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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에서 <복화술사들>이라는 책과 함께 식민지 시기 한국 소설을 읽었다. 순 한글로 소설을 쓰고 읽는 일이 자명한 일이 아니었다는 논의, '국어'나 '국문학'이란 개념이 분명하게 손에 잡히는 명확한 것이 아니라는 논의. 기억해야겠다. 이런 현실 속에서 소설이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그 소설에 문명개화라는 담론을 비롯한 여러 고뇌와 반성을 담아내려 했던 당시 작가들의 눈물겨운 고군분투. 역시 기억해야겠다.


예전에 읽었던 신영복 선생의 <담론>을 다시 읽을 일이 있었는데 이런 말이 있었다. 좋은 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없는 것은 나의 안목이다. 좋은 것은 좋은 사람 또는 좋은 물건 또는 좋은 작품일 수도 있겠다. 한국문학에 좋은 작품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걸 알아보는 내 안목이 없었을 뿐. 최명익, 김남천, 김사량, 허준과 같은 작가는 그 이름도 몰랐거나 이름만 알고 있다가 처음 읽어보았다. 이태준과 김유정은 다시 읽어보니 전보다 더 좋았다.


전에는 안목을 능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능력이 있어서 알아보거나 능력이 없어서 알아보지 못 하거나의 문제. 요즘은 이것이 어쩌며 태도의 문제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정적인 면보다는 좋은 면을 먼저 보려는 태도, 작가가 놓여있던 한계와 그 한계에서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기 위해 몸부림쳤던 작가의 노력을 알아주려는 태도. 이를테면 이인직, 이광수, 김동인 같은 작가들이 한국인으로서 한국어를 가지고 소설이란 것을 처음 쓴다는 일의 어려움 같은 것. 


전문가가 이끄는 독서모임에서 몇 년 째 소설을 읽다보니 내 생각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알겠다. 거기에 따라 내 태도도 바뀌고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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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모임에서 아니 에르노의 작품 두 편을 읽었다. 책을 읽을 때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을 듣게 되었는데, 에르노는 작품 속에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주인공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퇴행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충격이었다. 문학을 특히 소설을 읽으면서(에르노는 자신의 작품을 소설이 아니라고 한다지만) 주인공의 변화와 성장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작품을 읽으라는 말인가? 내게는 그것이 문학 독법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중반까지 얼마나 주인공 아킬레우스를 욕했는지 모른다. 전장에 나아간 장수가 어쩌면 그렇게 어린 아이 같은지. 그런 그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적장의 아버지와 마주 앉아 엄청난 감동을 선사한다. 의젓함을 넘어서 위대해 보이기까지 한 그를 두고 나는 칭찬을 쏟아냈다. 그런데 모임에서도 나온 말이지만 과연 이런 드라마틱한 변화가 우리들 일상에서 일어나는가? 멀리 갈 것도 없다. 대개의 경우 나는 어떤 계기가 주어져도 변화하지도 않고 성장하지도 못한다. 


사실 이 충격이 큰 이유는 다른 데에 있는데, 평소에 내가 사로잡혀 있는 이런 생각들 때문이다. 바로 '우리 모두가 성공할 수는 없다, 모두가 잘날 필요는 없다'는 생각 말이다. 그런데 나는 왜 소설을 읽을 때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변화하지 않고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일종의 판타지를 기대하며 작품을 대했던 것일까? 


천동설의 세상에서 지동설의 세상으로 옮겨온다면 이런 느낌일까? 앞으로는 전처럼 작품을 읽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당장 특별한 수가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니다. 가만히 앉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지적하는 일은 얼마나 쉬웠던가? 이제는 작품을 중심에 두고 그 둘레에서 내가 움직여야 한다. 일단은 '나도 그러하다'는 생각에서 시작해보려 한다. 내가 싫어했던 주인공들처럼 나도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안티고네와 도련님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다. 독서 모임에서 <안티고네>와 소세키의 <도련님>을 읽으면서 굳이 하지 않아도 좋은 말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고 늘 다짐하건만 역시 쉽지 않다. 나도 안티고네처럼 변화하지 않고, 도련님처럼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어쩌면 사과가 아니라 화해를 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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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책을 읽고 나면 굳이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라는 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팩트는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허균은 프랑스대혁명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수준이랄까? <파격의 고전>에서는 내용에 집중하여 이런 내용의 작품을 허균이 썼을 리 없다는 의심을 적고 있다면, 이윤석의 책에서는 조선시대 한글소설의 발생과 유통과정, 국문학 연구 초창기의 연구행태를 추적하며 제목처럼 그 의심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설사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국익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저자가 대학원 시절에 담당교수에게 들은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허균을 <홍길동전>의 작자로 만들어 우리는 대체 어떤 국익을 얻었는가? 한글소설의 출현이 200년 쯤 앞당겨지고, 다른 한글 고소설들과 달리 작자가 알려진 작품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떤 국익을 창출하는가? 

국문학사를 이렇게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쓰다 보니, 나는 고소설이 발전해서 신소설이 되고 신소설이 발전해서 근대소설이 된다는 허무맹랑한 국문학사를 배워야했던 것이다. 좀 늦으면 어떠한가? 나라 밖의 영향을 받았으면 또 어떠한가? 적어도 학문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제 나라 사랑은 그만하고, 진리를 사랑했으면 좋겠다. 다정도 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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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비루하다. 

이것이 내가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을 지지하는 이유 중 하나다.

나는 당신이 비루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더이상 비루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주기를 바랐다.


세상은 무도하다.

적들은 당신보다 더한 죄를 짓고도 떳떳하다.

뻔뻔하게도 그들은 당신 죽음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오독할 것이다.


언어는 가볍다.

명복을 빈다는 문장에는 결코 담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적어나간 문장들도 그러할 것이다.


비루한 삶과 무도한 세상 앞에 가벼운 언어를 가지고 나는 섰다.

당신도 그러했을 것이다.

오늘, 친구를 하나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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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면 무서운 말이다. 이 무서운 말을 뭣도 모르고 좋아했다. 언제나 행동보다 생각이 앞서는 INTP이자 소음인인 내가 왜 이 말을 좋아했을까? 이명박의 '정의'나 박근혜의 '100% 대한민국'이라는 슬로건과 같은 배경이었을까? 오늘 우연히 이 말에 대해 두 가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먼저 생각과 삶은 별개가 아니라는 점이다. 나의 생각은 나의 삶의 일부이다. 생각하는 것이 사는 것이고, 사는 것이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나처럼 생각'만' 하는 것은 문제지만.) 이미 여기서 이 말은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삶에서 생각을 떼어낸 것에는 불순한 의도가 숨어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모순과 불순을 받아들여도 문제는 또 있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과연 나쁜 일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을 정직이나 지행합일, 삶과 철학의 일치로 볼 수는 없을까?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생각대로 살라는 것인가. 아니면 생각과 삶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둘을 일치시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심리학자들이 설명한다.) 생각대로 살라는 것인가. 나는 후자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전자는 그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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