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평점 :
일시품절


좋은 소설을 읽었다. 실존 인물을 소재로 소설을 쓸 때에 생기는 작가의 고민을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고, 별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을밀대 지붕에서 떨어진 '강녀'를 끌어올려 승천하는 '선녀'로 다시 명명하려는 시도. 이것이 작가의 고민의 결과였을까.


이름에 대한 나의 생각은 강주룡과 비슷했다. 내 남편 이름이 일본놈 다카시든 청나라 왕서방이든 무슨 상관인가. 이렇게 부르든 저렇게 부르든 내 남편이다. 작품 후반에 주룡이 정달헌에게 자신의 이름 뜻을 풀이해 들려주는데, 이는 남편에게서 들은 것이다. 용처럼 긴 허리로 세상을 두루 품어주라는 뜻. 작품이 진행될수록 주룡은 자신의 이름처럼 점점 세상을 알아간다. 그가 알아가는 세상은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이라고 해도 좋겠다. 조국 독립에 대한 절실함 없이 그저 남편을 따라 독립군에 가담했던 주룡이 동료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자본가의 착취에 분노하며 노동운동의 선봉에 선다. 이렇게 보면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아직 나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주룡이 자신이 이름 뜻을 몰랐다면, 다른 이름을 가졌더라면 다른 삶을 살다 갔을까?


당신이 좋아서 당신을 독립된 나라에서 살게해주고 싶다는 남편 최전빈의 고백. 이것은 이 작품에서 가장 감동적인 말이었다. 화자도 쓰고 있듯 대의를 좇아서 산다는 것은 가정에 죄를 짓는 일이다. 이것이 나의 상상력의 한계였다. 둘 중 하나만 가질 수 있다는 생각. 하나를 희생해야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 그러나 전빈은 그 둘을 하나로 합하는 상상을 했고, 그 상상을 입 밖으로 꺼내서 듣는 사람을 감동시켰다. 적어도 내게는 그것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뒤에 가면 주룡이 비슷한 말을 한다. 내가 모던걸을 꿈꾸든 말든 관리자가 나를 이따위로 대하면 안 된다고. 모던걸을 꿈꾸는 사람과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사람을 도저히 동일인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이 빈곤한 상상력. 좋은 작품은 내 상상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알게해주고 상상력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넓혀준다.


증여와 교환의 대상, 노동력 착취와 성적 희롱의 대상, 대를 잇게 해줄 '자궁'으로서의 역할. 작품의 배경인 일제시대 여성의 삶이란 이런 것이었다. 이러한 여성의 삶을 바꾸기 위한 싸움은 지금도 진행중인데, 이런 와중에 주인공 주룡이 주변 남성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평가하고 있다. 연하의 남편은 귀여운 외모에 내가 보살펴야할 남자고, 독립군의 백광운은 주룡이 아는 남자 중 그나마 쓸만한 사람이다. 백광운 휘하의 남자들은 주룡과 주룡의 남편을 희롱하며 저희들끼리의 연대를 다지는데, 주룡은 여기에 항의하며 독립군에서 나온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에 집에서 나와 '독립'을 할 때는 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주된 이유로 제시된다. 가족은 돌보지 않고 남들 시선만 의식하는 사람, 딸을 재산과 바꿔 편하게 살아보려는 사람. 여러 남자들 중에서 무능하고 이기적인 아버지에게 주룡이 내리는 평가는 압권이다.


감옥에 갇힌 정달헌의 머릿속에서 주룡이 죽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가는 장면까지 거꾸로 재생된다. 정달헌은 올라가지 말라고 외친다. 올라가면 죽는다고. 주룡은 답한다. 알고 있다고. 주룡은 알면서도 간다. 그런데 주룡은 앞뒤 재고 따진 다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독립운동에 나설 계획이라는 남편의 말을 듣고서 남편을 더 키워 더 큰 뜻을 펼치게 해주겠노라고 말할 때도, 친구 홍삼이가 노조 결성 방해공작이 두려워 탈퇴를 하자 자신이 홍삼이 대신 들어가겠다고 말할 때도 그렇다. 주룡은 즉흥적으로 자신이 무슨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궤변'을 늘어놓으며 움직인다. 


