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원신문 156호 _2007년 11월 6일(화)
[연속기획_ 억압된 ‘실재(the Real)’의 귀환②]
인도계 영국 철학자인 램 로이 바스카(Ram Roy Bhaskar: 1944~)는 ‘비판적 실재론’의 주요 이론가이다. 그는 70년대 중반 이래, 한편으로는 실증주의적 과학관과 다른 한편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들과 대립하며 ‘실재’에 대한 비판이성적 접근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인식론적 물음과 존재론적 물음 사이의 ‘간극’은 바스카의 실재론이 구조적 ‘결정’과 실천적 ‘자유’ 사이에서 변증법적 긴장―이를테면 해방적 ‘운동성’―을 유지하는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이 쓸고 간 폐허 뒤에 왜소하게 남겨진 우리 지식계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국내에 바스카의 이론을 꾸준히 소개하고 있는 강원대 사회학과 이기홍 교수가 장문의 글로 바스카와 실재의 문제를 다루어주었다. 원우들의 열독을 바란다. (편집자 주)
로이 바스카와 ‘실재’의 해방적 변증법
지금도 맹활약 중인 영국의 (과학)철학자 로이 바스카의 견해는 보통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으로 불린다. 이 명칭은 ‘초월적 실재론(Transcendental Realism)’과 ‘비판적 자연주의(Critical Naturalism)’를 축약한 것으로 앞의 것은 (자연)과학에 대한 견해를, 뒤의 것은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견해를 특징짓는다. 바스카는, ‘비판적’이라는 단어와 ‘초월적’이라는 단어가 자신의 철학과 칸트철학과의 친화성을 보여준다면, 이와 동시에 ‘실재론’이라는 단어는 그것과의 차이를 나타낸다고 해설하면서 (자신이 명명한 것은 아닌) ‘비판적 실재론’이라는 명칭을 자기 철학의 대명사로 수용해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비판적 실재론은 철학과 인문사회과학들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움직임으로 이제는 완전히 국제적이고 다학문적인 것이 되었다.
바스카의 지적 궤적
바스카는 자신의 지적 궤적이 5개의 국면을 거쳐 발전해 왔다고 술회한다. 1975년에 ꡔ실재론적 과학론ꡕ을 출발하여 초월적 실재론의 과학철학을 제시한 다음, 1978년의 ꡔ자연주의의 가능성ꡕ에서는 비판적 자연주의적 입장의 사회과학철학을 발전시켰다. 이후, ꡔ과학적 실재론과 인간해방ꡕ등에서는 ‘설명적 비판’의 이론으로, ꡔ변증법: 자유의 맥박ꡕ등에서는 ‘초월적 변증법적 비판적 실재론’으로 논의를 옮겨갔다. 그리고 2002년의 ꡔ과학에서 해방으로ꡕ에서는 ‘메타-실재의 철학’으로 부르는 입장을 전개하고 있다. 과학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보편적인 자아실현의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는 이 5개의 국면은, 물론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뒤의 국면이 앞의 국면을 확대 또는 심화시키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실재의 귀환’이라는 기획 속에서의 바스카에 대한 논의는 주로 1국면과 2국면과 연관된다.
실증주의와 그 이후
바스카의 초월적 실재론은 20세기의 2/3을 지배해 온 실증주의적 과학관을 겨냥한 왕성한 비판활동의 맥락 속에서 등장하였다. 실증주의적 과학관은 흄(Hume)의 경험주의에 기초를 둔 것으로, 1920년대와 30년대의 비엔나학단(Vienna Circle)의 논리실증주의-- 마하, 피어슨(Pearson), 두엥(Duhem)의 인식론적 경험주의 및 환원주의와 프레게(Frege), 러셀(Russell) 그리고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논리적 혁신을 결합시킨 --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친숙해졌다. 과학을, 관찰과 실험을 통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일반화를 거쳐 이론을 구성하는, 또는 이론으로부터 가설을 연역하고 이 가설을 경험자료로 검증하는 활동으로 간주하는 상식적 견해도 이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물론 논리실증주의는 ‘귀납의 문제’라는 논리적 약점 때문에 뒤의 것을 유일의 ‘과학적 방법’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 견해는 오늘날에도 사회과학자들의 의식을 지배하여 이론에 대한 ‘가설 검증’을 사회연구의 본령으로 삼게 만들고 있다.
