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앙TV>가 방영하고 있는 "대국굴기(大國堀起)"에 대해 서방 언론들의 관심도 높은 모양이다. 전지구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중국의 자신감이 표출된 이 프로그램의 방영은 서구에 대한 시각과 중국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분명 지난날 "하상(河觴)"과는 사뭇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하상>이 거의 맹목적인 서구 편향을 보여준 데 비해, <대국굴기>는 서구 강대국들의 흥망을 추적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암암리에 중국이 그로부터 교훈을 얻어 강대국으로 부상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영국의 의회제도나 미국의 민주주의를 높이 칭찬하는 것도 실상은 이러한 교훈을 이끌어내기 위한 일환이다.

 중국의 최근 행보 또한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스스로가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방증해준다. 후진타오 주석의 아프리카 순방과 인도와의 정치적-경제적 협력("친디아"), 파키스탄과의 공고한 유대 확인 등은 국제사회에서 중국이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것으로 해석가능하다. 아래에 걸어놓은 글은 <대국굴기>의 방영과 관련한 <뉴욕타임즈>의 기사 한 토막이다. "거짓된 겸손을 흘리는" "부끄러움 타는 거인"이라는  표제가 의미심장하다. 인터뷰로 실린 중국인 교수들의 낙관적인 발언과 더불어, 눈에 보이지 않는 미국인들의 경계심을 엿보는 것도 한 재미다.

 중국이 현재까지는 "성공적인" 발전주의 국가로서의 행보를 걸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역사의 '우연'과 대면하기 위한 처방으로 강대국의 흥망성쇠를 공부하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긴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내부의 점증하는 모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어떨까. 단순히 "조화사회"를 외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UK]

 

 

 

China Shows Signs of Losing False Modesty

Photographs from China Central Television

 

 

http://www.nytimes.com/2006/12/09/world/asia/09china.html?_r=1&oref=slo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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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이를 접고 알라딘 서재에 자리를 잡은지도 어느새 한달이 다 되어간다. 본래 가장 애용하는 인터넷 서점인데다 좋아하는 선배의 서재를 매일 들락거리다보니, 낯설거나 어색한 것은 없다. 오히려 나는 <책>이라는 공통의 화제를 중심으로 모인 이들이 있다는 게 무엇보다 좋았다. 무언가 공통적인 관심사를 가진 이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들어선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즐거운 일이기에.

 (처음 올렸던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아직은 학기가 끝나지 않아서 마음의 여유가 없는 탓에 리뷰나 서평을 쓰기는 힘들어서, 주로 그동안 갈무리해두고 싶었던 자료들을 올리고 있다. 예전에 프리챌이나 싸이에 올렸던 것들도 있지만, 주로 최근의 것들이다. 이 점에서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알라딘에는 아무래도 다른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기능보다는 제한되어 있는 것들이 많아서 나누고 싶은 자료들을 제대로 공유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페이퍼 쓰기는 텍스트를 붙이는 데는 매우 편리하지만, 한글 파일이나 PDF 파일을 등재할 수는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따라서 업로드할 수 있는 자료들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논문들의 경우 스크롤의 압박-_-으로 특히 가독성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알라딘을 택하기 전에 네이버나 진보넷의 블로그를 고려해본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 페이퍼의 기본적인 목적이 자료의 업로드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는 공연한 불평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앞으로 공유하고 싶은 자료들을 어떻게 올려야할지는 여전히 고민이다.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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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언론 <레디앙>에서 예전 <진보정치>에서 실렸던 기사를 비롯하여 다양한 사회주의자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면모를 다루고 있는 꼭지이다. 아인슈타인과 헬런 켈러와 같은 유명한 사례에서부터 존 스타인벡이나 마릴린 먼로와 같은 인물들이 다뤄진다. 일종의 간략한 전기와 같은 구성으로 쉽게 읽기도 편하고, 개인적으로는 간간히 들어간 사진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UK]

 

 

