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상의 출구와 귀결은, 전반생은 공명이고 후반생은 장수라고 요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328

문학을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권력을 사랑할 것인가? 이것이 젊은 시절 나의 가장 큰 동요이자 망설임이었다. - P329

나는 이런 문제들을 반성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경전이 된‘ 혁명 문학을 19세기의 현실주의와 함께 놓고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문학이 가장 결여하고 있는 것이 작가 개인의 생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런 소설들이 담고 있는 사상은 작가 자신의 사상이 아니라 정치와 혁명,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하나로 통일되어 형성된 사상이었다. 그런 이야기 속의 인물들은 세계 문학 속에 등장하는 유일한 인물이 아니라정치의 심사를 거쳐 비준된 인물들로서 몸집과 키, 피부색, 복장과 두발 형태가 ‘통일된 인물‘들이었다. 이처럼 판에 박은 듯한 소설들에는 작가의 생각이 담겨 있지 않았다. 심지어 작가 개인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수많은 작가가 사용하는 가장 구체적인 언어에도 작가 본인의 생각이 담겨 있지 않았다. 이야기와 인물, 운명과 사상, 글쓰기의 방법 등은 말할 것도 없었다. - P336

고전과 좋은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는 먼저 독자들의 이해가 있고 그다음에 작가의 글쓰기가 있는 형태가 아니다. 이런 독자들과 훌륭한 소설의 조건이 만난 연후에 글쓰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소설은 선결 조건이 없는 상태에서 창조된다. 좋은 소설과 독자들은 십자로에서 우연히 만나 뜨거운 포옹을 나누게 되고 그런 다음 좋은 소설이 되는 것이다. 열독과 연구는 좋은 소설이 좋은 소설이 되는 시발점이다. 열독이 연구를 유도하는지 아니면 연구가 열독을 이끌어주는지에 대해서 작가들은 전혀 알 수가 없다. 작가는 그저 글을 쓸 뿐이다. 작가는 좋은 소설에 대한 자신의 이해, 자신의 생각에 따라 글을 쓸 때에만 좋은 소설을 써낼 수 있는 것이다. - P339

그대의모든 수확을 내려놓고,
그대의 모든 기대를 거둬들여라.
그대의 가족을 사랑하는 것을 잊지 말고,
이웃들에게 감사하는 것도 잊지 말라.
친구들에게도 정중하게 절을 하고,
그대를 키워준 땅에 무릎 꿇어 감사하라.
이것뿐이다. 이렇게만 하면 된다. -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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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마음 깊이 놀라움과 두려움도 느껴졌다. 정치 학습이라는 이 중대한 일이 문화대혁명 이후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순간도 느슨해진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편벽한 두메산골이라 해도 여전히 문화대혁명 때와 다르지 않았다. - P299

내가 책에서 읽은 문학작품의 이야기나 구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위대함과 풍부함, 비통함과 즐거움을 돌이켜볼 때, 내 고향 마을에는 그 수많은 작품이 표현하고 있는 것보다, 그리고 내가 내 소설 속에서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실하고 감동적인 일이 많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우매함과 둔함 때문에 그 마을에서 발견하고 감지할 수 없었던 진실도 많을 것이다. 나는 그 마을의 거리와 가옥들, 농지와 사계절,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사람들의 일상과 생로병사를 너무나 많이 봐왔다. 나는 그 마을의 일상과 중국화된 물질적, 물리적, 생리적 생활에 엄몰되어버려 물질과 물리, 생리를 초월하는 그 마을의 정신과 예술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30년 넘게 글을 써온 지금에 와서야 알고 보니 우리 고향의 그 마을 자체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이었다는 것을, 이 세상에 문학이 존재한 이래로 모든 성취를 다 합친다 해도 절대로 초월할 수없는 거작이라는 사실을 점점 깨닫는다. - P305

책을 읽거나 읽지 않는 것은 익숙함과 낯섦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 마을 사람들은 글을 읽을 수 있고 어느 정도의 문화도 갖추고 있지만 루쉰과 선충원, 샤오홍의 책을 읽지 않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루쉰과 선충원, 샤오홍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와 인물들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고전 무협소설과 진융의 작품을 읽는 것은 자신들의 신변과 생활 속에 그런 이야기와 사건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환주공주」를 비롯하여 과거 궁중에서의 사건과 일화를 다룬 영화나 연속극을 보는 것은 그들이 꿈속에서도 그런 장면과 스토리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익숙함과 낯섦에 따른 독서의 효과와 반응이 그 마을과 마을 사람들의 몸에 결정적 작용을 하는 것이다. - P309

