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평론 제6호] 마르크스의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과 월러스틴, 푸코

 

 

서관모(충북대 교수/ 사회학) 

 

 


1.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으로서의 맑스주의


과거 ꡐ정통ꡑ 맑스주의에서 말하던 ꡐ지배적 세계관ꡑ(레닌), 곧 절대지식으로서의 맑스주의는 죽었다. 이 죽음은 이러한 절대지식의 담지자인 당과 대중의 분리의 다른 표현이다. ꡐ현실 사회주의ꡑ의 붕괴는 이미 완료된 이러한 맑스주의의 죽음을 재확인하였을 뿐이다.


ꡐ세계관ꡑ으로서의 맑스주의의 죽음, 당 형태의 역사의 종언이 맑스주의 자체의 소멸을 뜻하는 것일 수는 없다. 지금 소멸한 것은 맑스주의의 지배적 형상이다. ꡐ계급투쟁의 조건들, 형태들, 효과들에 대한 이론으로서의 맑스주의ꡑ(알튀세르) 내지 ꡐ착취 분석으로서의, 국제주의적 강령으로서의, 분업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민주주의적 봉기의 윤리와 정치의 특수한 표현으로서의, 계급투쟁의 효과들에 대한 가설로서의 맑스주의ꡑ(발리바르)는 전혀 죽은 것이 아니다. 맑스주의가 세계관이 아닌 이상 말하듯이 ꡒ내일의 사회적, 정치적, 지적 문제들 중 어떤 것도 맑스주의의 자원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을 것ꡓ이지만, 계급투쟁이 역사 운동의 유일한 ꡐ동력ꡑ은 아니라 해도 화해불가능한 보편적 적대로 남아 있는 한 ꡒ어떤 문제도 맑스주의 없이 진지하게 대처될 수 없을 것ꡓ*주)이라 할 수 있다.


*주) {{에티엔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문화과학사, 1995, 15쪽.}}


그렇지만 지금 계급적대가 그 어느 때보다 세계를 분열시키고 있는 가운데 맑스주의는 거의 존재하기를 멈추다시피 한 상태이다. 그 일차적 이유는 이론외적, 정세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론내적인 것들, 즉 그 모순들과 한계들이다. 이 모순들과 한계들이 근원적인 것인 만큼 맑스주의는 근원적인 비판적 개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개조는 어디까지나 맑스주의의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요소들을 살리고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요소들의 가장 핵심을 이루는 것, 그것 없이 맑스주의는 있을 수 없는 것, 그것은 사회적 유대의 문제설정과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이다.


맑스주의 이론, 즉 역사유물론의 대상은 사회적 관계이다.*주1) 그러나 대상이 사회적 관계라는 것만으로는 맑스의 사고의 독창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맑스의 사고의 독창성은 사회적 관계 일반이 적대들에 의해 구조화된다고 파악한다는 데 있다. 맑스가 공동체적 관계로 이해되는 ꡐ사회적 유대ꡑ와 구별하여 개념화한 ꡐ사회적 관계ꡑ는, ꡒ공동체의 제거로부터 생겨난ꡓ, 또는 ꡒ공동체의 부재라는 인과성으로부터 생겨난 갈등적 관계이다.ꡓ*주2) 이 같은 사회적 관계 개념을 토대로 하여 구축되는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은 계급투쟁의 문제설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사실 맑스 자신은 이 점에서 동요한다. 그에게는 계급투쟁을 총체화하고 그리하여 사회적 적대를 계급으로 환원시키는 경향과 그 반대의 경향이 공존한다. 한 예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ꡐ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ꡑ이라는 개념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맑스는 여기서 지적 차이(intellectual difference)에 대하여 근본적인 관심을 보이지만 그것을 계급적대로 환원되지 않는 별개의 보편적 적대로 이론화하는 데에는 실패한다.*주3)


*주1) {{이와 관련된 맑스의 많은 테제들, 언명들 중에서 몇 개만 들어보자: ꡒ인간적 본질은 어떤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의 총화(ensemble)이다ꡓ(ꡐ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ꡑ 6); ꡒ한 사회는 개인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ꡓ(『그룬트리세』); ꡒ자본의 의인화로서의 자본가ꡓ(『자본』Ⅰ); ꡒ나의 분석방법은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주어진 경제적 시대로부터 출발한다ꡓ(아돌프 바그너의 정치경제학 교과서에 대한 난외 평주).}}


*주2) {{에티엔 발리바르, 『사회주의와 근대의 정치적 범주들』, 에티엔 발리바르 외, 윤소영 엮음, 『맑스주의의 역사』, 민맥, 1991, 272쪽. 발리바르는, 맑스가 자본주의가 공동체를 파괴했다는 반진보주의적 이념을 그 결론들을 전도시킴으로써 나름대로 다시 채택하고 이 이념으로부터 ꡐ사회적 관계ꡑ라는 자신의 개념을 도출한다고 한다.}}


*주3) {{에티엔 발리바르,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분할」, 『맑스주의의 역사』, 앞의 책; 「육체노동과 지적 노동의 분할ꡑ에 대하여」, 에티엔 발리바르, 서관모 엮음, 『역사유물론의 전화』, 민맥, 1993 참조.}}


오늘날 맑스주의 이론의 개조작업의 기본은 맑스 자신이 발전시키지 못하고 닫아놓은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의 모든 비판적 함의를 온전히 발전시키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맑스주의에서 기각해야 할 것은 프롤레타리아 당을 절대지의 담보자로 만들어 ꡐ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ꡑ가 ꡐ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ꡑ로 전화하도록 한 계급투쟁 또는 계급적대의 총체화이지 계급투쟁의 문제설정 자체가 아니다. 맑스주의의 계급투쟁의 문제설정을 유효화시키기 위한 조건은 계급적대를 성적 차이와 지적 차이라는 여타의 보편적인 사회적 적대들과 절합(節合)하는 것, 다시 말해 계급의 분할과 성의 분할, ꡐ육체와 정신의 분할ꡑ을 절합하는 것이다.*주) 이러한 방향으로 맑스주의 전체를 개조하는 데에는 비맑스주의적 요소들의 활용이 필수적이다.


*주) {{이러한 방향으로 중요한 이론적 진전을 보이는 문헌으로는 에티엔 발리바르, 「ꡒ인간의 권리ꡓ와 ꡒ시민의 권리ꡓ: 평등과 자유의 근대적 변증법」, 『맑스주의의 역사』, 앞의 책을 보라.}}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맑스주의의 개조는 맑스주의의 핵심인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과 사회적 관계 개념을 기각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 없이는 혁명적 정치로서의 대중정치를 사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하에서는 국가권력 문제와 관련하여 맑스주의에 발본적인 비판을 가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미셸 푸코의 이론화의 예를 들어 그들의 이론화가 맑스주의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맑스주의의 개조에 어떻게 활용가능하고 또 불가능한지를 보이고자 한다.

