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의 고전 -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
이진경 지음 / 글항아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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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 고전소설이 몇 편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뻔한 고전을 가지고 이토록 풍성하면서도 심도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저자의 능력이 놀랍다. 문학이론은 물론이고, 철학과 사회학을 넘나드는 지적 향연이 펼쳐진다. 인문학에 관심은 있으나, 아직 그 내공이 깊지 않은 독자가 택한다면 쉽게 빠져들 책이다. 내가 그러했다. 오랜만에 괜찮은 책을 만났다. 아직 독서를 마치진 못했지만, 저자가 가장 애착을 느끼는 고전은 아무래도 <심청전>인 것 같다. 그리고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 저자의 평가가 가장 박한 것은 <홍길동전>이다. 그러고 보니 표지에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이라고 인쇄되어 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저자에 따르면 <심청전>은 효를 설파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텍스트다. 피할 수도 있었던 죽음을 향해 끝까지 밀고나간 심청은 '효에 대한 요구를 과도하게 준수함으로써 그런 요구 자체를 어이없는 명령으로 만들어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저자는 그 증거를 되살아난 심청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에서 찾는다. 나는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다. 효녀 심청은 눈 먼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심청은 아버지를 포함한 맹인들을 집 밖으로 불러낸다. 심청의 아버지는 '집 밖'에서 눈을 뜬다. 저자는 여기서 '탈영토화'를 읽고, 나는 '살림'을 읽는다. 되살아난 심청이 아버지에게 전과는 다른 삶을 주었음을 읽는다. 오래 전에 보았던 신영복 선생의 <나무야 나무야>를 다시 읽어본다.


당신은 평강공주의 삶이 남편의 입신이라는 가부장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산다는 것은 살리는 것입니다. 살림(生)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이 공주가 아니기 때문에 평강공주가 될 수 없다고 하지만 살림이란 <뜻의 살림>입니다. 세속적 성취와는 상관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평강공주의 이야기는 한 여인의 사랑의 메시지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은 <삶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와 다른 맹인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한 심청과 달리 홍길동은 그 어떤 새로운 가치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길동을 움직이게 한 것은 신분제에 대한 반감이었으나, 그는 기존 체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왕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할 뿐이다. 왕이 병조판서 자리를 준다고 하니 냉큼 와서 받는다. '율도국'도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기존의 멀쩡한 나라를 침략해서 빼앗은 것이다. 무엇보다 홍길동은 '살생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자신을 죽이려던 자객과 그 공모자를 죽인다. 활빈당을 만들어 탐관오리들의 목을 벤다. 나중에는 죽일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는 자들을 몰살하기도 한다. 홍길동은 원하는 바가 분명하다. 그것은 체제에 자신을 편입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는 죽이고 또 죽인다. 다시 <나무야 나무야>를 읽는다.


단종은 국왕이란 칭호가 어울리지 않는 어린이입니다. 상왕이란 칭호는 더욱 그렇습니다.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고아나 다름없었습니다. 어린이를 왕좌에 앉히고 끌어내리고 다시 복위를 도모하고 유배와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세조의 왕권찬탈은 흔히 부도덕한 것으로 매도되고 단종복위를 모의하다 주륙당한 집현전 학사들은 선왕의 고명을 받든 충절의 사람들로서 추모됩니다. 그러나 세조의 주변에 결집한 세력의 사회적 성격은 무엇이며 그처럼 살벌한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기어이 복위를 도모했던 집현전 학사들의 충절과 명분은 얼마만큼 정의로운 것인가 하는 의문을 금치 못합니다.


