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언제나 자네가 먼저였다. 함께 밥을 먹자 말한 것도 자네가 먼저였고, 한 잔의 술을 권한 것도 자네가 먼저였으며, 숱한 소풍과 여행을 제안한 것도 자네가 먼저였다. 이름을 불러준 것도 자네가 먼저였고, 손을 내밀어 준 것도 자네가 먼저였으며, 마음을 알아준 것도 자네가 먼저였다. 그 시절 나는 자네를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참으로 쉽고도 편한 우정이었음을 모르고 벗을 사귀었으니, 그것이 내 철없음의 또 다른 증거다. 부끄럽고 미안한 일이다. 다시, 자네가 나를 먼저 찾았다. 자네와의 재회에 몇 가지 특별한 우연이 겹쳤으나, 그것은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오랜 시간 자네는 대답 없는 나를 부르고 있었으니, 아마도 그것이 우리 재회의 이유가 아니겠는가.
자네는 우정의 영원함과 재회의 기쁨을 말했으나, 벗이여 미안하다. 나는 영원을 믿지 않는다. 또한 나는 그닥 기쁘지도 않다. 이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나는 아직 두렵고 조심스럽다. 벌써 나는 다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다. 아마 자네도 그것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어찌 자네에게 털어놓은 일들이 전부이겠는가? 자네에게도 차마 보이지 못한 나의 부끄럽고 추한 모습들이 역겨울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나 혼자 세상의 짐을 모두 짊어진 양 굴긴 싫다.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는 법이다. 다만 내게 자네의 이야기를 들어줄 만큼의 여유가 없으니, 그것이 또한 미안한 것이다. 아, 전생에 자네는 내게 큰 빚을 지었음이 분명하다. 이번 생에 내가 자네를 먼저 찾는 날이, 자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되는 마법은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자네를 만나 하고 싶었던 말을 하고 나니 조금은 편안해진 기분이다. 자네 덕에 다른 벗들에게 연락할 용기도 얻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제부터는 안 해 본 짓을 하며 살겠노라고 다짐했건만 쉽지 않다. 그것은 온전히 내 몫일 것이다. 십 년의 소회를 이토록 밋밋하게 말하는 나 자신이 나도 싫다. 그러나 이것이 나다. 자네가 벗이라 불러준 사람이 이런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