과학을 이렇게 해석하는 ‘실증주의적 환상’은 과학의 발전에 대한 일원론적 이론과 과학의 구조에 대한 연역주의적 이론을 축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일원론적 과학발전론에 대한 비판은 세 가지 원천들로부터 제기되었다. 첫째, 포퍼(Popper)와 그의 제자들인 라카토스(Lakatos) 및 파이어아벤트(Feyerabend) 등은 검증가능성(verifiability)이 아니라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이 과학의 인증서라고 주장하면서 갈릴레오나 아인슈타인 등이 보여준 혁명적 약진에서 과학의 인식론적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둘째, 쿤(Kuhn)과 그밖의 과학사학자 및 과학사회학자들은 과학적 지식의 생산과 변형이 사회적 요인들의 영향을 받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셋째 툴민(Toulmin), 셀라스(Sellars) 등과 같은 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은 과학에서의 사실들의 비원자성(non-atomistic character) 또는 이론의존성과 변화가능성을 강조하였다. 과학이 연역적 구조를 갖는다는 주장은 ‘설명은 개별 사례들을 보편법칙-- 경험적 규칙성으로 해석되는 -- 아래 연역적으로 포섭시키는 것에 의해 진행된다’는 설명에 대한 포퍼-헴펠의 이론을 핵심으로 한다. 이 주장에 대한 비판은 스크리븐(Michael Scriven), 헤세(Mary Hesse), 하레(Rom Harré) 등이 제기하였는데, 그들은 인과성 및 법칙에 대한 흄의 기준, 설명에 대한 헴펠(Hempel)의 기준, 하나의 과학을 더 기본적인 다른 과학으로 환원시키는 것에 대한 네이글(Nagel)의 기준이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 (바스카는 이런 기준들이 필요조건조차 되지 못함을 입증하였다)
이들의 견해는 이론의 진위가 경험(적 자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며 (이론의 경험적 미결정성), 경험이 이론과 무관하게 외부세계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에 기초하여 해석 또는 구성되는 것이라는 (경험의 이론의존성) 두 명제로 정리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과학의 이론이 ‘객관적인’ 경험에 기초하거나 경험으로 확인함으로써 ‘객관적 진리성’을 갖는다고 실증주의의 이상은 붕괴되었고, 과학의 객관성이나 합리성은 부인되었다. 쿤과 파이어벤트는 한 이론과 그것에 뒤이은 또다른 이론 사이에 의미가 공유되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러한 ‘비교불가능한’(incommensurble) 이론들 사이에서의 합리적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쿤의 ‘패러다임’ 개념은 상이한 과학자 공동체들이 상이한 이론체들을 타당하다고 믿으면서 그 속에서 연구한다고 제시한다. 또한 이것은 이론독립적인 세계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부인하는 (초관념론적) 회의주의를 조장한다. ‘상이한 이론을 믿는 사람들은 상이한 세계에 사는 것’이라고 믿으면서 지식의 상대성(인식론적 차원)에 직면하여 존재의 지속적인 독립적 실재성(존재론적 차원)을 부인하는 것이다.
탈근대주의 또는 실재의 붕괴
존재의 영역을 인식의 영역으로 부당하게 환원하는 것은 오늘날 탈근대주의(postmodernism) 담론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유행이기도 하다. 과학적 지식의 ‘객관적 기초’를 확보하고자 하는 ‘기초주의적 기획’에 대한 인식론적 의심은 탈근대주의의 핵심이다. 우선 탈근대주의자들은 모든 지식 주장(모든 사실, 진리, 그리고 타당성)은 오로지 그것들의 맥락 또는 패러다임 내에서만 ‘납득가능하며 논란가능하다’는 협약주의 과학관을 수용하여 과학의 생산물- 개념, 설명, 이론 -이 그 생산자들의 편견과 이해관심의 흔적을 담고 있다는 의심을 제기한다. 탈근대주의는 과학이 서구 근대성의 기획, 그리고 계급, 지위, 성, 인종 등을 둘러싼 여러 가지의 국지적이고 특수한 투쟁들과 결합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여성주의자들은 사회과학의 남성중심적 편견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여성성과 여자다움에 대한 그것의 규범적 구성 속의 과학의 정치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어떤 사회적 담화치고 그것의 진리주장이 역사과정을 모양지으려는 진행 중인 사회적 이해관심에 묶여있지 않은 것은 없으며 또한 동시에 그런 이해관심과의 연루를 감추지 않는 것도 없다. 더 이상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은 없으며 모든 지식은 동등한 인지적 지위를 갖는다.
