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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좋은 소설을 읽었다. 실존 인물을 소재로 소설을 쓸 때에 생기는 작가의 고민을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고, 별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을밀대 지붕에서 떨어진 '강녀'를 끌어올려 승천하는 '선녀'로 다시 명명하려는 시도. 이것이 작가의 고민의 결과였을까.


이름에 대한 나의 생각은 강주룡과 비슷했다. 내 남편 이름이 일본놈 다카시든 청나라 왕서방이든 무슨 상관인가. 이렇게 부르든 저렇게 부르든 내 남편이다. 작품 후반에 주룡이 정달헌에게 자신의 이름 뜻을 풀이해 들려주는데, 이는 남편에게서 들은 것이다. 용처럼 긴 허리로 세상을 두루 품어주라는 뜻. 작품이 진행될수록 주룡은 자신의 이름처럼 점점 세상을 알아간다. 그가 알아가는 세상은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이라고 해도 좋겠다. 조국 독립에 대한 절실함 없이 그저 남편을 따라 독립군에 가담했던 주룡이 동료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자본가의 착취에 분노하며 노동운동의 선봉에 선다. 이렇게 보면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아직 나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주룡이 자신이 이름 뜻을 몰랐다면, 다른 이름을 가졌더라면 다른 삶을 살다 갔을까?


당신이 좋아서 당신을 독립된 나라에서 살게해주고 싶다는 남편 최전빈의 고백. 이것은 이 작품에서 가장 감동적인 말이었다. 화자도 쓰고 있듯 대의를 좇아서 산다는 것은 가정에 죄를 짓는 일이다. 이것이 나의 상상력의 한계였다. 둘 중 하나만 가질 수 있다는 생각. 하나를 희생해야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 그러나 전빈은 그 둘을 하나로 합하는 상상을 했고, 그 상상을 입 밖으로 꺼내서 듣는 사람을 감동시켰다. 적어도 내게는 그것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뒤에 가면 주룡이 비슷한 말을 한다. 내가 모던걸을 꿈꾸든 말든 관리자가 나를 이따위로 대하면 안 된다고. 모던걸을 꿈꾸는 사람과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사람을 도저히 동일인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이 빈곤한 상상력. 좋은 작품은 내 상상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알게해주고 상상력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넓혀준다.


증여와 교환의 대상, 노동력 착취와 성적 희롱의 대상, 대를 잇게 해줄 '자궁'으로서의 역할. 작품의 배경인 일제시대 여성의 삶이란 이런 것이었다. 이러한 여성의 삶을 바꾸기 위한 싸움은 지금도 진행중인데, 이런 와중에 주인공 주룡이 주변 남성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평가하고 있다. 연하의 남편은 귀여운 외모에 내가 보살펴야할 남자고, 독립군의 백광운은 주룡이 아는 남자 중 그나마 쓸만한 사람이다. 백광운 휘하의 남자들은 주룡과 주룡의 남편을 희롱하며 저희들끼리의 연대를 다지는데, 주룡은 여기에 항의하며 독립군에서 나온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에 집에서 나와 '독립'을 할 때는 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주된 이유로 제시된다. 가족은 돌보지 않고 남들 시선만 의식하는 사람, 딸을 재산과 바꿔 편하게 살아보려는 사람. 여러 남자들 중에서 무능하고 이기적인 아버지에게 주룡이 내리는 평가는 압권이다.


감옥에 갇힌 정달헌의 머릿속에서 주룡이 죽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가는 장면까지 거꾸로 재생된다. 정달헌은 올라가지 말라고 외친다. 올라가면 죽는다고. 주룡은 답한다. 알고 있다고. 주룡은 알면서도 간다. 그런데 주룡은 앞뒤 재고 따진 다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독립운동에 나설 계획이라는 남편의 말을 듣고서 남편을 더 키워 더 큰 뜻을 펼치게 해주겠노라고 말할 때도, 친구 홍삼이가 노조 결성 방해공작이 두려워 탈퇴를 하자 자신이 홍삼이 대신 들어가겠다고 말할 때도 그렇다. 주룡은 즉흥적으로 자신이 무슨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궤변'을 늘어놓으며 움직인다. 