 



2. 월러스틴: 대중정치의 사고불가능성


계급투쟁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와의 영원한 대결 속에서 발전하였으나 민족주의를 모방하는 것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계급적 공동체의 논리가 경합하던 민족적 공동체의 논리에 복속한 것이다. 종래 맑스주의는 계급투쟁과 계급구성의 영역이 국민적 공간이라는 것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회구성체 개념 자체가 이러한 관점에 매여 있었다. 맑스주의가 이러한 관점과 개념에 머물러 있는 한 반민족주의적, 반인종주의적 보편주의는 공염불이 되기 쉽다. 오늘날 맑스주의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계급투쟁의 형세가 의존하는 경제-정치적 과정의 유기적으로 초민족적인 성격을 잘 표현하는 어떤 개념이다. 브로델, 월러스틴의 ꡐ세계경제ꡑ 개념은 맑스주의가 잘 활용할 수 있는 그러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월러스틴의 세계경제 개념은 그의 이론체계 속에 유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의 세계체계 이론이 맑스주의의 사회구성체 이론과 근본적으로 다른 만큼 그의 변혁이론, 즉 반체계운동론 역시 맑스주의의 변혁이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맑스주의 측에서 그의 이론화의 어떤 긍정적 요소들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의 변혁이론 체계의 특성과 문제점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우선 맑스주의에 대한 월러스틴의 평가를 보자. 그는 ꡒ자유주의의 근대성 이론을 따라 발전해온 근대성 이론으로서의 맑스주의ꡓ, 즉 ꡒ개량주의 전략으로서의 맑스-레닌주의ꡓ는 죽었으며, 죽지 않은 것은 ꡒ근대성과 그 역사적 현현인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맑스주의ꡓ, ꡒ실질적인 사회세력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던 반체계적 추동력ꡓ이라고 본다.*주) 그는 ꡐ맑스-레닌주의ꡑ가 된 주류 맑스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다섯 가지 강령을 ① 공산주의 사회 성취를 위한, 혁명을 통한 국가권력 장악, ② 국가권력 장악 및 유지를 위한 잘 조직된 정당 건설, ③ 프롤레타리아 독재(권력을 노동자계급에게만 양도하는 것), ④ 사회주의의 불가역성, ⑤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ꡐ사회주의의 건설ꡑ(=국가발전 추구)로 요약한다. 이러한 강령에 입각한 정치적 프로젝트가 시효만료한 것은 사실이며, ꡒ맑스-레닌주의 운동에서 사용되었던 용어로서의 ꡐ혁명ꡑ은 이제 더 이상 생명력 있는 용어가 아니ꡓ라는 그의 판단 역시 현실적이다. 국가주의적이고 따라서 민족주의적인 발전전략 내지 이행전략에 대한 월러스틴의 비판은 타당하며, 이러한 비판은 사실 공산주의의 세계성(ꡒ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ꡓ)이라는 맑스의 사상에도 전적으로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주) {{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이후』, 당대, 1996, 305-311쪽.}}


또한 ꡐ구좌익ꡑ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그의 다음과 같은 언명 역시 전적으로 타당하다: 즉 ꡐ구좌익ꡑ 운동의 사회적 토대는 세계인구의 협소한 부류, 세계경제의 가장 근대적인 부문 중에서 덜 부유한 층들, 숙련 및 반숙련 도시 노동자계급, 세계의 인텔리겐차 등이었다. 구좌익 운동은 강력한 소수, 억압된 소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인구 중 수적으로 소수인 집단들이 지지하는 세계운동이었고, 이러한 현실은 구좌익의 정치적 선택의 폭을 제한했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구좌익은 합리주의적 개혁주의라는 자유주의 프로그램을 가속시키고자 했고 보편주의적 언어로 말했지만 실제로는 특수주의적 정치를 실행했다(『자유주의 이후』, 369-370쪽).


월러스틴은 해체의 시대를 위한 분명한 반체계전략을 뚜렷하게 공식화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20년이 걸릴 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그는 ꡒ역사적 대안들에 대한 진지한 평가이며, 가능한 대안적 역사체계의 실질적인 합리성에 대한 우리의 판단 행위ꡓ*주)로서의 ꡐ유토피스틱스ꡑ를 제출한다. 그러나 그의 유토피스틱스는 그가 주장하듯이 ꡒ냉철하고 합리적이고 현실주의적ꡓ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주) {{이매뉴얼 월러스틴, 『유토피스틱스』, 창작과비평사, 1999, 12쪽.}}


그는 ꡒ끊임없는 자본축적의 우선성의 극복을 위한 제언ꡓ을 하고자 한다. 그는 ꡒ비교적 평등하고 충분하게 민주적인 대안적 체계의 가능한 기초ꡓ로서 ꡒ체계내 생산의 기초양식으로서 탈집중화된 비영리 단위들의 설립ꡓ을 든다. 이러한 비영리적 생산단위들을 세계체계의 성격이 달라질 정도의 규모로 설립하고 운영하는 것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혁명적 변혁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의 제언은 공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ꡒ계급 차이의 세 가지 가장 큰 결과물인 교육과 의료 및 평생동안 보장된 적당한 수입에 각각 접근할 기회의 불평등을 극복할 수 없는 어떠한 근본적인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세 가지 필요 모두를 비영리기구가 제공하고 그 비용을 집단적으로 부담하도록 하여 상품화의 외부에 놓는 것이 어려울 리 없다. 우리는 이미 상수도 공급에서 그런 식으로 하고 있으며, 많은 나라에서 도서관도 그렇게 한다ꡓ(『유토피스틱스』, 114-115쪽). 여기서 ꡐ적당한 수입ꡑ이 최저임금 수준의 수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의 변화를 말할 수 있게 하는 수준의 수입을 뜻한다면, ꡐ비영리기구에 의한 적당한 수입의 제공ꡑ은 사회생활의 핵심영역에서 상품관계가 폐절됨으로써만, 사회적 관계들의 혁명적 전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에서 보면 상품관계의 부재란 계급 착취관계와 국가 지배관계의 부재를 뜻한다. 그런데 월러스틴은 그것을 상수도의 공공 공급과 같은 수준의 문제로 이해한다. 그의 제언의 공상성은 비영리 생산단위들 간의 교류를 ꡒ현체계에서 우리가 가진 독점적으로 통제되는 세계시장이 아닌 진정한 시장ꡓ(『유토피스틱스』, 110쪽)에 맡기는 데에서도 볼 수 있다. 계급적 착취와 국가적 지배와 무관한 시장이 있을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브로델에 연원을 둔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경제적 이데올로기에 속한다.


월러스틴은 맑스의 사상에서 죽지 않은 것, 여전히 유효하고 필수불가결 것으로 계급투쟁, 양극화, 이데올로기, 소외라는 핵심사상 내지 개념들을 든다. 이 중에서 다시 가장 중요한 것일 계급투쟁의 분석에서 월러스틴의 커다란 기여는, 맑스가 기술한 경제적 양극화과정이 자본주의 세계경제 수준에서 전개되며, 분석단위를 세계경제로 취할 때 양극화 테제가 전적으로 타당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주) 계급투쟁의 장이 세계경제라는 사실에 대한 그의 강조, 반인종주의적 반민족주의적 보편주의의 필연성에 대한 그의 강조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포로가 된 맑스주의의 지배적 형상의 해체에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계급투쟁과 따라서 변혁에 대한 고유하게 맑스적인 기여의 핵심은 그의 사고와 이론 속에 수용되지 못한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이론의 문제점은 경제와 정치의 관계의 문제, 결국 국가권력의 문제로 집약된다.


