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원신문 156호 _2007년 11월 6일(화)

[연속기획_ 억압된 ‘실재(the Real)’의 귀환②]

 


인도계 영국 철학자인 램 로이 바스카(Ram Roy Bhaskar: 1944~)는 ‘비판적 실재론’의 주요 이론가이다. 그는 70년대 중반 이래, 한편으로는 실증주의적 과학관과 다른 한편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들과 대립하며 ‘실재’에 대한 비판이성적 접근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인식론적 물음과 존재론적 물음 사이의 ‘간극’은 바스카의 실재론이 구조적 ‘결정’과 실천적 ‘자유’ 사이에서 변증법적 긴장―이를테면 해방적 ‘운동성’―을 유지하는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이 쓸고 간 폐허 뒤에 왜소하게 남겨진 우리 지식계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국내에 바스카의 이론을 꾸준히 소개하고 있는 강원대 사회학과 이기홍 교수가 장문의 글로 바스카와 실재의 문제를 다루어주었다. 원우들의 열독을 바란다.  (편집자 주)

 


 


로이 바스카와 ‘실재’의 해방적 변증법


지금도 맹활약 중인 영국의 (과학)철학자 로이 바스카의 견해는 보통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으로 불린다. 이 명칭은 ‘초월적 실재론(Transcendental Realism)’과 ‘비판적 자연주의(Critical Naturalism)’를 축약한 것으로 앞의 것은 (자연)과학에 대한 견해를, 뒤의 것은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견해를 특징짓는다. 바스카는, ‘비판적’이라는 단어와 ‘초월적’이라는 단어가 자신의 철학과 칸트철학과의 친화성을 보여준다면, 이와 동시에 ‘실재론’이라는 단어는 그것과의 차이를 나타낸다고 해설하면서 (자신이 명명한 것은 아닌) ‘비판적 실재론’이라는 명칭을 자기 철학의 대명사로 수용해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비판적 실재론은 철학과 인문사회과학들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움직임으로 이제는 완전히 국제적이고 다학문적인 것이 되었다.

 

 



바스카의 지적 궤적


바스카는 자신의 지적 궤적이 5개의 국면을 거쳐 발전해 왔다고 술회한다. 1975년에 ꡔ실재론적 과학론ꡕ을 출발하여 초월적 실재론의 과학철학을 제시한 다음, 1978년의 ꡔ자연주의의 가능성ꡕ에서는 비판적 자연주의적 입장의 사회과학철학을 발전시켰다. 이후, ꡔ과학적 실재론과 인간해방ꡕ등에서는 ‘설명적 비판’의 이론으로, ꡔ변증법: 자유의 맥박ꡕ등에서는 ‘초월적 변증법적 비판적 실재론’으로 논의를 옮겨갔다. 그리고 2002년의 ꡔ과학에서 해방으로ꡕ에서는 ‘메타-실재의 철학’으로 부르는 입장을 전개하고 있다. 과학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보편적인 자아실현의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는 이 5개의 국면은, 물론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뒤의 국면이 앞의 국면을 확대 또는 심화시키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실재의 귀환’이라는 기획 속에서의 바스카에 대한 논의는 주로 1국면과 2국면과 연관된다.



 


 

 

 

 

 

 

실증주의와 그 이후


 

바스카의 초월적 실재론은 20세기의 2/3을 지배해 온 실증주의적 과학관을 겨냥한 왕성한 비판활동의 맥락 속에서 등장하였다. 실증주의적 과학관은 흄(Hume)의 경험주의에 기초를 둔 것으로, 1920년대와 30년대의 비엔나학단(Vienna Circle)의 논리실증주의-- 마하, 피어슨(Pearson), 두엥(Duhem)의 인식론적 경험주의 및 환원주의와 프레게(Frege), 러셀(Russell) 그리고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논리적 혁신을 결합시킨 --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친숙해졌다. 과학을, 관찰과 실험을 통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일반화를 거쳐 이론을 구성하는, 또는 이론으로부터 가설을 연역하고 이 가설을 경험자료로 검증하는 활동으로 간주하는 상식적 견해도 이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물론 논리실증주의는 ‘귀납의 문제’라는 논리적 약점 때문에 뒤의 것을 유일의 ‘과학적 방법’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 견해는 오늘날에도 사회과학자들의 의식을 지배하여 이론에 대한 ‘가설 검증’을 사회연구의 본령으로 삼게 만들고 있다.


과학을 이렇게 해석하는 ‘실증주의적 환상’은 과학의 발전에 대한 일원론적 이론과 과학의 구조에 대한 연역주의적 이론을 축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일원론적 과학발전론에 대한 비판은 세 가지 원천들로부터 제기되었다. 첫째, 포퍼(Popper)와 그의 제자들인 라카토스(Lakatos) 및 파이어아벤트(Feyerabend) 등은 검증가능성(verifiability)이 아니라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이 과학의 인증서라고 주장하면서 갈릴레오나 아인슈타인 등이 보여준 혁명적 약진에서 과학의 인식론적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둘째, 쿤(Kuhn)과 그밖의 과학사학자 및 과학사회학자들은 과학적 지식의 생산과 변형이 사회적 요인들의 영향을 받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셋째 툴민(Toulmin), 셀라스(Sellars) 등과 같은 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은 과학에서의 사실들의 비원자성(non-atomistic character) 또는 이론의존성과 변화가능성을 강조하였다. 과학이 연역적 구조를 갖는다는 주장은 ‘설명은 개별 사례들을 보편법칙-- 경험적 규칙성으로 해석되는 -- 아래 연역적으로 포섭시키는 것에 의해 진행된다’는 설명에 대한 포퍼-헴펠의 이론을 핵심으로 한다. 이 주장에 대한 비판은 스크리븐(Michael Scriven), 헤세(Mary Hesse), 하레(Rom Harré) 등이 제기하였는데, 그들은 인과성 및 법칙에 대한 흄의 기준, 설명에 대한 헴펠(Hempel)의 기준, 하나의 과학을 더 기본적인 다른 과학으로 환원시키는 것에 대한 네이글(Nagel)의 기준이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 (바스카는 이런 기준들이 필요조건조차 되지 못함을 입증하였다)

