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정국이 드디어 마무리되었다. 흔히 이명박근혜 정권 9년이라고 하지만, 지난 4월 15일이 실질적인 권력교체의 날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좀 과장하자면 박정희의 장기집권이 이제서야 끝난 느낌이다. 이번 총선 과정과 결과에서 개인적으로는 실망과 분노를 느끼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우리 정치지형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확인한 것만으로 이번 총선은 큰 의미를 갖기에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지나고 보니 민주당의 선거전략은 치밀했고 훌륭했다. 민주당의 프레임과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했다. 죽어도 여러번 죽어야 했던 저 정당을 계속 살려둘 것인가? 촛불정신을 계승한 이 정권이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전철을 밟아도 좋은가? 투사가 되어 싸울 준비가 되어있었던 지지자들과 진보 성향의 유권자들의 마음에 기름을 붓고 불을 당겼다. 선택은 둘 중 하나뿐이었다. 적군과 아군, 살릴 것과 죽일 것.

비례의석을 단 한 석도 늘리지 않은, 캡을 씌운 '준'연동형비례대표제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어쩌면 위성정당의 등장은 사망 확인서 발급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유명무실한 비례대표제, 소선구제, 살생부적 선택의 강요, 바닥까지 다 끌어온 높은 투표율. 누군가 죽는다는 것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이번 총선은 죽은 제도를 이용해서 벌써 죽었어야 할 정당을 죽인 선거다. 사실 나도 속이 후련했다. 9년 묵은 체증이 내려갔다. 비난하지 않는다. 이러한 마침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다. 

민주당이 21대 국회를 어떻게 운영할지를 걱정한다. 민주당 입장에서야 죽일 놈들은 수도 없이 남아있다. 내 입장도 그렇다. 고상하게 표현하면 개혁입법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인가? 정치의 본질은 죽이는 것인가? 살리는 것인가? 민주당이 아무리 노오력을 해도 비정규직, 청년, 환경운동, 페미니즘, 성소수자, 장애인의 목소리를 오롯이 국회 안에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담아내기 위해 죽은 '준'연동형이라도 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가 앞으로도 계속 죽을 것인지, 조금이라도 살 것인지는 민주당 하기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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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욱이와 마주 앉아 곰팡이 슨 속을 씻어 내리며, 동옥이도 위로해주어야겠다는 원구의 계획대로 그날 그들 셋은 술과 통조림을 앞에 두고 오랜만에 즐거웠다. 그런데 얼마 후 원구가 동욱을 찾아가 보니 동욱 남매는 보이지 않고 새로 집주인이 된 사나이가 동욱은 외출한 채 소식 없이 돌아오지 않게 되었고, 그 뒤 동옥 역시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겠다는 소식을 전한다. 원구는 우산을 쓴 채 동욱 남매가 살던 집을 나온다. 손창섭은 <비 오는 날>의 결말을 이렇게 쓰지 않았다. 진짜 결말은 이렇다. 보자기를 싸 들고 간 원구는 사라져버린 동욱 남매의 소식을 듣고 발길을 돌려 나오다가 다시 돌아가 주인 사나이에게 보자기에 싼 물건을 준다. 원구가 친구와 함께 먹으려고 가져간 술과 통조림은 작품에 이름도 없이 잠깐 등장하는 웬 사나이의 차지가 되고 만다. 그 대목을 옮겨보면 이렇다. '한 손에 보자기 꾸러미를 들고 한 손으로는 우산을 받고 선 채, 원구는 사나이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었다. 원구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몇 걸음 걸어 나가다가 되돌아와 보자기에 싼 물건을 끌러 주인 사나이에게 주었다. 이거 원, 이거 원, 하며 주인 사나이는 대뜸 입이 헤 벌어졌다.' 

  이를테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손에는 더는 소용없는 보자기를 들고, 또 한 손에는 우산을 받고 선 채 비를 맞으며,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라고. 그러니 그 보자기를 앞에 선 모르는 사람에게 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어쩌면 손에 들고 있는 보자기가 사실은 소용없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일지 모른다고. 