거칠게 말해서 심청은 살리고 길동은 죽인다. 내가 보기에 <심청전>의 전반부는 공동체(이 책은 '효'와 '공동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심청전>을 읽는다.)가 그냥 두면 죽었을 심청이네를 살리는 이야기이고, 후반부는 심청이 눈 먼 자들을 살리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반면 <홍길동전>은 길동의 일방통행 식 욕망이 뻗어나갈 뿐이다. 홍길동에게 타인은 자신을 인정해줄 자가 아니면, 그 인정을 위해 자신이 수단으로 삼는 자로 등장할 뿐이다. 신영복 선생이 집현전 학사들의 충절에 제기한 의문을 홍길동의 활빈당 활동에도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청은 타인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준다. 심청이 맹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 것,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을 용맹한 장군으로 일어서게 만든 것, 나는 이것이 '살림'이라고 생각한다.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은 바로 이 '살림의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기쁨을 맛볼 때, 사람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심청이 진정으로 다시 태어난 지점은 인당수에서 연꽃으로 떠오른 때가 아니라, 아버지와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한 때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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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지난 주말 헌책방에 갔다가 이 책을 다시 손에 들게 되었다. 17년 전에 연암을 처음 알게 된 책이었다. 제목부터 도발적인 이 책은 당시 내겐 충격이었다. 연암의 문장은 그때까지 만나본 것 중 단연 최고였고, 거기에 담긴 사유 역시 대단했다. 단순히 연암의 글을 소개하는 수준의 책이 아니었으므로, 내가 받은 충격 중 일부는 저자가 일으킨 것이 분명했다. 나는 후에 정민 교수의 책을 몇 권 더 찾아 읽었다.


지금도 나는 연암을 최고의 문장가로 생각한다. 연암의 문장을 탐닉할 요량으로 다시 책을 펼쳤다. 책에 실린 산문 중 상당수가 연암의 문장론을 담은 것이다. 문장론을 펼치는 문장 자체가 교범이 되고 있으니 명실상부가 따로 없다고 하겠다. 연암의 문장에 마음을 빼앗기며 글을 읽다가 문득 '문체반정'이 떠올랐다. 18세기 조선사를 생각하니, 그의 글들이 단순한 문장론으로만 읽히지 않았다.


정조 시대가 어떤 때인가? 조선은 누적된 체제 모순으로 옴짝달싹하기 어려운 때인 동시에 마지막 개혁의 기회가 주어진 시기였다. 나를 포함한 오늘날 사람들은 정조를 애민정신이 투철한 개혁군주로 읽고 싶어 하지만, 남경태는 왕정복고(남경태가 보기에 조선은 '사대부가 지배하는 왕국'이었기에)를 시도했다 실패하고 수구로 돌아선 군주로 평가한다. 문체반정을 이런 맥락에서 읽으면 이해가 쉬웠다.


정조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의 사후에 조선이 멸망의 길로 들어선 것은 분명하다. 세도정치와 개항을 거쳐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조선이 멸망한 이유를 제도적 측면에서 찾는 정병석의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지배층의 모습이었다. 당시 '소중화' 운운하던 성리학자들의 행태를 남경태는 시대착오의 정신병으로 칭한다. 가혹한 평가지만 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연암의 글에 수없이 많은 비유가 등장하듯, 어쩌면 그의 문장론은 비유적으로 쓴 시론(時論)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연암의 메시지는 이런 것들이었다. 사변적 지식을 버리고, 살아있는 세계와 직접 만나라.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본질을 꿰뚫어 보라. 시류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라. 관성화된 삶과 죽은 독서에서 벗어나라. 절대적이고 획일적인 가치를 버리고 상대적 가치에 주목하라. 옛것을 모방하는데 그치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통하는 방법을 찾아라. 소중화를 외치며 성리학만 붙잡고 있는 사대부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해도 무방한 것 같다.


나는 윤동주의 시가 서정주의 그것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둘 중에 더 감동을 주는 것은 윤동주의 시라고 생각한다. 내가 촌스러운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어떤 글과 그 글을 쓴 사람의 삶이 명실상부하는 지를 자꾸 주목하게 된다. 나는 연암을 북학파의 실학자로 배웠는데, 그가 그의 삶에서 얼마나 성리학적 담론과 소중화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웠는지는 알지 못한다. 정조를 개혁군주로 기억하고 싶은 것처럼, 연암에 대해서도 그러려니 하고 짐작할 뿐이다. 아무래도 나는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라는 연암의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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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허무하다고 보는 것은 본인의 해석에 불과합니다. 과학은 사실을 전달해줄 뿐이고, 그것을 알고 어떻게 살아갈지는 본인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저자의 말이다. '사실'은 그 자체로 힘이 세다. 과학은 사실 만을 전달한다고 과학자들은 말하고,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을 믿는다. 정치인의 말은 조롱과 냉소의 대상이 되기 일쑤지만, 과학자는 같은 말을 해도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과학은 사실을 전달해줄 뿐이라는 말은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일종의 힘의 과시로 느껴진다. 