 


이들의 견해는 이론의 진위가 경험(적 자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며 (이론의 경험적 미결정성), 경험이 이론과 무관하게 외부세계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에 기초하여 해석 또는 구성되는 것이라는 (경험의 이론의존성) 두 명제로 정리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과학의 이론이 ‘객관적인’ 경험에 기초하거나 경험으로 확인함으로써 ‘객관적 진리성’을 갖는다고 실증주의의 이상은 붕괴되었고, 과학의 객관성이나 합리성은 부인되었다. 쿤과 파이어벤트는 한 이론과 그것에 뒤이은 또다른 이론 사이에 의미가 공유되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러한 ‘비교불가능한’(incommensurble) 이론들 사이에서의 합리적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쿤의 ‘패러다임’ 개념은 상이한 과학자 공동체들이 상이한 이론체들을 타당하다고 믿으면서 그 속에서 연구한다고 제시한다. 또한 이것은 이론독립적인 세계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부인하는 (초관념론적) 회의주의를 조장한다. ‘상이한 이론을 믿는 사람들은 상이한 세계에 사는 것’이라고 믿으면서 지식의 상대성(인식론적 차원)에 직면하여 존재의 지속적인 독립적 실재성(존재론적 차원)을 부인하는 것이다.

 

 



탈근대주의 또는 실재의 붕괴


존재의 영역을 인식의 영역으로 부당하게 환원하는 것은 오늘날 탈근대주의(postmodernism) 담론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유행이기도 하다. 과학적 지식의 ‘객관적 기초’를 확보하고자 하는 ‘기초주의적 기획’에 대한 인식론적 의심은 탈근대주의의 핵심이다. 우선 탈근대주의자들은 모든 지식 주장(모든 사실, 진리, 그리고 타당성)은 오로지 그것들의 맥락 또는 패러다임 내에서만 ‘납득가능하며 논란가능하다’는 협약주의 과학관을 수용하여 과학의 생산물- 개념, 설명, 이론 -이 그 생산자들의 편견과 이해관심의 흔적을 담고 있다는 의심을 제기한다. 탈근대주의는 과학이 서구 근대성의 기획, 그리고 계급, 지위, 성, 인종 등을 둘러싼 여러 가지의 국지적이고 특수한 투쟁들과 결합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여성주의자들은 사회과학의 남성중심적 편견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여성성과 여자다움에 대한 그것의 규범적 구성 속의 과학의 정치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어떤 사회적 담화치고 그것의 진리주장이 역사과정을 모양지으려는 진행 중인 사회적 이해관심에 묶여있지 않은 것은 없으며 또한 동시에 그런 이해관심과의 연루를 감추지 않는 것도 없다. 더 이상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은 없으며 모든 지식은 동등한 인지적 지위를 갖는다.

 


이에 더하여, 사화과학의 지식은 인간이 구성한 상대적인 것이라는 견해에 함축된 인과성은 사회과학이 인간을 구성한다는 주장에 의해 균형지어진다. 예컨대 사회과학연구에서 특정의 기법의 사용은 필연적으로 그 ‘과학적 규칙’에 대한 동조를 요구하며, 그러므로 차례로 연구 작업이 연구자를 ‘구성한다.’ 여기서 탈근대주의자들은 ‘뭐든지 해도 좋다(anything goes)'는 페이어아벤트의 방법론적 언명을 원용하여 과학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과학적 방법‘의 대체물로 개인의 경험, 공감, 감정, 직관, 주관적 판단, 상상력, 다양한 형태의 창의성 등에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이러한 용어의 실질적 내용과 그것들의 방법론적 중요성은 상당히 모호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의사소통되기 힘들다. 이렇게 하여 합리적인 것으로서 과학적 지식은 공공연하게 의도적으로 그리고 반(反)객관주의적으로 해체된다.

 


‘실재’는 구성되는 것인가?


일단 인식적 특권의 장막을 제거하면 과학은 특히 문화적 및 권력적 특권의 그물에 걸려있는 사회적 힘으로 나타난다. 푸코가 지적하듯 진리에 대한 주장은, 불가피하게 권력의 행위 즉 인간성을 형성하려는 의지이다. 진리에의 의지 속에 감추어진 것은 권력에 대한 의지이다. 사회적 담론은 인종적, 성적, 민족적 그리고 그 밖의 유형의 정체성과 사회질서 그리고 제도적 기능화- 과학의 지적이고 사회적인 권위를 수반하는 -의 규범적 틀을 창출함으로써 사회세계를 모양짓는다. 과학적 지식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담론은 다른 (과학적 및 비과학적) 담론에 의해 생산된 사회적 의제를 불신하면서 그것의 규범적 정체성 및 질서 개념에 권위를 부여한다. 사회적 담론의 진리성을 보증하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담론이 진리의 언어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담론, 그것의 담지자 그리고 그것의 의제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어떤 담론의 인식적 특권을 주장하는 것은 그것의 사회적 가치와 의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의 생산자와 담지자들에게 대해서도 사회적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인식론의 정치학은 역사를 모양지으려는 사회적 투쟁과 결합되어 있다.