*주) {{마찬가지로 세계체계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른바 ꡐ노동사회ꡑ의 종언 및 ꡐ지식사회ꡑ 또는 ꡐ문화사회ꡑ로의 이행이라는 테제는 전적으로 기만적이다.}}


ꡒ개별나라에서 국가의 장악을 통해 사회를 변혁하려는ꡓ 구좌익의 프로젝트에 대한 그의 비판에는 정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그가 ꡒ우리가 살고 있는 전체 세계체계의 거대한 이행에 중대한 영향을 끼쳐서 그 체계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자 할 때 국가가 그 주요수단은 아니다. 오히려 국가는 주요한 장애이다ꡓ라고 일반화할 때*주1) 사태는 복잡해진다. ꡒ정부의 권위는 유용할 수 있지만 거의 변혁적이지 못하다. … 국가권력은 기존 세계질서를 재정당화해주는 위험을 항상 내포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ꡓ(『자유주의 이후』, 344쪽)는 언명이 보여주듯이 그는 국가와 정부, 국가장치와 ꡐ억압적 국가장치ꡑ를 사실상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자신의 공격대상인 자유주의의 ꡐ법적 이데올로기ꡑ(맑스)의 관점이요, 이러한 권력 개념은 ꡐ권력에 대한 법적 개념ꡑ(푸코)이다. 맑스의 입장에서 국가장치는 접수해서 이용할 수 있는 것, ꡐ수단ꡑ이 아니다. 그것은 파괴되고 다른 종류의 대중적 정치조직 등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권력의 폐절은 계급 착취의 폐절의 이면일 뿐이다.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ꡐ소멸하는 국가ꡑ*주2), 레닌의 용어를 쓰자면 ꡐ동시에 비국가인 국가ꡑ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해답이라기보다는 거의 문제의 제기일 뿐이지만 말이다.


*주1) {{『자유주의 이후』, 12쪽. 물론 그가 ꡒ어떤 당면한 필요를 위해 국가권력을 이용ꡓ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가 ꡐ국가ꡑ 개념의 자유주의적 대당인 ꡐ시민사회ꡑ를 대안적 수단으로 간주하는 것 역시 아니다. ꡒ이것[ꡐ시민사회ꡑ를 건설하고 확장하고 재건하자는 것]은 국가에 관한 얘기만큼이나 공허하다. … 시민사회란 본질적으로 국가의 틀 안에 있는 시민조직을 뜻한다.ꡓ 같은 책, 13-14쪽.}}


*주2) {{국가의ꡐ소멸ꡑ에 대한 맑스의 입장에는 종말목적론적인 면이 분명히 있지만 이러한 면은 경향적으로 교정되어 감에 유의하자. 「고타강령 비판」에서 국가 ꡐ소멸ꡑ의 종말목적론은 이렇게 정정된다: ꡒ국가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어떤 전화를 경험하는가? 환언하면 국가의 현재의 기능들과 유사한 어떤 사회적 기능들이 그 곳에서 유지되는가? 과학만이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ꡓ}}


ꡒ국가권력에 집중하는 쉬운 목표ꡓ를 설정해온 구좌익에 대한 월러스틴의 비판은 정당하지만, 이론적 정치적 진전을 위해서라면 맑스의 사상과 구좌익의 ꡐ맑스-레닌주의ꡑ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는 어떤 내적 모순이 해방의 사상으로서의 맑스의 사상으로 하여금 반대물인 ꡐ국가 이데올로기ꡑ로 전화하게 하였는지를 질문하여야 할 것이다.


맑스의 권력 이해는 사실은 맑스 사상의 가장 독창적이고 혁명적인 부분의 하나이다. 권력에 대한 명목론의 입장, 관계론적 이해는 푸코의 것이기에 앞서 맑스의 것이다. 맑스의 이러한 입장은 정치에 대한 부르주아적인 계약론적 문제설정을 근원적으로 무효화시킨다. 맑스에게 계급은 ꡐ사회학적 집단ꡑ이 아니라 관계적 범주이다.*주) 일종의 ꡐ투쟁의 존재론ꡑ이라 할 입장을 택하는 맑스에게는 계급들이 먼저 있어서 서로 투쟁하는 것이 아니다. 계급들은 투쟁 속에서만 존재하고 전화하며, 이 투쟁을 통하여 계급들 간의 세력관계는 변화한다. 그럴진대 맑스의 논리는 ꡒ권력 장악ꡓ의 논리(푸코)와 거리가 멀다. 그러나 권력 ꡐ장악ꡑ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용어법은 얼마간 불가피한데, 이는 그것이 법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대중적인 의사소통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주) {{에티엔 발리바르, 「잉여가치와 사회계급」, 『역사유물론 연구』, 푸른산, 1989.}}


맑스주의가 ꡒ국가권력에 집중ꡓ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ꡒ쉬운 목표ꡓ가 아니다. 계급권력으로서의 국가권력은 국가장치의 물질성 속에서 실존하며 행사된다. 결국 맑스주의에서 국가 또는 국가권력의 ꡐ장악ꡑ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이른바 계급관계의 전화 및 따라서 ꡐ비국가ꡑ를 향한 국가형태의 전화를 위한 하나의 조건이라는 데에 있다. 따라서 국가권력을 ꡐ장악ꡑ한다는 것은 단순히 정부기관의 장악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계급투쟁을 통한 국가형태의 전화 과정, 얼마든지 가역적일 수 있는 과정의 개시를 뜻할 뿐이다. 정부기관의 장악은 국가권력 ꡐ장악ꡑ의 한 계기일 뿐이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ꡐ맑스-레닌주의ꡑ에서 맑스의 사고의 이러한 측면은 전도된다. 1930년대에 스탈린은 소련에 계급들은 존재하지만 계급적대는 소멸했다고 선언한다. 노동자계급, 농민계급, 인텔리겐차라는 세 계급간의 관계는 적대관계가 아니라 유대관계가 된다. 국가의 계급적 성격은 부정되고, ꡐ프롤레타리아트만의 국가가 아닌 전인민의 국가ꡑ인 사회주의 국가는 ꡐ소멸ꡑ시켜야 할 국가가 아니라 발전시켜야 할 국가로 선언된다. 사회주의는 독자적인 생산양식이 되며, 계급적대가 소멸한 이 사회에서 이행의 동력은 ꡐ과학기술혁명ꡑ이 된다. 맑스의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 자체를 근저에서 폐기하고 맑스주의를 기술주의적 경제주의로 둔갑시키는 이러한 ꡐ맑스-레닌주의ꡑ의 노선에 대한 월러스틴의 비판은 정당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 내에서 전부터 제기되어온 것이다.


그러면 변혁 또는 해방에서 왜 국가권력 문제가 중요한가? 그것은 착취관계와 지배관계가 서로 불가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한 맑스의 비판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ꡐ경제의 자동성(自動性)ꡑ이라는 관념으로 요약될 수 있는 ꡐ경제적 이데올로기ꡑ에 대한 비판이다.*주1)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소유와 노동을 국가와 계급투쟁에 연관시킴으로써 경제적 이데올로기가 분리하는 경제와 정치라는 두 개의 현실을 단락(短絡)시키며,*주2) 정치적이지 않은 ꡐ경제적ꡑ인 착취라는 관념은 노동력 매매의 계약적 형태로부터 초래되는 법적 환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국가에는 계급 착취관계의 재생산이라는 기능이 귀속된다. 알튀세르는 이와 관련하여 ꡒ상부구조의 존재의 본질과 본성을 생산조건들(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재생산의 관점에서 사고해야 한다ꡓ는 테제를 제출한 바 있다.*주3) 재생산의 관점은 필연적으로 ꡐ국가 개념의 확장ꡑ을 요구하는데, 이 확장 방식에는 국가로 하여금 사회의 영역을 잠식해 가도록 하는 그람시의 방식과 ꡐ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ꡑ 개념을 도입하는 알튀세르의 방식이 있다.


