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선 『겐지 이야기』였을까? "겐지를 보지 않고 노래를 읊으면 한을 품게 된다"라고 하는, 잘 알려진 후지와라노 도시나리의 견해를 이어받아 아들인 사다이에도 이야기 안에서 단순히 남녀의 연애물이 아닌, 위기에 빠진 궁정 문화의 규범으로서의 특별한 힘을 발견했던 것이다. - P47

궁정의 여성들을 최초의 독자로 한 『겐지 이야기』가 그 후 사다이에부터 시작하여 사네타카와 소기에 이르는 고전화 운동을 거쳐 전통적인 궁정 사회 외부의 다이묘와 일반 무사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말하자면 겐지 독자의 지방화, 전국화다. - P49

만일 아시카가(무로마치) 시대를 일본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다면 그 르네상스의 중심은 겐지다. 겐지는 아시카가 시대에 비로소 일본의 겐지 이야기가 된 것이다. - P52

9세기 후반, 아마도 궁정의 여성들 사이에서 생겨났을 히라가나는, 이윽고 가마쿠라시대에서 무로마치시대에 걸쳐 사람들의 독서생활에 여러 가지 변화를 일으킨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 외에 특히 눈에 띄는 변화를 두 가지 정도 들겠다. 우선은 가나 문자의 보급과 반비례하여, 귀족이나 승려 등의 전문 지식인 이외에 일반 지식인의 한자 능력이 서서히 쇠퇴를 보이기 시작한 것. 그리고 둘째로 이 시대가 끝나가던 무렵에 그때까지 문자와는 인연이 없던 하층 무사나 촌락의 묘슈名主급 하쿠쇼百姓지도자 격 농민, 나아가 그 아내나 딸까지 공문서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장을 쓰거나 읽을 수 있게 된 것. - P53

가타카나는 히라가나보다 조금 일찍, 9세기 중반에 사원에서 한역 불전을 독해하는 기법의 일종으로 궁리된 것이었는데, 이윽고 사원을 나와 불전이나 한문 서적 등의 딱딱한 책‘을 일본어로 읽고 주석을 달기 위한 문자로 널리 정착해갔다. 사각의 한자와 섞어서 사용하기에는 구불구불한 히라가나보다도 한자의 부수나 구성에서 따와 만든 직선적인 가타카나가 딱 들어맞는다. 그러한 미감도 포함하여, 여성 문자로서의 히라가나와 구별되는, 남성 지식인의 ‘학자식 읽기‘ 용으로 특화된 가나 문자가 가타카나였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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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도 다루었지만, 비록 독서의 황금시대로서의 20세기가 끝났어도 그것으로 우리의 독서 습관까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 터이다. 당연하다. 끝난 것은 책 자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영화, TV, 라디오, 연극, 무용, 음악, 회화, 사진, 디자인 등 다양한 미디어가 자아내는 그물망의 중심에 책이 묵직하게 위치한다는 황금시대의 구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이나 독서를 특히 우위에 있는 것이라 느끼는 심성이 엷어진 것만으로 책 자체의 가치가 줄어들지도, 책을 읽는 일상이 사라져버리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디지털 기술의 개입도 있고 책을 포함한 제 미디어의 배치가 와르르 변용되어가는 가운데 반드시 새로운 독서 습관이 다시금 천천히 양성되어갈 것이다. 이 책을 쓰고 난 지금 나는 ‘황금시대‘의 종언을 그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 P10

과학사학자인 나카야마 시게루가 자신의 저서 『패러다임과 과학혁명의 역사』에서, 유럽의 학문을 추진하는 엔진은 ‘논쟁‘이었는데 중국의 학문에서는 ‘기록의 집적‘이 우선시되었다는 의미의 주장을 했다. 그러므로 중국의 교육에서는 타인을 설득하는 ‘변론력‘이 아니라, 종이나 죽간에 기록된 선행자들의 언동(선례)을 반복해서 소리 내어 읽고 그 모든 것을 머릿속에 집어넣어 필요할 때 바로 생각해내도록 하는 것, 즉 ‘기억력‘을 가장 중시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 보태지는 것이 ‘문장력‘이다. 관료제의 계단을 올라가 황제 가까이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특별히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임과 동시에 두드러지게 인간적이고 고매한 시인이나 문장가이기도 하다는 것을 엄격한 시험(과거)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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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어떻게 지구를 망치는가
마이클 셸런버거 지음, 노정태 옮김 / 부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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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견해를 요약하면, 일반적으로 자연환경을 짓밟고 생태계를 파괴해 왔다고 인식되는 공업화와 경제발전이 사실은 자연환경과 생태계 보호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농업이 기계화되고 질 좋은 비료를 사용해 더 작은 면적의 농지에서 더 많은 농작물을 생산할 수 있게 생산 효율이 올라간다면 농지로 사용할 땅의 면적이 줄어들어 생태계가 다시 살아나고 야생종 동식물이 보존될 것이며, 개발도상국의 에너지 생산이 현대화되어 석탄이나 원자력 등의 방식을 사용하게 되면 더 이상 나무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지 않게 되어 삼림 파괴가 줄어들고 궁극적으로는 자연을 보호할 수 있게 된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경제가 발전해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하게 되어 출산율이 줄어들면 인구가 점차 감소해 결과적으로 인류에 의한 에너지 소비가 줄어들어 환경보호로 이어질 것이라는 논리는 내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깨끗한 에너지'라고 인식되고 있는 태양광 발전과 풍력 발전 등이 환경에 어떠한 악영향을 끼치는지도 지적한다.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을 통해 현재 인류의 에너지 수요를 충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발전소 건설에 어마어마한 넓이의 땅이 필요하고, 그만큼의 땅에 발전소를 짓는다면 환경이 그만큼 파괴될 것이다. 특히 풍력 발전소의 경우, 철새나 곤충이 다니는 길에 자리한 경우가 많아 보호종에 속하는 철새들이 길을 잃고 죽게 되거나, 곤충의 개체수가 급감해 생태계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많다.