게다가 세계는 복합적이고 혼돈적이어서 이 모든 상호작용을 연결하는 실마리를 풀어내거나 파악하고 이것들에 결정적인 언명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임의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모든 것이 질서를 찾아낼 수 없도록 긴밀하게 상호문맥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설명’은 불가능하다. 에코는 ‘세계 내의 모든 질서는 신의 것이지만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고로 객관적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객관적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역사적 주체도 발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과학의 ‘객관적 기초’에 대한 탈근대주의자의 의심은 ‘객관적 실재’에 대한 의심으로 전화한다. 이미 협약주의 과학관이 ‘외부의 실재’를 패러다임적 가정-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동하는 -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제시하였거니와, 탈근대주의자들도 인간의 정신적 과정과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으로부터 독립된 실재를 부인한다. 확신에 찬 탈근대주의자들은 정신적 상태와 외부세계의 구분이란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다고 기각하면서 실재는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재하는 세계는 없다’는 보들리야르의 단언(ꡔ아메리카ꡕ)은 실재의 존재를 부인하는 탈근대주의의 경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디즈니랜드는 그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상정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것이다. 디즈니랜드 밖의 모든,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전적으로 이미지, 즉 ‘시뮬라크라(simulacra)’이다. ‘정신이 이해의 범주들을 제공하는 한, 사람들의 정신적 형상 내에 고유한 것 이외의 실재 세계는 없다.’ 과학적 탐구의 실재하는 객체들은 과학적 이론의 산물이며 정신의 자연발생적 활동의 산물이다. 이제 더 이상 ‘저기에’ 존재하는 실재 같은 것은 없다.


덧붙이면 탈근대주의가 실용주의적 정당화에 호소하는 것은 ‘아무 것도 다른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무한회귀의 함정’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일 것이다. 이론가가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할 보편적이거나 합리적인 기준을 갖고 있지 않은 한 그의 결정은 각 이론가가 수용하는 부분적이고 이질적이며 궁극적으로 비교불가능한 기준에 의해 이루어진다. 예컨대 ‘기초를 가진 담론은 국지적이고 민족중심적일 수밖에 없으며, 보편적 근거를 추구하는 일은 국지적이고 실용적인 정당화를 위해 포기해야 한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그리고 이론가들에게 기초를 가진 보편적 이론을 구성하게 위해 쏟았던 노력, 별다른 결실은 내지 못하면서 우리에게 그렇게 비싼 비용을 부담시킨 노력을 실용적이고 부분적인 도덕적 분석으로 전화하라고 권유한다.

 

 


탈근대주의의 ‘인식적 오류’


이러한 회의주의에 직면하여 바스카는 과학의 ‘실험활동’을 분석하여, 인과법칙과 사건들의 (경험적) 유형을 존재론적으로 구별한다. 경험과 사건들의 규칙적 결합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활동에 의존한다. 인간이 없는 세계에는 경험이란 없을 것이며, 사건들의 일정한 결합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없는 세계에서도, 이제 과학에 의해 발견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는 인과법칙은 계속 작동한다. 비록 그것과 부합되는 사건들의 연쇄가 거의 없고 경험이 전혀 없다 해도 말이다. 실험활동에 대한 분석은 그러므로 과학적 지식이, 인과법칙에 대한 주장이 ‘인간 없는 세계’의 가능성을 수반한다는 것, 그 법칙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법칙은 작동하리라는 것, 또한 그 결과가 실현되지 않았을 때에도 (또는 그 결과가 인간에 의해 지각되거나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즉 그것에 대한 경험적 확인을 허용하는 조건 밖에서도 그 법칙은 계속 작동한다는 것을 전제로 탐구되고 있음을 입증한다.


과학을 객체에 대한 실천적적 탐구로 파악하면, 인간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초사실적으로 작동하는 실재하는 구조들, 기제들, 과정들, 관계들 및 영역들이라는 인간중심적이지 않은 존재론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바스카는 지적한다. 과학은 사회적 생산물이지만 과학이 찾아내는 실재들은 그것들이 발견되기 전부터 그리고 그 발견과 무관하게 작동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늘 역사적으로 특정한 사회형태들 속에서 구성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지식의 대상들이 그 지식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움직인다는 것도 똑같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존재에 관한 진술이 지식에 관한 진술로 환원되거나 지식에 관한 진술에 입각하여 분석될 수 없다. 즉 존재론적 문제를 인식론적 용어로 번역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스카는 존재의 영역을 인식의 영역으로, 즉 존재의 문제를 인간의 속성으로 부당하게 환원하는 것을 ‘인식적 오류’라고 규정한다). 경험론 철학은 세계에 관한 지식에서 존재론을 배제하려고자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이라는 범주에 기초를 두는 (또는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실재를 동일화하는) 암묵적 존재론과 경험의 대상들이 가진 특징(원자적 사건들, 사건들 사이의 기계적 관계 및 규칙적 결합)에 기초를 두는 암묵적 실재론을 감추거나 위장한다. 그리고 그 (암묵적) 존재론이 그들의 견해에 부과하는 제약에 사로잡혀 과학에 관한 이성적 직관과 갈등하면서 ‘존재론적 긴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무한히 해결불가능한 문제들-귀납의 문제 등과 같은-의 연쇄, 이러한 직관의 인간중심적 대체 그리고 인식론의 방법론적 함의와 과학의 실재론적 실천 사이의 균열로 이어진다.


 


지식의 두 측면


지식에는 두 측면이 있다. 지식은 한편으로 그것을 생산하는 사람들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않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 외부의 어떤 객체에 대한 인식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이 두 측면을 바스카는 ‘지식의 자동적 대상(intransitive objects of knowledge)’과 ‘지식의 타동적 대상(transitive objects of knowledge)’으로 구분한다(쉽게 표현하면 이것들은 각각 ‘있는 그대로의 대상’과 인간이 ‘알아낸 대상’에 해당한다). 그리고 과학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라면 어느 것이거나 자동적 대상과 타동적 대상의 필연성을, 그리고 두 대상들의 비동일성을 명백히 인식할 것을 강조한다. 이 구분을 따르면 (경험론처럼) 사유를 주어진 객체의 기계적 함수로 간주하거나 (관념론처럼) 창조적 주체의 활동이 세계에 사물들을 부여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과학의 과정 밖에 존재하는 변함없는 실재적 객체들과, 과학적 실천의 함수로서 과학 속에서 생산되는 변화하는 인지적 객체들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과학이 없는 자동적 대상들의 세계는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타동적 대상들이 없는 즉 과학적이거나 전(前)과학적인 선행물이 없는 과학은 상상할 수 없다. 지식의 생산은 선행하는 지식재료에 의존하여 이루어진다. 사회적 생산물인 지식들-새로운 지식의 타동적 대상들로 구실할 수 있는-은 세계의 알려지지 않는 (그러나 알 수 있는) 자동적 대상들을 탐구하는 데 사용된다.