*주1) {{발리바르는 법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는 ꡐ경제적 이데올로기ꡑ가 부르주아지의 국가 이데올로기라 한다.}}

*주2) {{맑스의 ꡐ이론적 단락ꡑ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맑스의 계급정치 사상」, 『역사유물론의 전화』, 앞의 책, 231-41쪽을 보라. 본래 단락(short circuit)이란 전기 회로의 두 점 사이를 작은 저항으로 접촉시키는 것을 말한다.}}


*주3) {{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 1991.}}


월러스틴은 맑스가 수행한 경제와 정치의 단락, 그리고 맑스 이후 그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진 국가 개념의 확장을 무시함으로써 국가 개념을 부르주아적인 법적 이데올로기, 경제적 이데올로기에 내맡겨둔다. 그리하여 사회적 관계의 변혁 또는 전화를 위한 ꡐ국가형태의 전화ꡑ의 문제설정, 국가의 발본적 민주화의 문제설정은 그의 이론체계 속에서 설자리가 없다. 그가 계급투쟁에 대한 맑스의 사상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하더라도,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적 관계의 혁명적 전화라는 고유하게 맑스적인 문제설정 및 그에 입각한 맑스의 핵심적 이론작업들은 그에게 의미를 갖지 못한다.


월러스틴 자신이 독창적으로 제시하는 반체계운동의 무기는 ꡒ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슬로건을 진지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체계에 과부하를 주는 전략ꡓ(『자유주의 이후』, 302쪽), ꡒ지배세력들이 받아들이기를 희망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체계의 위선과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체계에 과부하를 주는 전술ꡓ, 즉 ꡒ구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게 문자 그대로 자신의 보편적인 목표를 완수하도록 요구하는 것ꡓ(『자유주의 이후』, 346쪽)이다. 이러한 전략 또는 전술은 알튀세르, 발리바르의 ꡐ이데올로기적 지배의 잠재적 모순ꡑ 및 ꡐ대중의 이데올로기적 반역ꡑ의 논리*주)와 상통하는 바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에서와 달리 월러스틴의 경우에는 역사적 과정에서 ꡐ대중ꡑ이 특권적 지위를 갖지 못한다. 자연히 ꡐ대중과 계급의 변증법ꡑ이, 요컨대 대중운동의 힘과 동시에 그 위험, 그리고 이 운동의 조건인 대중과 혁명적 지식인의 결합의 모순이 사고될 수 없다. 그에게는 맑스적인 사회적 관계 개념, 그리고 ꡐ관계의 존재론ꡑ 위에서 구축되는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이 없기에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주) {{ꡒ역사의 피지배자들이 ꡐ위로부터ꡑ 그들에게 보내진 … 그들 자신의 가상의 요구들[예컨대 자유, 평등, 인권 등]에 부응하여 행동하고 그 결과들을 도출해내려고 집단적으로 시도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기존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에 반대하여 반역하는 것이다. 결국 주어진 역사적 정세 속에서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해후할 때, 그것이 혁명인 것이다. … ꡐ역사의 주체ꡑ인 계급은 없지만 … ꡐ역사를 만드는ꡑ, 즉 정치적 변화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대중들임은 결코 의심할 바 없다.ꡓ 에티엔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윤소영 엮음,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이론, 1993, 187-88쪽.}}


월러스틴은 추구해야 할 ꡒ민주적이고 평등한 체계ꡓ를 ꡒ벤섬적 자유주의의 이상ꡓ과 동시에 ꡒ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의] 이상ꡓ을 실현해 주는 구조로서 그린다(『유토피스틱스』, 102-110쪽). 자유주의의 종언을 선언하는 그의 변혁 노선이 ꡒ일종의 세계적인 사회적 자유주의ꡓ(?자유주의 이후?, 301쪽)의 유토피아로 귀결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주의에 대한 발본적 대안일 이러한 ꡒ세계적인 사회적 자유주의ꡓ가 유토피아적이라 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근본적인 면에서 자유주의와 논리적 상동성을 갖기 때문이다.


월러스틴은 ꡐ개인ꡑ과 대비하여 ꡐ집단ꡑ을 세계체계의 변혁의 주체로 설정한다. ꡐ세계적인 사회적 자유주의ꡑ가 ꡐ사회적ꡑ인 이유는 새로이 건설되어야 할 보편주의의 토대가 ꡒ원자론적 개인이 아니라 무수한 집단들ꡓ(『자유주의 이후』, 301쪽)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모든 개인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 것과 상동적으로, 월러스틴은 ꡒ집단의 비(非)배제성을 동시에 인식하면서 재편된 세계체계에 참여하는 모든 집단의 평등한 권리를 인정하는ꡓ 대안적 이데올로기(『자유주의 이후』, 342쪽)를 제시한다. 반체계세력을 구성하는 이 집단들은 ꡐ민주집중제ꡑ가 아니라 ꡒ집단 차원에서 투쟁상에 어떤 전략적인 우선순위도 존재하지 않는다ꡓ는 인식 위에 결집력이 있는 비통일적인 연대를 형성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전략적 우선순위가 배제된다면 어떠한 유효한 의식적인 집단적 실천이 가능한가? 각 집단들 내의 각종 대립 내지 적대와 집단들 간의 각종 대립 내지 적대는 어떻게 되는가? 개인 ꡐ주체ꡑ들 사이의 적대와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자유주의적 보편주의가 실제로는 엘리트주의적 특수주의이듯이, 집단 내의 개인들 사이의 적대와 차이, ꡐ집단 주체들ꡑ 사이의 적대와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ꡐ사회적 자유주의ꡑ의 추상적 보편주의 역시 또다른 종류의 엘리트주의적 특수주의로 귀결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ꡐ주체ꡑ들 간에 지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한, 개별 집단과 연대집단들을 이끌어 가는 것은 역시 개인적, 집단적 엘리트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월러스틴이 그렇게도 비판하는 ꡐ국가를 통한 개혁ꡑ이라는 ꡐ자유주의적ꡑ 이데올로기야말로 이러한 엘리트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 월러스틴의 ꡐ세계경제ꡑ 개념은 맑스주의의 비판적 개조와 따라서 유효화에 불가결하다. 그러나 그의 세계체계의 문제설정은 계급투쟁과 사회적 갈등들에 대한 맑스의 혁명적 관점 및 이론화 속에 적절히 배치될 때에만 그 해방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민족국가 내에서 완결되는 것으로서 사고되고 실천되는 계급정치가 필연적으로 반혁명적 개량주의로, 그의 용어를 쓰자면 ꡐ자유주의적ꡑ 정치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잘 입증해 주지만, 맑스의 ꡐ이론적 단락ꡑ에 대한 그의 이해의 결여는 혁명적인 정치로서의 대중정치에 대한 사고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3. 푸코: 또다른 역사유물론


국가권력 문제와 관련하여 월러스틴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맑스주의의 입장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이론가들 중에 미셸 푸코가 있다. 월러스틴이 맑스주의가 ꡒ국가권력에 집중ꡓ하는 것을 비판하지만 권력에 대한 자신의 독자적인 이론을 제시하지는 않음에 비해 푸코는 맑스주의와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권력 이론을 제시한다. 이와 상관적으로 월러스틴이 맑스주의의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을 형식적으로는 수용하는 반면 푸코는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 자체를 기각하고 그것에 미시권력/미시정치의 문제설정을 대치시킨다.