저자는 과학을 허무하다고 보는 것은 해석에 '불과'하다고 했다. 과학자인 저자는 사실을 해석보다 우위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진정으로 삶이 본인의 선택에 달렸다고 생각한다면, 사실보다는 해석을 우위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해석 없이는 어떤 선택도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지난 대선 국면에서 똑같은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도 사람들은 저마다 해석이 달랐고, 그에 따른 선택도 달랐음을 나는 기억한다.


바야흐로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다. 철학자인 저자는 과학의 시대를 의심한다. '의심하고 질문할 줄 아는 사람들이 과학의 시대를 열었'는데, 과학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 역설을 개탄한다. 우리는 과학이 '번영과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저자는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는 철학이 필요한 시대'라고 말한다. 나는 이 철학자의 말이 '어떻게 살아갈지는 본인의 선택에 달렸'다는 과학자의 말과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을 인문학의 시선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해석과 선택, 의심과 질문에는 쉼표가 필요하다. 일단 멈춰야 그것들이 가능하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멈출 준비가 되어있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방송가와 출판계에서는 인문학이 열풍이란다. 나는 인문학을 잘 모르지만, 인문학은 삶의 자세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 열풍 속의 인문학은 마치 식당의 여러 메뉴 중 하나로 전락한 느낌이다. 학업성적과 업무능력을 올려야 하고, 틈틈이 자기계발서도 읽어야 한다. 유행에 뒤처지지 않아야 하고, 인맥관리도 해야 한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인문학도 해야 한다. 지금까지 하던 것을 그대로 하되, 인문학적으로 보다 세련되고 여유롭게 보여야 한다는 요구, 어쩌면 이것이 인문학 열풍의 본질이 아닐까? 우리는 아직 멈추지 않았고, 멈출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다. 멈추지 않고 읽는 철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한다.


어쩌면 과학도 우리에게 멈춤을 권하고 있는 것 같다. 위 책에서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 하는 존재'라고 했다. 이것은 가끔 멈추고 의심하라는 과학의 요구가 아닐까? 또 '내가 태어나기 전의 세상과 죽은 후의 세상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것은 가끔 멈춰 질문을 던져도 크게 손해 볼 일 없을 거라는 과학의 위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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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의 독법을 모를 뿐더러 눈썰미도 없어서 영화를 볼 때 특정 장면이나 소품이 눈에 들어오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몇 년 전 이 영화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집중하게 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신발이었다. 그리고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신발은 내 기억에서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을 되살아나게 했었다.


이송희일 감독은 이 작품을 자신의 마지막 퀴어 영화로 선언한 것 같은데, 나는 이 영화의 주제를 퀴어가 아니라 학교폭력으로 읽었다. 지금까지 학교폭력이나 왕따 문제를 이보다 더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보지 못했다. 특히 왕따를 당하던 기택이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과 한패가 됨으로써 폭력에서 벗어나는 대목은 사실적인 설정이기에 더 가슴이 아팠다. 나는 비 오는 날 이 영화를 봤었고, 그 후 몸살이 났다.


영화의 주인공은 용주이고 극중에서 그는 게이다. 영화는 용주와 기웅의 로맨스가 학교폭력과 함께 내용 전개의 두 축을 이루고 있다. 다만 나는 신발에 주목하다 보니 이 영화를 기웅이 자아와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성장담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나에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자연스럽게 기웅이 되었다. 자아 확립과 관련해 기웅의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아버지의 부재이고, 다른 하나는 성적 정체성의 혼란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 어김없이 신발이 등장한다. 물론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나의 오독일 수 있다.


기웅의 아버지는 해고노동자로서 거리에서 투쟁 중이다. 당연하게도 기웅은 아버지를 찾아 헤맨다. 나중에 기웅을 만난 아버지가 건네는 선물이 바로 신발이다. 왜 하필 신발일까? 신화 속에서 아버지는 주인공에게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을 주는 사람이다. 기웅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고, 그런 기웅에게 아버지는 신발을 선물한다. 선물 받은 신발은 바로 기웅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집에 돌아갈 수 없는 아버지가 자신을 대신해 보낸 분신일 수도 있겠다. 신화에서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곧 내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같기 때문이다.