 



사회세계와 설명적 비판


그런데 지식의 (자동적) 대상의 존재는 인간활동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존재의 자동성 명제)를 ‘사회세계’에 적용할 때에는 혼란이 생긴다. 현상적으로 사회세계는 인간의 활동으로 구성되고 인간의 활동에 의존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자연세계에서는 지식의 대상들이 그것들에 대한 지식의 생산과정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움직이는 반면, 사회적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어떤 측면에서 인문사회과학적 지식은 그것의 대상에 대해 ‘내부적’이다. 이 맥락에서 바스카는 ‘변형적 사회활동 모델(trasformational model of social activity)’을 제안한다. 특정 시점의 사회는 그에 앞서 존재한 사람들이 재생산하거나 변형해온 구조들과 관습들과 관행들의 총체이며, 그러므로 사회는 그 시점에서의 행위주체들의 활동의 산물이 아니다. 사회(구조)는 의도적인 인간 활동에 필수적인 조건들을 제공하며, 특정 시점에서 인간 행위주체들의 활동은 그 사회(구조)를 재생산하거나 변형한다. 따라서 사회(구조)와 개인들은 범주적으로 구별되는 사회세계의 두 실재들이다. 그러므로 사회(구조)는 인간행위주체 (그리고 그들이 가진 지식)과 인과적 상호의존성을 갖지만, 존재적으로는 독립적인 자동성을 갖는다.


특히 사회구조가 그 구조에 대한 특정의 견해나 믿음을 가진 행위주체들의 실천에 의해 재생산되거나 변형된다는 이 모델은 사회적 존재와 의식에 대한 설명적 비판이 사회구조의 변형을 동반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더 심층적으로는 사회세계에 관해서는 사실진술과 가치진술 사이의 논리적 간격이 엄격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우선 대부분의 인문사회과학적 담론은 그 자체가 가치-침윤적(value-impregnated)인 것이다. 사회 상황에 대한 최상의 (가장 정확하거나 정밀하거나 완벽한) 서술은 거의 불가피하게 평가적일 것이다, 즉 가치함축을 갖는다. 그뿐 아니라, 사회세계에 관한 사실진술이나 이론진술은 행위주체의 실천적 판단에 경향과 동기를 부여하고 적절한 상황에서는 논리적으로 이것들을 수반한다(반면 실천적 고려는 사실적 및 이론적 판단에 경향과 동기를 부여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판단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회세계를 탐구하여 설명하는 연구가 갖는 설명적 비판의 가능성이 인문사회과학들이 가진 해방적 잠재력의 핵심이라고 바스카는 강조한다.


 


실천적 보수주의로서의 탈근대주의를 넘어서


인식적 오류를 벗어나지 못하는 탈근대주의는 모든 것을 회의함으로써 모든 것들을 비판하는 외양적인 급진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인간의 밖에 있는 실재에 대한 ‘이성적’ 인식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나아가 ‘실재’ 자체를 부인하는 견해는, 보수주의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또 주관적으로 보수적인 의향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실천적으로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이다. 객관적 실재 및 그것에 대한 합리적 인식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실재’를 개선하려는 활동을 질식시키고 그 활동의 방향을 마비시킨다. 탈근대주의가 정치적 절망의 이면에서 변혁을 향한 열정 대신 자기도취적인 개인주의와 쾌락주의를 탐닉하고 있음은 이것을 증거한다.

 



이기홍│강원대학교 사회학과 yikihong@kangw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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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례특강 ::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Jacques Derrida, 『Specters of Marx』)




▶ 강사 소개 : 진태원 (서울대 철학과 박사,『마르크스의 유령들』의 역자) 
                      

- 그 외 저서 : 『서양근대철학』(공저), 『라깡의 재탄생』(공저) 

                      

- 역서 : 『에코그라피』,『법의 힘』,『헤겔 또는 스피노자』,『스피노자와 정치』


▶ 일시 : 11월 24일(토) 오후 3시

▶ 장소 : 신촌 세미나네트워크 [새움] 강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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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시는 길 : 신촌 지하철역 1번출구 -> KFC 골목에서 우회전 -> 신보건약국 골목 -> 이박사 칼국수 건물 3층


 

 관심 있는 여러분들의 많은 참석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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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1-16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내한(!) 하시는군요. :)

청년도반 2007-11-17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 님/ 발마스 님 서재에서는 자주 뵈었던 것 같은데 반갑습니다. 네, 이미 들어오셨지요. ^^
 

교수신문 2007년 11월 12일 월요일

“‘봉기의 정치’와 ‘해방의 정치’ 오해”

>>반론 _ 백승욱 교수의 『대중들의 공포』 서평(교수신문 제458호)을 읽고

 

지난호 <교수신문>에 실린 백승욱 중앙대 교수(사회학)의 『대중들의 공포』 서평에 대해 공동역자 최원 씨가 반론글을 인터넷 교수신문에 올렸다. 서평자와 역자 사이의 불필요한 오해나 소모적 논쟁을 지양하기 위해, 반론을 지면으로 옮겼다. ■

 

백승욱 교수의 서평을 보고 역자의 한 사람으로서 반가움이 앞섰다.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러나 역자 해제에 대한 백 교수의 비판적 언급에 이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시민인륜의 정치는 단순한 국가에 대한 개혁의 언사는 아니다. … 여기서 특히 중요한 점은 그(발리바르)가 ‘이상적 보편성’이라는 말을 통해서 강조하려한 ‘봉기의 정치’의 우위라는 사고이다. 정치의 자율성이나 노동의 적대를 말하면서, 그가 이미 현 구조 사이에 모순의 전복의 계기가 포함돼 있음을 이야기할 때 중요한 것은 현재의 ‘규칙을 인정함으로써’ 변혁이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개발해야 함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음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백 교수는 위의 근거를 통해 이 책의 역자후기가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관련 두 가지 이견을 말씀드리고 싶다.