맑스주의 이론에 대한 푸코의 문제제기는 ꡒ총체적인(global) 또는 전체주의적인(totalitarian) 이론의 금지 효과ꡓ, 또는 ꡒ총체화하는 담론의 전제지배ꡓ*주1)로 집약될 수 있다. 총체적 이론화, 즉 사회의 한 부분의 총체화는 권력과 관련하여 ꡒ단 하나의 위대한 거부의 처소ꡓ를 설정하게 한다. 여기에 푸코는 ꡒ권력망 도처에 존재하는ꡓ ꡒ다양한 저항점들ꡓ을 대치시킨다.*주2)


*주1) {{Michel Foucault, Power/Knowledge: Selected Interviews & Other Writings 1972-1977, Pantheon Books, 1980, pp. 80, 83.}}


*주2) {{미셸 푸코, 『성의 역사 제1권: 앎의 의지』, 나남, 1990, 109쪽.}}


그러면 맑스주의 이론과 푸코의 이론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은 종말론적 이행론으로 이르게 하는 맑스주의의 ꡐ총체화적ꡑ 이론화는 억압적인 것이고 푸코의 반(反)총체화적 이론화는 해방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주1) 만약 맑스주의가 국가이데올로기로 전화한 맑스주의로서의 ꡐ맑스-레닌주의ꡑ와 동일한 것이라면 이렇게 보는 데 별로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맑스주의는 진지하게 고려해 볼 대상이 되지도 못할 것이다. 맑스의 이론화에는 역사적 과정을 총체화하는 측면, 목적론적 역사철학적 측면이 강력하게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정수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부터 유증받은 이러한 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발본적인 반총체화적인 면에 있다면, 우리는 맑스주의의 내적 모순들, 무엇보다도 맑스의 이론화의 내적 모순과 동요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주2) 그리고 ꡒ관념은 계급투쟁 속에 채택된 대중 이데올로기적 형태를 취하게 될 때만 역사적으로 능동적일 수 있다ꡓ*주3)고 한다면, 모순들의 존재는 어떤 면에서 맑스주의 이론의 오류의 지표라기 보다 그 위대성의 지표일 터이다. 이는 맑스주의가 완전히 무모순적이었다면, 즉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면, 그러한 맑스주의라면 대중을 장악하는 것, 대중 이데올로기로 전화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1) {{어떤 이들은 총체화적인 것을 근대적인 것과 동일시하여 맑스주의의 ꡐ근대적 문제설정ꡑ에 푸코, 들뢰즈의 ꡐ탈근대적 문제설정ꡑ을 대치시키기도 한다. 한 예로 이구표는 ꡒ탈근대적 담론들은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거대 담론들에 의해 공유된 근대적 개념 범주들의 적실성에 의문을 제기ꡓ한다고 하면서 ꡒ탈근대적 문제설정 안에서야 비로소 권력과 저항의 문제를 볼 수 있고 사고할 수 있다ꡓ고 한다(이구표, 「일상적 권력과 저항: 탈근대적 문제설정」, 『진보평론』, 제4호, 2000년 여름, 15쪽). 그가 맑스주의의 ꡐ근대적인ꡑ 계급투쟁의 문제설정이 권력과 저항의 문제를 볼 수 없게 한다고 말하려 한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러한 표현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논지에서 벗어나지만, 거시권력, 거시정치에 대한 담론은 거대담론이고 미시권력, 미시정치에 대한 담론들은 미시담론인가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푸코, 들뢰즈의 담론들이 맑스의 담론보다 덜 거대하다고 보지 않지만, 문제는 거대/미시가 전혀 아니다. ꡒꡐ큰 이야기들ꡑ(grand recits)이란 흥미롭게도 ꡐ포스트모더니즘ꡑ이 가장 고전적인 실증주의와 공유하는 암호인데, 이 사실은 미국에서 양자가 함께 번창하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ꡓ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말(「ꡐ세계ꡑ는 변화하였는가?」, 『이론』, 제11호, 95년 봄/여름, 200쪽)이나 ꡒ큰 이야기들의 종말을 통고한다는 것은 큰 이야기만큼이나 겸허하지 못한 것ꡓ이라는 알랭 바디우의 말(『철학을 위한 선언』, 백의, 1995, 27쪽)은 참고할 가치가 있다.}}


*주2) {{맑스의 이론화의 내적 모순과 동요에 대한 가장 중요한 분석으로는 에티엔 발리바르, 「맑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의 동요」, 『역사유물론의 전화』, 앞의 책을 보라.}}


*주3) {{루이 알튀세르, 「오늘의 맑스주의」, 서관모 엮음, 『역사적 맑스주의: 비판적 재평가』, 새길, 1993, 54쪽.}}


요컨대 맑스의 이론화에는 푸코의 이론화 이상으로 반총체화적인 면이 있기도 하며, 따라서 양자는 단순하게 대립하는 것,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푸코 자신이 이렇게 말한다:


ꡒ이는 총체적(global) 이론들이 꽤 수미일관한 방식으로 국지적(local) 연구를 위한 유용한 도구들을 제공해 오지 않았다는 것도, 계속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이 그 증거들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러한 도구들은 다음과 같은 조건, 즉 이 담론들의 이론적 통일성이 어떤 의미에서 미결의 상태에 두어진다는 조건, 또는 최소한 삭감되거나, 분할되거나, 전복되거나, 희화화되거나, 연극화되거나 한다는 등의 조건하에서만 제공되어 왔다고 믿는다.ꡓ*주)


*주) {{Michel Foucault, Power/Knowledge: Selected Interviews & Other Writings 1972-1977, Pantheon Books, 1980, pp. 80-81. 푸코의 권력이론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이 책의 국역본(『권력과 지식: 미셸 푸코와의 대담』, 나남, 1991)은 유감스럽게도 거의 창작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온통 오역 투성이며, 심지어 멋대로 말을 만들어 붙이거나 생략하고 있다. 여기 인용된 부분도 이 번역본에서는 정반대로(즉 ꡐ제공한다ꡑ는 내용을 ꡐ제공하지 않는다ꡑ는 내용으로) 번역하고 있을 뿐 아니라 원문에 없는 그럴 듯해 보이는 말을 만들어 붙이고 있다. 필시 이 번역본은 푸코뿐만 아니라 맑스의 ꡐ권력 이론ꡑ에 대한 대중적 오해를 유포시키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맑스주의가 총체적인 이론이라 해서 국지적 저항을 분석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 맑스주의 이론의 통일성은 해체되어야 하는데, 푸코의 이러한 주장은 ꡐ맑스주의 이론의 허구적 통일성ꡑ에 대한 알튀세르의 부단한 강조와 상통한다. 어떤 점에서 푸코는 맑스주의의 오류에 대해서라기보다 그 내적 모순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볼 수조차 있다. 푸코의 이름을 들어 맑스주의의 권력 이론을 비판하는 논자들이 흔히 맑스의 권력 이론과 자유주의적 권력 이론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무시함에 비해 정작 푸코는 자유주의의 법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맑스주의의 비판을 무시하지 않으며, 자유주의의 권력관과 맑스주의의 권력관의 커다란 차이를 인정한다.*주)


