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15일 충북대학교에서 있었던 호서사학회의 논문발표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사회사와 신문화사


 최근 신문화사와 관련된 저작이 여러 권 출판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전반적으로는 국내의 사학계에 불고 있는 "새 바람"으로 반기는 분위기에서 그 책들이 받아들여졌지만, 신문화사가 갖고 있는 시각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에서 비롯된 따끔한 지적도 없지 않았다. 물론 그 비판은 신문화사가 "넘어서려" 하였던 사회사의 방법론을 고수하는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경우가 많았다. 그 비판 중의 일부는 신문화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경청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있고, 다른 일부는 신문화사의 논지에 대한 오해에서 출발한 것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창하게 내세운 제목과는 달리 본고는 사회사와 친화력을 갖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비판 중 신문화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할 몫과 근본적인 오해에 연유하는 몫을 구분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는다. 물론 그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사와 신문화사 사이의 건전한 상호 이해나 상호 비판이 역사학 자체에 가져다 줄 건설적인 효과를 증진시키려 함에 있다.

 


 첫 번째로 제기되는 신문화사 주창자들의 주장에 대한 비판은 그들이 사회사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희생양 만들기 식의 논리"에 빠져들어가지 않았는가 하는 지적이다. 한국 근대의 민족운동을 연구하였던 대구대학교 사회학과의 김영범 교수의 그런 지적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 아날학파에 대한 연구서인 『아날학파의 역사세계』를 최근에 출간시켰던 충남대학교의 김응종 교수의 비판이다. 그는 그 책의 머리말에서 지난 10년 동안 아날 학파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모던' 역사학으로 밀려나고 말았다고 탄식한다. "'새로운' 역사학은 속죄양을 필요로 하며 '낡은' 역사학을 단순화시킨다. 이제는 어제의 '새로운' 역사학을 책임지고 있던 아날학파가 그런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김기봉 교수가 브로델을 단순화시켰고 곽차섭 교수가 아날학파와 전체사를 동일시한 결과로 나타난 현상일 뿐, 아날 학파는 브로델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아날학파가 아니라 아날학파들이 있으며, 브로델이 아니라 브로델(들)이 있는 것"이기에 아날학파 역시 그 역사가들의 다양성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있다.

 


