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탈리 데이비스(Natalie Zemon Davis: 1928- )




 구미의 학계는 그 층위가 대단히 두텁다. 역사학의 경우도 시대별, 나라별로 학자들이 즐비하며, 그 내부 또한 연구의 주제나 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세분되어있다. 그렇듯 잘게 가지를 친 영역마다 대가의 칭호를 받을 자격을 가진 권위자들이 있어 엄정한 학문적 성과물을 통해 학풍을 주도하며 존경을 받고 있다. 유명세를 탄 학자들의 저작만이 시장성을 검증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거의 독점적으로 소개되며 독서 대중의 편식을 강요하는 우리의 풍토에 견주어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학문의 폭과 깊이가 모두 보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학문의 분과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대에 '유럽 근대사'와 같이 방대하면서도 모호한 영역을 대표하는 역사가가 존재할 수 있을까? 만일 그 대답이 긍정적일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나탈리 데이비스와 같은 인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나탈리 데이비스에 비견될만한 다른 역사가들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미국 출신의 그녀는 유럽 근대사에서 여러 분야를 새롭게 개척하며, 근대사를 넘어서 역사학 자체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그런 연고로 많은 전문적 역사가들은 유럽 근대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녀를 꼽음에 주저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유럽 근대와 관련하여 '문화사', '여성사', '인류학적 역사' 등등의 개념을 어느 정도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까닭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녀가 닦아 놓은 길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탈리 데이비스는 단지 예전에 이룩해놓은 업적 덕분에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만은 아니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녀는 영화가 역사의 전망을 더 환하게 밝혀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물론, 유럽사를 넘어 미국과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로 연구 대상의 지리적인 확충까지 꾀하며 선구자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학자로서 그녀의 뛰어난 업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마르탱 게르의 귀향』(The Return of Martin Guerre)이라는 영화와 같은 제목의 책이 번역 출간됨으로써 그녀의 역사적 혜안의 편린이 소개되긴 했지만, 역사가로서 그녀의 총체적인 역량을 음미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초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저서를 따라가며 선구적인 영역 개척의 의미를 되짚어볼 것이다.


 때로 이 글의 논조는 초연한 관찰자로서 나탈리 데이비스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 객관적이고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넘어서, 그녀의 삶 자체에 대해 존경심을 갖는 사람에게서 우러나오는 송사(頌辭)처럼 들리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 불가피하다. 첫째로, 그녀는 유태인으로서,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가정을 꾸려나가는 여성으로서 학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지극히 어렵던 시기에 그 학문의 기준을 높여놓은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 과정에서 그녀는 매카시즘의 선풍이 불던 시기에 '미국 하원의 비미국적 활동조사위원회'(House Committee of Un-American Activities, 이하 HCUA로 약함)에 의해 내려진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에 맞서 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녀의 학문적 진취성의 밑바탕에는 실제 삶에서 부딪치는 여러 장애물들을 단순하게 극복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그런 개인적 어려움을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역사의 요인으로 파악하려는 태도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태인으로서 나탈리 데이비스가 비우호적인 기독교 사회 속에서 적응해야 한다는 실제적 문제는 그녀의 주요 연구 대상인 종교개혁과 관련된 시기에 있어 훨씬 더 현실적이면서도 미묘한 방식으로 종교와 사회와 문화 사이의 관련성을 검토할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또한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담당함과 동시에 학자의 위치에 오르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시대에 그녀는 그 일을 해냈을 뿐 아니라, 여성 학자들에 대한 편견에 대항하며 여성사라는 분야를 실제로 확립시켰다. 실로 그녀의 삶은 그녀의 학문과 분리되지 않았다. 그녀의 인간적 삶에 대한 찬사는 그녀의 학문적 업적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인 것이다.

