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지젝이 평가하듯이, 포스트알튀세르주의자인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 라클라우 등은 알튀세르와 거리를 두면서도 여전히 그를 주요 준거로 삼으면서 좌파 이론의 부활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알튀세르의 뛰어난 제자로 잘 알려진 발리바르는, 마치 “맑스주의가 마침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하라. 그러면 그것은 변화할 것이다”라고 했던 알튀세르의 선언을 실행에 옮기기라도 하듯이, ‘맑스주의의 위기’ 이후 맑스주의의 아포리아(논리적 궁지)와 대면하여 그것을 내부로부터 전환시키기 위한 작업에 몰두해왔다.

『대중들의 공포』는 알튀세르의 ‘상징적 죽음’ 이후,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대략 10여 년에 걸친 발리바르의 연구 작업을 모아놓은 탁월한 성과물이다. ‘맑스주의의 위기’를 돌파해온 그의 사유의 (잠정적) 결산인 셈이다.
보편성과 정치
알튀세르의 문제틀에서 ‘맑스주의의 위기’를 경유해 발리바르의 최근 작업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글들(『대중들의 공포』의 역자 후기를 포함해)에서 소개된 바 있으므로, 곧장 발리바르의 문제틀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추려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그것을 ‘새로운 정치의 조건’이라고 명명해볼 수 있다. 하지만 짧은 지면과 이해의 편의를 위해 임의적인 축약과 도식화의 위험을 무릅쓸 수밖에 없겠다.
우선 어떤 정치도 자신을 보편적인 것으로 정립하지 못하는 한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보편성은 정치를 가능케 하는 지평을 구성한다. 따라서 보편성을 거부하거나, 그 대립물의 지위에 있는 특수성, 독특성, 차이 등에 호소하는 것은 현실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보편성에 내재하는 모순이다.
첫째 자본주의의 세계화로 인해 세계 인류의 통합과 세계 공동체의 실현이라는 현실적 보편성이 도래하지만, 이는 세계적 규모의 사회적 양극화와 결합하는 내적 배제로 인해 새로운 인종주의와 종족 갈등을 유발한다.
둘째 허구적 보편성을 구성하는 현대 국가의 민족공동체는 개인들을 일차적 소속(계급, 직업, 성, 종교 등)에서 해방시켜 개인들의 자율성을 확립하고 동일성 간의 갈등을 규제하지만, 이는 또한 헤게모니적 정상성의 모형과 행동규칙에 따라 개인들을 억압하고 배제한다.
셋째 현대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평등자유라는 이상적 보편성은 시민의 권리를 확립하는 무한한 봉기의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다양한 해방투쟁들 간의 갈등과 분열을 생성시킨다(이를테면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의 관계처럼).
다음으로 각각의 보편성에는 그에 고유한 정치의 형상이 대응하는데(<표> 참조), 여기서도 보편성에 내재하는 모순과 관련하여 각각의 정치 개념에 아포리아가 존재한다. 발리바르는 하나의 정치 개념에 두 개의 모델을 제시하면서 그 아포리아를 검토한다.
보편성
|
정치·
|
모델
|
이상적 보편성(평등자유)
|
해방(정치의 자율성)
|
인권의 정치(발리바르)
불화의 정치(랑시에르)
|
현실적 보편성(세계화)
|
변혁(정치의 타율성)
|
적대의 정치(맑스)
갈등의 정치(푸코)
|
허구적 보편성(민족국가)
|
시민인륜(타율성의 타율성)
|
위로부터의 시민인륜(헤겔)
아래로부터의 시민인륜(들뢰즈ㆍ가타리)
|
첫째 해방의 정치에서, 평등자유의 권리를 향유하려는 인권의 정치는 정치의 자율성을 표현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정치 주체가 사전에 스스로 자율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난점에 직면한다. 사회 내에서 ‘몫이 없는 자들’이 평등한 분배를 요구하고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불화의 정치는 ‘몫이 없는 자들’이 자신의 보편성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정치의 주체에 미달한다.