 신문화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사회사나 아날학파를 단순화시킨 것은 확실하다. 아날학파는 변모를 거듭하며 문제의식을 확장시켜 나갔다. 전수연 교수가 지적하듯 "변화는 변함없는 아날의 명제"였으며, "인간 삶의 모든 양상과 그 상호작용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전체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브로델은 페브르와 블로크를, 르 루아 라뒤리 등은 브로델을 넘어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화사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아날학파가 지리적 결정론이나 인간이 매몰된 구조주의인 것으로만 인식되도록 사람들을 오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본인이 집필한 『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의 경우에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즉, 신문화사의 출현 배경으로서 사회사를 넘어서야 한다는 과제를 설정하고, 사회사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아날학파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만을 상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지 이거스가 상세하게 밝혀놓았듯, '사회사'라고 이름할 수 있는 영역에는 프랑스의 아날학파와 마르크스주의 역사과학 이외에도 '독일의 사회경제사'와 '역사사회학', '미국의 사회사 전통', 서독의 '역사적 사회과학'과 같은 조류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신문화사나 미시(문화)사의 출현과 그 이론적 뒷받침을 설명하는 책에서 그것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상정된 사회사는 어느 정도 단순화되어 설명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그 약점이 부각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전략적인 필요와 책의 분량을 고려해야 한다는 실제적인 상황에 의해 촉발된 것일 뿐, 엄정하게 학문적인 태도는 아닌 것으로 비쳐진다. 그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처럼 다양하게 변모해간 아날학파나 사회사가 어떤 단계에서 그런 변화의 과정을 겪었는가를 이해하고, 그 변화의 계기가 신문화사의 등장과는 어떤 맥락에서 관련을 맺는지 파악하려 할 때 오히려 신문화사는 진정 사회사를 '넘어서는' 대안으로서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의 비판은 신문화사가 별로 새로울 것이 없지 않은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교수신문』에 의해 "역사학의 신조류 신문화사--사회사의 보완인가 새로운 대안인가"라는 기획 대담이 있었고 거기에서 본인은 신문화사를 대변한 일이 있었다. 그 대담에서 사회자는 "신문화사가 주장하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이미 사회사가들이 갖고 있던 문제의식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역사학은 무엇이 새로운지에 대한 문제제기도 가능하지 않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졌고, 사회사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선정된 이영석 교수는 그에 대해 "평민이나 하층민의 삶에 대한 연구는 신문화사가 등장하기 전부터 시도된 것 아닙니까?구조를 특권화하는 오늘날의 사회사와는 거리가 있지만, 태동기의 사회사 연구에서는 이미 사회적 일탈자나 여성, 특수집단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여성사 분야를 제외하면, 신문화사의 스펙트럼 내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습니다"라고 답하며 신문화사에 별로 새로운 것이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런 비판은 김영범 교수에 의해 더욱 신랄하게 바뀐다. 그는 신문화사가 미국에서 뒤늦게 등장해서 오히려 새롭게 보이는 것일 뿐, 넓은 의미의 신문화사적 방법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각국 고유의 지적 풍토와 문화적 조건을 매개로 형성되어 점차 파급, 확장되어왔다고 논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문화사는 이미 오래 전에 아날학파 또는 '사회과학적 역사학'의 구조적 패러다임과 경합하기 시작했던 것인즉, 그 '새로움'은 지나치게 과장된 게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문화사의 대극에 '사회사'가 세워질 때 그 정체성이랄까 의미는 일관성도 없고 두루뭉수리로 매겨지면서 많은 혼란과 오해를 유발하고 있다"고 자신의 논지를 연장시키며, "향후 역사학의 바람직한 진로가 '아래로부터의/밑으로부터의 역사'가 내세워졌을 때, 그것은 사회사에 속하는가 아닌가?"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거의 대부분의 주장이 그러하듯 이 두 번째의 비판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신문화사에서 말하는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출발시킨 것이 사회사인 한, 신문화사가 하나의 거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사에 새롭게 제시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역사를 보는 방식이나 접근 방법을 새롭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즉 통계에 의존한 수치의 해석보다는 미시적인 자료에 대한 상징적 해석을 통해 역사의 실체에 다가서려 하였다는 점에서 그것은 종래의 사회사와는 다르다. 신문화사가 사회사와 비교하여 새로운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위상에 따라 달리 정해질 수 있는 상대적인 문제일 것이며, 미국에서 뒤늦게 나왔기 때문에 오히려 새롭게 보이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역사학계에서 그런 경향이 뒤늦게 나왔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의 사실적인 확증은 차치한다 할지라도, 미국의 학계에서 그 여러 경향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신문화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확실하다. 그렇듯 여러 가지 경향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새롭게 정의를 내렸을 때 그것이 새로운 시도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 역시 신문화사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친근하게 혹은 소원하게 느끼는가 하는 정도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실로 이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해질 소지를 안고 있다. 그것은 김영범 교수가 말하듯 미국의 신문화사가 존재하기 오래 전부터 각국의 다양한 종류의 '신문화사'가 아날학파나 '사회과학적 역사학'의 구조적 패러다임과 경합을 벌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를 진술했을 때, 그것이 오늘날의 신문화사가 나아가려는 방향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사가인 라파엘 새뮤얼은 '사회사'가 무엇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는가를 꼽고 있다. 그가 꼽은 대상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속한다. '가정 생활의 본질', 추상적인 것보다는 실제적인 생활, 특권적인 엘리트보다는 '보통' 사람들, 센세이셔널한 사건보다는 평상적인 일, 하부 문화, 군중 심리, 성(性)적 정체성, 영화, 팝 아트, 등등. 이러한 목록은 오늘날 신문화사에서 다루려 하는 대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바로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신문화사와 사회사의 관계를 상호배제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논법은 이제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김영범 교수의 논지가 갖는 설득력은 배가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같은 문제에 대해 사회사의 측면에서 출발하는 사람과 신문화사에서 출발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접근 방식과 문제 의식에 대한 정밀한 비교분석이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문화사에 대해 제기되는 세 번째의 비판은 우리 나라의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앞서 언급하였던 대담에서 이영석 교수는 "한국사회는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가 공존하는 사회"이며, "위기와 고난으로 점철된 시간대를 통과해 오면서 우리세대의 역사가들은 자연스럽게 무겁고 견고한 근대성에 집착"했다고 언급하였다. 그러한 인식의 논리적 귀결점은 다음과 같다: '이른바 신문화사에서 주장하는 논지에는 공감이 간다. 그렇지만, 식민지 지배와 분단의 현실을 겪은 우리에게는 아직도 민족이나 계급과 같은 거대 담론이 제기하는 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은데, 이미 그런 문제를 해결된 혹은 한물 간 것이라고 치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학 및 그와 맥락을 같이 하는 신문화사를 우리가 적극적으로 수용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이 아닌가?' 확실히 이것은 신문화사를 수용하려는 사람들로서 경청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김영범 교수는 "신문화사가 거대담론을 너무 쉽게 비판만 한 것이 아닌가 자문하고, 거대담론을 다시 포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를 원하는 본인의 책의 논지에 공감하면서도 그 논의가 진지한 문제제기로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이 모든 문제는 신문화사가 사회사를 대체하는 패러다임인가 아닌가 하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문화사가 등장하였다고 해서 사회사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김기봉 교수가 제기하였듯 우리의 역사에서 '부드러운' 근대를 통해 개화기 한국인들의 한 단면을 들여본다고 하여, 그것이 '단단한' 근대에 대한 연구의 가치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실지로 사회사의 성과가 축적되어있지 않을 경우 신문화사적인 자료의 해독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신문화사에서 제기하는 문제점들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우리의 근대사에 있어서도 기존 사회사의 방식으로는 들여다 볼 수 없는 문제점들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며, 그에 따라 새로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서발턴, 혹은 하위주체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식민지 경험의 역사를 풀어나가려고 하는 인도 지식인들의 고민과 해결책을 잠시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어떤 역사에서건 단 하나의 해석틀이 존재한다고 상정하는 것은 역사를 보는 눈을 경직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유럽 계몽주의의 계획을 인도에 적용시키는 것을 포기한다고 하여 그것이 곧바로 이성적인 시도를 포기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풀이하여 말한다면, 서양에서 해체주의의 등장이 이성의 지배에 대한 반발로 싹이 텄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여성의 문제와 봉건적 가족 구조의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서발턴 연구가 서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성의 포기와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 그 논리를 적용시킨다고 하면, 신문화사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민족과 통일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새로운 틀 속에서 조명하려는 시도라고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사회사와 신문화사의 '대립'이라는 것은 실제보다 훨씬 크게 포장된 경우가 많고 그것에 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은 저널리즘이 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때로는 이야기 거리를 창출하거나 논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기자들은 과장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지로 앞서 언급하였던 대담에서도 실상 본인과 이영석 교수 사이에서는 대립이라기보다는 공감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이영석 교수가 "엄밀성보다 문학성 뛰어난 문화사학자"라고 본인을 표현하고, 본인은 이영석 교수를 "참을 수 없는 사회사의 무거움을 고수하는 완고한" 학자라고 표현하였다고 기사화함으로써 사회사와 신문화사 사이에 엄청난 간격이 존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신문이 나간 뒤 이영석 교수와 본인의 통화에서 "우리가 그렇게 말했나요?"라고 서로 물으며 웃음을 터뜨렸던 일이 있었다. 그와 비슷하게 전국역사학대회의 포스트모더니즘 패널을 취재(?)한 『한겨레신문』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몇 년 동안 신문화사의 끊임없는 '싸움 걸기'에 마르크시즘 역사학이나 프랑스의 아날, 독일의 사회구조사 같이 구조와 전체를 중요시하는 사회사 쪽은 묵묵부답이었다. 정확히는 '무시'로 일관했다." 이 기사를 읽고 김응종 교수와 본인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실로 김응종 교수가 본인의 책에서 아날학파를 단순화시킨 글을 읽고서도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했듯, 문화사를 주도하는 사람들 역시 사회사를 주창하는 사람들의 논지를 충분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사와 신문화사 사이에 "'아름다운 협동'이 이루어져서 안될 까닭이 없"으며, "신문화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은 사회사라기보다 목적론적·도식주의적 거대담론임을 다시금 분명히해둘 필요가 있다"는 김영범 교수의 제안은 타당하다.