알면서도 간다는 주룡의 말은 어쩌면 자신의 선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땅히 도래할 어떤 이상에 대한 열정과 내 몸과 같은 이웃을 향한 사랑. 이것은 주룡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룡은 알면서도 간다. 나는 이렇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작품이 좋았나보다. 알면서도 가는 것, 생각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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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네 권의 역사책을 간단한 메모로 정리하고 넘어간다. <정의의 감정들>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제기한 소송을 분석하여 그들이 풀고자했던 억울하고 원통한 감정을 연구의 대상으로 한 감정사 책이다. '한국 사회 집단 불안의 기원을 찾아서'라는 부제가 붙은 <식민지 트라우마> 역시 열등감과 열패감, 모욕과 수치, 인정욕망과 히스테리컬한 공격성 등 식민지 시기 감정사를 탐구한다. <전쟁과 가족>은 한국전쟁의 경험을 가족과 공동체라는 관계망 속에서 사유하는 책이다. '근대성의 표준으로 설정된 남성을 역사화하려는 시도'라고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는 <남성성의 각본들>은 해방 후 민족국가 성립 과정에서 배제된 비남성에 주목하고 있다.


<정의의 감정들>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차별당한 조선시대의 여성들이 같은 시기 유럽이나 중국, 일본 등과 비교해도 특이할 정도로 법 앞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대개의 경우 여성은 남성 대리인을 법정에 세워야 했다고.) 또 하나는 여성들이 주로 법정에서 호소한 것이 남편을 비롯한 가족의 억울함이었다는 점인데, 이 경우 여성이 가부장의 대리인으로 격하되는 동시에 질병등으로 무능한 남편을 대신하는 능동적인 여성으로 상승하는 면이 있는 것으로 읽혔다. 조선시대에 여성의 삶 특히 사대부 양반 남성에 의해 차별당하고 배제당한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독서가 더 필요하다.


사실 나처럼 감정사에 무지한 독자 입장에서는 <식민지 트라우마>에서 다루는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의 감정이라는 것이 너무도 당연해보여 이런 것이 연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놀라운 정도다. 다만 뒤 표지에 적혀있듯 '권위주의, 부정부패, 정치 불신, 물질주의 등 해방 이후 우리 사회 적폐의 뿌리까지 엿볼 수 있는' 연구라는 점에서 내게는 아주 반가운 역사책이었다. 이 책에서 발견한 (아주 사적인 기준에서) 최대의 수확에 해당하는 문장을 옮겨보면 이렇다. 한국 사회는 왜 공동체 또는 공공선에 대한 관심이 약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겠다. 

삶의 모든 면에서 불안과 불안정을 안고 살았으므로 적대적 타자에 대해서는 빠르게 대항적 에너지를 끌어내지만 타자가 부재할 때 그 적대의 에너지는 자기 자신, 가족, 이웃, 마을, 지역의 구체적이고 사적인 이해를 위해 투입된다. 국민국가 경험의 부재는 공과 사, 국가와 시민사회, 개인과 국가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주체의 모습으로 공동체, 친족과 같은 관계를 제시하고 있는 <전쟁과 가족>에서는 친족이 사적 영역에 속하며 이 친족이 공적 세계에서 물러나야 근대사회와 정치의 지평이 드러난다는 주장을 근대 정치의 신화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눈에 들어온다. 책은 전쟁을 경험한 주체는 홀로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친족의 일원이었고, 국가권력(남과 북, 그리고 미군도)은 이 점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좌제로 대표되는 전후에 펼쳐진 역사도 마찬가지로 친족관계를 정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공적 세계가 회복되기 위해 친족의 목소리가 오히려 크고 분명하게 들려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내게는 대단히 신선하게 다가온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희생자(친족)를 애도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한 투쟁으로 보는 저자의 시각에 동의하면서도, 친족을 철저히 사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나의 편견(?)을 쉽게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시 관련된 독서가 더 필요함을 실감한다. (그리고 하나의 사족을 달자면, 이 책 덕분에 최근 독서모임에서 읽은 박완서의 작품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안티고네>에 대해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열렸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민족국가의 탄생과 남자-되기'라는 <남성성의 각본들>의 부제가 암시하는 바는 익숙한 주제인데, 이것을 이광수, 김동리, 염상섭, 손창섭, 황석영 등 문학작품을 예로 들어 풀어나는 것이 대단히 흥미로웠다. 거기에 서북청년단, 국민개병제, 국가보안법과 병역법 등 현대사가 버무려지면서 네 권의 책 중 가장 내 입맛(?)에 맞는 책이 되었다. 