 



 나탈리 데이비스는 1928년 디트로이트에서 유태인인 아버지 줄리안 제먼(Julian Zemon)과 어머니 헬렌 램포트(Helen Lamport)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여자 대학교인 스미스 칼리지에 입학한 그녀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문학에도 심취하고, 미국과 유럽의 위대한 시기를 다룬 역사 수업을 들으며 1차 사료를 읽어야 할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는 등 인문학의 교양을 폭넓고 깊이 있게 쌓았다. 그런 한편 이상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대안으로 마르크스주의에 물들며 토론회와 독서회를 조직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력은 훗날 그녀의 학문적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만 그녀의 삶 전체에 가장 큰 의미를 갖게 되는 대학 시절의 사건은 3학년 당시 챈들러 데이비스(Chandler Davis)라는 수학 전공의 남학생을 만난 일이었다. 하버드 대학에서 여름 학기를 수강하던 나탈리는 그곳에서 해군 출신의 복학생 챈들러를 만났다. 그는 수학 외에도 과학, 음악, 시에 조예가 깊었고 나탈리와 이념적 성향이 같았다. 만난 지 3주만에 챈들러는 청혼했고, 6주만에 그들은 결혼했다. 나탈리 제먼은 비로소 나탈리 데이비스가 된 것이다. 그 때 챈들러는 22세, 나탈리는 19세였다. 기독교도인 챈들러와 유태인인 나탈리의 만남은 스캔들로 여겨질 정도로 주위의 반대가 많았지만, 그들은 인생의 동반자이자 이념의 동지로서 평생의 고락을 같이 했다. 나탈리가 학문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도 여성이 스스로 나아갈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명분에 찬동하던 챈들러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출판한 여러 책의 머리말에는 남편인 수학자 챈들러에 대한 애정 어린 헌사가 실려있다. 그것은 동반자에 대한 겉치레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학문의 길을 가면서도 비판적 제안과 논의를 통해 책의 수준을 높여준 사람에게 합당한 예우이다.


 나탈리 데이비스는 본디 역사학의 박사학위 과정을 이수한 뒤 그와 관련된 자료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챈들러와 결혼한 뒤 아이를 갖고 가정을 꾸려야 할 일을 고려할 경우, 챈들러를 따라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이 더 수월하리라는 생각이 그녀의 인생의 진로를 바꾸게 만들었다. 또한 하버드 대학교와 미시간 대학교의 대학원 생활은 역사학에 대한 그녀의 태도도 바꾸게 만들었다. 원래 사상사에 관심을 갖고 있던 그녀가 사회사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녀는 특히 16세기의 리용(Lyon)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론(Rhone) 강과 사온(Saone) 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그 도시는 16세기에 곡물 폭동, 인쇄공들의 파업, 프로테스탄트 봉기 등 이른바 '작은 사람들'(menu peuple)의 소요가 자주 일어난 곳이었다. 리용은 그녀의 학위 논문 주제가 되었다. 그곳은 물질적 경험이 종교와 같은 상부 구조의 변화를 좌우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는 물론, 신교가 자본주의 정신을 배양하였다는 막스 베버의 명제를 역사적으로 증명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나탈리는 1952년 리용으로 연구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6개월 동안 머물렀던 그곳의 풍광과 사람들을 사랑했지만, 그녀가 가장 큰 애정을 쏟아 부은 곳은 문서보관소였다. 지금은 유럽사를 연구하는 미국 역사가들이 문서보관소를 찾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고 있지만, 실지로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생긴 새로운 현상이었다. 그 이전까지 미국의 역사가들은 유럽의 역사가들에 의해 이미 발굴되어 인쇄된 자료를 갖고 연구했다. 2차 대전 직후 툴루즈(Toulouse)의 문서보관소를 뒤졌던 존 먼디(John Mundy)와 함께 나탈리 데이비스는 자료를 발굴하며 유럽사를 연구한 최초의 세대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16세기 프랑스 공증인들의 글씨체를 읽는 법에 대한 어떤 실질적인 도움도 얻지 못한 채, 나탈리 데이비스는 리용 주민들의 신분, 종교, 직업, 숙소, 세금 등등에 관한 자료를 어렵사리 수집하였다.


