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허무하다고 보는 것은 본인의 해석에 불과합니다. 과학은 사실을 전달해줄 뿐이고, 그것을 알고 어떻게 살아갈지는 본인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저자의 말이다. '사실'은 그 자체로 힘이 세다. 과학은 사실 만을 전달한다고 과학자들은 말하고,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을 믿는다. 정치인의 말은 조롱과 냉소의 대상이 되기 일쑤지만, 과학자는 같은 말을 해도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과학은 사실을 전달해줄 뿐이라는 말은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일종의 힘의 과시로 느껴진다.
저자는 과학을 허무하다고 보는 것은 해석에 '불과'하다고 했다. 과학자인 저자는 사실을 해석보다 우위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진정으로 삶이 본인의 선택에 달렸다고 생각한다면, 사실보다는 해석을 우위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해석 없이는 어떤 선택도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지난 대선 국면에서 똑같은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도 사람들은 저마다 해석이 달랐고, 그에 따른 선택도 달랐음을 나는 기억한다.
바야흐로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다. 철학자인 저자는 과학의 시대를 의심한다. '의심하고 질문할 줄 아는 사람들이 과학의 시대를 열었'는데, 과학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 역설을 개탄한다. 우리는 과학이 '번영과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저자는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는 철학이 필요한 시대'라고 말한다. 나는 이 철학자의 말이 '어떻게 살아갈지는 본인의 선택에 달렸'다는 과학자의 말과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을 인문학의 시선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해석과 선택, 의심과 질문에는 쉼표가 필요하다. 일단 멈춰야 그것들이 가능하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멈출 준비가 되어있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방송가와 출판계에서는 인문학이 열풍이란다. 나는 인문학을 잘 모르지만, 인문학은 삶의 자세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 열풍 속의 인문학은 마치 식당의 여러 메뉴 중 하나로 전락한 느낌이다. 학업성적과 업무능력을 올려야 하고, 틈틈이 자기계발서도 읽어야 한다. 유행에 뒤처지지 않아야 하고, 인맥관리도 해야 한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인문학도 해야 한다. 지금까지 하던 것을 그대로 하되, 인문학적으로 보다 세련되고 여유롭게 보여야 한다는 요구, 어쩌면 이것이 인문학 열풍의 본질이 아닐까? 우리는 아직 멈추지 않았고, 멈출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다. 멈추지 않고 읽는 철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한다.
어쩌면 과학도 우리에게 멈춤을 권하고 있는 것 같다. 위 책에서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 하는 존재'라고 했다. 이것은 가끔 멈추고 의심하라는 과학의 요구가 아닐까? 또 '내가 태어나기 전의 세상과 죽은 후의 세상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것은 가끔 멈춰 질문을 던져도 크게 손해 볼 일 없을 거라는 과학의 위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