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는 유학의 전성기에 서구화가 이루어졌다. 유학의 확산이 먼저 도쿠가와 체제를 동요시키고 이어서 서구화가 일본 사회를 강타한 것이다.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 유학은 서구화를 안내하기도 하고 그것에 저항하기도 하면서 결국 ‘자살‘했고, 그 영향력은 러일전쟁 무렵부터 급속히 쇠퇴해 갔지만, 메이지 시대에도 그 후에도 일본 사회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 P133

그러나 근대를 ‘근세‘ 동아시아가 도달해야 할 역사 단계(목표)로 미리 상정해 놓고, 마치 출구를 앞에 두고 미로를 헤매는 대상을 다루듯 하는 연구 태도는 타당한가? 17세기와 18세기, 심지어는 19세기 동아시아 사회가 근대로 수렴되어야 할 필연성은 과연 존재했을까? 유럽 근대의 도래 이전의 역사를, 근세에서 근대로, 또는 ‘근대로의 도정(道程)‘ 등으로 설정하는 것은 역사 연구자들의 프레임일 뿐, 과연 역사적 실태를 반영한 것일까? 유럽 근대가 도래하지 않았다면 동아시아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전개 되었을는지는 추측하기 어렵다. - P137

유학적 정치사상은 현존 질서를 옹호하는 면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막부나 다이묘들이 유학을 장려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유학적 정치사상은 일반 사무라이들이 군인이나 서리가 아니라 사(士)가 되어 정치에 참여할 것, 민중에 대한 군정(軍政)을 그만두고 인정(仁)과 덕정(政)을 펼쳐야 한다는 것 등을 자각케 하는 급진적인 요소도 갖고 있었다.
(중략)
유학적 정치사상은 도쿠가와 사회에서는 양날의 칼이었다. 이 칼을 어떠 세력이 어떻게 들이미는가에 따라 그것은 ‘매력적인 위험 사상‘이 될 수도 있었다. - P147

19세기 초엽은 이 ‘독서하는 사무라이‘ 또는 ‘칼 찬 사대부‘들이 대량으로 출현한 시기였다. 때마침 막부나 각 번은 재정난에 허덕였고, 도시에서는 우치코와시(폭동)가, 농촌에서는 잇키가 전에 없이 자주 발생하였다. 결정타는 외세의 등장이었다. 이 내우외환의 시대에 사대부 의식으로 새롭게 무장한 이들은 급속히 정치에 뛰어들었다. 이때 이들이 정치 현장에서 의존했던 수단은 어느덧 그들도 익숙해져 있던 사대부적 정치 문화였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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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서양 세력에게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부터였다. 그러나 이것을 심각하게 인식하게 된 계기는 아편전쟁(1840~1842) 이었다. 막부는 이때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하는데 이를 덴포 개혁(天保改革)이라 한다. 아편전쟁을 직접 치른 청이 아무런 개혁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과 비교해 보면 영국에게 포탄 한 방 맞지 않은 일본이 즉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선 것은 특기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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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소수파‘는 서양 열강의 제계 진출을 사실 이상으로 공격적으로 묘사하여 제시했다. 실제로 서양 열강이 세계 각지를 무차별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의 성과가 쌓이고 증기선과 신형 무기들이 발명된 이후, 즉 19세기 중반 이후부터인데, 이들은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이미 서양을 무자비한 세계 정복자로 보고 있었다. - P69

18세기에는 중국이나 조선, 서양과는 구별되는 일본과 일본인의 정체성에대한 담론이 활성화되었다. 이른바 ‘원(原)민족주의‘의 성립인데, 그중에서 중요한 것들이 천황의 혈통이 만세일계(혈통이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로 이어져 역성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외국 군대에 국토가 유린된 적이 없고 지금까지 독립을 보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략) 이것은 일본이 다른 나라들과 달리 ‘순결‘하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었고 따라서 자칫하면 이 순결을 더럽힐 수도 있다는 강한 공포감, 경계심을 조장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국가나 민족에 대한 자의식이 강해질수록 그것의 훼손과 상실에 대한 위기감도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순결한 일본‘ 이미지의 형성은 기독교에 대한 공포를 강화했다. - P70

기리시탄이 이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당시 대부분의 일본 지식인들은 기독교를 서양이 끼칠 최대의 해악, 일본을 망국으로 이끌 최고의 적으로 규정하였고, 기독교에 대한 이 같은 과도한 공포가 이들의 위기의식을 부채질했다. - P71

