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리는 죽는다. 개죽음이다. 이 개죽음을 개죽음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전호리의 육체가 아니라 전호리의 자아다. 그 자아가 바로 원숭이 왕이다. 전호리는 죽지만 원숭이 왕은 살아남는다. 육체는 죽어도 자아는 죽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죽고 그가 만든 괴물은 살아남았다.) 의미와 가치는 육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아를 위한 것이다. 육체는 의미와 가치를 필요로 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이 필요하고,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자아다. 육체의 개죽음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보려는 자아의 가련한 시도, 이것이 이 단편의 주제다. 개죽음은 전호리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서 양주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 개죽음을 기록한 왕수초도 죽었다. 그리고 왕수초의 기록을 지키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 이소정과 그의 누이가 있다. 두 사람이 잘 살고 있다는 원숭이 왕의 말은 거짓말이다. 그래야 개죽음을 견딜 수 있다.
원숭이 왕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금서의 내용도 이야기로 되어 있을 것이다. 왕수초는 <양주십일기>를 쓰면서 그 수많은 죽음이 개죽음이 아닌 이유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의미와 가치는 이야기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 이야기는 물론 허구다. 모두 거짓이라서 허구가 아니라, 모두 사실일 수 없어서 허구다. 어떤 기록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을 수는 없다. 허구라서 의미 없고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 허구일 때에만 의미와 가치가 발생한다. 아니, 의미와 가치는 허구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허구인 이야기를 만들고, 전파하고, 듣고, 믿는 이유다.
세상에 왕수초의 이야기나 원숭이 왕의 이야기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편의 이야기가 있다. 반대편은 바로 불의다. 불의는 상대에게 개죽음을 강요하기도 한다. 양편의 이야기들이 서로 경쟁한다. 시간이 흘러 왕수초의 이야기가 승리해 진실임을 인정받았듯이 전호리와 같은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도 승리해 진실로 승격할 것임을 작가 켄 리우는 믿는 듯하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 사실 이 믿음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다. 우리는 이 믿음이 실현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특별히 ‘역사’라고 부른다. 역사란 이야기다. 우리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다.
따라서 진실이 드러나기까지 걸리는 역사의 시간을 인간의 수명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절망하는 것은 난센스다. 처음부터 역사는 인간의 죽음을 뛰어넘기 위한 이야기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이 소설집에서 펼쳐지는 진화라는 이야기도, 우주라는 이야기에도 해당한다. 역사와 진화와 우주의 시간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무의미할 만큼 작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무의미해 보이는 인간이 역사와 진화와 우주라는 이야기를 발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영원의 시간 동안 계속된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우리는 의미와 가치를 놓치지 않는다. 물론 나의 이런 믿음도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나는 지극히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이지만, 허무주의에는 빠질 수 없어서 이렇게 믿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