첫째, 필자는 역자해제의 어떤 부분에서도 시민인륜의 정치가 국가에 대한 ‘개혁’을 의미한다는 식의 주장을 해본 적이 없다. 반대로 시민인륜의 정치가 해방의 정치와 반드시 결합돼야 하며, 그것이 ‘갈등적 민주주의’라는 발리바르의 입장의 요체라고 지적함으로써 해방의 정치의 중요성을 충분히 강조했다고 생각한다. 해제에서 발리바르를 따라 우리가 ‘국가 사멸론’을 비판하고 ‘국가의 전화’를 사고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국가의 전화’는 백승욱 교수도 서평에서 직접 사용한 표현이니 그것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또 해제에서 혁명주의와 개량주의의 대립이 불모적이라는 말을 했지만, 이는 발리바르 자신의 말이니 이도 문제가 아니라 생각한다. 

 

둘째, 아시다시피 해방의 정치와 시민인륜의 정치의 결합이라는 사고는 『대중들의 공포』의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 사고다. 마오쩌둥의 ‘조반유리’라는 해방의 외침과 스피노자의 ‘오히려 인식하라’는 준칙의 결합을 주장함으로써 발리바르가 ‘혁명을 문명화’할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이고, 이는 이 책의 저자서문에도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백승욱 교수는 이 ‘결합’이 아마 해방의 정치·봉기의 정치의 ‘우위’ 하에서, 해방과 시민인륜의 결합이어야 한다고 보는 듯하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백승욱 교수의 오해임을 전하고 싶다. 발리바르는 어디에서도 이런 주장을 해본 적이 없다. 만일 필자가 모르는 문헌에서 그가 이런 주장을 했다면, 모자란 후학을 위해 그 문헌적 근거를 알려주셨으면 한다. 그러나 오히려 발리바르는 다른 문헌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 적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그것을 지탱하는 사회적 변화들에 의해 오늘 의문스럽게 된 것이 바로 정치와 경제의 이러한 단락이다.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의 이론으로서 ‘정치철학’이라는 관념이 전면에 재등장하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문제는 루소로의 회귀나, … 로크 또는 칸트로의 회귀로 제기된다. 이때 스피노자로 회귀하는 경우는 훨씬 드문데, 그를 이러한 관점(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으로 이끌어 오기란 힘겨운 일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철학적으로 결정적인 질문이다.(『스피노자와 정치』 235쪽, 진태원 옮김)”

이 글은 역주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정치의 세 개념’이라는 글보다 일 년 앞선 글로, 아직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과 ‘정치의 자율성’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가 여기에서 마르크스의 타율성의 정치가 위기에 처한 후 ‘자율성의 정치’로 복귀하려는 유혹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대표적 예가 네그리의 자율주의다), 이에 대해 우리는 (‘오히려 인식하라’의) 스피노자로의 복귀를 중심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자율성의 정치, 봉기의 정치의 전통은 복원돼야 할 것이지만, 이 복원은 오직 그것이 문명화(civilize)되는 한에서, 시민인륜(civility)과 결합되는 한에서만 유효할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 물론 이는 해방의 정치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끝으로, 백승욱 교수가 말한 ‘봉기의 정치의 우위’가 혹시 발리바르가 말한 ‘구성에 대한 봉기의 우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나 반추해보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발리바르에게서 ‘구성에 대한 봉기의 우위’란 ‘(제도적인 것으로서의)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 대한 (대중적 실천으로서의) 정치의 자율성의 우위’를 말하는 것이지, 결코 ‘시민인륜의 정치에 대한 해방의 정치의 우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시민인륜을 ‘구성’이라는 계기로 한정하는 것은 시민인륜을 ‘정치’가 아닌 ‘제도적인 것’으로 환원하려는 것으로, 발리바르가 ‘정치의 세 개념’에서 명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물론 필자는 해제의 어디에서도 ‘봉기에 대한 구성의 우위’를 주장해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봤을 때,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백승욱 교수의 말은 다소 무리가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최원 / 로욜라대 박사과정·철학

[필자는 『대중들의 공포(엔티엔 발리바르 지음, 서관모·최원 옮김, 2007)』의 공동 역자로 뉴욕 뉴스쿨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는 ‘인종주의라는 쟁점: 푸코와 발리바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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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제458호 _2007년 11월 5일 월요일

[확대서평] 『대중들의 공포』 엔티엔 발리바르 지음 | 최원ㆍ서관모 옮김 | b | 2007

‘시장의 퇴행적 확장’과 ‘마르크스의 귀환’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를 전화시키려 한 노력으로 한국 사회에 잘 알려져 있는 정치철학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발리바르에 대한 관심은 표면에서 다소 사라졌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이 표면에서 다소 사라졌던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마치 ‘마르크스 이후’ 시대에 들어선 것처럼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은 줄어든 것처럼 보였는데, 단지 마르크스 아닌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가끔씩 마르크스는 초청받아 무대에 등장하곤 했다.