한국문학에서 보편으로 삼은 민족문학, 리얼리즘 문학은 철저히 젠더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분석은 주목할 대목이다. 그런데 그 문학(그리고 몇몇 영화)사 안에서도 '남성성의 각본'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목소리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지적은 더 주목할 만한다. '남성성을 탈구축하고, 젠다화된 문학사를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라는 지배적 허구에 관한 텍스트로 다시 읽음으로써 더 많은 텍스트들, 더 많은 가능성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저자를 응원한다. 우리 문학사가 써내려온 남성성이 허구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더 많은 가능성'과의 조우가 아닐까?


굳이 네 권의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찾자면 '국가'가 될 것인데, <정의의 감정들>에서 국가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최종 심판자, 국왕으로 모습으로 등장한다. 정작 억울한 일이 펼쳐질 때는 보이지 않는다. 국가는, 왕은 마지막 장면에만 등장한다. <쌀 재난 국가>에서 말한 재해를 방지하는 정도의 역할만 맡은 국가가 떠올랐다.

<식민지 트라우마>에 국가는 없다. 일상적으로 전방위적으로 폭력과 모욕을 가하는 당국(총독부)가 있을 뿐이다. 이로 인해 민족감정으로서의 민족주의가 성립했고, 이것이 초래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어두운 모습은 위에 적은 것과 같다.

<전쟁과 가족>의 국가는 한국전쟁 기간 중 철저하게 친족, 공동체, 관계를 파괴했다. 뿐만 아니라 남과 북 모두에서 전후에도 철저하게 친족을 정치적으로 관리하면서 통치에 이용했다.

<남성성의 각본들>의 국가는 오직 남성을 일등 시민으로 호명하는 국가다. 여성과 남성성을 의심받는 남성들에게 국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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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마지막 날, 이제 곧 11월이다. 올해를 마무리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지난 1년 동안의 독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여성'이라는 키워드다. 특별히 의도하지 않았으나 여성의 삶을 다룬 책을 몇 권 읽게 되었다. 그 중에서 인상깊었던 책을 꼽는다면 <사람입니다 고객님>, <레이디 크레딧>, <보이지 않는 여자들>이다. 각각 한국 콜센터 여성 노동장의 삶,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속의 한국 성매매 산업, 사회 전분야에 걸친 여성을 배제한 남성 표준화(?)를 다루고 있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책은 <다락방의 미친 여자>인데, 여성 작가의 글쓰기의 어려움, 그리고 그 특징이 흥미롭지만 읽기에 만만치가 않다. 다음에 읽을 책으로 점찍어둔 책은 <정의의 감정들>. 조선시대 여성들의 소송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여성과 역사가 만나는 지점이 눈길을 끈다.