 그렇게 수백 장의 카드에 빽빽하게 필사한 자료를 갖고 귀국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FBI 요원들이었다. 왜냐하면 나탈리 데이비스는 프랑스로 떠나기 전 HCUA의 위헌적 행위를 공격하기 위하여 미시간 대학교의 '인문학, 과학 평의회'에서 비밀리에 발간한 팜플렛을 작성하였고, 챈들러는 그 평의회의 총무를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매카시(Joseph McCarthy)의 선풍이 몰아치던 당시 그 팜플렛으로 말미암아 젊은 부부에게는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챈들러는 미시간 대학교의 교수직을 내어놓는 것은 물론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나탈리 데이비스의 회상에 따르면, HCUA의 평결 과정과 근대 초 유럽의 사법 체계 사이에는 닮은 점이 있었다. 부부가 함께 기소되었다면 그들 모두는 남편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간주하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의 남성중심주의적인 사고 방식과는 상관없이, 그러한 평결이 나탈리 자신에게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챈들러처럼 해임되고 옥고를 치르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뿐, 나탈리의 삶 자체는 훨씬 고달파졌다. 가계를 꾸려나가는 일부터가 어려운 상황에 첫 아이를 임신했다. 더욱 나쁜 것은 FBI에서 여권을 압수하여 리용으로 연구 여행을 떠날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 최악의 상황을 헤쳐나갈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그녀는 당시 살고 있던 뉴욕 지역의 공공 도서관과 대학의 도서관을 모두 뒤져 16세기 리용에서 출판된 모든 책을 섭렵했다. 책의 내용 뿐 아니라 제본 방식에서부터 책 첫머리의 그림, 간행과 관련된 기록, 책장의 가장자리에 기록한 메모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검토했다. 그것은 책의 역사가 사회사를 위해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생각해볼 계기를 그녀에게 제공해주었다.


 나탈리 데이비스는 세 자녀를 키우며 1959년 박사 학위 논문 "신교와 리용의 인쇄공들"(Protestantism and Printing Workers of Lyon)을 완성시켰다. 이 논문은 몇 가지 점에서 근대 초 종교개혁의 연구에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종교개혁 연구는 연구자들의 신앙 고백과 비슷했다. 이를테면 신교도들은 신교의, 카톨릭교도들은 카톨릭교의 편에 서서 연구를 진행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객관적인 연구가 될 수 없었고, 교리와 관련하여 신학자들의 논쟁을 다루는 내용으로 그치기가 일쑤였다. 종교와 사회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도 카톨릭 교회의 재산에 대한 불만이 신교도들의 봉기를 일으켰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논의되었을 뿐이다.


 나탈리 데이비스가 유태인이었다는 사실은 최소한 이 문제에 있어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만들었다. 신교, 카톨릭 어느 측에도 충성을 보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로지 리용의 남성 신교도들의 직업과 사회적 위상에 관한 자료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남성 신교도들은 어떤 사회 계급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경제적인 적이 종교적으로는 동료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신교도들은 특정의 직업과 선택적 친화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기술 이용과 문자 해독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직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인쇄공들은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신의 말씀을 전파한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평신도들이 성직자의 개입이 없이 신앙만으로 신과 직접 접할 수 있다는 신교의 교리가 그들에게 더 호소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사회적 차원을 고려할 때는 경제적 계급뿐 아니라 평신도와 성직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영적 계급 사이의 투쟁도 그 배경으로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경제적 결정론이라는 단선적인 축에서 벗어나 다양한 개념의 틀을 사회사 연구에 도입시킨 선례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960년대는 나탈리 데이비스가 사회사가로서 역량을 키워나간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녀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에 의해 FBI로부터 여권을 되돌려 받아 리용과 제네바로 여러 차례 연구 여행을 떠나 많은 자료를 축적하였다. 그녀는 이 당시에 모은 자료를 아직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또한 이 시기에 그녀는 대학의 강단에 서게 되었다. 컬럼비아 대학교와 브라운 대학교에서 강사 생활을 하던 그녀는 남편 챈들러가 교수직을 얻은 터론토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것은 생활의 안정뿐 아니라 학문 공동체 속에서 많은 조언과 교감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동료들을 얻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빈민 구제, 휴머니즘과 이단"(Poor Relief, Humanism, and Heresy)과 "16세기 프랑스의 한 노동 조합"(A Trade Union in Sixteenth-Century France)은 이 시기에 나탈리 데이비스가 추구하던 사회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논문이다. 전자의 논문에서는 리용의 자료를 이용하여 기업의 가치관과 기독교 휴머니즘의 신조와 프로테스탄티즘이 결합되어 복지 개혁이 이루어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후자의 논문에서는 제네바의 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재판 기록을 이용하여 유럽 도제들의 비밀 결사가 운용되는 방식 및 그들의 의례와 전략을 밝혔다. 그녀는 비밀 결사에의 입문 의례와 처벌의 형식이 도제들을 결속시키는 데 기여하였고, 그러한 결속 아래 그 '작은 사람들'은 능동적으로 임금을 비교적 높게 유지할 수 있었음을 지적했다.