 그렇게 마르크스가 무대에서 사라진 데는 마르크스와 무관하지만은 않던 환상들의 붕괴가 작용했고, 그와 더불어 마르크스도 무대에서 끌려 내려갔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부르는 현 시대의 특징들이 어느 정도 전면적으로 드러나면서, 결국 마르크스 없이 갈 수 없다는 것은 좀 더 분명해졌고, 이제는 ‘환상 몰락 이후’의 마르크스가 귀환하고 있고 또 귀환해야 할 때이다. 발리바르의 작업에 다시 주목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렇게 귀환한 마르크스는 이제 좀 더 분명하게 아포리아들과 모순들을 가득 안고 있는 마르크스이며, 그렇기 때문에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오히려 현 시기의 문제를 풀고, 그 난점을 통해 발전이 가능한 마르크스가 될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왜 아포리아와 모순인가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에서 다루는 쟁점은 매우 포괄적이다. 발리바르는 이런 쟁점들과 전면적으로 대결해, 이를 통해 어떻게 우리가 마르크스라는 계기의 강점을 충분히 살려, 그것을 통해 우리 시대의 모순과 파국을 돌파해 갈 계기를 찾아낼 수 있는지의 고민을 제기하고 있다.

 우선 시대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 보자. ‘세계화’라는 시대 규정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우리는 시장의 세계적 지배와, 또한 전례 없는 세계적 배제와 불평등의 증대라는 이야기를 동시에 듣고 있다. 미국헤게모니 이후 세계체계의 특이성이라 할 이 현상의 핵심적 특징은 무엇인가. 발리바르는 이것을 세계가 ‘문턱’을 넘어선 것으로 설명하며, 이를 ‘시장의 퇴행적 확장’으로 이야기한다. 현 시기 세계는 자본이 세계의 구석구석을 남김없이 자본 축적 속에 포섭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본은 축적의 공간을 선별적으로 장악하고, 나머지의 공간은 배제(그리고 극단적 폭력) 속에 던져 놓고 있다. 이 버려진 ‘배제’의 공간은 자본-노동이라는 적대의 구도조차 성립되지 않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런 배제의 공간은 외적으로만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파고들어 지금까지의 노동포섭의 전략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킨다. ‘민족·사회 국가’의 해체는 이렇게 이중적으로 진행된다. 동일화와 인종주의의 문제가 전례 없이 중요해지는 정세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까지의 마르크스주의는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는가. 노동의 인간학과 노동의 정치만으로 이 쟁점에 마주할 수 있는가. 발리바르가 시민인륜의 정치라는 ‘타율성의 타율성’의 정치를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 없이는 정치의 다른 영역의 작동은 불가능하다. 이는 동일화와 탈동일화의 과정이 동시에 사고돼야 하는 정치이며, 여기서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매개’와 ‘헤게모니’가 강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발리바르가 국가라는 ‘매개’가 강조되는 ‘허구적 보편성’을 ‘봉기’라는 ‘이상적 보편성’과 반드시 결합시켜 사고하려는 데서도 보이듯이, 이런 시민인륜의 정치는 그 자체로 성립될 수 없고 다른 두 가지 정치와의 정세적 절합 속에서만 의미를 갖게 된다. 여기서 ‘정치의 자율성’과 ‘정치의 타율성’이라는 다른 두 가지 정치가 문제가 된다. 인종주의의 문제가 예외적이고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보편성의 차원으로 확대되어 사고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치의 자율성은 ‘인민의 해방은 오직 인민 자신에 의해서’라는 ‘해방의 정치’의 주장이다. 이는 근대정치가 늘 열어놓지만 동시에 늘 억압하려 하지 않을 수 없는 모순적 쟁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자유로운 평등’의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계기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근대정치의 틀 자체 속에서 전복의 계기들을 가지고 있는 ‘내적 전화’라는 쟁점으로 제기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발리바르가 강조하는 마르크스의 특이점은 이런 정치의 자율성에 대한 강조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동시에 그 정치의 공간이 다른 곳에, 즉 구조에(또는 ‘경제’에) 있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정치의 타율성을 강조하고, 이는 ‘변혁’이라는 사고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점에 특히 주목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노동의 모순을 사고하는 데서 정치경제 비판의 핵심으로서 ‘정치와 경제의 단락’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민인륜의 정치에서 ‘노동의 인간학’의 한계를 지적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동시에 노동의 인간학의 핵심을 버릴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노동가치설 때문이 아니라, 적대라는 정치적 의념이 노동과정에 도입되고, 여기서 노동과정의 내부적 분할과 그에 대한 정치적 과정의 작동이라는, 즉 노동과정의 적대와 국가라는 문제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 때문에 변혁은 노동과정의 내적인 전화(그것은 지식노동과 육체노동 관계의 전화를 말한다)와 동시에 그와 맞물린 국가의 내적인 전화를 요구하는 것이 된다.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의 내적 균열

 둘째로 주목할 점은 이데올로기라는 문제이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에게서 모호하게 남은 이데올로기론의 문제를 분명히 발전시키는데, 여기서 핵심적인 쟁점은 지배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피지배자의 요소를 주요한 성분으로 하여 구성된 이데올로기이고, 그렇기 때문에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의 내적 균열이 여기서 동시에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이데올로기는 ‘허구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상상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고, 늘 동일성의 형성과 재형성을 둘러싼 투쟁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그 작동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 된다.

 이 두 가지 측면을 통해 강조하려는 바는, 자본주의 근대세계에서 지배는 피지배자에 대한 내적인 지배를 배제하고서는 성립 불가능하지만, 억압할 수 없는 최소한으로 피지배자의 저항과 모순을 배제할 수 없고, 따라서 이렇게 얽힌 과정전개의 역사적 분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발리바르의 논의의 함의는 몇 가지 대립점들을 통해 좀 더 분명해 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푸코 통해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 비판

 첫째로 시민인륜의 정치는 단순한 국가에 대한 개혁의 언사는 아니다. 발리바르는 세 가지 정치가 ‘원리적’으로 결합될 수 없고, ‘정세적’으로만 결합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여기서 특히 중요한 점은 그가 ‘이상적 보편성’이라는 말을 통해서 강조하려한 ‘봉기의 정치’의 우위라는 사고이다. 정치의 자율성이나 노동의 적대를 말하면서, 그가 이미 현 구조 사이에 모순의 전복의 계기가 포함돼 있음을 이야기 할 때 중요한 점은 현재의 ‘규칙을 인정함으로써’ 변혁이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개발해야 함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음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의 역자후기는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주의해 읽는 것이 좋다.