한편 최근 몇 년 동안 독서모임에서 제인 오스틴, 버지니아 울프, 박완서 등 여성 작가를 주로 읽어왔다. 독서경력 운운할 정도는 아니지만, 여성 작가들의 책을 읽으면서 책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은 바뀌는 것을 실감한다. 가장 큰 것은 돌봄 노동에 대한 인식이다. 이제 어떤 책을 손에 들면 먼저 이 작가가 서재에 틀어박혀 이 책을 쓰는 동안 누가 대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해주었을까를 묻게 된다. 다음으로는 어떤 작가의 한계나 단점에 대해서 따지기 전에 먼저 그 작가가 그 한계와 단점 속에서 무엇을 하기 위해 펜을 들었는지를 생각하기로 다짐했다는 것. (다짐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역시 어렵다.) 당분간 여성의 삶을 다룬 책, 그리고 여성 작가의 책을 꾸준히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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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사람들은 늘 물을 것이다. 세상은 왜 이런 모습인가? 우리 사회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제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처지에 몇 달 전 새삼 이런 질문을 떠올린 것은 박권일의 책을 읽어서다. 세계 가치관 조사라는 것이 있단다. 세계 주요 국가를 상대로 조사하는 여러 가치관 중 박권일이 주목하는 것은 생존 가치와 자기표현 가치의 대립. 내 식으로 거칠게 정리하면 전자는 '먹고사니즘'의 문제이고, 후자는 민주주의, 양성평등, 소수자 배려, 환경문제와 같은 공공성에 대한 관심을 뜻한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모든 나라에서 경제가 성장하면 전자의 지표는 낮아지고, 후자의 지표는 올라간다. 단 전세계에서 두 나라만 예외다. 싱가포르와 우리나라. 아무리 경제가 성장해도 높은 생존 가치는 떨어지지 않고, 낮은 자기표현 가치는 오를 줄 모른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이런가? 우리는 왜 사적 관심사(그마저도 경제적 이익에 한정된)에 갇혀 좀처럼 공공의 영역으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이런 사태의 역사적 기원은 무엇인가?







  이철승의 책이 답이 될 수 있다면 내 경우에는 질문보다 답을 먼저 읽은 셈이 된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여러 모습을 결정한 원인으로 벼농사를 지목하고 있는 이 책은 일종의 환원론이 흥미를 유발하는 동시에 명쾌함을 선사한다. 벼농사 지역과 밀농사 지역에 대한 대조는 이미 잘 알려진 논의인데, 이 책에서 주목하는 우리나라 벼농사의 특징은 경작은 공동으로 하고, 수확물의 소유는 개인적으로 하는 이중적 시스템이다. 공동으로 경작하기에 평등의식은 높아지는데, 개인적으로 소유하기에 경쟁은 심해지는 고약한 상황이 펼져진다. 공동 경작이므로 옆집과 우리 집의 '노력'은 비슷할 수밖에 없는데, 옆집의 수확량이 우리 집보다 많으면 배가 아프다. 비교가 끊이지 않고, 수확량과 관계없이 불행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연공서열의 중시나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것과 같은 벼농사 문화에서 비롯한 현재 한국사회의 여러 모습을 다루고 있는데, 나는 야경국가 논의와 과거제와 관련된 논의가 인상적이었다. 벼농사는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에 취약하기 때문에 한반도 사람들은 대개 국가의 역할을 재난의 예방과 구휼로 봐왔는데, 이는 세월호나 코로나 국면에서도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한편 벼농사 체제에서 신분 상승의 통로로 존재한 과거제가 시험 숭배의 계기와 차별의 도구가 되었다는 분석도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이철승의 책은 대단히 흥미롭다는 면에서 그리고 보완 후속 작업이 필요하다는 면에서 다음 저작을 기대하게 만든다.)







  부계로 이어지는 종법 계승과 적장자 우대 상속제도, 종법 질서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고 차별받는 여성(딸과 며느리)과 서얼, 일상적으로 되풀이되며 사람들을 규율하는 제사와 상장례 의식.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전통이라는 것은 아무리 올려잡아도 조선 후기, 즉 17세기 이후의 모습이라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자주 깜박해서 문제지만. 박권일과 이철승의 책을 읽었으니 이제는 조선 시대를 다룬 책을 읽을 차례다. 주로 미야지마 히로시와 계승범의 책을 보았다. 미야지마 히로시는 소농사회론이라는 경제사적 틀을 가지고 조선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형성과정을 보여준다. 계승범은 주로 한중 관계사를 연구해 조선 후기 지배층의 보수성과 폐쇄성의 기원을 밝히는 작업을 하는 듯하다.