2. 

  <미해결의 장>에는 주인공과 광순이 비빔밥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아니, 나오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광순에게 삼백 환을 받아든 나는 도넛 집에 가서 '젠자이(팥고물을 한 떡)'를 주문한다. 그런데 젠자이가 나오는 동안 나는 '불시에'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쌀밥과 김이 떠오르는 만둣국을 생각한다. 나는 주문한 떡은 먹지도 않고, 만둣국에 꼭 밥을 먹어야 한다며 젠자이 값으로 백 환짜리 한 장을 내놓고는 도넛 집을 나온다. 백반 한 그릇이 필요한 나는 몇 군데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어떤 양식점으로 들어가 메뉴에 '돈까쓰'라고 적힌 글자를 본다. 나는 '그 발음이 내게 알맞은 것 같아서' 돈가스와 백반을 먹어보고 싶은데, 가격이 삼백 환이다. 일하는 소녀에게 가격을 한 번 더 확인한 나는 백 환을 더 장만해 가지고 오겠다고 일러놓고 밖으로 나온다.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되돌아가 소녀에게 십 분 안으로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한다. 소녀뿐 아니라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경멸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은 물론이다. 광순의 '오피스'로 가 광순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백 환을 더 청한다. 광순은 오래간만에 돈가스 맛을 좀 보겠다며 나를 따라나선다. 그런데 양식점의 그 소녀가 보이지 않는다. 몸이 불편해서 방금 돌아갔단다. 나는 실망하여 광순을 떠밀 듯이 밖으로 나온다. 결국 둘은 다른 음식점으로 가서 비빔밥을 먹기로 한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광순은 내게 묻는다. 대체 날 뭐 하러 찾아오는냐고, 나한테 무엇을 기대하느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너는 왜 사느냐? 하는 물음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끝내 등장하지 않는 비빔밥과 같은 것이다. 아니, 끝내 등장하지 않는 비빔밥을 먹기까지의 그 어이없고 우스꽝스러우며 서글픈 에피소드와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쉽게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칫 그 대답은 우리가 말하려는 그 삶이란 것에 비해서 너무 가볍거나 너무 무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정작 비빔밥 먹는 장면은 보여주지 않고, 난데없이 '너는 왜 사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작가의 솜씨가 기가 막힌다.


3.

  소년은 점직한(부끄럽고 미안한) 듯이 그러고 한쪽 손에 든 고무신을 뒤로 슬며시 감추었다. 그러나 만기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소년이 들고 있는 고무신을 걸으면서 유심히 보았다. 그것은 달아서 뒤꿈치가 터지고 코뚜리가 쭉 찢어져서 도무지 발에 걸리지 않게 되어 있었다. 만기는 가슴이 찌르르 했다. 전차를 타기 전에 그는 소년에게 고무신부터 한 켤레 사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근처에는 고무신 가게가 눈에 뜨이지 않았고 때마침 전차가 눈앞에 와 멎어서 그대로 이내 차에 오르고 말았다.

  이를테면 <잉여인간> 속 '그제야' 눈치 챈 고무신, 또는 '때마침' 도착한 전차와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는 언제나 '그제야' 눈치를 채고, 언제나 '때마침' 눈앞에 와 멎은 전차에 오른다. 뭔가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다음이고, 필연이라고 믿었던 것은 사실 우연의 연속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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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도 책을 읽고 서평이나 독후감을 쓰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은 웬일인지 모르겠다. 늘 그렇듯이 돈은 없고, 시간은 많았던 한해였다. 올해는 어느 때보다 많은 책을 (특히 소설을) 읽었다. 이것은 다행인가, 불행인가. 올해 읽은 책을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간다. 이제 곧 한 살 더 먹는다. 아직 읽어야 할 책이 많이 남았다. 