이에 더하여, 사화과학의 지식은 인간이 구성한 상대적인 것이라는 견해에 함축된 인과성은 사회과학이 인간을 구성한다는 주장에 의해 균형지어진다. 예컨대 사회과학연구에서 특정의 기법의 사용은 필연적으로 그 ‘과학적 규칙’에 대한 동조를 요구하며, 그러므로 차례로 연구 작업이 연구자를 ‘구성한다.’ 여기서 탈근대주의자들은 ‘뭐든지 해도 좋다(anything goes)'는 페이어아벤트의 방법론적 언명을 원용하여 과학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과학적 방법‘의 대체물로 개인의 경험, 공감, 감정, 직관, 주관적 판단, 상상력, 다양한 형태의 창의성 등에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이러한 용어의 실질적 내용과 그것들의 방법론적 중요성은 상당히 모호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의사소통되기 힘들다. 이렇게 하여 합리적인 것으로서 과학적 지식은 공공연하게 의도적으로 그리고 반(反)객관주의적으로 해체된다.
‘실재’는 구성되는 것인가?
일단 인식적 특권의 장막을 제거하면 과학은 특히 문화적 및 권력적 특권의 그물에 걸려있는 사회적 힘으로 나타난다. 푸코가 지적하듯 진리에 대한 주장은, 불가피하게 권력의 행위 즉 인간성을 형성하려는 의지이다. 진리에의 의지 속에 감추어진 것은 권력에 대한 의지이다. 사회적 담론은 인종적, 성적, 민족적 그리고 그 밖의 유형의 정체성과 사회질서 그리고 제도적 기능화- 과학의 지적이고 사회적인 권위를 수반하는 -의 규범적 틀을 창출함으로써 사회세계를 모양짓는다. 과학적 지식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담론은 다른 (과학적 및 비과학적) 담론에 의해 생산된 사회적 의제를 불신하면서 그것의 규범적 정체성 및 질서 개념에 권위를 부여한다. 사회적 담론의 진리성을 보증하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담론이 진리의 언어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담론, 그것의 담지자 그리고 그것의 의제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어떤 담론의 인식적 특권을 주장하는 것은 그것의 사회적 가치와 의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의 생산자와 담지자들에게 대해서도 사회적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인식론의 정치학은 역사를 모양지으려는 사회적 투쟁과 결합되어 있다.
게다가 세계는 복합적이고 혼돈적이어서 이 모든 상호작용을 연결하는 실마리를 풀어내거나 파악하고 이것들에 결정적인 언명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임의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모든 것이 질서를 찾아낼 수 없도록 긴밀하게 상호문맥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설명’은 불가능하다. 에코는 ‘세계 내의 모든 질서는 신의 것이지만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고로 객관적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객관적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역사적 주체도 발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과학의 ‘객관적 기초’에 대한 탈근대주의자의 의심은 ‘객관적 실재’에 대한 의심으로 전화한다. 이미 협약주의 과학관이 ‘외부의 실재’를 패러다임적 가정-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동하는 -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제시하였거니와, 탈근대주의자들도 인간의 정신적 과정과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으로부터 독립된 실재를 부인한다. 확신에 찬 탈근대주의자들은 정신적 상태와 외부세계의 구분이란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다고 기각하면서 실재는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재하는 세계는 없다’는 보들리야르의 단언(ꡔ아메리카ꡕ)은 실재의 존재를 부인하는 탈근대주의의 경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디즈니랜드는 그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상정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것이다. 디즈니랜드 밖의 모든,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전적으로 이미지, 즉 ‘시뮬라크라(simulacra)’이다. ‘정신이 이해의 범주들을 제공하는 한, 사람들의 정신적 형상 내에 고유한 것 이외의 실재 세계는 없다.’ 과학적 탐구의 실재하는 객체들은 과학적 이론의 산물이며 정신의 자연발생적 활동의 산물이다. 이제 더 이상 ‘저기에’ 존재하는 실재 같은 것은 없다.