*주) {{ꡒ정치 제도들에 대한 다른 유형의 비판 - 실제적 권력이 법의 규칙들을 벗어난다는 것뿐만 아니라, 법체계 자체가 폭력을 행사하고, 일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폭력을 전유하며, 일반적인 법의 겉모습 아래 지배의 불균형과 불의를 작용하게 하는 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이 문제였기 때문에 훨씬 더 철저한 비판 - 이 19세기에 나타났다.(『앎의 의지』, 103쪽).}}


물론 푸코는 즉각 두 권력관의 공통점을 부각시키지만 이 때 그가 문제삼는 것은 흔히 오해되는 바와 달리 맑스주의의 실체론(substantialism)이 아니라 ꡐ경제주의ꡑ이다.


ꡒ내 의도는 [자유주의 권력관과 맑스주의 권력관 사이의] 수많은 거대한 차이들을 추상하려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렇지만 … 나는 정치권력에 대한 … 법적이고 말하자면 자유주의적인 관념(conception)과 맑스주의적 관념, 어쨌든 현재 맑스주의적이라 주장되는 특정한 관념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간주한다. 나는 이 공통점을 권력이론에서의 경제주의라 부르고자 한다. 이는 고전적, 법적 이론에서는 권력은 상품과 같이 소유할(possess) 수 있는, 그리고 … 이전하거나 양도할 수 있는 하나의 권리로 간주된다는 것을 말한다. … 다른 한 사례[ꡐ일반적인 맑스주의적 관념ꡑ]에서는 우리는 이러한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이 후자의 관념에는 다른 어떤 것, 즉 권력의 경제적 기능성(functionality)이라 부를 수 있을 어떤 것이 본래적으로 존재한다. 이 경제적 기능성은 일차적으로 권력이 생산관계들의 유지에서, 동시에 생산력들의 발전 및 특정한 형태가 가능하게 해 주는바 계급지배의 유지에서, 수행하는 역할의 견지에서 파악되는 한도 내에서 존재한다.ꡓ(Power/Knowledge, pp. 88-89).


푸코는 권력이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관념을 맑스주의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푸코가 권력을 영유되는 ꡐ물ꡑ로서 이해하는 실체론과 대립하는 권력에 대한 ꡐ명목론ꡑ의 입장에서 ꡒ권력은 제도도 아니고, 구조도 아니며, 일부 사람들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하는 특정한 권세도 아니다. 그것은 주어진 한 사회에서 복잡한 전략적 상황에 부여되는 이름이다ꡓ라고 할 때(『앎의 의지』, 107쪽) 그의 비판의 과녁은 자유주의이지 맑스주의가 아니다.


그리고 맑스주의의 권력이론에서의 경제주의에 대한 비판은 푸코에 의해 처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여러 방향에서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비판들이 근거 없는 것들이 아니고 맑스는 분명히 경제주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경제주의에 대한 가장 발본적인 비판이 존재한다.*주)


*주) {{에티엔 발리바르, 「맑스의 계급정치 사상」, 앞의 글, 231-41쪽 참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적 공간은 국가/사회, 정치/경제, 국가/자본, 속박/자유, 위계/평등, 공적 이해/사적 이해, 계획/시장과 같은 일련의 대립쌍들에 의해 전체적으로 구조화된, 근본적으로 이원적인 공간이다. 이러한 고전적 이항대립은 사회적 관계가 사람들 사이의 유대라는 것을 전제한다. 반면 맑스는 사회적 관계 일반이 적대들에 의해 구조화된다고 파악한다. 구체적으로 맑스의 착취 분석은 모든 사회적 관계가 물질적 제약의 성격에 따라서 정의되는 사회집단들에 대한 물질적 제약의 조직화라는 것을 함축한다.*주) 순수히 경제적인 착취란 없는 것이며, 비대칭적으로 분배된, 권력의 기술 및 수단이 없는 적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분석 속에 나타나는 맑스의 입장은 발본적인 반경제주의이다. 경제와 정치를 단락시키는 맑스의 분석은 나아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이항대립들 전체를 무효화시킨다. 따라서 맑스주의 권력이론에서의 경제주의에 대한 푸코의 비판은 정당하지만 동시에 부당하다.


*주) {{이에 대해서는 루이 알튀세르, 『자본론을 읽는다』, 두레, 1991, 제8장 「마르크스의 비판」을 보라.}}


실제 푸코는 맑스의 이론과 공식 맑스주의를 구분할 뿐 아니라 자신의 분석에서 맑스주의적 분석을 원용한다. 예컨대 『감시와 처벌』에서 그는 『자본』에서의 매뉴팩추어적 분업에 관한 맑스의 분석들을 원용하여 규율적 절차들이 어떻게 인간의 축적과 자본의 축적이라는 두 개의 과정을 통일시켜 육체의 효용을 증대시키는가를 증명하는데*주) 이것은 맑스가 수행한 ꡐ이론적 단락ꡑ에 정확히 상응하는 것이다. 『앎의 의지』(106-110쪽)에서 그가 수행하는 정치권력, 계급, 혁명에 대한 논의 역시 맑스주의의 이론 및 전략적 분석들과 양립불가능한 것이 결코 아니며, 물론 알튀세르의 ꡐ과잉결정ꡑ의 관념과 전혀 대립하지 않는다.


*주)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나남, 1994, 321-25쪽. 푸코와 맑스의 관계에 대한 이하의 논의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푸코와 마르크스: 명목론이라는 쟁점」, 『이론』, 제3호, 1992년 겨울, 302-309쪽의 난해한 논의를 이해하기 쉽게 주석한 것이다(이 번역본은 윤소영 엮음, 『알튀세르와 라캉: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서』, 공감, 1996에 재수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맑스와 푸코 사이의 감축불가능한 상위점은 어디에 있는가? 근본적인 상위점은 ꡐ국지적인 것ꡑ과 ꡐ총체적인 것ꡑ의, 말하자면 권력의 미시물리학과 거시물리학의 양자택일에 관한 것이 아니다. 푸코 자신이 맑스주의 이론이 국지적 연구를 위한 유용한 도구들을 제공해 왔다고 했듯이 맑스주의는 미시권력을 분석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푸코가 거시권력을 분석할 수 없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상위점은 사회적 갈등의 구조에 대해 맑스와 푸코가 제시하는 대립적인 관념에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맑스의 모순의 논리와 푸코의 세력관계의 논리의 대립이다. 맑스의 모순의 논리 속에서는 세력관계란 ꡐ모순의 전략적 계기ꡑ일 뿐인 반면, 푸코의 세력관계의 논리 속에서는 모순이란 기껏해야 ꡐ세력관계의 특수한 배치ꡑ일 뿐이다.


