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감은 퇴영적인 쇄국으로 나아가게도 하지만, 반대로 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적극적인 체제 변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19세기 일본은 후자를 감행했다. 위기감은 그 후로도 근대 일본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다. - P7
그러나 ‘강렬하고도 과장된 위기감‘은 신속히 체제 개혁을 수행하고 자국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에는 큰 역할을 한 반면, 곧바로 외부에 대한 거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이웃 국가들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침략욕으로 나타난 것은 잘 아는 대로이다. - P8
역사를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변혁 세력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은 그들이 승리하여 지금의 사회를 만들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구체제(앙시앵 레짐)와 그 지배자들의 영향력은 대부분의 경우 최후의 순간까지 변혁 세력보다 강력했다. 청조가 무너지는 순간에도 쑨원보다는 청 조정 지배자들의 영향력이 강했을 것이며, 김옥균보다는 고종이나 조선 조정 대신들의 힘이 더 셌을 것이다. 구체제의 각 행위자들이 구질서 내에서 어떤 행동과 조치를 취하는가, 즉 어떤 역사적 선택을 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회의 향방에, 또 변혁 세력의 운명에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 P8
일본은 18세기 말부터 급속히 유학이 확산되었다. 19세기는 아마도 일본 역사상 가장 유학(중심은 주자학)이 번성한 때일 것이다. 그런데 이 유학은 병영국가인 도쿠가와 체제와는 잘 맞지 않는 사상이다. 도쿠가와 체제에서 유학은 ‘위험 사상‘이 될 수 있었다. 유학이 확산됨에 따라 이 사무라이 체제는 동요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서양의 충격‘이 있기 전에 ‘유학적 영향‘에 따른 체제 동요가 이미 시작되었다. 즉 ‘일본적 사회 → 유학적 영향(동아시아 국가 모델의 수용 시도) → 서양의 충격 → 근대화‘라는 궤도를 걸었다는 것이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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