 

http://www.redian.org/news/articleList.html?sc_serial_code=SRN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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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통신] 역사 참극을 상상할 수 없다는 그대에게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한 독일화가 오토 딕스
전쟁실체 폭로하는 그림으로 2차대전을 경고했다
상상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자각하지 않는 순간 참극은 반복된다
한겨레 한승동 기자
» 부상병
시대의 증인들 (3)

광주에 1주일 정도 머물면서 전남대에서 3번의 강연과 특별강의를 했다. 인문학연구소 주최 강연회의 연제는 ‘난민과 국민 사이-팔레스타인과 재일조선인’. 이어서 미술과 신경호 교수 초청에 따른 특강 ‘오토 딕스(Otto Dix)와 유럽 리얼리즘’. 3번째는 철학과 주관 ‘상호문화철학의 문제들’을 다룬 국제회의에서 ‘일본 국민주의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제목의 보고를 했다.

모두 많은 학생들이 참가했는데, 그들은 적극적이고 진지했다. 시니컬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 일본 학생들과는 다른 인상으로, 호감이 갔다. 하지만 몇몇 학생들한테서 들은 의견은 일본 학생들과 공통된 것이었다.

“선생은 팔레스타인 난민과 같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런 상상력을 지닐 수 있는지 모르겠다.” “선생들이나 선배들은 광주 5.18을 비롯한 고난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라고 하지만 우리로선 아무래도 실감할 수 없기 때문에 때론 그것을 억압이나 강제라고 느끼게 된다.”

이 젊은이들을 비난하는 건 무의미하며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여기엔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난문(難問)이 암시돼 있다. 바로 이 난문 때문에 프리모 레비 등 ‘시대의 증인’들은 고민했다. 우리도 고민하며 헤쳐나갈 수밖에 없다.

독일 화가 오토 딕스도 또한 이 난문과 격투를 벌였다. ‘시대의 증인’ 가운데 한사람이다. 1891년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그림 재능을 인정받아 드레스덴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조국애’를 앞세운 어른들 선동에 넘어가 많은 젊은이들이 앞다퉈 전장으로 향했다. 그들에게 전쟁은 영웅적이고 로만틱한 전설과 같은 것이었다. 23살의 대학생이었던 딕스도 이 열광적인 기분을 동시대 청년들과 공유하고 있었다. 그는 자원입대해 최전선에서 병사로서 전쟁을 경험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체험한 독일 예술가는 적지 않다. 하지만 딕스만큼 가열차게 최전선을 구석구석 핥듯이 경험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사상 첫 총력전이었다.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독가스, 기관총, 항공기, 잠수함 등 근대무기가 대대적으로 사용됐다. 독일과 프랑스 국경지대인 서부전선에서는 장기간 참호전이 이어졌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은 4년 이상 계속됐다. 두 진영 합해 대체로 6500만에 이르는 병사들이 동원돼 그들중 약 1천만명이 전사하는 사상 유례없는 소모전이었다. 딕스가 실제 체험한 전쟁은 결코 영웅적이지도 로만틱하지도 않았다. “이, 쥐, 철조망, 벼룩, 유탄, 폭탄, 구멍, 사체, 피, 포화, 술, 고양이, 독가스, 캐논포, 똥, 포탄, 박격포, 사격, 칼, 이것이 전쟁! 모두 악마의 짓거리!” -딕스의 전장일기에 나열돼 있던 글들이다.

그러나 전후 독일사회는 극도의 인플레 속에서 전쟁에서 다친 사람들이 소외당하는 한편으로 나치스 등 극우세력이 대두하는 사회불안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너무 일찍 전쟁의 기억을 과거로 흘려보내고 다음 전쟁을 향하여 난 가파른 고갯길을 달려 내려가려 하고 있었다.




