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시골보다 못한 소도시였다. 게다가 노인들만 살고 있는데도 너무 드문드문 죽어 나가는 통에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로실드의 바이올린> 도입부다. 내게 체호프는 <상자 속의 사나이>의 작가였다. 이번에 체호프를 읽으며 얻은 수확 중 하나는 이 작품을 알게 된 것이다. 정말 완벽하고 환상적인 소설의 첫 문장이다. (판본에 따라 두 문장이 아니라 한 문장으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체호프의 러시아어는 한 문장인가, 어떤가 모르겠다.) 독서 모임에서 교과서에 나올 법한 도입부라고 지껄였는데, 나중에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책에서 이 문장을 칭찬하는 대목을 읽은 기억이 났다. 불과 몇 달 전 일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내가 죽은 날까지 주판알을 튕기는 주인공 야코프라는 노인이 사랑스러워 죽겠다.


1894년에 발표한 작품이라고 했다. 한반도에서는 갑오개혁과 동학운동이 있던 해다. 문학사나 소설론을 제대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소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일국의 소설의 발전은 그 나라의 근대화의 정도나 국력의 신장과 궤를 같이 한다고 했다. 잊기 쉬운 사실, 소설은 근대문학 양식이다. 우리가 근대화의 초입에서 진통을 겪고 있을 때, 러시아에서는 이미 이런 단편이 나왔다. 더 놀라운 점은 체호프보다 수십 년 앞선 선배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가 이미 러시아 문학의 정점을 찍고 난 다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광수의 <무정>을 갖기 한참 전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는 각각 단편 하나씩을 읽었을 뿐이라 잘 모른다. 다만 두 사람의 작품이 체호프의 그것과는 결을 달리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일단 스케일 면에서 체호프를 압도한다. 분량도 그렇고 서사도 그러하다. 인물을 비교해도 그렇다. 체호프의 등신들을 말해 뭣하랴? 굳이 체호프의 작품을 두 선배의 작품 앞에 두지 않더라도, 그의 문학은 비주류나 변방이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 어쩌면 체호프 자신은 의식하지 않았지만, 바로 직전의 두 거장의 문학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체호프의 문학은 등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체호프의 세계관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터이지만.


체호프는 혁명 직전을 살다 죽었다. 세상의 모든 혁명이 그러하듯 러시아의 혁명 직전 상황은 참혹한 것이었다. 그의 소설은 조국의 참담한 현실 앞에서 지식인이 쓴 글치고는 지나치게 태평해 보이기도 한다. 체호프의 단편은 한마디로 쉽게 변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것은 어쩌면 변화를 택하지 않고는 어떤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러시아에 대한 은유가 아니었을까? 체호프를 위한 내 나름의 변명이다. 차르의 압제, 대기근, 거기에 전쟁까지 겹치고 나서야 혁명은 가능했다. 체호프는 혁명을 예감했을까? 살아서 혁명을 보았다면 뭐라 말했을까?


체호프의 등신들은 상자 속에 들어가 있다. 상자라는 비유는 두 가지를 떠올리게 한다. 하나는 소통의 불가능성이고, 또 하나는 변화(성장이든 퇴보든)의 불가능성이다. 그런데 어쩌면 소설은 소통과 변화를 보여주는 문학이다. 소설에는 최소한 서로 다른 인물 두 사람이 등장해야 이야기 진행이 가능하다. 인물 간의 소통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소설이라고 해도, 작가는 서로 다른 입장에 대해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작가 자신의 입장을 배반하는 것일지라도. 소설 속의 변화는 시간의 흐름에서 온다. 소설 속에서는 시간이 흐르는데 시간 앞에서 모든 것은 변할 수밖에 없다. 체호프마저도 (소설이 아니라 희곡이긴 하지만) <갈매기>의 여주인공의 변화는 막을 수 없었다. 물론 체호프의 세계관 속에서 사람들은 상자 속에 갇혀 산다. 그래서 나는 궁금하다. 소설 속에서 소통과 변화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체호프는 왜 다른 것을 하지 않고 문학을 했을까? 이것 역시 일종의 반작용인 것인가?


체호프는 소설보다는 희곡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자신의 희곡을 코미디라고 우겼다는 것. <갈매기> 한 편을 읽었을 뿐이지만, 그의 희곡은 결코 코미디는 아니었다. 이현우 선생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코미디와 체호프가 생각하는 코미디가 달랐을 것이라고 했다. 혹시 그가 생각하는 코미디는 작품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희곡과 연극을 보는 관객을 합쳐놓으면 코미디가 되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단편과 그것을 읽는 독자를 겹쳐놓으면 코미디가 되는 식으로 말이다. 바로 내가 그렇다. 내 얘기인 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면서 등신 운운하며 체호프를 읽었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한 마디. 뭘 웃나? 이름만 바꾸면 자네 얘긴데.


세계사나 소설론도 모르면서 체호프의 소설 안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의 소설 밖에서만 기웃거리는 독서가 되고 말았다. 인상 깊었던 문장을 옮긴다.



삶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은 어딘가 무대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무대 위는 고요하고 평온하죠. 그저 말 없는 통계만이 몇 명이 미쳤고, 몇 양동이의 술을 마셔치웠고, 몇 명의 어린이가 영양실조로 죽었다며 저항하고 있죠. 어쩌면 분명 그래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행복한 사람이 평안한 건 불행한 사람들이 말없이 자기 짐을 지는 덕분이라는 게 명백하니까요. 불행한 사람들이 침묵하지 않으면 행복이란 불가능하겠죠. - <산딸기>


그리고 그녀의 사랑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그런 일 없이도 힘들고 온갖 불행으로 가득 찬 내 삶을 그녀가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이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 <사랑에 관하여>


저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심장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제야 우리의 사랑을 방해한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불필요하고 사소하고 기만적이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생각할 때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나 불행, 선행이나 악행보다 더 고상한 것,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해야 하며, 아니면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 <사랑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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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텔게우스 2018-08-18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정말 잘 쓰시네요. 가독성이 정말 좋아요~ 잘 읽었습니다!

책의속밖 2018-08-18 16:55   좋아요 0 | URL
네, 읽고 쓸 때 가독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최고의 칭찬이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