그 마을의 독자들은 정말로 자기네 삶과 영혼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은 읽지 않는다. 읽을 마음도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자기 땅과 마을을 가진 모든 위대한 작가가 그 마을과 그 땅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이 보편적으로 읽히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헛되고 불가능한 일이다. - P309

영혼이 갈라진 사람은 자기 영혼의 피를 볼 수가 없다. 이는 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이다. ‘옌안문예좌담회에서의 연설‘의 가장큰 오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학예술로 노동자, 농민, 병사를 표현해내고 노동자, 농민, 병사들에게 그들의 책을 읽게 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구름과 연기의 운동이나 요란하게 울리다 멈춘 구호와 같아서 문학과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 P310

이제 30년이 넘는 글쓰기를 거쳐 나는 비로소 그 마을과 땅,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존재했는지, 무엇을 도모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선택하여 글을 쓰게 한 뒤로 내 글쓰기를 통해 그 마을,
그 땅이 중국과 세계의 중심이라는 이치와 존재를 증명하려 했을 뿐이다.
나를 선택하여 문학의 명예를 통해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임을 밝히는 증인이 되게 했던 것이다.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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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항상 존엄이 없는 생활 속에서 살아 있다는 존엄을 위해 노력해왔다. 이는 모든 보통 사람의 기본적인 바람이다. 이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바람이 하나 또 하나 쌓이면서 인류의 이상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 P263

존엄 없이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중국 인민들의 생존 현실이다. 따라서 중국의 문학작품들도 대부분 각종 문학적 양식으로 인간의 그 존엄한 삶이 아니라 중국인들의 존엄 없는 삶을 체현하고 있다. 삶이 이렇다보니 문학적 체현도 이럴 수밖에 없다. - P264

오늘날의 중국 사회에서 상업과 공업은 권력과 결탁되지 않으면 이윤과 자본, 자본의 축적을 실현할 수 없다. 오늘날의 중국에서는 법률이 인간 존엄의 근본이 아니라 권력이 모든 사람의 존엄의 근본이요 그 보장이다. 존엄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권력이 있는 삶을 사는 것과 같다. (중략) 이 세계에는 중국 작가들처럼 글쓰기에 있어서 권력에 대한 인식과 묘사에 그렇게 집착하는 나라와 작가들이 없다. 중국에는 작품에서 권력을 묘사하지 않는 작가가 없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중국 문학의 한 가지 특별한 현상이다. 왜 이렇게 문학이 집중적이고 보편적으로 사랑과 미움보다 권력에 집착하는 것일까? 권력이 바로 오늘날 중국의 모든 사람의 존엄에 대한 보장인 동시에 살인 무기이기 때문이다. 권력뿐만 아니라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그렇다. - P266

한마디로 말해서, 누구도 현실 앞에서 존엄하게 살고 있거나 생활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중국의 현실이자 사실이다. 또한 유일함이자 필연이기도 하다. 이처럼 존엄이 없는 삶이 중국에서는 매우 보편적일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운명으로 결정되어 있어 도피도 불가능하다. 그런 까닭에 이런 상황은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진다. - P267

중국 작가들이 존엄을 지닌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속적인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세속적인 삶을 인정하려면 또 반드시 체제와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고 의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많든 적든 권력과 명예를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 작가들이 필연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노선이다. - P272

우리는 신앙 없이도 살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믿음과 명예가 없이는 살 수 없다. 진리를 찾지 못할 수는 있지만 애써 찾아낸 진실과 성심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모든 사물에 대해 저항하고 투쟁할 수는 없지만 이 열악하고 용속한 환경에서 어떤 일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타협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말을 할수 없다면 침묵하면 된다. 침묵 속에서 길거리 한쪽에 서 있을지언정 화려한 꽃과 박수 소리 속에서 길 한가운데를 걷거나 무대에 서지 않으면 된다. 이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이렇게 하려는 노력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존엄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다. - P277