위기의식을 갖게 되면 그에 대한 대응은 두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 하나는 그 위기를 피하기 위해서 더욱 폐쇄적으로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위기를 정면 돌파하여 오히려 스스로 팽창하는 것이다. ‘강력한 소수파‘들은 일본도 서양에 맞서 해외로 진출, 즉 웅비(雄飛) 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여기에는 순수하게 경제적으로만 진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와 함께 군사적·정치적 진출도 주장하는 자들이 많았다. - P72

일본 지식인들은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서양이 세계 각지를 식민지화하고 있는 현상을 잘 알고 있었으며, 결국 세계는 몇몇 강대국의 권역으로 구분될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좋든 싫든 따라갈 수밖에 없는 시대의 대세라고 보았다. 따라서 식민지가 되기 싫으면 스스로 강대국이 되어 하나의 권역을 구축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실로 20세기 전반기 대동아공영권의 기원이 되는 발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서양이 식민지를 통해 큰 이득을 보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무주지(無主地: 국제법상 어느 국가의 영토로도 되어 있지 않은 지역)의 경우 먼저 점령하지 않으면 다른 국가가 차지할 것이라는 인식이 해외 팽창론을 더욱 부채질했다. - P84

청과 전쟁을 벌인 영국이 다음에는 일본을 침략할 거라는 소문도 파다했다. 전쟁 당사자인 청이나 조선이 아편전쟁으로 그다지 큰 위기의식을 갖지 않았던 데 비해 일본 전역은 아편전쟁에 대한 갖가지 뉴스와 소문으로 끓어올랐다. - P87

막부에 서양 정보가 풍부하게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막부의 많은 우수한 역인들이 개국주의자로 변해 갔다. 적지 않은 정권 핵심 분자들이 개항과 무역을 시대의 대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은 일본의 신속한 개항 결정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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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들은 변혁 과정에서 사회적 중간 단체 역할을 했다. 번이 중간 단체로서 존재했기 때문에 일본은 대대적인 변혁 과정에서도 사회질서가 파국적으로 붕괴되지 않고 어느 정도의 치안이 유지될수 있었다. 조선이나 청의 경우 이 중간 단체가 없거나 취약했다는 점이 변혁을 추진하지 못한 하나의 원인으로 지적되는 걸 생각해 보면이 점은 주의할 만하다. 더구나 번의 국가화가 진행되면서 번 정부와 가신단, 영민 사이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짐에 따라 중간 단체인 번의 영향력도 점점 증대되어 갔다.
- P35

그러나 18세기 후반 이래 유학이 급속히 확산되자 세상은 점점 쇼군 권력의 근거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요구하게 되었다. 막부는, 쇼군은 도대체 정치적으로 어떤 존재인가? 국왕인가, 아닌가? 왜 도쿠가와씨는 정권을 잡고 있는가? 천명인가? 그렇다면 교토의 천황은 어떤 존재인가? 막부와 그의 관계는 뭐라고 설명할 수 있는가? 막부는 이런 질문들에 대답해야만 했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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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감은 퇴영적인 쇄국으로 나아가게도 하지만, 반대로 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적극적인 체제 변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19세기 일본은 후자를 감행했다. 위기감은 그 후로도 근대 일본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다. - P7

그러나 ‘강렬하고도 과장된 위기감‘은 신속히 체제 개혁을 수행하고 자국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에는 큰 역할을 한 반면, 곧바로 외부에 대한 거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이웃 국가들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침략욕으로 나타난 것은 잘 아는 대로이다. - P8

역사를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변혁 세력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은 그들이 승리하여 지금의 사회를 만들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구체제(앙시앵 레짐)와 그 지배자들의 영향력은 대부분의 경우 최후의 순간까지 변혁 세력보다 강력했다. 청조가 무너지는 순간에도 쑨원보다는 청 조정 지배자들의 영향력이 강했을 것이며, 김옥균보다는 고종이나 조선 조정 대신들의 힘이 더 셌을 것이다. 구체제의 각 행위자들이 구질서 내에서 어떤 행동과 조치를 취하는가, 즉 어떤 역사적 선택을 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회의 향방에, 또 변혁 세력의 운명에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 P8

일본은 18세기 말부터 급속히 유학이 확산되었다. 19세기는 아마도 일본 역사상 가장 유학(중심은 주자학)이 번성한 때일 것이다. 그런데 이 유학은 병영국가인 도쿠가와 체제와는 잘 맞지 않는 사상이다. 도쿠가와 체제에서 유학은 ‘위험 사상‘이 될 수 있었다. 유학이 확산됨에 따라 이 사무라이 체제는 동요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서양의 충격‘이 있기 전에 ‘유학적 영향‘에 따른 체제 동요가 이미 시작되었다. 즉 ‘일본적 사회 → 유학적 영향(동아시아 국가 모델의 수용 시도) → 서양의 충격 → 근대화‘라는 궤도를 걸었다는 것이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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