저자의 최종 결론은, 현재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완전히 탄소 중립(친환경)적이면서도 인류에게 필요한 에너지량을 충족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원은 원자력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원자력을 강력히 지지하면서 원자력은 다른 에너지원에 비해 대단히 안전하며, 현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원자력에 대한 공포는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체르노빌과 일본 원전 사고의 피해 역시 과장된 것이라고 근거를 들어 밝히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원자력 발전에 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원자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너무나 다른 얘기라서 완전히 수용하기는 힘들었지만 사실상 현재 원자력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저자의 말에는 공감이 갔다.


물론 현재 환경보호를 위해 행해지는 노력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플라스틱과 비닐을 적게 쓰고, 수질오염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에너지를 덜 소비하려 하는 노력은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다만 플라스틱을 계속 이대로 소비하다가는 몇 십 년 안에 종말 수준으로 환경이 파괴될 것이라느니 하는 '종말론적'인 환경주의는 사실상 환경보호와 인류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상당 부분 감성을 내세운 이들의 주장을 여러 가지 과학적인 근거를 들어 반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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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국일수록 경제에서 농업의 비중이 높고, 더 많은사람이 도시 외 지역에 퍼져 살아간다. 그들이 도시에 모여 사는 시민이될 때 농지는 다시 늪과 숲이 되어 자연의 영역이 커질 수 있다. 이는 보편적인 인권과 풍요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바람직하고 당연한 일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과 미래 세대를 위해 자신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척할 수 있는 권리를 지녀야 마땅하니 말이다. - P565

스위스에 사는 환경주의자라면, 잘 따져보면 그다지 환경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 ‘에코백‘을 들고 다니는 번거로움 정도는 감수할 것이다. 하지만 스위스에 지어진 댐과 수력 발전소를 모두 파괴하고 지금부터 나무를 땔감으로 삼으라고 한다면 동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신들은 이미 얻은 문명의 이기를 충분히 누리고 있으면서, 덕분에 지난 1000년 또는 100년 전보다 훨씬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 속에 살아가면서, 후진국의 댐 건설을 가로막는 이기적인 행태가 환경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 P566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져 본다면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원자력 발전의 활용을 높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후 재앙과 맞서는 나‘라는 자아도취에 빠져 앞뒤가 맞지 않는 요구를 하고 있다. - P567

셸런버거는 환경 휴머니즘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위해 더 나은 삶의 여건을 만들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밀도가 높은 에너지원을 쓰는 것은 인간 스스로에게 이로울 뿐더러 궁극적으로는 자연을 보호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통찰에는 어떤 겸손이 깔려 있다. 우리가 문명을 이루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다른 생명체를 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동물임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동물로서 정직하게 스스로의 입지와 한계를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 P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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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은 19개의 하위집단으로 분류된다. 그중 두 하위집단의 개체 수는 늘었고, 네 하위집단은 줄어들었고, 다섯 하위집단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나머지 여덟 하위집단은 전혀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다. 전반적인 추세를 제대로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북극의 얼음 면적이 줄어들어 북극곰의 개체 수가 줄어들고 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이 늘 존재한다. 가령 사냥이 그렇다. 1963년부터 2016년까지 사냥당한 북극곰은 약 5만 3500마리다. 오늘날 남아 있는 북극곰은 2만 6000여 마리로 추산되는데 그 2배에 달하는 수치다.
(중략)
이처럼 북극곰에 관한 정보는 오류투성이다. 이는 기후 변화와 관련해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과학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려 준다. - P501