작가들의 생활은 용속함을 피할 수 없지만 글쓰기는 장엄할 수 있고, 또 반드시 장엄해야 한다. 존엄하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존엄한 글쓰기는 가능한 것이다. 존엄한 글쓰기가 있다는 것이 작가가 작가일 수 있는 유일한 기초다. 작가의 글쓰기가 이러한 독립과 장엄을 상실할 때, 그들의 글쓰기는 글쓰기라 할 수 없고 그저 먹고살기 위한 ‘일‘이 되고 만다. 배불리 먹고 따스하게 입기 위해, 살아 있기 위해 하는 출퇴근 같은 일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속적으로 살고 있다고 해도 글쓰기는 반드시 장엄해야 한다.
여기서 장엄한 글쓰기는 몇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문학 자체에 대한 장엄성이다. 중국 작가들은 현실 생활에서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문학과 생활이 분리되는 양상을 보인다. 생활 속에서는 살아가기 위해 세속을 탈피하지 못한다. 하지만 글쓰기에서는 세속을 벗어나는 것이 가능해진다. 장엄해질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둘째는 세속적 삶에 대한 장엄한 인식이다. 다시 말해서 세속적인 삶 속에서 세속을 써내는 것이 아니라 장엄함을 써내야 하는 것이다.
(중략) 20세기 문학에서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상대적으로 자아와 근본을 위한 쪽으로 흐르고 있다. 그런 까닭에 문학의 장엄성도 더욱 돌출되고 두드러진다.
셋째, 중국 작가들은 어떻게 장엄하게 글을 쓰는가 하는 것이다. 장엄하게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태도이자 입장이요 자각적 선택이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그다지 엄숙하고 장엄하게 생활하지 않는 사람도 남들처럼 장엄한 작품을 써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장엄하게 사는 사람들이 반드시 장엄한 작품을 써낼 수 있다고 보장하기가 어렵다. 이는 개인적인 생활 방식이 작품의 장엄성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의 장엄성은 생활과 문학에 대한 작가의 인식과 문학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작가의 생활관과 인생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 P281

나는 여기서 몇 가지 구호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고 싶다. 세속적 삶을 인정하더라도 그 세속 속에서 존엄을 갖춘 사람이 되자! 속세에 산다고 해도 세속적인 글쓰기는 하지 말자! 억지로 타인의 글쓰기의 존엄성을 요구하지 말고 자신의 글쓰기의 존엄성을 반드시 추구하자!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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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와 시장경제는 호랑이와 고기의 관계가 되어버렸다. 정치가 시장경제에 일정한 관용과 부양을 제공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권력의 기둥과 기반을 무너뜨릴 수도 있지만, 지나치게 넓은 관용과 운신의 공간을 제공하면, 당연히 누려야 할 자유를 철저하게 확보한 뒤 그런 자유를 위해 힘차게 달리고 약동하게 될 것이고, 그때부터 집중된 권력의 기반과 자리를 넘어뜨리거나 무너뜨리게 된다.
중국식 권력 집중과 상대적으로 느슨한 자유가 바로 중국식 정치와 시장경제의 관계다. - P234

문학은 한쪽은 상대적으로 개방된 경제와 한쪽은 고도로 집중된 권력의 모순된 조건 하에서 생존하고 호흡하며 발전하고 글쓰기를 진행한다.
권력의 집중은 문학의 음산한 하늘이다. 상대적 느슨함은 하늘에서 새어나오는 밝고 아름다운 햇빛이다. 그리하여 문학은 이처럼 때로는 흐렸다가 때로는 비가 오고, 때로는 햇빛이 쨍쨍하다가 때로는 바람이 부는 하늘 아래서 생장하며 꽃을 피우고 춤추고 탄식한다. - P236

문학이 권력과 정치를 만나 비문학적이고 무비판적이어서는 안 된다. - P239

중국인들이 직시해야 하는 문제는 문학이 정치를 멀리할 수는 있지만 생활은 정치에서 도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 P240

정치와 권력은 사람들의 생활과 생명의 모든 공간에 스며들어 있다. 이 때문에 중국 작가들은 역사적으로 정치가 문학을 주기적으로 인도하고 간섭해온 상태에서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다) 문학이 정치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집단적 공통 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문학이 정치에서 멀리 벗어날 수는 있지만 정치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일부가 될 때 사람들은 이런 생활과 인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제시하게 된다. - P241

정치가 모든 개인의 일상생활에 스며들어 있을 때, 작가들이 집단적으로 정치를 멀리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인동시에 슬픈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중국의 느슨하면서도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문학이 정치와 권력에서 이탈하여 거리를 두려고 한다면, 이는 정치와 제도가 싸우지도 않고 승리하게 하는 것이며 바로 정치와 권력이 생각하는 바를 만족시키는 것이 된다. - P242