 이렇듯 사회사를 실행하면서도 종교적 신조나 입문 의례 등을 다루는 그녀의 주제는 경제적 계급만을 분석의 틀로 사용하는 종래의 사회사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날 학파가 한 대안이 될 수는 있었지만, 당시까지 아날 학파는 주로 농촌 지역의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의 노동자와 관련된 종교사를 다루는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인구통계학과 물질 문명의 발견에 치중하던 아날 학파의 '전체사'(histoire tatale) 대신 그녀가 찾은 다른 길은 인류학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성'을 하나의 변수로 역사에 포함시킬 수 있는 여유까지도 제공했다.


 인류학적 대안의 모색은 1969년 "무질서의 이유"(The Reason of Misrule)라는 논문 집필을 시작하며 굳어진 생각이기도 하다. 성직자들이 후원하는 도시의 축제에서 벌어지는 청소년 집단의 요란스러운 소동을 다룬 이 논문에서 나탈리 데이비스는 관행적인 사회사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의미를 캐낼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한 관행들에 대해 역사가의 관심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소한 놀이로 치부해버릴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지방의 청소년 집단의 행태를 조사한 아놀드 반 헤넵(Arnold Van Gennep)의 『프랑스 민속 편람』(Manuel de folklore fran ais)을 읽으며 해결되었다. 또한 이 당시 영어로 번역되었던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의 『라블레와 그의 세계』(Rabelais and His World)에서 제시되고 있는 카니발레스크(carnivalesque)의 개념에서 도움을 얻기도 하였다. 즉, 축제는 일상 생활의 일시적인 전도라는 것이다.


 1970년대에 나탈리 데이비스는 인류학과 민속학의 저서를 섭렵했다. 그녀는 에번스-프리처드(E. E. Evans-Pritchard), 빅터 터너(Victor Turner),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 시드니 민츠(Sidney Mintz) 등등의 저서를 읽으며 인류학과 민속학의 성과를 역사학에 접합시킬 방안을 추구하였다. 이 시기는 역사가 키스 토마스(Keith Thomas)와 피터 브라운(Peter Brown)이 각기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Branislaw Malinowski)와 메리 더글라스(Mary Douglas)에게서 영감을 얻으며 선구적인 저작을 완성시켜 나가던 시기와 일치한다. 인류학의 저서에 익숙해진 결과 나탈리 데이비스의 역사 연구는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당시 신교도와 구교도의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배경을 구분시키는 범주에 '연령'을 포함시키기도 했고, 의례 행위가 갖는 상징적 의미를 캐려 시도하기도 하였으며, 구전 문화에도 더 큰 관심을 두게되었다.


 1975년 나탈리 데이비스는 이전에 발표된 논문들과 이러한 관심사에서 출발한 논문들을 『근대 초 프랑스의 사회와 문화』(Society and Culture in Early Modern France)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어냈다. 이 제목은 오늘날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인류학의 냄새가 풍기는 신선한 것이었다. 이 책에 포함된 논문 "폭력의 제의"(The Rites of Violence)는 16세기 프랑스의 종교 폭동에 뒤따르던 살인이나 신성모독과 같은 극단적인 형태의 폭력이 단지 악마성의 표출이 아니라 의례와 축제 행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논지를 펼치고 있다. 그밖에도 이 책에는 특히 여성을 다룬 두 개의 논문 "도시 여성과 종교적 변화"(City Women and Religious Change)와 "위에 있는 여성"(Women on Top)이 들어있다. 앞의 논문은 신교도가 된 여성들은 누구였는지를 밝히고 있고, 뒤의 논문은 축제 때 남성과 여성이 옷을 바꿔 입으며 성별을 전도시키던 풍습이 갖는 의미를 추적하고 있다.


 여성사에 대한 열정은 나탈리 데이비스가 역사학에 발을 담그기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그것은 교수가 된 이후에도 남성은 '아무개 교수'라고 불리지만 여성은 '아무개의 부인'이라고 불리던 학계의 관행에 대한 저항 의지 때문에 더욱 강렬하게 바뀐 열정이기도 하다. 그녀는 미국 여성사의 선구자인 질 커 콘웨이(Jill Ker Conway)를 만났다. 1971년 그들은 함께 캐나다 최초의 여성사 강좌를 개설하였다. 여성사를 개척한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점에서 실행에 옮기기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첫째, 여성사를 수행하려면 생물학에서 법학과 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 분야에 대한 학과교류적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일이 큰 난관이었다. 둘째로 여러 시대와 장소에서 여성의 역할 및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가 갖는 의미를 검토한다는 일은 종교개혁이나 프랑스 혁명과 같은 거대한 사건에 대해서도 재평가해야 한다는 어려움을 수반했다. 1971년부터 6년 동안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분교에서 재직하였던 기간에 나탈리 데이비스는 여러 동료들과 함께 여성학 연구 프로그램을 개발하였고, 그와 동시에 역사와 문학과 예술사의 학과교류 잡지인 『표상』(Representations)을 창간하였다.