알면서도 간다는 주룡의 말은 어쩌면 자신의 선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땅히 도래할 어떤 이상에 대한 열정과 내 몸과 같은 이웃을 향한 사랑. 이것은 주룡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룡은 알면서도 간다. 나는 이렇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작품이 좋았나보다. 알면서도 가는 것, 생각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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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에서 <복화술사들>이라는 책과 함께 식민지 시기 한국 소설을 읽었다. 순 한글로 소설을 쓰고 읽는 일이 자명한 일이 아니었다는 논의, '국어'나 '국문학'이란 개념이 분명하게 손에 잡히는 명확한 것이 아니라는 논의. 기억해야겠다. 이런 현실 속에서 소설이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그 소설에 문명개화라는 담론을 비롯한 여러 고뇌와 반성을 담아내려 했던 당시 작가들의 눈물겨운 고군분투. 역시 기억해야겠다.


예전에 읽었던 신영복 선생의 <담론>을 다시 읽을 일이 있었는데 이런 말이 있었다. 좋은 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없는 것은 나의 안목이다. 좋은 것은 좋은 사람 또는 좋은 물건 또는 좋은 작품일 수도 있겠다. 한국문학에 좋은 작품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걸 알아보는 내 안목이 없었을 뿐. 최명익, 김남천, 김사량, 허준과 같은 작가는 그 이름도 몰랐거나 이름만 알고 있다가 처음 읽어보았다. 이태준과 김유정은 다시 읽어보니 전보다 더 좋았다.


전에는 안목을 능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능력이 있어서 알아보거나 능력이 없어서 알아보지 못 하거나의 문제. 요즘은 이것이 어쩌며 태도의 문제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정적인 면보다는 좋은 면을 먼저 보려는 태도, 작가가 놓여있던 한계와 그 한계에서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기 위해 몸부림쳤던 작가의 노력을 알아주려는 태도. 이를테면 이인직, 이광수, 김동인 같은 작가들이 한국인으로서 한국어를 가지고 소설이란 것을 처음 쓴다는 일의 어려움 같은 것. 


전문가가 이끄는 독서모임에서 몇 년 째 소설을 읽다보니 내 생각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알겠다. 거기에 따라 내 태도도 바뀌고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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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모임에서 아니 에르노의 작품 두 편을 읽었다. 책을 읽을 때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을 듣게 되었는데, 에르노는 작품 속에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주인공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퇴행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충격이었다. 문학을 특히 소설을 읽으면서(에르노는 자신의 작품을 소설이 아니라고 한다지만) 주인공의 변화와 성장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작품을 읽으라는 말인가? 내게는 그것이 문학 독법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중반까지 얼마나 주인공 아킬레우스를 욕했는지 모른다. 전장에 나아간 장수가 어쩌면 그렇게 어린 아이 같은지. 그런 그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적장의 아버지와 마주 앉아 엄청난 감동을 선사한다. 의젓함을 넘어서 위대해 보이기까지 한 그를 두고 나는 칭찬을 쏟아냈다. 그런데 모임에서도 나온 말이지만 과연 이런 드라마틱한 변화가 우리들 일상에서 일어나는가? 멀리 갈 것도 없다. 대개의 경우 나는 어떤 계기가 주어져도 변화하지도 않고 성장하지도 못한다. 


사실 이 충격이 큰 이유는 다른 데에 있는데, 평소에 내가 사로잡혀 있는 이런 생각들 때문이다. 바로 '우리 모두가 성공할 수는 없다, 모두가 잘날 필요는 없다'는 생각 말이다. 그런데 나는 왜 소설을 읽을 때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변화하지 않고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일종의 판타지를 기대하며 작품을 대했던 것일까? 