용주와 기웅이 처음 만나 통성명을 하면서 용주가 기웅의 신발을 살짝 밟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예전에 기웅이 잃어버렸던 신발을 용주가 보관하고 있다가 기웅에게 가져가라며 던져주는 장면도 등장한다. 나는 이 두 장면을 기웅은 애써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부정하고 있는데, 용주는 그것을 기웅에게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있다는 상징으로 읽었다. 신화 속에서 신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해주는 신표로 등장한다. 그 신표를 용주가 밟으면서 통성명을 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그 신표를 용주가 가지고 있다가 던져준다. 이 장면들은 기웅이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며, 나중에는 용주에게 마음을 열 것임을 짐작하게 했다.


맞다. 영화를 보며 떠올랐던 책은 바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다. 5권까지 나온 이 시리즈 제1권의 첫 번째 꼭지가 바로 신발 이야기다. 외짝 신 사나이 이아손, 칼과 가죽신을 신표로 아버지를 찾은 테세우스가 주인공이다. 덤으로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와 콩쥐의 꽃신도 등장한다. 신발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렇듯 끝이 없었다. 신발은 자살하는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벗어놓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책에서 이윤기 선생은 묻는다. '우리는 혹시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아닌가?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잃어버렸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사람은 신발 한 짝 이상의 어떤 것을 획득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선생은 또 이렇게 단언하기도 한다. '자신을 알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을 향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이런 의문은 누구나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의문을 제기한 다음에는 그 답을 모색하는 경험이 뒤따라야 한다. 의문을 제기하고 그 의문의 답을 모색하는 사람은 신화의 주인공,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의문만 제기할 뿐 그 답을 모색하지 않는 사람은 신화의 조연, 자기가 사는 모듬살이의 조연에 머문다.'


이윤기 선생에 따르면 기웅은 영화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자기 삶의 주인공은 된 것 같다. 그리고 기웅이 주인공이 되는 길에는 늘 친구 용주가 함께 있었다. 영화는 말한다. 친구가 없으면 이 세상은 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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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 싶다>를 봤다.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이런 충격적인 사건들 앞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공통적인 태도가 몇 가지 있다. 가해자나 피해자의 특수한 상황을 부풀려 그것을 사건의 유일한 원인으로 돌리는 것이 대표적이다. 어쩌면 이것은 비슷한 일이 자신에게도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부른 비겁한 회피일지도 모른다. 이런 시선이 피해자에게로 향하면 당해도 싸다든지, 원인제공을 한 잘못이 있다는 등의 말로 2차 피해를 야기하기도 하는데, 다행히 이번 사건에 그런 일은 없었던 듯하다. 대신 가해자의 정신질환이나 장애가 원인으로 지목되었는데, 사실 나도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런 끔찍한 사건의 원인을 조현병이나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생각하면 그나마 안심이 되고 편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진행형의 사건이 마치 종결된 사건처럼 느껴지고, 아무 근거도 없이 나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느껴진다. 동원되는 용어가 어렵고 생소할수록 그 효과는 커진다. 참으로 쉬운 방법이다. 방송 말미에는 캐릭터 커뮤니티라는 것이 다뤄졌다. 나는 스마트폰도 사용하지 않는 원시인이라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사건과 관련해 캐릭터 커뮤니티라는 말은 앞으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 생소한 온라인 공간에 이번 사건의 모든 책임이 있는 것으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어제 방송에서도 어김없이 가해자는 피해 아동 부모의 입을 통해 인간이 아닌 것으로 규정되었다. 참혹한 방법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가 울부짖으며 내뱉은 이 말을 부정하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바로 여기에 이런 사건을 직시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는 듯하다. 결국 우리는 가해자가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다. 이 사건의 주범과 공범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인간이 아닌 그 어떤 존재도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이런 짓을 한다. 힘들지만 이것을 인정해야 처벌도 가능하고 예방도 가능할 것이다. 그들을 인간이 아닌 것으로 규정하여 밀쳐놓으면 잊기도 쉽고, 일상으로 돌아가기도 쉬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한 짓이고, 인간만이 하는 짓이다. 어쩌면 인간 본성들 가운데 일부는 짐승만도 못한 데에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방송을 보는 내내 인간이란 결국 이런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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