 이 시기에 나탈리 데이비스는 학문의 생애에 있어서 또 다른 변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 계기는 버클리 시절 말년에 한 대학원생이 장 드 코라스(Jean de Coras)라는 16세기의 법관이 쓴 책을 보여준 것이었다. 피레네산맥의 한 마을에서 3년 이상에 걸쳐 다른 사람의 아내에게 남편으로 받아들여졌던 사람에 대한 잘 알려진 재판 기록을 담은 그 책에 대한 그녀의 첫 반응은 "이것은 영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려는 젊은 날 소망의 반영일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의미에서 그것은 오래도록 인류학적 역사를 실행해온 경험의 자연스러운 결말이기도 했다. 인류학의 세례를 받은 역사를 서술하면서 나탈리 데이비스는 서유럽 전역의 문서보관소에서 수집한 문서 자료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죽은 사람들을 다루기 때문에, 인류학자들처럼 현장 작업을 하면서 원주민들과 인종지학적인 의견 교환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녀에게 못내 아쉬운 점이었다.


 1978년 프린스턴 대학교로 적을 옮긴 나탈리 데이비스는 코라스의 기록 『잊을 수 없는 판결』(Memorable Decree)을 읽으며 그 내용을 영화로 만든다면 인종지학적인 현장 조사 자체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와 흡사한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이를테면, 피레네의 산간 마을에서 철저한 고증을 통해 16세기 초와 같은 환경을 만들어놓고 배우들로 하여금 감정이입을 통해 재판 당사자들의 처지에 서도록 한다면 역사를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1980년 나탈리 데이비스는 영화의 감독을 맡을 인물을 찾기 위해 파리에 있었다. 우연히도 바로 그 때 저명한 시나리오 작가 장클로드 카리에르(Jean-Claude Carri re)와 젊은 감독 다니엘 비뉴(Daniel Vigne)는 그 재판에 얽힌 사건을 영화화하기 위한 기획을 시작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합류했고 1982년에 영화 『마르탱 게르의 귀향』(Le Retour de Martin Guerre)이 나왔다.