1. 카프카








올해는 내 사주에 '병화'가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으로 시작했다. 큰 불을 뜻한단다. 카프카의 사주에도 병화가 들었단다. 읽은 작품이 없어도 친밀감을 느꼈던 이유가 이것이었을까? 내친김에 미뤄왔던 카프카 장편 읽기에 도전했다. 병화때문인가? 차마 남을 태울 수 없어서 작가가 자신을 태우기 위해 쓴 작품으로 읽혔다. 이것은 아무런 근거도 댈 수 없는 뜬구름 잡는 식의 감상일 뿐. 사실 나 같은 무지렁이가 카프카를 한 번 읽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알겠는가? 최근, 독서모임에서 카프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침'으로 읽는 관점을 접했는데, 흥미로웠고 그럴듯했다. 다른 번역본으로 다시 읽어볼 일이다.


2. 나쓰메 소세키
















전부터 읽고 싶었던 작가다. 몇몇 장편이 남긴 했지만, 올해는 소세키를 읽어서 좋았다. 소세키는 내게 내용과 상관없이 읽을 때 마음을 편안하고 흐뭇하게 만드는 작가다. 메이지 시대, 조국 근대화의 사명과 문학에 대한 개인적 취향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해야 했던 소세키. 작품 속 주인공들의 삶은 결말이 성공적이라 할 수 없지만, 소세키의 삶은 나름 잘 버텨낸 삶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의외로 좋았던 작품은 데뷔작 <고양이>와 <이백십일>이라는 단편이었다. 우울할 때 남몰래 꺼내서 키득거리며 읽기에 좋다.


3. 일본 문학















소세키 소설 두 편과 함께 독서모임에서 읽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몇몇 단편들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다.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 선생의 통찰. 현재 내 눈 앞에서 펼쳐지는 모든 사태들은 그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처음부터 그러한 것이 아니라, 어느 역사적 시점에 부자연스럽게 끼어든 일들이라는 것. 시점과 문체와 개인의 내면과 같은 근대문학의 담론도 그러하다는 것. 원래부터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은 없다는 말씀.


4. 프랑스 문학

















다작의 작가 발자크와 에밀 졸라가 버티고 있어 공략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두 작가의 작품은 아직 읽지 못한 작품이 많이 남았다. 남은 19세기 프랑스 문학은 내년으로 미룬다. 올해 읽은 프랑스 문학의 압권은 단연 <보바리>다. 문학의 수도승이 써내려간 치밀한 묘사와 구성은 일종의 명품 수공예를 연상케 했다. 처음에 다소 지루하다고 불평하며 감히 플로베르를 몰라봤다는 것을 사죄드린다.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제르미날>. 에밀 졸라와 같은 문제의식을 괜찮은 장편으로 써낸 한국 작가가 없어서 아쉽다. 조세희의 <난쏘공> 정도가 있을 뿐. 작년에 읽은 <목로주점>과 <돈>에 이어서 내년에는 <나나>, <인간 짐승>과 같은 작품으로 이어지겠다. 


5.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드디어 우리 도선생님과 톨선생님의 장편을 읽었다. 혹은 읽어버렸다. 사실 이 작품들에 대해 말해보라고 한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다만 다른 작품들에 비해 훨씬 훌륭하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겠다 싶었다. 특히 <전평>과 <까라마조프가>는 압도적이었다. 사실 올해의 독서는 이 두 편의 소설을 읽었다고 적고 넘어가도 될 것인데, 적다보니 말이 길어진다. 톨스토이는 저 높은 곳에서 역사와 세상과 인간 군상을 한눈에 조망하게 해준다. 한데 그렇게 조망하는 세계는 결코 질서정연하지 않다. 특히 전쟁터에서의 주인공들의 헛짓거리란 말도 못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작품 속에서 이런 인간 쓰레기들을 끌고 가서 도대체 뭘 어쩌려나 싶은데, 결국엔 구원을 말한다. 한데 그것이 전혀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톨스토이는 높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넓다. 톨스토이는 얼마큼 높이 올라갈 수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디까지 끌어안을 수 있을까? 나로서는 가늠할 수 없다.