우리는 그 대답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 보고서의 과학적 기반 자체는 대체로 건전하다. 하지만 <정책 결정자를 위한 요약>과 언론 보도자료, 보고서 저자들의 성명과 언론 인터뷰 등이문제다. 그것들은 이념적 동기를 가지고 과장하는 경향을 보인다. 중요한 맥락을 함부로 생략한다. - P507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를 비롯한 여러 과학 조직들은 언론용 보도자료를 만들면서 중요한 사실들을 빼놓거나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대중의 인식을 호도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자연재해로 인한 사망 피해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인류는 계속 변화한 환경에 적응해 나갈 것이며, 따라서 그 피해는 더 줄어들 것이라는 사실 역시 말하지 않는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화재의 발생빈도와 피해를 좌우하는 가장 큰 요인은 기후 변화가 아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숲 가까운 곳에 사는 것, 그리고 나무를 연료로 쓰는 것이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식량 생산량은 기후 변화가 아니라 비료, 농기계, 관개 시설에 좌우된다는 사실 역시 그들은 침묵으로 감추고 있을 뿐이다. - P509

오늘날의 환경주의는 일종의 세속 종교다. 기성 종교색이 옅은 고학력층을 위한 신흥 종교인 셈이다. 신도들은 주로 선진국과 일부 개발도상국에 거주하는 상위 중산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환경주의는 신도들에게 개인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새로운 인생의 목적을 제공한다. 환경주의는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영웅과 악당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 준다. 또한 환경주의는 과학의 이름으로 설파되는데, 따라서 지적인 권위까지 확보하고 있다. - P520

나는 세속적인 사람들이 왜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끌리는지 알게 되었다. 종말론적 환경주의가 유대교 - 기독교 또는 다른 종교에서 제공하는 것과 같은 심리적이고 영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었다.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사람들에게 삶의 목적을 제공해 준다. 세계를 기후 변화로부터 구하기 위해, 또는 다른 환경 재앙을 막아내기 위해 뭔가 희생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어떤 영웅 서사 속의 주인공이 될 수있다. 잠시 뒤에 살펴보겠지만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삶의 서사는 우리가 삶의 의미를 찾는 데 필요하다고 믿는다.
게다가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과학과 이성적 담론에 친숙한 이들에게도 안도감을 준다. 기성 종교와 달리 미신과 환상에 기대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 분야의 주요 학자 중 한 사람은 이렇게 언급한다. "제도화된 기독교 계열 종교에 회의적이지만 삶에서 더 넓은 의미의 종교적 의미를 원하는 이들에게 환경주의가 세속화된 종교로서 매혹적으로 다가오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P522

환경 종교의 신도들은 상대방을 악마로 몰아붙이는 성향을 보이며, 많은 경우 위선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은 모국과 외국의 발전과 번영을 가로막기까지 한다. 기성 종교에 몸담고 싶지는 않지만 종교적 가치를 열.
망하는 이들이 원하는 더 깊은 심리적 · 실존적 · 영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대신 그저 불안과 우울만을 퍼뜨리고 있다. - P523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할 일은 많다. 문제는 그 방향이다. 현재의 긍정적인 흐름을 더욱 키워 나가야 한다. 저에너지 농경 사회로 돌아가자는 퇴행적 움직임으로 지금까지 이룩한 발전을 되돌리려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기후 변화와 삼림 파괴, 멸종 등을 둘러싼 분노와 공포조장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환경 운동이 키우고 있는 슬픔과 고독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 환경 운동의 많은 부분은 잘못되었다. 해소할 길 없는 불안을 퍼뜨리고,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념을 유포하며, 실재하는 증거를 호도하거나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 P538

부유한 나라들은 지금 당장 가난한 개발도상국들에 채운 개발과 에너지 생산의 제약이란 족쇄를 풀어야 한다. 자신들은 고밀도 에너지를 쓰면서 빈곤국들은 저밀도 에너지를 쓰도록 강요하는 것, 자신들이 가난을 떨쳐 내고 풍요를 이룬 길에 개발도상국이 들어서지 못하게 막는 것은 위선적일 뿐 아니라 비윤리적이다. 개발의 길에 늦게 들어서는 나라일수록 산업화를 이루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 P542

에너지 밀도는 환경에 대한 피해를 좌우하는 핵심요소다. 그래서 나무 대신 석탄을 연료로 쓰는 것은 환경에 도움이 되는 반면 천연가스나 원자력 대신 석탄을 쓰는 것은 환경에 해롭다. 천연가스는 석탄을 대체할 때는 좋은 연료지만 우라늄의 자리를 뺏는다면 나쁜 연료가 된다. 인류 문명이 요구하는 에너지를 공급하면서 동시에 인류가 환경에 미치는 부담을 줄여 나갈 수 있는 에너지원은 오직 원자력뿐이다. 생선을 포함한 식량 생산에서 에너지 밀도를 높이면 인간이 환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행위인 농업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 P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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