 그 영화는 영화 제작자들과 역사가의 협력이 빚어낸 훌륭한 결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지만 나탈리 데이비스는 그 영화의 제작 단계 초기부터 같은 주제에 대해 책을 써야 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영화에서는 특히 여주인공 베르트랑드의 행동이 수동적으로 묘사되었고, 이야기의 여러 요소들이 생략되거나 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어떤 면에서 표현력이 대단히 뛰어나긴 하지만, 2시간 이내에 모든 것을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생략이나 왜곡이 불가피했다. 나탈리 데이비스는 그 마을의 생활과 관련하여 자신이 찾을 수 있던 모든 자료를 이용해서 마르탱 게르의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납득이 갈 수 있도록 책을 쓰려 했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었던 간접적인 이유 중 하나는 이미 1975년 에마뉘엘 르 루아 라뒤리(Emmanuel Le Roy Ladurie)의 『몽타유』(Montaillou)와 1976년 카를로 긴즈부르그(Carlo Ginzburg)의 『치즈와 벌레』(Cheese and the Worms)라는 미시사의 걸작이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 책은 영화가 초연된 것과 같은 1982년에 최초로 프랑스에서 발간되었고 이듬해에 미국에서 선을 보였다. 나탈리 데이비스는 자신의 미시사적 기술을 '인종지학적 기술'(ethnography)이라고 말했다. 나탈리 데이비스는 그 놀라운 이야기를 이중적으로 서술하였다. 첫 번째는 사건 자체가 전개되며 마을 사람들에게 비쳐진 단계에 따라 서술했고, 두 번째는 법관 코라스와 몽테뉴(Montaigne)를 비롯한 기록자들이 이야기를 풀어나간 방식에 따라 서술했다. 그 의도는 사실과 기록 사이의 차이를 독자들에게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성 방식은 당연히 역사 서술에 내재하는 문학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렇듯 나탈리 데이비스는 영화를 통해 역사와 문학의 접점에 도달했다. 프린스턴 대학교는 영화나 문학에 대한 관심을 구체화시키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이야기체 역사의 부활을 강조하던 노대가 로렌스 스톤(Lawrence Stone), 유럽의 문화 연구를 주도하던 칼 쇼스케(Carl Schorske)와의 만남으로 또 다른 종류의 지적 자극을 얻은 것은 물론,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와 공동으로 강의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역사가 갖는 문학성에 대한 관심은 나탈리 데이비스가 미국 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던 1987년에 출간된 『문서보관소 속의 창작』(Fiction in the Archives)이라는 저서로 결실을 보았다. 이 책도 『마르탱 게르의 귀향』과 마찬가지로 법률에 관한 텍스트로부터 출발하였다. 그 텍스트는 살인에 대한 국왕의 용서를 탄원하는 수많은 편지였다. 그러한 진정서의 원작자는 모든 사회 계층 출신의 인물들이며, 여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진정서가 갖추어야 할 법률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국왕과 그의 대신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편지를 써야 했다. 이러한 편지들은 서기관에 의해 씌어졌고, 그 편지의 내용을 구술하던 사람들은 글을 읽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편지는 중세 말과 근대 초의 유럽의 사회상을 풍부하게 전해주는 자료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나탈리 데이비스가 특히 초점을 맞추었던 것은 그 탄원자들이 여러 가지 다른 상황 속에서 용서를 탄원하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나, 그들이 구사하던 전략이었다. 그들은 모두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며 구명 운동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에 '창작'(fiction)이라는 단어를 넣은 것은 그러한 진정서의 이야기가 지어낸 '허구'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그 탄원자들이 말하고 행동할 때 고안해내 사용하는 '기지'나 '술책'을 가리킨다. 따라서 나탈리 데이비스는 『문서보관소 속의 창작』을 통해 그 편지들을 그 시대의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에 대한 증거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 증거를 읽는 신뢰할만한 방안까지도 제공하였던 것이다.


 사회사, 인류학적 역사, 인종지학적 기술, 여성사, 역사의 문학성 등등 나탈리 데이비스가 갖고 있던 다양한 관심사는 1995년에 출판된 『주변부의 여인들』(Women on the Margins)이라는 저서로 결집되었다. 이 책은 17세기를 살았던 세 명의 도시 출신 여인들의 특이한 삶을 주제로 하고 있다. 유태인 상인 글리클 바스 유다 라이프(Glikl bas Judah Leib)는 함부르크(Hamburg)에서 메츠(Metz)로, 카톨릭 장인이자 교사인 마리 귀아르(Marie Guyart de l'Incarnation)는 투르(Tours)에서 퀘벡(Quebec)으로, 신교도 예술가이자 곤충학자인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Maria Sibylla Merian)은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서 뉘른베르크(Nuremberg)와 암스테르담(Amsterdam)을 거쳐 남미의 수리남(Suriname)으로 이주하며 삶의 기록을 남겼다.


 불어가 아닌 유럽의 언어로 연구의 영역을 확대한 이 책은 여러 모로 의미가 깊다. 이 책은 단일한 미시사가 아니라 여러 삶을 비교하며 그 속에서 성별에 따른 위계질서가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를 보이고 있다. 퀘벡과 수리남으로 건너간 마리와 마리아는 신대륙에서 비유럽인들을 만난다. 그들과의 접촉은 유럽에서도 특히 프랑스에 초점을 맞춰 연구하였던 나탈리 데이비스에게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들의 삶은 다른 종류의 결혼 생활과, 다른 종교와 다른 직업에 의해 특징지어진 이색적인 것이다. 그러한 삶들을 한 책에 묶을 수 있도록 엮어준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주변부'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종교적, 사회적, 지리적으로 주변부에 살고 있었으며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특히 더 큰 창의력을 갖고 살아가야 했다는 것이다. 그 주변부는 그들에게서 새로운 삶을 발견하기 위한 개척지가 되었다. 수녀원을 건설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넜던 여인에게서, 애벌레와 나비를 찾기 위해 수리남의 강을 노 저어 탐사했던 여인에게서 나탈리 데이비스가 발견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여성으로, 유태인으로, 공산주의자라는 당시로서 치명적인 비난으로, 어머니로 온갖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며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만든 자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70세를 넘어 새로운 밀레니엄에 들어서도 나탈리 데이비스는 『16세기 프랑스의 선물』(The Gift in Sixteenth-Century France)과 『영화 속의 노예』(Slaves on Screen)라는 두 권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마르셀 모스(Marcel Mauss)가 1925년 『선물』(The Gift)이라는 대작을 발간한 이후 선물은 마샬 살린스(Marshall Sahlins), 레비-스트로스(Claude L vi-Strauss), 말리노프스키 등등 많은 인류학자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16세기 프랑스의 선물』에서 나탈리 데이비스는 선물을 주고받는 방식의 변천을 통해 16세기 프랑스에 대한 또 하나의 인종지학적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영화 속의 노예』는 1980년대와 1990년대를 통해 '역사와 영화'라는 제목으로 펼쳐졌던 세미나에 바탕하여, 노예 수용소와 대농장과 반란과 해방에 관한 드라마를 펼치고 있다.