천동설의 세상에서 지동설의 세상으로 옮겨온다면 이런 느낌일까? 앞으로는 전처럼 작품을 읽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당장 특별한 수가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니다. 가만히 앉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지적하는 일은 얼마나 쉬웠던가? 이제는 작품을 중심에 두고 그 둘레에서 내가 움직여야 한다. 일단은 '나도 그러하다'는 생각에서 시작해보려 한다. 내가 싫어했던 주인공들처럼 나도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안티고네와 도련님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다. 독서 모임에서 <안티고네>와 소세키의 <도련님>을 읽으면서 굳이 하지 않아도 좋은 말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고 늘 다짐하건만 역시 쉽지 않다. 나도 안티고네처럼 변화하지 않고, 도련님처럼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어쩌면 사과가 아니라 화해를 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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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네 권의 역사책을 간단한 메모로 정리하고 넘어간다. <정의의 감정들>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제기한 소송을 분석하여 그들이 풀고자했던 억울하고 원통한 감정을 연구의 대상으로 한 감정사 책이다. '한국 사회 집단 불안의 기원을 찾아서'라는 부제가 붙은 <식민지 트라우마> 역시 열등감과 열패감, 모욕과 수치, 인정욕망과 히스테리컬한 공격성 등 식민지 시기 감정사를 탐구한다. <전쟁과 가족>은 한국전쟁의 경험을 가족과 공동체라는 관계망 속에서 사유하는 책이다. '근대성의 표준으로 설정된 남성을 역사화하려는 시도'라고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는 <남성성의 각본들>은 해방 후 민족국가 성립 과정에서 배제된 비남성에 주목하고 있다.


<정의의 감정들>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차별당한 조선시대의 여성들이 같은 시기 유럽이나 중국, 일본 등과 비교해도 특이할 정도로 법 앞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대개의 경우 여성은 남성 대리인을 법정에 세워야 했다고.) 또 하나는 여성들이 주로 법정에서 호소한 것이 남편을 비롯한 가족의 억울함이었다는 점인데, 이 경우 여성이 가부장의 대리인으로 격하되는 동시에 질병등으로 무능한 남편을 대신하는 능동적인 여성으로 상승하는 면이 있는 것으로 읽혔다. 조선시대에 여성의 삶 특히 사대부 양반 남성에 의해 차별당하고 배제당한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독서가 더 필요하다.


사실 나처럼 감정사에 무지한 독자 입장에서는 <식민지 트라우마>에서 다루는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의 감정이라는 것이 너무도 당연해보여 이런 것이 연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놀라운 정도다. 다만 뒤 표지에 적혀있듯 '권위주의, 부정부패, 정치 불신, 물질주의 등 해방 이후 우리 사회 적폐의 뿌리까지 엿볼 수 있는' 연구라는 점에서 내게는 아주 반가운 역사책이었다. 이 책에서 발견한 (아주 사적인 기준에서) 최대의 수확에 해당하는 문장을 옮겨보면 이렇다. 한국 사회는 왜 공동체 또는 공공선에 대한 관심이 약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겠다. 

삶의 모든 면에서 불안과 불안정을 안고 살았으므로 적대적 타자에 대해서는 빠르게 대항적 에너지를 끌어내지만 타자가 부재할 때 그 적대의 에너지는 자기 자신, 가족, 이웃, 마을, 지역의 구체적이고 사적인 이해를 위해 투입된다. 국민국가 경험의 부재는 공과 사, 국가와 시민사회, 개인과 국가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주체의 모습으로 공동체, 친족과 같은 관계를 제시하고 있는 <전쟁과 가족>에서는 친족이 사적 영역에 속하며 이 친족이 공적 세계에서 물러나야 근대사회와 정치의 지평이 드러난다는 주장을 근대 정치의 신화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눈에 들어온다. 책은 전쟁을 경험한 주체는 홀로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친족의 일원이었고, 국가권력(남과 북, 그리고 미군도)은 이 점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좌제로 대표되는 전후에 펼쳐진 역사도 마찬가지로 친족관계를 정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공적 세계가 회복되기 위해 친족의 목소리가 오히려 크고 분명하게 들려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내게는 대단히 신선하게 다가온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희생자(친족)를 애도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한 투쟁으로 보는 저자의 시각에 동의하면서도, 친족을 철저히 사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나의 편견(?)을 쉽게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시 관련된 독서가 더 필요함을 실감한다. (그리고 하나의 사족을 달자면, 이 책 덕분에 최근 독서모임에서 읽은 박완서의 작품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안티고네>에 대해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열렸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민족국가의 탄생과 남자-되기'라는 <남성성의 각본들>의 부제가 암시하는 바는 익숙한 주제인데, 이것을 이광수, 김동리, 염상섭, 손창섭, 황석영 등 문학작품을 예로 들어 풀어나는 것이 대단히 흥미로웠다. 거기에 서북청년단, 국민개병제, 국가보안법과 병역법 등 현대사가 버무려지면서 네 권의 책 중 가장 내 입맛(?)에 맞는 책이 되었다. 

