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리에서 대통령 후보들의 현수막을 보았다. 내가 본 네 개의 문구 중 가장 높은 점수는 '내 삶을 바꾸는 대통령'에 주겠다.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반문이 가능하지만, 지금은 변화 자체가 희망이 되는 암울한 시기이므로 최고점으로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 정치를 냉소의 대상에서 변화의 도구로 격상하려는 시도가 엿보여 좋았다.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은 가장 평범하고 무난한 문구였다. 앞부분은 개혁의 냄새를, 뒷부분은 안정의 냄새를 풍겼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은 고민은 이해하지만, 뭔가 좀 아쉽다. 메시지도 분명하지 않고, 대구도 맞지 않는다. 무엇보다 임팩트가 없다. '정부다운 정부, 리더다운 리더'라고 고치면 좋을 것 같다. 내가 별 걱정을 다 한다. 임팩트가 강하기로는 '지키겠습니다 자유대한민국'과 '국민이 이깁니다'가 막상막하다. 눈에 잘 들어오기는 한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자유대한민국은 내 조국 대한민국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부터 알쏭달쏭하다. 그리고 무엇으로부터 지키겠다는 것일까? 국정농단 세력으로부터? 4대강의 재앙으로부터?
그리고 문제의 '국민이 이깁니다'. 오늘 잠시 동안 나를 사색에 빠지게 한 문구다. 이 문구를 내세운 후보의 소속 정당 이름에도 '국민'이 포함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국민이 어떤 경쟁에서 누구를 상대로 이긴다는 것일까? 이기는 것은 좋은 것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대체 저들이 말하는 국민은 누구일까? 전부가 이기는 싸움이나 경쟁은 없으니, 아마도 전국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지지자들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소속 정당의 당원들을 말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선거캠프에서 일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까?
이 대목에서 나는 이명박의 '국민성공시대'와 박근혜의 '100% 대한민국, 국민행복시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성공할 수 있다는 말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이명박근혜 정권 9년을 살고 나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아니다. 이미 그 자체로 거짓말이다. 전국의 모든 고3 수험생은 누구나 열심히 공부하면 서울대에 갈 수 있다. 나는 정말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모든 수험생이 동시에 서울대에 합격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열심히 공부하면 서울대에 갈 수 있다는 참말은 거짓말이다. 나는 기호 3번의 말을 믿는다. 어떤 국민은 이길 것이다, 반드시. 문제는 내가 그 국민의 범주에 들 수 있는가 이다. 어떤 국민이 승리할 때, 어떤 국민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구조, 이 구조에 대해 말하지 않는 정치인들은 어김없이 나와 내 이웃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왔다.
소위 전문가들은 모든 선거는 51대 49의 싸움이라고, 중도 표심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한다. 모든 선거는 자신의 당선으로 인해 크고 작은 이익을 침해당할 수 있는 유권자를 누가 더 많이 설득하거나, 속이는 지를 겨루는 게임이라고. 나는 설득당하는 것과 속아넘어가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믿는다. 내가 대통령 후보라면 이런 구호로 설득하고 속일 것이다. '자살하지 않는 나라'. 참모들은 반대가 심하겠지만, 작은 글씨로 적을 문구도 몇 개 구상했다. '뇌물 공여자가 자살하지 않는 나라', '국정원 요원이 자살하지 않는 나라'도 그 중 하나다. 오늘 스산한 거리를 걸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