 둘째로, 발리바르의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 비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발리바르는 이 대립을 부각시키기 위해 푸코라는 이단점을 동원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오히려 마르크스의 강점이 부각된다.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 난점은 동형성의 유비가 지닌 한계이고, 서로 다른 구조에 대한 서로 다른 분석의 필요성을 일반성으로 대체하는 한계에서 발생한다.

 셋째로, 소수자라는 쟁점이 제기된다. 발리바르는 소수자 문제에 대해 조심스러운데, 그는 소수자라는 쟁점이 동일성의 정치에서 그 자체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과, ‘세계화’시대에는 다수자조차 점점 더 소수자적 외양을 띠어간다는 점을 지적한다. 오히려 그는 ‘소수자 되기’보다는 보편성의 전유의 쪽에 서고 있다. 그가 페미니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해결책은 새로운 동일성을 갖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변혁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를 귀환시키는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주체로서 인민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또한 ‘정치경제 비판’의 ‘변혁’의 마르크스를 발전시키면서,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를 지금까지보다 더 넓은 외연으로 일반화시키려는 시도를 동시적으로 수행하려 할 때 발리바르의 시도를 피해간다면 그 모색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백승욱 / 중앙대·사회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중국 단위 체제와 국가의 노동력 관리방식의 변화’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중국의 노동자와 노동정책』, 『자본주의 역사강의』, 『문화대혁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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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바르는 누구인가

발리바르(Etienne Balibar)는 마르크스주의의 근원적 해체를 시도했던 알튀세르의 제자이자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마지막 대가로 꼽힌다. 1942년 프랑스 아발롱 출생, 니메그대(네델란드)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파리 낭테르대 명예교수이자, 미국 캘리포니아대 비판이론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역사유물론연구』, 『민주주의와 독재』,『역사유물론의 진화』, 『마르크스의 철학』 등이 있다.

그의 아포리즘 하나. “어떤 정치의 개념도 완전하지 않다. 따라서 역사적 시간 속에서 그리고 생의 공간 속에서 각각의 것들은 다른 것들을 전제한다. 변혁 없이는 해방도 시민인륜도 없으며, 해방 없이는 시민인륜도 변혁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전제들로부터 하나의 체계, 하나의 불변의 질서를 만들길 원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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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원신문 156호 _2007년 11월 6일(화)

대중들의 공포를 시민인륜으로

[학술] 발리바르와 보편성의 정치학

 

김정한│서강정치철학연구회 multitude@naver.com

 

알튀세르를 영어권에 처음 소개하는 평론을 쓴 홉스봄은, 좌파 사회에 거의 알려진 바 없는 엘리트 철학자가 갑자기 나타나 비범한 논리와 문체로 논쟁을 촉발하면서, 스탈린주의 이후 정체된 맑스주의 이론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며 놀라워했다. 물론 구세대 공산주의자를 자임하는 홉스봄은 똑똑한 좌파 청년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알튀세르의 논변이 ‘실제 맑스’가 아니라 ‘알튀세르의 맑스’라고 걱정하면서, 자신의 친구인 톰슨에게도 알튀세르와 논쟁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며 만류했다고 한다. 알튀세르의 사상은 어차피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지젝이 평가하듯이, 포스트알튀세르주의자인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 라클라우 등은 알튀세르와 거리를 두면서도 여전히 그를 주요 준거로 삼으면서 좌파 이론의 부활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알튀세르의 뛰어난 제자로 잘 알려진 발리바르는, 마치 “맑스주의가 마침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하라. 그러면 그것은 변화할 것이다”라고 했던 알튀세르의 선언을 실행에 옮기기라도 하듯이, ‘맑스주의의 위기’ 이후 맑스주의의 아포리아(논리적 궁지)와 대면하여 그것을 내부로부터 전환시키기 위한 작업에 몰두해왔다.

 



『대중들의 공포』는 알튀세르의 ‘상징적 죽음’ 이후,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대략 10여 년에 걸친 발리바르의 연구 작업을 모아놓은 탁월한 성과물이다. ‘맑스주의의 위기’를 돌파해온 그의 사유의 (잠정적) 결산인 셈이다.

 

 

 



보편성과 정치



알튀세르의 문제틀에서 ‘맑스주의의 위기’를 경유해 발리바르의 최근 작업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글들(『대중들의 공포』의 역자 후기를 포함해)에서 소개된 바 있으므로, 곧장 발리바르의 문제틀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추려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그것을 ‘새로운 정치의 조건’이라고 명명해볼 수 있다. 하지만 짧은 지면과 이해의 편의를 위해 임의적인 축약과 도식화의 위험을 무릅쓸 수밖에 없겠다.



우선 어떤 정치도 자신을 보편적인 것으로 정립하지 못하는 한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보편성은 정치를 가능케 하는 지평을 구성한다. 따라서 보편성을 거부하거나, 그 대립물의 지위에 있는 특수성, 독특성, 차이 등에 호소하는 것은 현실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보편성에 내재하는 모순이다.



첫째 자본주의의 세계화로 인해 세계 인류의 통합과 세계 공동체의 실현이라는 현실적 보편성이 도래하지만, 이는 세계적 규모의 사회적 양극화와 결합하는 내적 배제로 인해 새로운 인종주의와 종족 갈등을 유발한다.