 이 노역사가는 아직도 우리에게 어떤 놀라움을 남겨놓고 있을까? 기다려볼 일이다.


 

 


<주요 개념>


◎ 카니발레스크: 미하일 바흐친이 『라블레와 그의 세계』에서 고안해낸 개념이다. 중세까지 만연하던 축제의 장터는 근대로 들어서며 사라졌지만, 그것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라블레의 소설과 같은 텍스트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런 소설을 가리키기도 하는 이 용어는 축제에서 위와 아래, 남성과 여성 등등 모든 것이 전도된 상황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를테면 가상의 혁명과 같은 상황으로서, 민중의 불만을 해소시키는 안전판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 인종지학적 기술: 인류학자들이 현장에서 원주민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서술하는 방식에 대해 나탈리 데이비스가 붙인 명칭이다. 본문에서 밝힌 것처럼, 나탈리 데이비스는 이른바 미시사의 기술이 인종지학적 기술과 흡사하다고 논한다.


◎ 주변부: 왕권이건 시민권이건 정치적 권력의 중심부에서 벗어났고, 문화적으로도 학문과 제도의 중심부에서 벗어난 지역을 가리킨다. 주변부는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유럽의 많은 남성들도 출신 성분, 재산, 직업, 종교 등등의 이유로 권력의 중심부에서 빗겨 있었다.

 

 



<어록>


◎ 아주 부유하고, 권력이 크고, 학식이 높고, 성직에 있는 사람들은 "소박한 사람들"의 삶과 관련될 때에만 기술하였다.
(『근대 초 프랑스의 사회와 문화』에서)


◎ 역설적으로 내가 영화 창조 작업을 음미하면 할수록, 그것을 넘어서는 무엇을 향한 나의 욕망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마르탱 게르의 귀향』에서)


◎ 과거의 연구는 도덕적 감수성과 비판적 이해를 위한 도구를 보상으로 제공합니다. 시절이 아무리 사악하고 냉혹함이 아무리 엄청나다 할지라도, 저항의 요인 혹은 친절과 선의의 요인이 나타납니다. 상황이 아무리 황량하고 억압적이라 할지라도, 어떤 형태의 임기응변적인 대응 방식이 생깁니다.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미래에 물려줄 것입니다. 현재가 아무리 정태적이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과거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최소한 사태가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과거는 끊임없는 흥미의 원천이며, 희망의 원천까지도 될 수 있습니다.
(1997년 미국철학회 초청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행한 연설에서)


◎ 역사 영화는 과거를 과거로 놔두어야 한다.
(『영화 속의 노예』에서)

 

 



<저서>


Society and Culture in Early Modern France, Stanford University Press, 1975.


The Return of Martin Guerr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3. 『마르탱 게르의 귀향』, 양희영 옮김, 지식의풍경, 2000.

Fiction in the Archives,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7.

Women on the Margin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5.

The Gift in Sixteenth-Century France,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2000.

Slaves on Scree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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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도반 2006-12-05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나탈리 지먼 데이비스의 학문적 생애와 그의 주요 저작에 대한 설명이 잘 어우러진 글이다. 한길사에서 출판된 『월경(越境)하는 지식의 모험자들』에 수록되었다.

출처는 http://home.knue.ac.kr/~hocho/board/wwwboard.cgi?db=lecture&mode=read&num=301&page=4&ftype=6&fval=&backdepth=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