덧붙이면 탈근대주의가 실용주의적 정당화에 호소하는 것은 ‘아무 것도 다른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무한회귀의 함정’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일 것이다. 이론가가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할 보편적이거나 합리적인 기준을 갖고 있지 않은 한 그의 결정은 각 이론가가 수용하는 부분적이고 이질적이며 궁극적으로 비교불가능한 기준에 의해 이루어진다. 예컨대 ‘기초를 가진 담론은 국지적이고 민족중심적일 수밖에 없으며, 보편적 근거를 추구하는 일은 국지적이고 실용적인 정당화를 위해 포기해야 한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그리고 이론가들에게 기초를 가진 보편적 이론을 구성하게 위해 쏟았던 노력, 별다른 결실은 내지 못하면서 우리에게 그렇게 비싼 비용을 부담시킨 노력을 실용적이고 부분적인 도덕적 분석으로 전화하라고 권유한다.
탈근대주의의 ‘인식적 오류’
이러한 회의주의에 직면하여 바스카는 과학의 ‘실험활동’을 분석하여, 인과법칙과 사건들의 (경험적) 유형을 존재론적으로 구별한다. 경험과 사건들의 규칙적 결합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활동에 의존한다. 인간이 없는 세계에는 경험이란 없을 것이며, 사건들의 일정한 결합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없는 세계에서도, 이제 과학에 의해 발견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는 인과법칙은 계속 작동한다. 비록 그것과 부합되는 사건들의 연쇄가 거의 없고 경험이 전혀 없다 해도 말이다. 실험활동에 대한 분석은 그러므로 과학적 지식이, 인과법칙에 대한 주장이 ‘인간 없는 세계’의 가능성을 수반한다는 것, 그 법칙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법칙은 작동하리라는 것, 또한 그 결과가 실현되지 않았을 때에도 (또는 그 결과가 인간에 의해 지각되거나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즉 그것에 대한 경험적 확인을 허용하는 조건 밖에서도 그 법칙은 계속 작동한다는 것을 전제로 탐구되고 있음을 입증한다.
과학을 객체에 대한 실천적적 탐구로 파악하면, 인간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초사실적으로 작동하는 실재하는 구조들, 기제들, 과정들, 관계들 및 영역들이라는 인간중심적이지 않은 존재론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바스카는 지적한다. 과학은 사회적 생산물이지만 과학이 찾아내는 실재들은 그것들이 발견되기 전부터 그리고 그 발견과 무관하게 작동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늘 역사적으로 특정한 사회형태들 속에서 구성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지식의 대상들이 그 지식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움직인다는 것도 똑같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존재에 관한 진술이 지식에 관한 진술로 환원되거나 지식에 관한 진술에 입각하여 분석될 수 없다. 즉 존재론적 문제를 인식론적 용어로 번역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스카는 존재의 영역을 인식의 영역으로, 즉 존재의 문제를 인간의 속성으로 부당하게 환원하는 것을 ‘인식적 오류’라고 규정한다). 경험론 철학은 세계에 관한 지식에서 존재론을 배제하려고자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이라는 범주에 기초를 두는 (또는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실재를 동일화하는) 암묵적 존재론과 경험의 대상들이 가진 특징(원자적 사건들, 사건들 사이의 기계적 관계 및 규칙적 결합)에 기초를 두는 암묵적 실재론을 감추거나 위장한다. 그리고 그 (암묵적) 존재론이 그들의 견해에 부과하는 제약에 사로잡혀 과학에 관한 이성적 직관과 갈등하면서 ‘존재론적 긴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무한히 해결불가능한 문제들-귀납의 문제 등과 같은-의 연쇄, 이러한 직관의 인간중심적 대체 그리고 인식론의 방법론적 함의와 과학의 실재론적 실천 사이의 균열로 이어진다.