지난 100년 동안, 특히 1949년 이후 예술 영역에서 중국 작가들이 혁명과 정치, 권력으로부터 받았던 지나치게 강렬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압박과 간섭에 기초하여 말하자면, 작가와 독자, 비평가들이 형성하고 있는 공통의 인식은 문학이 정치에서 멀어지면 일종의 ‘순수 예술‘이라 할 수 있고 현실과 정치에 가까이 다가가면 ‘엄숙‘하지만 순수하지 못한 예술적 가치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의 순수 관념과 현행 중국의 문학예술 정책은 문학이 현실에 대해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회피할 것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격려하기까지 한다. - P246

‘강경한 글쓰기‘는 좀더 충분한 문학적 의미를 갖춘 ‘부드러운 글쓰기‘ ‘더 높고 큰 글쓰기‘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부드러운 글쓰기의 자양과 에너지를 흡수하여 이처럼 ‘더 높고 큰 글쓰기‘가 커포티의 ‘냉열혈‘을 뛰어넘고 20세기의 부조리 문학과 마술적 리얼리즘 문학의 장막을 뛰어넘어 좀더 새롭고 현대적인 ‘더 높고 큰 글쓰기‘ 이후의 중국식 소설 ‘홍루몽‘을 써낼수 있어야 한다. - P254

사람들의 머리 위에 있는 권력과 정치,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 때문에 나는 지금 보통 사람들과 보통 마음, 보통 사건들에 대한 감수성과 장악력을 상실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의 ‘작음‘에 대한 민감성과 추구를 상실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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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를 떠날 때, 사병들이 전부 나와 엉엉 울면서 나를 보내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사병들과 나 사이의 감정이 전부 내가 직권 남용하고 자신의 권력을 확대했던 감정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중략) 이 모든 것이 나 때문이 아니라 권력 때문이었고, 지도원이라는 하찮은 직권을 마구 남용하고 확대한 결과였다. - P202

이때를 기점으로 반년 가까이 나는침대 위에 올라가 검토서를 써야 했다. 한장 또 한 장 반복해서 검토서를 썼지만 한 번도 통과되지 못했다. 당시 나는 이미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농사를 지을 준비까지 해놓고 있었다. 아무리 써도 통과되지 못할 검토서라면 더 이상 수정할 것도 없고 더 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부대의 최고 수장이 과일을 한 바구니 들고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게 벌일 없을 거라면서 앞으로 부대를 예찬하고 조국과 영웅들을 찬미하는 작품을 좀 쓰면 된다고 말했다. 수장이 우리 집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너무나 감격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수장이 가고 나서도 나는 집 안에서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한편으로는 운명의 급전직한 반전에 감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 깊은 곳에서 권력에 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이 솟아나왔다. - P208

권력은 오만함과 사악함, 그리고 음흉한 힘으로 가득 찬 거대한 악마의 지팡이 같았다. 이 지팡이가 사람들에게 은덕을 베풀 때는 많은 돈과 신선한 꽃을 가져다주지만 조금이라도 화가 나면 개인뿐 아니라 그 가족 전체의 운명까지 어디서 왔는지 모를 바람이 열심히 길을 가고 있는 개미의 몸을 덮치는 것과 같은 꼴이 되고 만다. 개미는 바람에 날려 어디로 가게 되는지도 알지 못한다. - P211

두려움은 이렇게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글쓰기가 내 생명의 일부가 된 것과 마찬가지다. 살아 있는 한 나는 글을 써야 하고, 글을 쓰는 한 필연적으로 초조와 불안, 두려움이 따라다닌다. 그리고 두려움과 두려움으로부터의 도피로 인해 내 글쓰기에는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자세가 형성되었다. 고요한 밤에 아이가 들판을 걷고 있을 때,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나는 무섭지 않아! 무섭지 않다고!"라고 외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는 무섭기 때문에 "무섭지 않아!"라고 외치는 것이고 큰 소리로 "무섭지 않아!"라고 외치기 때문에 더더욱 무섭고 겁이 나는 것이다. - P220

내가 진정으로 쓰고 싶었던 책은 이런 것이 아니라 ‘나는 왜 매일 한바탕씩 울고 싶은 것인가‘라는 제목의 책이다. 이 책은 허구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마음속 감정의 실록‘이다. 이 책에서 기술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는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렵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쓸 수 있는지는 나 자신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몇 년 전 어느 날, 우연한 순간에 "매일 한바탕씩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 항상 그런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 P221

결국 삶이 반드시 나의 글쓰기인 것은 아니지만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나의 삶이다. 삶이 반드시 나의 생명에 영향을 미치진 않지만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나의 생명이고 필연적으로 나의 생명에 영향을 미친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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