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지난 주말 헌책방에 갔다가 이 책을 다시 손에 들게 되었다. 17년 전에 연암을 처음 알게 된 책이었다. 제목부터 도발적인 이 책은 당시 내겐 충격이었다. 연암의 문장은 그때까지 만나본 것 중 단연 최고였고, 거기에 담긴 사유 역시 대단했다. 단순히 연암의 글을 소개하는 수준의 책이 아니었으므로, 내가 받은 충격 중 일부는 저자가 일으킨 것이 분명했다. 나는 후에 정민 교수의 책을 몇 권 더 찾아 읽었다.
지금도 나는 연암을 최고의 문장가로 생각한다. 연암의 문장을 탐닉할 요량으로 다시 책을 펼쳤다. 책에 실린 산문 중 상당수가 연암의 문장론을 담은 것이다. 문장론을 펼치는 문장 자체가 교범이 되고 있으니 명실상부가 따로 없다고 하겠다. 연암의 문장에 마음을 빼앗기며 글을 읽다가 문득 '문체반정'이 떠올랐다. 18세기 조선사를 생각하니, 그의 글들이 단순한 문장론으로만 읽히지 않았다.
정조 시대가 어떤 때인가? 조선은 누적된 체제 모순으로 옴짝달싹하기 어려운 때인 동시에 마지막 개혁의 기회가 주어진 시기였다. 나를 포함한 오늘날 사람들은 정조를 애민정신이 투철한 개혁군주로 읽고 싶어 하지만, 남경태는 왕정복고(남경태가 보기에 조선은 '사대부가 지배하는 왕국'이었기에)를 시도했다 실패하고 수구로 돌아선 군주로 평가한다. 문체반정을 이런 맥락에서 읽으면 이해가 쉬웠다.
정조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의 사후에 조선이 멸망의 길로 들어선 것은 분명하다. 세도정치와 개항을 거쳐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조선이 멸망한 이유를 제도적 측면에서 찾는 정병석의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지배층의 모습이었다. 당시 '소중화' 운운하던 성리학자들의 행태를 남경태는 시대착오의 정신병으로 칭한다. 가혹한 평가지만 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연암의 글에 수없이 많은 비유가 등장하듯, 어쩌면 그의 문장론은 비유적으로 쓴 시론(時論)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연암의 메시지는 이런 것들이었다. 사변적 지식을 버리고, 살아있는 세계와 직접 만나라.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본질을 꿰뚫어 보라. 시류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라. 관성화된 삶과 죽은 독서에서 벗어나라. 절대적이고 획일적인 가치를 버리고 상대적 가치에 주목하라. 옛것을 모방하는데 그치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통하는 방법을 찾아라. 소중화를 외치며 성리학만 붙잡고 있는 사대부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해도 무방한 것 같다.
나는 윤동주의 시가 서정주의 그것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둘 중에 더 감동을 주는 것은 윤동주의 시라고 생각한다. 내가 촌스러운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어떤 글과 그 글을 쓴 사람의 삶이 명실상부하는 지를 자꾸 주목하게 된다. 나는 연암을 북학파의 실학자로 배웠는데, 그가 그의 삶에서 얼마나 성리학적 담론과 소중화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웠는지는 알지 못한다. 정조를 개혁군주로 기억하고 싶은 것처럼, 연암에 대해서도 그러려니 하고 짐작할 뿐이다. 아무래도 나는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라는 연암의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