  이철승도 인용하고 있는 소농사회론은 집약적 벼농사, 과거제, 주자학, 종법 질서 등을 핵심으로 한다. 중국은 송대 이후 한국은 16세기 이후 집약적 벼농사가 가능해지면서 고용노동이나 예속적 노동이 아닌 가족 중심의 경영이 보편화했고, 이에 따라 지배층이 농업 경영에서 물러났다. 지주로서 지대를 받게 된 지배층은 과거 준비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확보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공부해야 할 주자학은 관료제와 종법 질서에 기반한 국가체제를 추구한다. 이로써 조선은 과거제도에서 비롯한 '양반관료제', 족보 편찬 붐에서 확인할 수 있는 '친족 네트워크', 유향소나 향약 등 양반에 의해 통치되는 향촌사회가 성립된다. 이것이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일어난 변화다.






  

  계승범의 한중관계 연구에서도 16세기가 중요하다. 조선 초(15세기)까지만 해도 사대를 국시로 내걸기는 했지만 사대가 곧 국익을 보장한다는 관념은 없었다. 그러나 16세기 중종 대에 이르면 사대와 국익을 동일시하는 지배층의 생각이 문헌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계승범은 중종 대에 관한 책을 따로 한 권 냈는데,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과 당시 명 황제로 있던 가정제와의 특별한 밀월관계가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어 흥미롭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 명나라는 명실상부하게 임금의 나라이자 아버지의 나라가 된다. 문제는 군신 관계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여지가 있으나, 부자간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 '재조지은'을 베푼 명은 이후 조선 지배층에게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된다.

  청 황제의 책봉을 받고 청 황제에게 조공을 받치면서도(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 안에서 국가의 안위를 보장받으면서도), 청나라를 멸시하고 명이 망한 천하에서 조선만이 유일한 중화의 문명을 이어받게 되었다는 소중화론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시대착오적 소아병에 가깝다. 심지어 숙종 때에는 궁궐 안에 대보단을 세우고 명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는 의례를 거행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영조와 정조 대를 거쳐 개항 후에도 이어졌다. 그리고 개항 후 조선이 겪은 역사는 모두가 아는 바다. 계승범에 따르면 명청 교체 이후 조선은 중화질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었다. 그러나 조선의 지배층이 택한 길은 그 길이 아니었다.







  미야지마 히로시와 계승범을 읽으면서 얻은 수확은 우리 역사에서 16세기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이다. 16세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한반도의 소농사회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을 규정하였고, 16세기부터 변화하기 시작한 조선 지배층의 대명 의식은 그 후 한반도의 역사를 정체와 비극으로 몰아갔다. 사실 조선사를 다룬 책을 찾아보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한국인에게 결여된 공공성에 대한 감각과 그렇게 된 역사적 기원이었다. 이것은 다음 독서로 미루기로 한다. 사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막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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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전혀 읽지 않다가 최근 몇 년 동안 주로 소설을 읽었다. 소설만을 읽는 일이 물리기도 하고, 이런저런 비문학 책들이 눈에 들어오기도 해서 이제는 다시 소설을 떠나보낸 지 6개월쯤 되었다. 지난 반년 동안 읽을 책들을 정리해본다. 이 번잡한 독서에서 굳이 하나의 키워드를 찾자면 공공성이 적당할 것이다. 전에는 공동체, 가치, 윤리와 같은 문제를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나는 요즘 책 속에 길이 있다거나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혹시 진실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1. ‘라는 괴물







독서모임이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 책들이다. <일리아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킬레우스의 성장과 변화가 프리아모스 왕과의 대면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성장과 변화는 고립에서 벗어나 관계와 만남을 통해 가능하다. 작품 중반까지 주인공의 모습이 너무 싫었지만, 아킬레우스는 골방에서 책만 읽는 나보다 훨씬 훌륭하다.

