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 책을 읽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한국사, 특히 조선사를 많이 읽었다. 그런데 세계사에 관한 기본지식도 없으면서 나는 작년부터 문명 간의 교류에 관한 책들에 관심을 두고 있다. 단순히 관심의 대상이 옮겨간 것인지, 아니면 기특하게도 사유의 폭이 넓어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을 포함해서 이런 류의 책들이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물음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첫째, 왜 중국은 오랫동안 통일 제국을 유지한 반면 유럽은 분열을 면하지 못했는가? 둘째, 왜 동양문명은 서양문명에 역전당했는가?
내가 너에게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을 강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나는 왜 이런 이야기에 빠져드는가이다. 문명과 문명이 만난다거나 경쟁한다는 말은 가치중립적이다. 그 말 속에는 피가 없고 눈물이 없다. 그러나 너는 한 번 생각해 보라. 문명과 문명의 만남과 경쟁 속에서 죽어나가야 했던 무수한 목숨들을. 문명 간의 교류란 어쩌면 피도 눈물도 없는 전쟁과 살육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내가 문명 간의 교류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할 때 그것은 희생당한 그 무수한 사람들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극단적인 이성형의 인간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관계가 아니라 과업이다. 말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감정을 배격하고 이성을 추앙한다. 한 발 물러서서 관찰하고 생각하는 것을 즐긴다. 심지어 나 자신을 관조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말투 또한 그러하다. 너는 종종 그런 나를 혐오의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런 내가 수천 년의 역사를 문명 간의 교류라는 무미건조한 말로 정리하는 역사책을 즐겨 읽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 지도 모른다. 예전부터 너는 나에게 소설 읽기를 권했었다. 이 책에 소설 읽기가 인간의 공감능력을 키우고 폭력성을 누그러트린다는 말이 나와서 나는 깜짝 놀랐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소설에는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그나마 학창시절에는 억지로라도 읽었는데, 졸업 후에 읽은 소설은 5권인지 10권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예전에 나는 내가 소설책이 아닌 인문서를 '선택'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선택의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것은 '능력'의 문제일 지도 모른다. 소설을 읽을 줄 아는 능력 말이다. 운동을 잘 못 하고, 노래를 잘 못 하는 것은 능력의 문제로 여겼으면서도, 왜 소설을 읽지 않는 것은 능력의 문제로 여기지 않았었는지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을 능력 밖의 것으로 밀쳐두려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나도 너처럼 소설을 읽어보리라 다짐하고 있다.
세상은 문명화하고 있는가? 아니면 과거보다 더 야만화하고 있는가? 이 책이 던지는 또 다른 물음이다. 소설을 많이 읽는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내 대답은 일단 유보다. 나에겐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다만 전쟁이나 살인으로 인한 사망자의 절대적 수치와 상대적 수치의 차이가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수치화할 수 있다면 살아남은 자들의 스트레스를 비교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전쟁과 살육이 다반사였던 시절의 작은 규모의 잦은 전쟁보다 오히려 요즘 같은 시절에 어쩌다 한 번 접하는 큰 전쟁이 더 큰 스트레스를 유발하지 않을까? 너의 짐작이 맞다. 나는 대답을 유보했지만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믿지는 않는다.
나는 극단적인 이성형인 동시에 '약간'은 비관주의자이기도 하다.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오늘날 예전처럼 공개적이고 잔인한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 이유는 인권의 문제 이전에 필요 때문이라는 것이다. 죽음이 일상이었던 시절에는 그렇게 해야 사형 집행의 효과가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신문 귀퉁이에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기사 한 줄만으로도 그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럴듯한 해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인류의 문명화와 야만화도 결국 최첨단 무기의 버튼을 누를 선택권이 있는 자들의 '필요'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관주의자다운 우울한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비관주의자이면서도 '진보'를 믿는다. 버튼을 누르려 하는 자들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했으나, 그들을 견제하고 통제하는 장치를 하나씩 늘려온 것이 바로 진보의 역사라고 믿는다. 어쩌면 그들에게 소설을 읽히는 것도 하나의 진보일 수 있겠다. 그리고 그들에게 소설을 쓰게 하는 것이 진보의 완성일 수도 있겠다. 이해와 공감은 읽을 때보다 쓸 때 더 깊다는 것이 내 지론이기 때문이다. 뜬금없게도 살인을 할 수 없어서 소설을 쓴다던 어떤 작가가 떠오른다. 또 뜬금없지만 너와 같은 사람이 버튼에 손을 올리고 있다면 마음놓고 역사책을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문득 너의 부드러운 미소가 그리워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