한국문학에서 보편으로 삼은 민족문학, 리얼리즘 문학은 철저히 젠더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분석은 주목할 대목이다. 그런데 그 문학(그리고 몇몇 영화)사 안에서도 '남성성의 각본'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목소리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지적은 더 주목할 만한다. '남성성을 탈구축하고, 젠다화된 문학사를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라는 지배적 허구에 관한 텍스트로 다시 읽음으로써 더 많은 텍스트들, 더 많은 가능성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저자를 응원한다. 우리 문학사가 써내려온 남성성이 허구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더 많은 가능성'과의 조우가 아닐까?


굳이 네 권의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찾자면 '국가'가 될 것인데, <정의의 감정들>에서 국가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최종 심판자, 국왕으로 모습으로 등장한다. 정작 억울한 일이 펼쳐질 때는 보이지 않는다. 국가는, 왕은 마지막 장면에만 등장한다. <쌀 재난 국가>에서 말한 재해를 방지하는 정도의 역할만 맡은 국가가 떠올랐다.

<식민지 트라우마>에 국가는 없다. 일상적으로 전방위적으로 폭력과 모욕을 가하는 당국(총독부)가 있을 뿐이다. 이로 인해 민족감정으로서의 민족주의가 성립했고, 이것이 초래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어두운 모습은 위에 적은 것과 같다.

<전쟁과 가족>의 국가는 한국전쟁 기간 중 철저하게 친족, 공동체, 관계를 파괴했다. 뿐만 아니라 남과 북 모두에서 전후에도 철저하게 친족을 정치적으로 관리하면서 통치에 이용했다.

<남성성의 각본들>의 국가는 오직 남성을 일등 시민으로 호명하는 국가다. 여성과 남성성을 의심받는 남성들에게 국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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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마지막 날, 이제 곧 11월이다. 올해를 마무리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지난 1년 동안의 독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여성'이라는 키워드다. 특별히 의도하지 않았으나 여성의 삶을 다룬 책을 몇 권 읽게 되었다. 그 중에서 인상깊었던 책을 꼽는다면 <사람입니다 고객님>, <레이디 크레딧>, <보이지 않는 여자들>이다. 각각 한국 콜센터 여성 노동장의 삶,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속의 한국 성매매 산업, 사회 전분야에 걸친 여성을 배제한 남성 표준화(?)를 다루고 있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책은 <다락방의 미친 여자>인데, 여성 작가의 글쓰기의 어려움, 그리고 그 특징이 흥미롭지만 읽기에 만만치가 않다. 다음에 읽을 책으로 점찍어둔 책은 <정의의 감정들>. 조선시대 여성들의 소송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여성과 역사가 만나는 지점이 눈길을 끈다.








한편 최근 몇 년 동안 독서모임에서 제인 오스틴, 버지니아 울프, 박완서 등 여성 작가를 주로 읽어왔다. 독서경력 운운할 정도는 아니지만, 여성 작가들의 책을 읽으면서 책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은 바뀌는 것을 실감한다. 가장 큰 것은 돌봄 노동에 대한 인식이다. 이제 어떤 책을 손에 들면 먼저 이 작가가 서재에 틀어박혀 이 책을 쓰는 동안 누가 대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해주었을까를 묻게 된다. 다음으로는 어떤 작가의 한계나 단점에 대해서 따지기 전에 먼저 그 작가가 그 한계와 단점 속에서 무엇을 하기 위해 펜을 들었는지를 생각하기로 다짐했다는 것. (다짐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역시 어렵다.) 당분간 여성의 삶을 다룬 책, 그리고 여성 작가의 책을 꾸준히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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