딕스의 연작 판화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6년 뒤인 1924년에 간행돼 발표와 동시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비평가는 그 작품을 “오싹할 정도의 인간 망각벽을 깨부순다”고 평했다. (위 그림은 그 중 한 점인 <부상병>)

»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 성공회대 연구교수
그 뒤에도 딕스는 전쟁의 비참과 어리석음을 철저히 그려내는 작업을 계속했다. 우파는 그 작품들을 “조국을 위한 희생이라는 숭고한 관념”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1933년 나치스가 정권을 탈취하자 딕스는 대학에서 쫓겨났다. 그의 작품은 ‘퇴폐예술’이란 낙인이 찍혀 압수되고 파괴당했다. 한때는 히틀러 암살계획에 관여한 혐의로 구속돼 취조당한 적도 있다.

그가 경고한대로 두번째의 세계대전이 일어나 첫번째보다 훨씬 더 심대한 파괴와 살륙이 자행됐다. 제1차 대전 종전으로부터 90년. 제2차 대전 종전으로부터 60년. 인류사회에선 아직 전쟁, 파괴, 살륙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오싹할 정도의 인간 망각벽”은 변함이 없다.

앞서 얘기한 학생들의 의견에 대한 내 대답은 이랬다. “그 말대로, 타자의 고통이나 과거의 고난에 대한 상상력을 지니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에겐 그런 상상력이 있다고 간단히 얘기하는 건 불성실하며 심지어 위선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애써 ‘상상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자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방기하는 순간 시니시즘(냉소)이 개가를 올리고 참극이 반복된다.”

번역=한승동 선임기자

 

 

 

 8일 오후에 학교에서 "난민과 국민 사이에서"라는 제목으로 서경식 선생의 강연이 있었다. 벼르고 있던  참이었지만 발표가 있던 수업 때문에 결국 가지 못했다. 꽤나 아쉽다. 선생의 글은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씩 조금씩 읽어가야 할 것만 같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대적 감수성이 부재하는 우리 시대에, 그의 무거운(!) 발언이 모두의 마음에 '각인'되기를 바란다.

 “그 말대로, 타자의 고통이나 과거의 고난에 대한 상상력을 지니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에겐 그런 상상력이 있다고 간단히 얘기하는 건 불성실하며 심지어 위선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애써 ‘상상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자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방기하는 순간 시니시즘(냉소)이 개가를 올리고 참극이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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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6-12-09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감니다...

청년도반 2006-12-09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라님/ 반갑습니다. 처음 글을 남겨주신 분이네요.

앞으로 종종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

바라 2006-12-09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명록에 발마스님의 흔적도 있군요^^; 닉넴이 멋지십니다.
종종 좋은 글들 보러 오겠습니다...

청년도반 2006-12-10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청년도반의 뜻을 알아차리신건가요? 靑年+道伴입니다만. 물론 불교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

서재를 꾸린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변변찮긴 하지만, 종종 들러서 좋은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덧) 바라님도 발마스님을 아시는군요. :)
 

서양 제국 ‘타산지석’ 삼은 자신감
한겨레
» 최근 ‘강대국의 흥성’(원제 ‘대국굴기’)이라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가 중국사회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켰다. 서세동점 이래 세계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준 대국들의 흥망성쇠를 다룬 이 다큐 제작은 다음 대국으로 떠오를 중국의 자신감을 은연중 드러내면서 그때를 위해 국민들을 교육시키고 있는 것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상징하는 상하이 푸둥지구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16)

중국 후끈 달군 ‘강대국의 흥성’ TV다큐 미래 사회에 대한 그들 자부심 엿보이네
강력한 중앙권력·타협 정신·전쟁 반대 이런 ‘열쇳말’로 그들 문제 풀 수 있을까

 

냉정한 다큐 하나가 중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어디선가 당시, 송사, 원곡, 명청소설 그리고 당대 중국은 다큐멘터리(紀錄片)라는 말을 본 적이 있었는데 과연 명불허전이라고 ‘강대국의 흥성’(원제는 대국굴기)이라는 TV 다큐멘터리가 중국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더구나 원 제목에서 등장하는 대국이니 굴기(堀起)니 하는 단어는 상당히 민감할 수 있는 말들이 아닌가. 중국위협론, 화평굴기론(和平堀起), 화평발전론 등 일련의 ‘원소’들과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리 저리 수소문해서 완전히 ‘독파’하지는 못했지만 거의 다 보았다. 한 줄 평을 말하자면 중국판 영상 세계사라고 할 수 있다.

