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척 중에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큰아버지 집 벽에 금이 갔다. 단독 주택이었는데 지진 몇 년 후에 ‘2세대 대출‘을 받아 다시 집을 지었다. 큰아버지가 정년퇴직 때까지 갚고 그다음에 이어서 장남이 갚는 대출이다. 지진으로 인해 집이 무너져서 못 살게 됐는데 대출만 남은 경우도 많았다. 나도 남편도 집을 사고 싶은 마음이 없다. 계속 월세로 살고 있는데 집을 사도 지진으로 잃을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 중 하나다. - P313
일본 입시에 관해 한국 사람한테 자주 듣는 지적이 "에스컬레이터식 진학은 불공평하지 않냐"는 것이다. 게이오처럼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입학 시험 없이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학교를 말하는 것 같은데 사실 나는 뭐가 불공평한지 잘 모르겠다. 학비도 비싸고 들어가기도 어렵다. 에스컬레이터식이라고 해도 의대나 법대 같은 인기 학부에 들어가려면 당연히 경쟁해야 한다. 일본에서 에스컬레이터식 학교를 가지고 불공평하다는 이야기는 별로 못 들었는데 한국에 비해 입시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다. - P322
한국에서는 취업할 때 학점이 영향을 미친다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공부를 열심히 한다. 학점을 정정해 달라고 교수에게 연락하는 학생도 있어서 놀랐다. 일본은 취업에 학점이 높고 낮고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나는 대학 성적을 회사에 제출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오히려 일본에서는 면접 때 서클 활동이나 아르바이트를 통해 어떤 경험을 하고 뭘 배웠는지 이야기를 나누면서그 사람의 인간성을 보려고 한다. 대학에서 공부만 하면 이야깃거리가 없어서 면접 때 불리하다. 한국에서 자주 쓰는 ‘스펙‘이라는 말도 일본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다. - P323
이렇듯 일본은 개개인의 능력보다 ‘와(和)‘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집단의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경쟁을 피하는 것은 저출산 영향으로 입시도 취업도 어렵지 않게 된 일본 국내에는 통하지만, 결국 글로벌 경쟁에서는 뒤처질 수밖에 없다. - P325
일본은 한국에 비해 ‘느리다‘고 느끼는 일이 많은데 국민성의 차이도 있지만 노인이 많은 것과도 상관이 있는 것같다. 특히 디지털화가 늦어져서 아날로그 방식의 절차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일이 많다. 한편 디지털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노인에게는 아날로그가 좋을 때도 있다. - P327
한국에서는 택시 운전사와 말을 나누다 보면 자신은 이런 일을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일시적으로 하고 있다는 식의 말을 듣게 될 때가 있다. 이것이 사실 내가 한국에서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다.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면 일하는 사람도 서비스를 받는 사람도 행복해지지 않을까 싶다. - P339
한국은 일본보다 빠른 속도로 저출산 고령화가 진행 중이다. 어쩌면 한국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은 변화가 빨라서 예측하기 어렵다. 일본은 천천히 쇠퇴하고 있는데 아직 중소기업은 건강한 편이다. 한국은 시작과 변화의 힘이 있고 일본은 지속의 힘이 있다. 시작과 변화는 젊은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고령화 사회에서는 오히려 일본의 지속의 힘이 중요할 수도 있다. - P356
맨날 축구만 하면서 꿈은 의사였다는 대목에서 빵터졌네 ㅋㅋㅋㅋㅋㅋ
고등학생 시절 공부한 시간은 한국 고등학생에 비하면 아주 짧았던 것 같다. 내가 특별한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생 때 축구부였던 오빠는 365일 중 350일은 부활동을 했던 것 같다. 특별히 축구를 잘하는 학교도 아니었다. 그렇게 매일 축구만 하면서 꿈은 의사였다. 아니나 다를까 의대는 세 번 떨어지고 결국 치과대로 갔다. - P301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게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아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은 다양할 텐데 말이다. - P295
공부와 부 활동(스포츠) 둘 다 열심히 하자는 ‘문무양도‘는 일본 학교의 교육 방침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그렇게 가르친다. 그러면서 공부만 하는 것보다는 청춘을 실컷 즐기자는 분위기가 있다. - P302
우연이겠지만 유토리 교육이 끝난 것은 동일본 대지진의 해였다. 동일본 대지진은 사망자와 실종자를 합쳐서 2만 2,000명을 넘는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게다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방사능 오염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벌어지기도 했다. 이 사건들을 젊은 나이에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유토리 세대는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들이 위 세대에 비해 집이나 차에 대한 소유욕이 없는 것은쓰나미가 집이나 차를 쓸어 가는 것을 목도한 것과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 P305
한국에서는 의외로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일본에서 부부동성(夫婦同姓)은 법적 의무다. 남편이 아내 성으로 바꿔도 되지만 어쨌든 부부라면 같은 성을 써야 한다. 실제로 95퍼센트는 아내가 남편 성을 따른다. 나는 2000년대 초반에 법대를 다녔는데 당시에도 부부별성을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논의가 오래전부터 있었고, 곧 실현될 거라고 배웠다. ‘내가 결혼할 때는 부부별성이 되어 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바뀌지 않았다. 결혼 후 10년 이상 지났지만 지금도 일본은 부부동성이다. - P252