푸코가 권력에 대한 명목론적 입장에서 제출하는 다음과 같은 테제들은 맑스에게도 전적으로 타당하다: 권력은 점유할 수 있는 사물이 아니다; 권력관계는 다른 사회적 관계들에 외재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이다; 권력은 아래로부터 나온다; 권력관계는 의도적이고 동시에 비주체적이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앎의 의지』, 108-109쪽). 중요한 점은 이 테제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푸코와 마르크스』, 304쪽).*주) 푸코는 그것들을 순수히 외부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즉 전략적 갈등 속에서 갈등의 항(項)들은 서로 파괴하고 상쇄하고 강화하고 수정하지만 ꡐ대립물의 통일ꡑ에 의한 것과 같은 어떤 통일물을 형성하거나 상급의 개체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맑스의 모순의 논리 속에서는 갈등의 발전은 갈등관계 그 자체의 내재화를 조건으로 하고, 그 결과 적대적인 양항(兩項)은 이 관계의 담지자들이 된다. 즉 계급관계들은 피지배자들이 예속관계 그 자체를 파괴하고 그럼으로써 그 관계가 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개인들로 스스로 전화함으로써만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뿐인 화해불가능한 관계들이 되는 것이다.


*주) {{이 번역본에는 ꡒ이해되지는 않는다ꡓ가 ꡒ확장되지는 않는다ꡓ로 되어 있다. sꡑentendent(이해되다)를 sꡑetendent(확장되다)로 잘못 본 것이다.}}


푸코와 맑스의 이러한 상위는 실천에 대한 파악에서의 상위와 연관된다. 맑스적 관점에서는 실천은 ꡒ실천 자신의 외부에 주체화(subjectivation)의 효과들을 생산하는 외부적 생산ꡓ이다. 계급투쟁이라는 실천에 대해 말하자면, 계급들이라는 ꡐ주체들ꡑ이 존재하고 이어 이들이 서로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들의 동일성이 계급투쟁의 효과이다. 계급적 주체성은 계급투쟁의 효과(주체화)로서 생산되는 것이다. 반면 푸코에게 권력은 우선적으로 육체들 그 자체에 대하여 작용하며 우선적으로 주체화를 겨냥하는, 그 결과 지식 효과들을 생산하는 생산적 실천이다. 결국 푸코적인 세력관계 논리는 ꡒ삶의 어떤 가소성(可塑性)ꡓ*주)이라는 관념에 의해 지지된다(『푸코와 마르크스』, 304쪽). 반면 맑스주의적인 모순의 논리는 ꡒ구조의 어떤 내재성ꡓ과 분리될 수 없다. 맑스에게 모순은 세력관계들에 내재적인 구조이기 때문이다.


*주) {{번역문에는 ꡐ가소성ꡑ(plasticite: 造型가능성)이 탄력성(elasticite)으로 잘못되어 있다.}}


맑스와 푸코의 이론은 각각 고유한 곤란을 내포한다. 맑스의 ꡐ역사유물론ꡑ은 물질성 속에서 또는 물질적인 것으로서 역사적인 것을 사고하는 하나의 시도이다. 그것은 ꡐ사회적 관계의 물질성ꡑ과 ꡐ모순의 역사성ꡑ이라는 테제들에 입각해 구성된다. 이 테제들은 결합되어 ꡐ모순의 효과에 의해 사회적 관계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적 전화의 필연성ꡑ이라는 하나의 테제를 형성한다. 여기서 곤란은 ꡐ모순들의 종언에 대한 상상적 예상ꡑ으로서의 변증법 즉 목적론적인 변증법과 구분되는, 모순들의 현실적(actual) 운동의 분석 내지 ꡐ현실적 모순ꡑ의 분석으로서의 변증법이 어떻게 사고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순수히 형식적인 모순(정의상 양립하지 않는 추상적 항들)이나 단순한 현실적 대립(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고 그 합력이나 균형점이 계산될 수 있는 서로 외재적인 힘들, 즉 모순의 양항의 관계가 대칭적인 종류의 ꡐ모순ꡑ)과 동시에 구별되는 ꡐ현실적 모순ꡑ을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마르크스주의적 변증법의 시금석이다.*주1) 맑스는 착취 분석에서 이러한 변증법의 요소를 제출하지만 그의 이러한 변증법은 공산주의 속에서의 모순들의 최종적인 화해를 예기하는 헤겔적인 변증법에 압도된다.*주2)


*주1) {{에티엔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앞의 책, 139-40쪽.}}


*주2) {{ꡐ현실적 모순ꡑ의 재정식화는 알튀세르의 작업 대상 자체였다. 알튀세르의 구조적 인과성 도식 자체는 주체(구성적 주체)를 근원적으로 추방하고자 한다. 문제는 어떤 ꡐ부정성ꡑ 개념이 없이는 구조적 적대를 발본적인 저항의 형태들을 취하는 화해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정식화시킬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가 해결할 수 없었던 곤란은 ꡐ주체 없는 부정성ꡑ을 사고하는 것이었다. Etienne Balibar, ꡒStructural Causality, Overdetermination, and Antagonismꡓ, A. Callari et al. eds., Postmodern Materialism and the Future of Marxist Theory, Wesleyan University Press, 1996, p. 119. 발리바르는 생산양식의 문제설정과 주체화양식의 문제설정의 절합에 입각한 시빌리테(civilite)의 정치를 정식화하면서 ꡒ그 효과성이 자신의 반대물을 통하여 작동하는 원인ꡓ으로서의 경제와 이데올로기라는 새로운 인과성 도식을 제출함으로써 나름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Etienne Balibar, ꡒThe Infinite Contradictionꡓ, Yale French Studies no 88, Yale University Press, 1995; ꡒ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Emancipation, Transformation, Civiliteꡓ, La crainte des masses, Galilee, 1997). 그 귀추를 더 지켜봐야 할 발리바르의 정식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는 서관모,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진보평론』, 제2호, 1999년 겨울, 274-80쪽을 보라.}}


푸코의 역사이론 역시 물질성 속에서 역사적인 것을 사고하는 하나의 시도라는 점에서 또하나의 ꡐ역사유물론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ꡐ유물론ꡑ과 그 자신이 말하는 ꡒ역사주의ꡓ는 맑스의 테제들과 조목조목 대립하는 테제들로 구성된다. 푸코는 ꡐ사회적 관계의 물질성ꡑ 테제 대신 ꡐ육체들에 대해 행사되는 것으로서의 권력의 배치들 및 실천들의 물질성ꡑ 테제를, ꡐ모순의 역사성ꡑ 테제 대신 ꡐ사건의 역사성ꡑ 테제를 제출한다. 여기서 곤란은 ꡒ삶의 변형(metamorphoses)의 지평*주)이라는 또다른 형태의 목적론 속에 역사적 사건을 각인하지 않고 육체의 물질성에 입각해서 역사성의 범주들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ꡓ 하는 데에 있다(『푸코와 마르크스』, 307쪽). 맑스의 역사유물론이 역사적 시간의 논리로서의 모순이라는 역사철학의 ꡐ유심론ꡑ에 시달리고 있다면, 푸코의 ꡐ유물론ꡑ과 ꡐ역사주의ꡑ에 대해서는 ꡐ생기론ꡑ의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맑스가 사회적 관계들의 물질성에서 변증법의 관념성(idealite)으로 부단히 이행하고 있다면, 푸코는 육체의 물질성에서 삶의 관념성으로 이행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주) {{이에 대해서는 『앎의 의지』, 155쪽의 다음과 같은 언명을 참고하라: ꡒ … 권력에 대항하는 세력은 … 삶과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버팀목으로 삼았다. … 요구되고 목표의 역할을 하는 것은 근본적인 욕구, 인간의 구체적인 본질, 인간이 지닌 잠재성의 실현, 풍부한 가능성으로 이해된 삶이다. … 그리하여 정치적 투쟁이 법의 확립을 가로질러 표명된다 할지라도, 그러한 투쟁의 쟁점이 된 것은 법이라기보다는 삶이다. 삶ㆍ육체ㆍ건강ㆍ행복 그리고 욕구의 만족에 대한 ꡐ권리ꡑ, 모든 탄압이나 ꡐ소외ꡑ를 넘어 인간의 참모습과 모든 가능성을 되찾을 권리 … 그 모든 새로운 권력 절차들에 대한 정치적 반응이었다.ꡓ 물론 이러한 ꡐ삶ꡑ은 바로 푸코 자신의 정치적 투쟁의 목표이기도 했다. 푸코의 이러한 삶의 변형(완전한 실현)의 목적론을 맑스의 ꡒ총체적 인간ꡓ의 실현(『자본』, 제1권)의 목적론과 비교해 볼 수도 있겠다.}}