 

가만히 컴퓨터에 앉아서 인류의 역사를 좌지우지했던 강대국의 흥망성쇠를 영상으로 보는 한편 카메라 렌즈 저편에 있는 중국의 시각을 생각해보는 동안은 사립문 밖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알았다는 선인들의 심정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하!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이렇게 해서 형성된 것이었구나! 서양을 알아야 중국을 알 수 있고, 또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자각을 하고 있던 차에 개인적으로 이 다큐는 정말 유익한 공부가 되었다.

 

‘강대국의 흥성’은 <중국중앙텔레비전>의 경제채널(CCTV 2)에서 지난 달 13일부터 24일까지 12회에 걸쳐 방영된 다큐멘터리다. 놀라운 것은 황금시간대라고 할 수 있는 저녁 9시30분부터 매일 방영되었다는 사실이다. 한 회의 분량은 50분. 현재 반응이 좋아 다시 재방영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도 좋은 다큐멘터리를 TV에서 많이 방영하지만 대개 많은 사람들이 보기 쉽지 않은 심야에 드문드문 편성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렇게 좋은 시간대에 매일 12일 동안 방영했으니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15세기 이래 지리 대발견 이후 전지구적인 영향을 미쳤던 아홉 개의 강대국, 즉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미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합쳐서 한 회, 영국 러시아 미국은 각각 비중있게 두 회씩, 나머지 국가는 한 회의 분량으로 처리하였다. 마지막은 전체를 총괄하는 결론편. 대부분 과거에 ‘식민주의자’ 혹은 ‘제국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였던 나라들이다.

 

 

‘조화사회 건립’ 당위성 역설

나는 이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회를 보고 <맹자>의 마지막 구절이 생각났다. 맹자가 요임금으로부터 공자까지 대략 500년마다 출현했던 성인의 계보를 하나하나 열거하다가 불쑥 “공자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가 백여년이니 성인이 살았던 때와 시간적 거리가 멀지 않고 성인이 살았던 곳과 이토록 가까운 곳에 살고 있건만 (성인이) 없다면 또한 없을 것이로다!”라는 유명한 말을 꺼낸다. ‘내가 바로 성인의 도통을 잇는 오늘날의 성인’이라는 자부심을 에둘러 이렇게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다큐멘터리에서도 포르투갈로부터 미국까지 시대순으로 다룬 다음 마지막 총괄편에서는 이런 나레이션으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었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진부한 사유방식과 세계가 대치하던 시대의 갖가지 편견을 버린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미래의 오백년 내지 더 긴 시간동안 세계가 발전하려면 여전히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21세기의 변화가 강대국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점은 분명하다. 영구평화, 공동번영의 조화사회를 건립하는 것이 인류가 공동으로 노력해야 하는 방향이라는 것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조화사회를 역설하고 있는 중국이 미래 세계의 역사에서 차지할 역할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나오는 대목이다. 강대국의 역사를 훑으면서 일본은 있는데 중국은 없을까라고 생각했는데 화면 저편에서 강대국의 흥망성쇠를 차분히 바라보고 있는 중국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서구 열강의 흥망사에서 겸허하게 배워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지만 그렇다고 서구를 중심에 놓고 자신의 전통을 단순하게 비판하지도 않는다.

 

이 점은 1988년 방영되어 커다란 풍파를 불러일으켰던 <황허의 요절>(원제는 <하상>인데 대본은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1989년에 번역 출판되었다)과 대비된다. 이 다큐에서는 대외무역과 자유주의 전통으로 대표되는 개방적인 해양의 남색문명과 중국 내륙의 황허유역으로 대표되는 전제적이고 폐쇄적인 황색문명을 단순하고도 선명하게 대비시키면서 서양을 이상화하고 있었다. 당시 수많은 지식인들의 서양에 대한 관념도 이런 측면이 농후하였다. 그런데 이 작품은 기실 당시 자오쯔양 당 총서기의 정책방향을 찬양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천안문 사태를 계기로 자오쯔양은 실각하고 이 작품은 민족허무주의를 조장하는 반전통적인 작품으로 비판받았다.