한편 오디세우스가 만난 괴물 퀴클롭스의 정체(?)가 흥미롭다. 그는 같은 종족들과 어울려 살지 않고, 동굴 속에서 혼자 사는 외눈박이 괴물이다.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은 신의 명령이라는 말에 나는 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한다고 대꾸한다. 공동체, 가치, 윤리의 문제는 생각하지 않고, 골방에 들어앉아 혼자서 책만 읽는 내가 바로 외눈의 괴물이 아니었던가? 외눈으로 책을 보니 제대로 읽지 못할 수밖에 없다.

 

2. 가치의 문제







한참 전에 유행했던 샌델의 책들을 이제야 읽었다. 본인은 공동체주의 철학자로 불리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고 하지만, 뒤늦게 샌델을 읽으며 나는 우리 사회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지 하는 문제, 즉 가치의 문제에 눈을 떴다. 샌델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에 기초한 자유와 권리 차원의 문제접근을 지양하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동성 결혼은 당사자들의 문제이니 국가가 허용 여부를 정할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사실 이것은 내 입장이기도 한데, 샌델은 이에 반대하는 것이다. 동성 결혼 허용해야 한다면, 그것은 국가가 이성 간의 결합을 신성하게 여겨 보호하는 것처럼 동성 간의 결합도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뉴스에서 한 정치인의 페미니즘과 채식을 강요하지 말라는 발언을 들었다. 당연히 전후 맥락은 생략된 채 보도가 된 것이겠지만, 페미니즘과 채식의 공동체 차원의 가치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만을 내세우며 강요하지 말라는 정치인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정치란 공공의 문제를 다루는 일이 아닌가? 그 정치인이 제1야당 대표로 선출되었다고 하니 다시 한번 그의 발언과 가치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의 발언을 비판했던 화살은 나에게 되돌아왔다.

 

3. 나의 조선사 공부







미야지마 히로시와 계승범이라는 역사학자를 새로 알게 되어오랜만에 조선사 책을 몇 권 읽었다. 조선사는 사극을 즐겨 보던 어린 시절부터 나의 오랜 관심 분야다. 미야지마 히로시의 논점은 동아시아 소농사회론이라 할 것인데, 나는 조선 시대 양반의 신분적 특징에 대한 논의에 눈길이 갔다. 집약적 도작으로 인해 토지 경영에서 물러나게 된 양반층이 토지에 대한 특권을 상실함과 동시에 과거 합격자의 소수 가문의 집중 등 폐쇄적 특권을 지닌 신분으로서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조선사 전반에 걸쳐 일어난 일이고, 주자학의 확산과 보급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공부가 더 필요한 지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조선 시대에 대한 이미지, 즉 충효로 대표되는 유교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적 질서, 사대와 소중화 의식은 주로 조선 후기의 모습인데, 이러한 변화의 시작점으로 계승범은 중종 대를 주목한다. 외교, 정치, 학문 등 전방위적으로 조선의 유교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반정으로 왕위에 앉혀져 재위 초반 실권이 없었던 중종과 명 황제 가정제와의 특별한 관계가 흥미롭게 그려진다. 한편 나로서는 16세기까지 한반도의 남성들이 귀걸이를 했다는 뉴스(?)는 의외이면서도 재미있는 소식이었다. 마침 계승범의 신간 <모후의 반역>이 나왔다기에 읽어볼 생각인데, 아마도 조선의 효치와 광해군 대의 정치사를 다룬 책일 터이다.

 

4. 미국이라는 나라와 한반도











<반지성주의>는 현상을 분석하기보다 그 배후를 추적한 책인데, 미국의 종교사가 거론되는 것은 전혀 뜻밖이었다. <정치적 부족주의>는 베트남 전쟁을 비롯한 미국 대외정책 실패의 역사를 현지의 정치적 부족주의라는 틀로 살피는 책이다. 이 두 책은 어떻게 트럼프 미 대통령이 가능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도 읽을 수 있는데, 공통으로 찾을 수 있는 답을 거칠게 정리하자면 불평등과 특권층에 대한 반감이다. 이것은 비단 미국만의 일이 아닌 것 같아 우려스럽다.