둘째 정치의 자율성의 구조적·정세적 조건을 사유하는 변혁의 정치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내적 변혁을 통해 정치 주체의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적대의 정치는 세계 변혁을 담당할 세계적인 정치 주체의 출현을 해명하지 못하며, 개인의 육체를 형성하고 배치하는 권력관계를 변혁하려는 갈등의 정치는 저항을 가능케 하는 자유의 실천을 해명하지 못하면서 결국 자기의 변혁이라는 문제로 퇴행한다.
셋째 변혁의 정치의 조건을 사유하는 시민인륜의 정치는 폭력과 동일성의 극단적 결합에서 유래하는 극단적 폭력(얼굴 없는 잔혹과 메두사의 얼굴을 한 잔혹)을 전환시키기 위해 동일화들 간의 갈등을 감축하려는 일종의 반폭력의 정치이다.
위로부터의 시민윤리는 법치국가가 허구적 보편성에 기초해 개인들에게 하나의 동일성(이를테면 민족)을 부과하면서(동일화), 동시에 개인들의 일차적 동일성을 선별하고 위계화하여(탈동일화), 일차적 동일성에서 비롯하는 개인들 간의 폭력적 갈등을 조절하는 것이지만, 국가가 부과하는 동일성 자체가 폭력일 뿐만 아니라 국가 스스로 시민인륜의 담지자가 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대중들이 시민인륜의 규범을 도입하도록 국가를 강제하는 아래로부터의 시민윤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반파시즘의 관점에서 동일화보다 탈동일화를 우선시하여 소수자-되기를 주장하는 욕망의 미시정치는, 국가를 변혁하려는 다수자-되기 전략이 증오의 이상화로 귀착할 위험을 포착하긴 하지만, 거대 기계가 추동하는 사회적 연관의 해체 및 탈개인화와 공명할 위험이 존재한다.
새로운 정치의 조건
세 개의 보편성에 대응하는 세 개의 정치는 서로 대체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보로메오의 매듭처럼 서로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자 조건의 조건이다. 이는 각각에 고유한 모순과 내재적인 아포리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발리바르는 해방, 변혁, 시민윤리의 정치가 서로 어떻게 절합되는가는 열려 있는 문제라는 관점을 고수한다. 그러나 그런 절합이 정세에 의해 규정된다면, 논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발리바르가 파악하는 오늘날의 정세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정세를 특징짓는 것은 세계화(현실적 보편성)이다. 세계화로 인해 민족국가(허구적 보편성)의 위기가 발생한다. 그리고 민족국가의 위기가 함의하는 바는 민족국가가 그동안 담지해온 시민인륜의 공간이 해체되어 극단적인 폭력이 범람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폭력이 범람할 때, 평등자유(이상적 보편성)에 기초한 인권의 정치(해방의 정치)뿐만 아니라 계급적인 적대의 정치(변혁의 정치)도 더 이상 기능할 수 없는 ‘정치의 소멸’이 일반화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정세에서는 해방의 정치와 변혁의 정치의 ‘조건의 조건’인 시민인륜의 정치가 보다 중요해진다. 이런 점에서 발리바르는 시민인륜을 가능케 하는 공간으로서 그것을 담지하는 국가의 역할을 새삼 강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분명히 국가장치의 파괴와 국가 소멸을 전망하는 고전적 맑스주의와, 1968년 혁명 이후 다양한 신좌파와 자율주의가 채택한 국가를 기각하거나 반대하는 반국가주의 모두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아마 옮긴이가 역자 후기에서 ‘국가라는 쟁점’과 거의 필사적으로 대결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물론 초국가적 시민인륜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에 대해 발리바르는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발리바르의 정세 분석이 타당한지 여부와 별개로 『대중들의 공포』가 현대 정치와 철학에 관한 새로운 사유의 장을 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발리바르는 맑스주의에 내재한 아포리아의 오랜 탐색 끝에 풍요로운 논리와 개념들을 제공했다. 이제 독자들이 그에 응답할 차례이다. 다시, 창문을 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