둘째 허구적 보편성을 구성하는 현대 국가의 민족공동체는 개인들을 일차적 소속(계급, 직업, 성, 종교 등)에서 해방시켜 개인들의 자율성을 확립하고 동일성 간의 갈등을 규제하지만, 이는 또한 헤게모니적 정상성의 모형과 행동규칙에 따라 개인들을 억압하고 배제한다.



셋째 현대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평등자유라는 이상적 보편성은 시민의 권리를 확립하는 무한한 봉기의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다양한 해방투쟁들 간의 갈등과 분열을 생성시킨다(이를테면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의 관계처럼).



다음으로 각각의 보편성에는 그에 고유한 정치의 형상이 대응하는데(<표> 참조), 여기서도 보편성에 내재하는 모순과 관련하여 각각의 정치 개념에 아포리아가 존재한다. 발리바르는 하나의 정치 개념에 두 개의 모델을 제시하면서 그 아포리아를 검토한다. 



보편성


정치·


모델


이상적 보편성(평등자유)


해방(정치의 자율성)


인권의 정치(발리바르)

불화의 정치(랑시에르)


현실적 보편성(세계화)


변혁(정치의 타율성)


적대의 정치(맑스)

갈등의 정치(푸코)


허구적 보편성(민족국가)


시민인륜(타율성의 타율성)


위로부터의 시민인륜(헤겔)

 아래로부터의 시민인륜(들뢰즈ㆍ가타리)




첫째 해방의 정치에서, 평등자유의 권리를 향유하려는 인권의 정치는 정치의 자율성을 표현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정치 주체가 사전에 스스로 자율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난점에 직면한다. 사회 내에서 ‘몫이 없는 자들’이 평등한 분배를 요구하고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불화의 정치는 ‘몫이 없는 자들’이 자신의 보편성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정치의 주체에 미달한다.



둘째 정치의 자율성의 구조적·정세적 조건을 사유하는 변혁의 정치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내적 변혁을 통해 정치 주체의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적대의 정치는 세계 변혁을 담당할 세계적인 정치 주체의 출현을 해명하지 못하며, 개인의 육체를 형성하고 배치하는 권력관계를 변혁하려는 갈등의 정치는 저항을 가능케 하는 자유의 실천을 해명하지 못하면서 결국 자기의 변혁이라는 문제로 퇴행한다.



셋째 변혁의 정치의 조건을 사유하는 시민인륜의 정치는 폭력과 동일성의 극단적 결합에서 유래하는 극단적 폭력(얼굴 없는 잔혹과 메두사의 얼굴을 한 잔혹)을 전환시키기 위해 동일화들 간의 갈등을 감축하려는 일종의 반폭력의 정치이다.



위로부터의 시민윤리는 법치국가가 허구적 보편성에 기초해 개인들에게 하나의 동일성(이를테면 민족)을 부과하면서(동일화), 동시에 개인들의 일차적 동일성을 선별하고 위계화하여(탈동일화), 일차적 동일성에서 비롯하는 개인들 간의 폭력적 갈등을 조절하는 것이지만, 국가가 부과하는 동일성 자체가 폭력일 뿐만 아니라 국가 스스로 시민인륜의 담지자가 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대중들이 시민인륜의 규범을 도입하도록 국가를 강제하는 아래로부터의 시민윤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반파시즘의 관점에서 동일화보다 탈동일화를 우선시하여 소수자-되기를 주장하는 욕망의 미시정치는, 국가를 변혁하려는 다수자-되기 전략이 증오의 이상화로 귀착할 위험을 포착하긴 하지만, 거대 기계가 추동하는 사회적 연관의 해체 및 탈개인화와 공명할 위험이 존재한다.

 



새로운 정치의 조건



세 개의 보편성에 대응하는 세 개의 정치는 서로 대체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보로메오의 매듭처럼 서로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자 조건의 조건이다. 이는 각각에 고유한 모순과 내재적인 아포리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발리바르는 해방, 변혁, 시민윤리의 정치가 서로 어떻게 절합되는가는 열려 있는 문제라는 관점을 고수한다. 그러나 그런 절합이 정세에 의해 규정된다면, 논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발리바르가 파악하는 오늘날의 정세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정세를 특징짓는 것은 세계화(현실적 보편성)이다. 세계화로 인해 민족국가(허구적 보편성)의 위기가 발생한다. 그리고 민족국가의 위기가 함의하는 바는 민족국가가 그동안 담지해온 시민인륜의 공간이 해체되어 극단적인 폭력이 범람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폭력이 범람할 때, 평등자유(이상적 보편성)에 기초한 인권의 정치(해방의 정치)뿐만 아니라 계급적인 적대의 정치(변혁의 정치)도 더 이상 기능할 수 없는 ‘정치의 소멸’이 일반화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정세에서는 해방의 정치와 변혁의 정치의 ‘조건의 조건’인 시민인륜의 정치가 보다 중요해진다. 이런 점에서 발리바르는 시민인륜을 가능케 하는 공간으로서 그것을 담지하는 국가의 역할을 새삼 강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분명히 국가장치의 파괴와 국가 소멸을 전망하는 고전적 맑스주의와, 1968년 혁명 이후 다양한 신좌파와 자율주의가 채택한 국가를 기각하거나 반대하는 반국가주의 모두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아마 옮긴이가 역자 후기에서 ‘국가라는 쟁점’과 거의 필사적으로 대결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물론 초국가적 시민인륜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에 대해 발리바르는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발리바르의 정세 분석이 타당한지 여부와 별개로 『대중들의 공포』가 현대 정치와 철학에 관한 새로운 사유의 장을 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발리바르는 맑스주의에 내재한 아포리아의 오랜 탐색 끝에 풍요로운 논리와 개념들을 제공했다. 이제 독자들이 그에 응답할 차례이다. 다시, 창문을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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