나머지 세 권의 책을 거창하게 소개한다면 한반도의 과거를 읽고, 비극을 반성하며, 통일을 준비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저자가 미국인을 위해 쓴 한국전쟁사라는 브루스 커밍스의 책은 추천할 만하다. 전쟁의 기원을 일제에 의한 병탄과 해방정국까지 거슬러 올라가 서술하면서 미국의 책임을 강조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특히 전쟁 발발 직전과 도중에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비롯한 전쟁 범죄의 참상은 한국인이라면 꼭 대면해야 할 과거사인데, 이는 아직도 풀지 못한 오늘의 문제이기도 하다.

 

5. 정치의 발견과 불평등 문제














어떤 책을 읽어도 불평등의 문제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어서 오늘날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불평등이라는 점을 실감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박상훈의 책을 만난 것은 또 하나의 수확이었다. 냉소와 좌절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절박한 문제를 고민하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의 책에서 인상적인 대목을 옮겨놓는 것으로 정리를 대신한다.

빈곤 인구의 비율이 낮고 계층 간 불평등 정도도 낮으며 비정규직의 규모도 작은 나라는 어디일까? 투표율은 높고 인권 및 자유화 지표도 좋으며 소수자 및 이주민에 대한 권리 부여 정도가 높고 여성 장관 비율도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기대 수명도 높고, 불법 약물 복용, 10대 임신, 10대 자살, 저체중아 출산율, 정신 질환 발병률, 영양실조, 비만율이 낮은 나라는 어디일까? 후천적으로 계층 상승이 가능한 사회적 유동성이 높은 나라, 즉 기회의 평등이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강력 범죄율과 재소자 비율이 낮은 안전한 나라는 어디일까? 요컨대 어떤 유형의 민주주의가 되어야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평화로운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 국가 간 민주주의의 성취를 통계적으로 조사 연구한 성과들이 몇 개 있다. 그에 따르면, 가장 설득력 있는 결론은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진보 정당의 경쟁력(집권 기간, 득표 경쟁력 등)이 큰 나라일수록, 다른 하나는 (보통 노조 조직률, 노사 협약 적용률, 노조의 중앙 집중화 정도로 평가하는) 노동조합의 힘이 강할수록 좋은 지표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노동을 배제하는 정도가 덜할수록 그리고 진보적인 정당들도 상당한 득표를 하고 집권의 전망도 있는 나라들이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6. 우리, 인간들








이런 과학책들은 아무리 쉽게 씌었어도 나로서는 어렵고 낯설기만 하다. 일종의 의무감으로 읽는 책들인데,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간다. 윌슨의 책은 인간의 창의성과 인문학의 기원으로 우리의 먼 조상들이 밤에 불을 피워놓고 대화를 나누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장회익은 물리학의 법칙으로 생명을 정의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문외한인 나로서는 뜻밖에도 온생명이라는 관계론적 결론에 이르고 있다. 철학자 김동규와 생물학자 김응빈의 책 역시 공생과 관계의 철학을 역설하고 있어 흥미롭다. 장대익의 책은 진화론을 바탕으로 우리 인간사를 설명하는 책이고, 김대식의 책은 그나마 쉽게 읽을 수 있는 뇌과학과 인공지능 입문서 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7. ‘라는 사람






연암은 물이고, 다산은 불이다. 두 사람의 사주와 살아간 내력, 두 사람이 남긴 저서에 드러난 학문과 글쓰기 방법론, 인간관계와 당대의 정치 현실을 대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여러 면에서 둘은 서로 대비된다. 두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 읽은 책인데, 오히려 자신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나는 불이면서도 불인 줄을 모르고 사십 년을 살았다. 심지어 나는 내가 물이거나 물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다. 내 사주에 () 불이 들어있다는 것을 몇 년 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이 책이 더 흥미롭게 읽혔고, 읽는 동안 내 문제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이 책을 숙제처럼 읽었는데, 새로운 숙제가 생기고 말았다. 나는 누구인가? 나에 대한 내 생각은 얼마나 정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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