6. 러시아 문학
















올해의 발견이라 한다면 투르게네프와 레스코프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작가들이야 작품을 읽지 않아서 그렇지 워낙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두 작가는 특히 레스코프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주인공이 맞는 허무하면서도 당연해 보이는 비극적 결말, 인상에 남는다. 마치 내 모습을 보는 듯했다. <맥베스 부인>은 강력한 여성 캐릭터를 내세워 전혀 다른 이야기를 펼쳐보인다. 러시아 소설에 이런 작품도 있었나 싶었다. 레스코프의 <광대 팜팔론>이나 <왼손잡이>와 같은 다른 작품이 기대된다. 이것은 내년으로 넘긴다.


7. 영국 문학

















올해의 독서에서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작품들이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영국 작가들이 모여서 '이런 것을 쓰자'라고 담합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한마디로 이들 작품들은 잃어버린 핏줄과 돈줄을 찾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그 비중이 크든 작든 이런 이야기가 반드시 등장한다. 알고 봤더니 너랑 나랑 사촌이래. 알고 봤더니 주인공이 막대한 유산의 상속자래. 분명 이에 대한 연구도 되어 있을 것이니, 한 번 찾아봐야겠다. 한 편을 꼽자면 <테스>다. 지인이 예전에 이 작품을 두고 '자존심을 지킨 사랑'이라 평한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아주 마음에 드는 평이었다. 다음에 다시 읽는다면 백석의 번역으로 보고 싶다.


8. 미국 문학









얼마 읽지 않은 미국 문학이지만 <모비딕>을 읽었기에 그것으로 되었다. 1951년이라는 연도를 결코 잊지 못할 것 같다. 믿기지 않을 만큼 현대적이고 세련되었다. 당대에 읽히지 않은 것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역자도 말하고 있듯이 이 소설은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바다와 같다. 바다와 고래와 인간의 육체를 묘사하는 물질성에서부터 철학과 영혼과 종교를 말하는 형이상학까지, 거대하다. 올해 읽은 책은 첫째 <전평>, 둘째 <까라마조프가>, 셋째 <모비딕>이다. 이 세 작품과 같은 작품을 앞으로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홍 글자>의 주인공은 <맥베스 부인>과 더불어 올해의 잊을 수 없는 여성으로 꼽는다. <톰 아저씨>의 경우 당대 가장 첨예한 문제였던 노예제에 관해 작가가 할 수 있는 말을 최선을 다해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 작가들도 이 시대의 첨예한 사안에 대해 더 많이 발언하기를 기대한다.


9. 독일 문학









독일 문학은 많이 읽지 못했다. 사실 도서관에서 빌려다놓고 조금 읽다가 포기한 작품이 몇 편 있다. 파우스트도 1권만을 겨우 읽었을 뿐이다. 그나마 <미하엘 콜하스>라는 신선한 작품을 만나 즐거웠다. 카프카의 3대 장편을 읽은 것으로 독일 문학의 아쉬움을 달랜다. 

한편 올해는 괴테가 제출한 '세계문학'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볼 일이 많았다. 거기에는 조영일의 <세계문학의 구조>라는 책을 읽은 것도 한몫했다. 소세키와 같은 국민작가의 부재, 한국문학의 위상과 번역의 문제, 세계문학 전집의 유행과 효용의 문제 등. 내가 답을 낼 수는 없지만 이런저런 생각은 많았다.


10. 기타
















주로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들이다. 우선 제발트와 존 버거를 알게 된 것이 수확 중의 수확이다. 이들 두 작가는 내 독서 행태에 대해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렵고 재미없다고 쉽게 포기하고 말았던 지난 독서 경험들, 반성한다. 평생에 걸친 경험과 생각을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에 걸쳐 쓴 작품을 단 몇 시간만 읽고 뭔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놓아버렸던 것이다. 제발트와 존 버거는 읽을 때는 힘들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만나고 싶은 작가가 되었다. <종이 동물원>과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훌륭한 sf를 알게 된 것도 좋았다고 한마디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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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19-12-30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네요!
새해에도 즐독하십시요!ㅎ

책의속밖 2019-12-31 08:11   좋아요 0 | URL
막시무스 님도 즐독하시고,
즐겁고 편안한 새해 맞이하시기 바랄게요!
 