문제는 푸코의 ꡐ유물론ꡑ의 모호성 또는 내적 한계에 있다. 푸코는 육체에 행사되는 것으로서의 권력의 관계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러나 충분히 명목론적(=관계론적)이기 위해서는 육체 자체를 사회적 관계들의 견지에서, 무엇보다도 계급적 관계, 성적 관계, 지적 관계의 견지에서 사고해야 한다(『푸코와 마르크스』, 308쪽). 즉 계급적대, 성적 적대, 지적 적대가 관통하는 것으로서의 육체를 사고해야 한다.*주1) 그러나 적대에 의해 구조화되는 것으로서의 사회적 관계 개념을 기각하는 그는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리하여 말년에 『성의 역사』 제2권, 제3권에서 그가 탐구하는 것은 ꡒ개인을 도덕적 행위의 주체로서 성립하게 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양식의 완성으로 이해된 ꡐ윤리ꡑ의 역사ꡓ*주2)이다. 푸코의 관심은 이제 육체에 행사되는 것으로서의 권력과 그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ꡒ자기에의 배려에 의해 지배되는 삶의 기술ꡓ, ꡒ존재의 기술ꡓ 또는 ꡒ자아의 테크닉ꡓ*주3)으로 이행한다. 이제 그에게는 세계의 변혁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산/전화가 문제이다. 그의 역사이론은 여전히 ꡐ역사주의적ꡑ이겠지만 그것이 여전히 ꡐ유물론적ꡑ이라 말하기는 곤란할 것이다. 따라서 미시ꡐ정치ꡑ도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된다.


*주1) {{물론 육체를 관통하는 것은 이 세 가지 보편적인 적대적 관계들만이 아니다.}}


*주2) {{미셸 푸코, 『성의 역사 제2권: 쾌락의 활용』(1984), 나남, 1990, 267쪽.}}


*주3) {{미셸 푸코, 『성의 역사 제3권: 자기에의 배려』(1984), 나남, 1990.}}


물론 말년의 푸코의 이러한 이론적 진화는 예정된 것이 아니다. 『감시와 처벌』(1975)과 『앎의 의지』(1976)에서 제출되는 그의 역사이론은 이후의 그의 이론화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 중요한 거대한 성과, 역사이론에서 새로이 개척된 하나의 대륙이다. 푸코 덕분에 우리는 하나의 ꡐ역사유물론ꡑ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대립하는 두 개의 ꡐ역사유물론ꡑ을 갖게 되었다. 역사유물론, 즉 ꡐ물질성 속에서 역사적인 것을 사고하는 시도ꡑ는 역사관념론으로 반전될 수 있는 필연적으로 모호한 시도이다. 맑스의 유물론도 푸코의 유물론도 이러한 모호함 내지 내적인 모순들을 지니고 있다. 맑스주의가 그 유효화를 위하여 근원적으로 개조되지 않으면 안 되는 오늘날 우리가 맑스의 작업에만 준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대립하는 푸코의 작업에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따라서 커다란 이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맑스주의를 위한 푸코의 활용과 관련하여 이 두 개의 유물론의 대립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푸코의 활용은 맑스의 이론과 푸코의 이론의 단순한 결합이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이해가능해지고 적용가능해지기 위해서 이론은 어떤 지점에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론의 고정점이 맑스에게는 사회적 관계요 푸코에게는 육체이다. 따라서 맑스와 푸코의 입장들 사이에서 하나를 택하고, 택한 그 입장에서 상대편의 이론화의 요소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방식으로, 푸코가 맑스를 활용하였듯이 맑스주의자들은 푸코를 활용할 수 있다. 양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맑스주의자로 남아있으면서 푸코주의자일 수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거나 남을 미혹시켜서는 곤란하다. ꡐ내적으로 모순적인 맑스ꡑ에 ꡐ무모순적인 푸코ꡑ를 대립시키고 이 대립을 ꡐ틀린 맑스ꡑ를 버리고 ꡐ맞는 푸코ꡑ를 선택하는 데 알리바이로 사용하는 것은 더욱 곤란하다. 중요한 것은 이론적 및 따라서 정치적 입장의 채택이지 이론들 간의 수미일관성의 비교가 아니다.


 



4. 결론


맑스주의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가들 중에서 월러스틴과 푸코는 특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을 맑스주의와 공유하면서 변혁적인 거시정치를 사고하고자 하는 월러스틴과,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 자체를 기각하고 그것에 미시권력/미시정치의 문제설정을 대치시키는 푸코 사이의 거리는 멀다. 그러나 그들의 작업에 대한 이상의 검토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맑스주의의 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맑스의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과 사회적 관계 개념의 중요성이다.


사회적 관계의 혁명적 전화 이외에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압제의 형태들을 역사적으로 폐지하는 다른 수단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적 관계의 혁명적 전화를 위한 실천은 조직된 집단적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조직된 집단적 실천 속에서 맑스가 주장했듯이 ꡐ대중이 역사를 만든다ꡑ. 그러한 실천이 실질적 해방을 낳을 수도, 새로운 야만을 산출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맑스주의에 고유한, 적대에 의해 구조화되는 것으로서의 ꡐ사회적 관계ꡑ 개념의 모든 중요성과 모든 곤란은 역사적 과정에서 대중들에게 부여되는 특권적 지위와 관련된다. 엘리트들이 아닌 대중들이 역사를 만든다는 입장, 만들어갈 수 있고 만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이 아니라면 왜 저 ꡐ유물론적(=비목적론적) 변증법ꡑ의 모험이 문제가 되겠는가.


월러스틴과 푸코의 작업에 대한 검토는 오늘날 여전히 해방의 정치로서의 대중정치를 사고하고자 하는 맑스주의자들에게 이론적 겸허의 미덕을, 즉 맑스주의의 한계들과 곤란들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해 주는 것 같다. 역으로 착취 및 착취에 관련된 압제 이외의 다른 종류의 억압들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다른 이론들 역시 맑스주의 앞에 겸허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억압에 저항하고자 하는 이론이 오만하다면 그것은 또하나의 억압의 원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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