 

이에 비하면 ‘강대국의 흥성’은 3년에 걸쳐 직접 9개의 나라를 방문하여 중요 문서나 유적 등을 현지 촬영하기도 하고 관련 전문가의 인터뷰를 집어넣는 등 이데올로기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역사를 상당히 사실적이고도 객관적으로 다루고자 노력했다. 특히 이 작품에 커다란 영감을 제공했던 <강대국의 흥망>의 저자 폴 케네디를 비롯하여 세계체제론의 이매뉴얼 월러스틴 등 학자, 전문가, 정치인 등의 인터뷰를 중간 중간에 배치해서 역사적 사실을 차분히 정리해주고 있다.

 

 

제국 지위 누렸던 9개 나라 3년에 걸쳐 현지 촬영한 대작
당 최고결정기구 중앙정치국의 주요국 발전사 학습소식 듣고
엘리트가 만들었다고 하니 지도부와 엘리트가 ‘통하네’

서구 미화하지 않고 객관화

관방 매체의 미묘한 변화를 통해 어떤 정치적 신호를 감지하는 전통이 있는 중국 문화 속에서 이 다큐의 방영 뒤에 어떤 정치적 배경이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궁금해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 다큐의 총감독인 런쉐안은 단호한 어조로 부정하고 있다. 그가 이 다큐를 만들게 된 것은 2003년 11월 말에 출근하면서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하나의 소식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15세기 이래의 세계 주요 국가의 발전역사에 대해 중국공산당의 실질적인 최고 결정기구라고 할 수 있는 중앙정치국에서 집단학습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아주주간>에 따르면 이 집단학습활동은 2002년 10월26일부터 시작하여 평균 45일 만에 한 차례씩 지속적으로 열리는데 가장 최근에는 10월23일에 열렸다고 한다.

 

이 다큐를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9차 회의(2003년 11월24일)에서 주제발표를 했으며 이 다큐의 학술적 자문을 담당했던 첸청단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교수는 이 다큐가 세계사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세계적 사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도 이 다큐를 보고 복잡다단한 근현대 세계사의 중요 맥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런 소식을 종합해볼 때 이 다큐는 중앙정부의 어떤 의도가 직접적으로 개입되어 만들어졌다기 보다는 영서일점통(靈犀一點通)이라고 중국의 주요 엘리트들과 중국지도부가 은연중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다큐는 결국 서구 열강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아주주간>에서는 제도의 건설과 창안, 국민의 문화소질, 그리고 이른바 소프트파워라고 개괄하고 있다. 모두 일리 있는 말들이다. 그러나 나는 이 다큐를 보는 동안 제일 먼저 국가의 중요성이랄까 강력한 중앙권력이랄까 하는 것을 설파하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왜냐하면 지방 분산적인 봉건체제에서 먼저 강력한 중앙권력을 가진 민족국가를 이룩한 나라가 세계사의 무대에서 크게 활약했던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그 다음으로 중요하게 그리고 있다고 생각된 것이 타협의 정신이다. 아무리 강력한 민족국가를 형성해서 세계를 주름잡는다고 하더라도 타협의 정신으로 자기 사회의 모순을 적절히 완화시킬 수 없는 국가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거나 쇠락의 길을 걸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론하고 싶은 것이 전쟁 반대의 정신이다. 1차대전 때는 33개국에 파급되어 1000만명 이상이 죽었고 2차대전 때는 61개국에 파급되어 5000만명 이상이 죽었다고 하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를 거꾸로 뒤집어 보면 현재 중국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권력을 이양받은 지방권력은 점차 비대해지면서 부패하는 현상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급속한 경제성장을 달성하는 이면에서 이른바 삼대모순이 중국사회의 안정을 위협하고 있다. 북핵문제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한 베네데토 크로체의 말은 참으로 옳도다!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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