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 2007년 11월 12일 월요일
“‘봉기의 정치’와 ‘해방의 정치’ 오해”
>>반론 _ 백승욱 교수의 『대중들의 공포』 서평(교수신문 제458호)을 읽고
지난호 <교수신문>에 실린 백승욱 중앙대 교수(사회학)의 『대중들의 공포』 서평에 대해 공동역자 최원 씨가 반론글을 인터넷 교수신문에 올렸다. 서평자와 역자 사이의 불필요한 오해나 소모적 논쟁을 지양하기 위해, 반론을 지면으로 옮겼다. ■
백승욱 교수의 서평을 보고 역자의 한 사람으로서 반가움이 앞섰다.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러나 역자 해제에 대한 백 교수의 비판적 언급에 이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시민인륜의 정치는 단순한 국가에 대한 개혁의 언사는 아니다. … 여기서 특히 중요한 점은 그(발리바르)가 ‘이상적 보편성’이라는 말을 통해서 강조하려한 ‘봉기의 정치’의 우위라는 사고이다. 정치의 자율성이나 노동의 적대를 말하면서, 그가 이미 현 구조 사이에 모순의 전복의 계기가 포함돼 있음을 이야기할 때 중요한 것은 현재의 ‘규칙을 인정함으로써’ 변혁이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개발해야 함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음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백 교수는 위의 근거를 통해 이 책의 역자후기가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관련 두 가지 이견을 말씀드리고 싶다.
첫째, 필자는 역자해제의 어떤 부분에서도 시민인륜의 정치가 국가에 대한 ‘개혁’을 의미한다는 식의 주장을 해본 적이 없다. 반대로 시민인륜의 정치가 해방의 정치와 반드시 결합돼야 하며, 그것이 ‘갈등적 민주주의’라는 발리바르의 입장의 요체라고 지적함으로써 해방의 정치의 중요성을 충분히 강조했다고 생각한다. 해제에서 발리바르를 따라 우리가 ‘국가 사멸론’을 비판하고 ‘국가의 전화’를 사고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국가의 전화’는 백승욱 교수도 서평에서 직접 사용한 표현이니 그것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또 해제에서 혁명주의와 개량주의의 대립이 불모적이라는 말을 했지만, 이는 발리바르 자신의 말이니 이도 문제가 아니라 생각한다.
둘째, 아시다시피 해방의 정치와 시민인륜의 정치의 결합이라는 사고는 『대중들의 공포』의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 사고다. 마오쩌둥의 ‘조반유리’라는 해방의 외침과 스피노자의 ‘오히려 인식하라’는 준칙의 결합을 주장함으로써 발리바르가 ‘혁명을 문명화’할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이고, 이는 이 책의 저자서문에도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백승욱 교수는 이 ‘결합’이 아마 해방의 정치·봉기의 정치의 ‘우위’ 하에서, 해방과 시민인륜의 결합이어야 한다고 보는 듯하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백승욱 교수의 오해임을 전하고 싶다. 발리바르는 어디에서도 이런 주장을 해본 적이 없다. 만일 필자가 모르는 문헌에서 그가 이런 주장을 했다면, 모자란 후학을 위해 그 문헌적 근거를 알려주셨으면 한다. 그러나 오히려 발리바르는 다른 문헌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 적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그것을 지탱하는 사회적 변화들에 의해 오늘 의문스럽게 된 것이 바로 정치와 경제의 이러한 단락이다.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의 이론으로서 ‘정치철학’이라는 관념이 전면에 재등장하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문제는 루소로의 회귀나, … 로크 또는 칸트로의 회귀로 제기된다. 이때 스피노자로 회귀하는 경우는 훨씬 드문데, 그를 이러한 관점(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으로 이끌어 오기란 힘겨운 일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철학적으로 결정적인 질문이다.(『스피노자와 정치』 235쪽, 진태원 옮김)”
이 글은 역주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정치의 세 개념’이라는 글보다 일 년 앞선 글로, 아직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과 ‘정치의 자율성’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가 여기에서 마르크스의 타율성의 정치가 위기에 처한 후 ‘자율성의 정치’로 복귀하려는 유혹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대표적 예가 네그리의 자율주의다), 이에 대해 우리는 (‘오히려 인식하라’의) 스피노자로의 복귀를 중심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자율성의 정치, 봉기의 정치의 전통은 복원돼야 할 것이지만, 이 복원은 오직 그것이 문명화(civilize)되는 한에서, 시민인륜(civility)과 결합되는 한에서만 유효할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 물론 이는 해방의 정치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끝으로, 백승욱 교수가 말한 ‘봉기의 정치의 우위’가 혹시 발리바르가 말한 ‘구성에 대한 봉기의 우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나 반추해보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발리바르에게서 ‘구성에 대한 봉기의 우위’란 ‘(제도적인 것으로서의)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 대한 (대중적 실천으로서의) 정치의 자율성의 우위’를 말하는 것이지, 결코 ‘시민인륜의 정치에 대한 해방의 정치의 우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시민인륜을 ‘구성’이라는 계기로 한정하는 것은 시민인륜을 ‘정치’가 아닌 ‘제도적인 것’으로 환원하려는 것으로, 발리바르가 ‘정치의 세 개념’에서 명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물론 필자는 해제의 어디에서도 ‘봉기에 대한 구성의 우위’를 주장해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봤을 때,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백승욱 교수의 말은 다소 무리가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최원 / 로욜라대 박사과정·철학
[필자는 『대중들의 공포(엔티엔 발리바르 지음, 서관모·최원 옮김, 2007)』의 공동 역자로 뉴욕 뉴스쿨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는 ‘인종주의라는 쟁점: 푸코와 발리바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