 


 어찌 되었든, 신문화사에 대한 사회사의 비판이 제기한 교훈을 하나 제기하며 이 발표를 마감하려 한다. 본디 신문화사는 이론적인 성향이 강한 역사학의 분야이다. 반면 사회사는 그렇지 못하다. 한 저명한 사회사가가 자인하듯 "사회사는 정의 내리기보다는 방어하기가 훨씬 쉽다." 또한 "사회사를 실행에 옮기는 뛰어난 역사가들은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실천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정당하게 소비한다." 국내 사회사가들의 '무시'의 원인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사회사를 실행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그들이 사회사를 왜 하고 있고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이론적, 방법론적으로 밝힌 글을 그다지 접하지 못한 것이 본인의 과문 탓만은 아닐 것이다. 실지로 역사학은 구체적인 개별을 다루기 때문에 이론적인 연구를 경원해왔던 것이 사실이고 사회사에서는 그 경향이 더욱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론이 실제적인 연구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론적 뒷받침이 없다면 예리한 문제의식이 창출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신문화사의 '도전'에 대한 사회사의 '응전'이 단지 신문화사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사회사 자체의 목적과 대상과 방법에 대한 이론적 성찰로 이어져 더 넓은 의미에서 역사학의 발전을 위한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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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도반 2006-12-05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의 조한욱 교수는 국내 사학계에 '신문화사'를 도입한 선구적 인물이다. 신문화사 및 미시사 도입 이후 10여년 간의 결과는 공보다는 과가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한욱 선생은 예의 그 진중함으로 생산력있는 연구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글 몇 편을 올린다.

출처는 그의 홈페이지 <조한욱 교수의 서양사 이야기>이다. http://home.knue.ac.kr/~hocho/board/wwwboard.cgi?db=lecture&mode=read&num=184&page=9&ftype=6&fval=&backdepth=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