우리들이 저놈에게 기억시켜 놓은 거라곤 그저 쫓고 사냥하고 죽이는 일뿐이지요. 저놈이 아는 게 그것뿐이라면 우리가 부끄러워 할 일입니다.

사냥개, 로봇 사냥개,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닌 로봇 사냥개. 이를 두고 주인공이 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키워드는 '부끄러움'과 '책임'이다.

옛 성현은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부귀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부자들은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하라고 자식들을 가르쳤다. 시인은 살기 어려운 인생에서 시가 쉽게 씌어지는 것이 부끄럽다고 썼다.

제 앞가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부끄럽기로는 내가 최고다. 대체 나는 왜 읽는걸까? 이 소설은 책을 불태우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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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리는 죽는다. 개죽음이다. 이 개죽음을 개죽음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전호리의 육체가 아니라 전호리의 자아다. 그 자아가 바로 원숭이 왕이다. 전호리는 죽지만 원숭이 왕은 살아남는다. 육체는 죽어도 자아는 죽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죽고 그가 만든 괴물은 살아남았다.) 의미와 가치는 육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아를 위한 것이다. 육체는 의미와 가치를 필요로 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이 필요하고,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자아다. 육체의 개죽음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보려는 자아의 가련한 시도, 이것이 이 단편의 주제다. 개죽음은 전호리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서 양주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 개죽음을 기록한 왕수초도 죽었다. 그리고 왕수초의 기록을 지키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 이소정과 그의 누이가 있다. 두 사람이 잘 살고 있다는 원숭이 왕의 말은 거짓말이다. 그래야 개죽음을 견딜 수 있다.


원숭이 왕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금서의 내용도 이야기로 되어 있을 것이다. 왕수초는 <양주십일기>를 쓰면서 그 수많은 죽음이 개죽음이 아닌 이유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의미와 가치는 이야기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 이야기는 물론 허구다. 모두 거짓이라서 허구가 아니라, 모두 사실일 수 없어서 허구다. 어떤 기록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을 수는 없다. 허구라서 의미 없고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 허구일 때에만 의미와 가치가 발생한다. 아니, 의미와 가치는 허구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허구인 이야기를 만들고, 전파하고, 듣고, 믿는 이유다.


세상에 왕수초의 이야기나 원숭이 왕의 이야기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편의 이야기가 있다. 반대편은 바로 불의다. 불의는 상대에게 개죽음을 강요하기도 한다. 양편의 이야기들이 서로 경쟁한다. 시간이 흘러 왕수초의 이야기가 승리해 진실임을 인정받았듯이 전호리와 같은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도 승리해 진실로 승격할 것임을 작가 켄 리우는 믿는 듯하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 사실 이 믿음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다. 우리는 이 믿음이 실현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특별히 ‘역사’라고 부른다. 역사란 이야기다. 우리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다.


따라서 진실이 드러나기까지 걸리는 역사의 시간을 인간의 수명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절망하는 것은 난센스다. 처음부터 역사는 인간의 죽음을 뛰어넘기 위한 이야기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이 소설집에서 펼쳐지는 진화라는 이야기도, 우주라는 이야기에도 해당한다. 역사와 진화와 우주의 시간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무의미할 만큼 작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무의미해 보이는 인간이 역사와 진화와 우주라는 이야기를 발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영원의 시간 동안 계속된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우리는 의미와 가치를 놓치지 않는다. 물론 나의 이런 믿음도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나는 지극히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이지만, 허무주의에는 빠질 수 없어서 이렇게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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