건 단 하나의 해석틀이 존재한다고 상정하는 것은 역사를 보는 눈을 경직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유럽 계몽주의의 계획을 인도에 적용시키는 것을 포기한다고 하여 그것이 곧바로 이성적인 시도를 포기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풀이하여 말한다면, 서양에서 해체주의의 등장이 이성의 지배에 대한 반발로 싹이 텄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여성의 문제와 봉건적 가족 구조의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서발턴 연구가 서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성의 포기와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 그 논리를 적용시킨다고 하면, 신문화사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민족과 통일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새로운 틀 속에서 조명하려는 시도라고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사회사와 신문화사의 '대립'이라는 것은 실제보다 훨씬 크게 포장된 경우가 많고 그것에 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은 저널리즘이 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때로는 이야기 거리를 창출하거나 논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기자들은 과장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지로 앞서 언급하였던 대담에서도 실상 본인과 이영석 교수 사이에서는 대립이라기보다는 공감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이영석 교수가 "엄밀성보다 문학성 뛰어난 문화사학자"라고 본인을 표현하고, 본인은 이영석 교수를 "참을 수 없는 사회사의 무거움을 고수하는 완고한" 학자라고 표현하였다고 기사화함으로써 사회사와 신문화사 사이에 엄청난 간격이 존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신문이 나간 뒤 이영석 교수와 본인의 통화에서 "우리가 그렇게 말했나요?"라고 서로 물으며 웃음을 터뜨렸던 일이 있었다. 그와 비슷하게 전국역사학대회의 포스트모더니즘 패널을 취재(?)한 『한겨레신문』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몇 년 동안 신문화사의 끊임없는 '싸움 걸기'에 마르크시즘 역사학이나 프랑스의 아날, 독일의 사회구조사 같이 구조와 전체를 중요시하는 사회사 쪽은 묵묵부답이었다. 정확히는 '무시'로 일관했다." 이 기사를 읽고 김응종 교수와 본인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실로 김응종 교수가 본인의 책에서 아날학파를 단순화시킨 글을 읽고서도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했듯, 문화사를 주도하는 사람들 역시 사회사를 주창하는 사람들의 논지를 충분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사와 신문화사 사이에 "'아름다운 협동'이 이루어져서 안될 까닭이 없"으며, "신문화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은 사회사라기보다 목적론적·도식주의적 거대담론임을 다시금 분명히해둘 필요가 있다"는 김영범 교수의 제안은 타당하다.

 


 어찌 되었든, 신문화사에 대한 사회사의 비판이 제기한 교훈을 하나 제기하며 이 발표를 마감하려 한다. 본디 신문화사는 이론적인 성향이 강한 역사학의 분야이다. 반면 사회사는 그렇지 못하다. 한 저명한 사회사가가 자인하듯 "사회사는 정의 내리기보다는 방어하기가 훨씬 쉽다." 또한 "사회사를 실행에 옮기는 뛰어난 역사가들은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실천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정당하게 소비한다." 국내 사회사가들의 '무시'의 원인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사회사를 실행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그들이 사회사를 왜 하고 있고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이론적, 방법론적으로 밝힌 글을 그다지 접하지 못한 것이 본인의 과문 탓만은 아닐 것이다. 실지로 역사학은 구체적인 개별을 다루기 때문에 이론적인 연구를 경원해왔던 것이 사실이고 사회사에서는 그 경향이 더욱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론이 실제적인 연구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론적 뒷받침이 없다면 예리한 문제의식이 창출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신문화사의 '도전'에 대한 사회사의 '응전'이 단지 신문화사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사회사 자체의 목적과 대상과 방법에 대한 이론적 성찰로 이어져 더 넓은 의미에서 역사학의 발전을 위한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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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도반 2006-12-05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의 조한욱 교수는 국내 사학계에 '신문화사'를 도입한 선구적 인물이다. 신문화사 및 미시사 도입 이후 10여년 간의 결과는 공보다는 과가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한욱 선생은 예의 그 진중함으로 생산력있는 연구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글 몇 편을 올린다.

출처는 그의 홈페이지 <조한욱 교수의 서양사 이야기>이다. http://home.knue.ac.kr/~hocho/board/wwwboard.cgi?db=lecture&mode=read&num=184&page=9&ftype=6&fval=&backdepth=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