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소수파‘는 서양 열강의 제계 진출을 사실 이상으로 공격적으로 묘사하여 제시했다. 실제로 서양 열강이 세계 각지를 무차별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의 성과가 쌓이고 증기선과 신형 무기들이 발명된 이후, 즉 19세기 중반 이후부터인데, 이들은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이미 서양을 무자비한 세계 정복자로 보고 있었다. - P69

18세기에는 중국이나 조선, 서양과는 구별되는 일본과 일본인의 정체성에대한 담론이 활성화되었다. 이른바 ‘원(原)민족주의‘의 성립인데, 그중에서 중요한 것들이 천황의 혈통이 만세일계(혈통이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로 이어져 역성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외국 군대에 국토가 유린된 적이 없고 지금까지 독립을 보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략) 이것은 일본이 다른 나라들과 달리 ‘순결‘하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었고 따라서 자칫하면 이 순결을 더럽힐 수도 있다는 강한 공포감, 경계심을 조장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국가나 민족에 대한 자의식이 강해질수록 그것의 훼손과 상실에 대한 위기감도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순결한 일본‘ 이미지의 형성은 기독교에 대한 공포를 강화했다. - P70

기리시탄이 이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당시 대부분의 일본 지식인들은 기독교를 서양이 끼칠 최대의 해악, 일본을 망국으로 이끌 최고의 적으로 규정하였고, 기독교에 대한 이 같은 과도한 공포가 이들의 위기의식을 부채질했다. - P71

위기의식을 갖게 되면 그에 대한 대응은 두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 하나는 그 위기를 피하기 위해서 더욱 폐쇄적으로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위기를 정면 돌파하여 오히려 스스로 팽창하는 것이다. ‘강력한 소수파‘들은 일본도 서양에 맞서 해외로 진출, 즉 웅비(雄飛) 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여기에는 순수하게 경제적으로만 진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와 함께 군사적·정치적 진출도 주장하는 자들이 많았다. - P72

일본 지식인들은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서양이 세계 각지를 식민지화하고 있는 현상을 잘 알고 있었으며, 결국 세계는 몇몇 강대국의 권역으로 구분될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좋든 싫든 따라갈 수밖에 없는 시대의 대세라고 보았다. 따라서 식민지가 되기 싫으면 스스로 강대국이 되어 하나의 권역을 구축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실로 20세기 전반기 대동아공영권의 기원이 되는 발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서양이 식민지를 통해 큰 이득을 보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무주지(無主地: 국제법상 어느 국가의 영토로도 되어 있지 않은 지역)의 경우 먼저 점령하지 않으면 다른 국가가 차지할 것이라는 인식이 해외 팽창론을 더욱 부채질했다. - P84

청과 전쟁을 벌인 영국이 다음에는 일본을 침략할 거라는 소문도 파다했다. 전쟁 당사자인 청이나 조선이 아편전쟁으로 그다지 큰 위기의식을 갖지 않았던 데 비해 일본 전역은 아편전쟁에 대한 갖가지 뉴스와 소문으로 끓어올랐다. - P87

막부에 서양 정보가 풍부하게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막부의 많은 우수한 역인들이 개국주의자로 변해 갔다. 적지 않은 정권 핵심 분자들이 개항과 무역을 시대의 대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은 일본의 신속한 개항 결정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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