지식의 두 측면
지식에는 두 측면이 있다. 지식은 한편으로 그것을 생산하는 사람들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않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 외부의 어떤 객체에 대한 인식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이 두 측면을 바스카는 ‘지식의 자동적 대상(intransitive objects of knowledge)’과 ‘지식의 타동적 대상(transitive objects of knowledge)’으로 구분한다(쉽게 표현하면 이것들은 각각 ‘있는 그대로의 대상’과 인간이 ‘알아낸 대상’에 해당한다). 그리고 과학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라면 어느 것이거나 자동적 대상과 타동적 대상의 필연성을, 그리고 두 대상들의 비동일성을 명백히 인식할 것을 강조한다. 이 구분을 따르면 (경험론처럼) 사유를 주어진 객체의 기계적 함수로 간주하거나 (관념론처럼) 창조적 주체의 활동이 세계에 사물들을 부여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과학의 과정 밖에 존재하는 변함없는 실재적 객체들과, 과학적 실천의 함수로서 과학 속에서 생산되는 변화하는 인지적 객체들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과학이 없는 자동적 대상들의 세계는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타동적 대상들이 없는 즉 과학적이거나 전(前)과학적인 선행물이 없는 과학은 상상할 수 없다. 지식의 생산은 선행하는 지식재료에 의존하여 이루어진다. 사회적 생산물인 지식들-새로운 지식의 타동적 대상들로 구실할 수 있는-은 세계의 알려지지 않는 (그러나 알 수 있는) 자동적 대상들을 탐구하는 데 사용된다.
사회세계와 설명적 비판
그런데 지식의 (자동적) 대상의 존재는 인간활동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존재의 자동성 명제)를 ‘사회세계’에 적용할 때에는 혼란이 생긴다. 현상적으로 사회세계는 인간의 활동으로 구성되고 인간의 활동에 의존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자연세계에서는 지식의 대상들이 그것들에 대한 지식의 생산과정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움직이는 반면, 사회적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어떤 측면에서 인문사회과학적 지식은 그것의 대상에 대해 ‘내부적’이다. 이 맥락에서 바스카는 ‘변형적 사회활동 모델(trasformational model of social activity)’을 제안한다. 특정 시점의 사회는 그에 앞서 존재한 사람들이 재생산하거나 변형해온 구조들과 관습들과 관행들의 총체이며, 그러므로 사회는 그 시점에서의 행위주체들의 활동의 산물이 아니다. 사회(구조)는 의도적인 인간 활동에 필수적인 조건들을 제공하며, 특정 시점에서 인간 행위주체들의 활동은 그 사회(구조)를 재생산하거나 변형한다. 따라서 사회(구조)와 개인들은 범주적으로 구별되는 사회세계의 두 실재들이다. 그러므로 사회(구조)는 인간행위주체 (그리고 그들이 가진 지식)과 인과적 상호의존성을 갖지만, 존재적으로는 독립적인 자동성을 갖는다.
특히 사회구조가 그 구조에 대한 특정의 견해나 믿음을 가진 행위주체들의 실천에 의해 재생산되거나 변형된다는 이 모델은 사회적 존재와 의식에 대한 설명적 비판이 사회구조의 변형을 동반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더 심층적으로는 사회세계에 관해서는 사실진술과 가치진술 사이의 논리적 간격이 엄격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우선 대부분의 인문사회과학적 담론은 그 자체가 가치-침윤적(value-impregnated)인 것이다. 사회 상황에 대한 최상의 (가장 정확하거나 정밀하거나 완벽한) 서술은 거의 불가피하게 평가적일 것이다, 즉 가치함축을 갖는다. 그뿐 아니라, 사회세계에 관한 사실진술이나 이론진술은 행위주체의 실천적 판단에 경향과 동기를 부여하고 적절한 상황에서는 논리적으로 이것들을 수반한다(반면 실천적 고려는 사실적 및 이론적 판단에 경향과 동기를 부여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판단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회세계를 탐구하여 설명하는 연구가 갖는 설명적 비판의 가능성이 인문사회과학들이 가진 해방적 잠재력의 핵심이라고 바스카는 강조한다.
실천적 보수주의로서의 탈근대주의를 넘어서
인식적 오류를 벗어나지 못하는 탈근대주의는 모든 것을 회의함으로써 모든 것들을 비판하는 외양적인 급진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인간의 밖에 있는 실재에 대한 ‘이성적’ 인식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나아가 ‘실재’ 자체를 부인하는 견해는, 보수주의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또 주관적으로 보수적인 의향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실천적으로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이다. 객관적 실재 및 그것에 대한 합리적 인식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실재’를 개선하려는 활동을 질식시키고 그 활동의 방향을 마비시킨다. 탈근대주의가 정치적 절망의 이면에서 변혁을 향한 열정 대신 자기도취적인 개인주의와 쾌락주의를 탐닉하고 있음은 이것을 증거한다.
이기홍│강원대학교 사회학과 yikihong@kangwo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