가부장재의 잔재는 사실 부부의 호칭에도 드러난다. 남편은 옷또(夫), 아내는 쓰마(妻)다. 하지만 많은 남성들은 밖에서 아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요메 (嫁)라고 한다. 요메는 며느리라는 뜻이라 남편이 이렇게 칭하는 것은 잘못된 사용법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남성이 많다. 반대로 아내가 밖에서 남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슈진, 또는 단나라고 하는 여성이 많다. 둘 다 ‘주인‘이라는 뜻이다.남편 밑에 아내가 있다는 것이다. 관습적인 표현이지만 들을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말이다. 옛날에는 전업주부가 많았고 이혼도 적었지만, 지금은 많은 여성들이 결혼 후에도 일을 계속하고 이혼도 흔하다. 이제 부부동성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 P253
이렇게 오랫동안 선택적 부부별성제가 실현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여성의 인권을 가볍게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부별성에 반대하는 보수파는 부부동성이 일본 고유의 제도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부부동성이 법으로 규정된 것은 1898년이다. (중략) 1868년에 메이지 시대가 시작되어 모든 사람들이 성을 갖게 된 후에도 부부별성이 일반적이었다. 1898년에 부부동성을 규정한 것은 메이지 시대가 시작한지 30년 지난 시점이다. 오히려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 국가를 따라 도입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면에서 서양화가 진행된 시기였지만, 특히 부부동성은 가부장제를 통해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기 쉽게 만드는 데 유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 P254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일본 정부에게 선택적 부부별성제 도입을 2024년 10월까지 네 번 권고했지만 여전히 따르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국민들 사이에 여러 의견이 있는 사안이며 앞으로충분히 검토하고 대응하겠다"고 답했다. 네 번째 권고를 받을 때까지 충분히 검토할 시간은 있었으니, 앞으로도 적극적인 대응은 기대하기 어렵다. - P256
나는 신문 기자가 될 때까지 일본에서 그렇게 성범죄가 많은지 몰랐다. 거의 보도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2022년 강제 성교 등으로 가해자가 체포, 기소된 것은 1,655건이나 되고, 그중 피해자가 20대 이하인 경우가 80퍼센트를 차지한다. 그런데 가해자가 유명인이거나 강간 살인처럼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가아니면 대부분 보도되지 않는다. 신문사에서는 "피해자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들었지만 납득이 가지 않았다. - P257
나카이 사건을 ‘트러블이라고 보도한 일본 언론도 문제다. 나카이와 여성 사이에 트러블이 발생했다고 하면 보통시청자나 독자는 무슨 트러블인지 궁금해할 것이다. 일본 뉴스를 보는 한국 지인은 "도대체 어떤 트러블이냐"고 여러 번 나에게 물어봤다. 한국에서는 ‘성상납‘이라고 보도하고 있는 사이에도 일본에서는 계속 ‘트러블‘이라는 말을 썼다. 가해 당사자가 숨기려고 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왜 언론사가 사건의 본질을 숨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P259
나카이 사건은 원래 ‘개인적 트러블‘로 덮으려던 사건이다. 후지TV가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한 이유는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의 지적 때문이었다. 후지TV의 주주인 미국 펀드가 후지TV에게 조사를 요구한 것이다. 해외에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적절한 대응을 기대하기 어렵다. - P261
일본에서는 언론이 문제를 파악해도 보도하지 않고 감추는 일이 적지 않은 듯하다. 일본 국민이 목소리를 내는 것에 소극적인 배경에는 일본 언론의 책임도 있다. - P263
2024년 10월에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선택적 부부별성제 도입을 권고했을 때 일본 정부는 또 다른 권고도 받았다. 황위 계승에 대해서 남성만 계승하게 돼 있는 황실전범을 개정하도록 권고받은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 권고를 사실상 거부했다. 부부동성도, 남성만 황위를 계승하는 것도 결국 같은 뿌리인 가부장제에 기인하는 것 같다. - P264
천황은 헌법상 ‘일본국의 상징‘이다. 일본국의 상징인 천황이 남성이어야 한다는 것은 헌법이 규정한 남녀평등과 모순되지 않을까? - P265
2024년 세계 경제 포럼이 발표한 젠더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146개 국가 중 일본은 118위였다. 한국은 94위로 양국이 다 낮지만 일본이 더 심각하다. 경제, 교육, 보건, 정치 네 가지 분야 중 일본은 정치 분야가 특히 낮다.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낮아서인데 초대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 이후 이시바 시게루(石破茂)까지 65명 중 여성은 단 한명도 없다. 결국 부부별성제 도입이나 여성 천황에 소극적인 정부의 구성원은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 P266
일본국 헌법 제1장 제1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그 지위는 주권이 있는 일본국민의 총의에 따른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성 천황에 대해서는 정부가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이 논의해서 정해야 한다. 여성 천황을 용인하자는 의견이 81퍼센트라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는데 유엔의 권고를 정부가 거부하는 것은 헌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P268
한국 남자를 만나고 나서 가장 많이 변한 건 자기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일본 여자들은 불만이 있어도 일단 참는 경우가 많다. 불만을 표현하는 법을 잘 모른다. 상대방이 알아서 눈치채기를 기대하고, 싸우지 않고 해결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건 한국 남자 친구한텐 통하지 않았다. - P271
일본 여자는 순종적이고 여성스럽다고 생각하는 한국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이를 전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일본 여자들은 여성스러움을 어느 정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여자력‘이라는 말이 있는데, 외모나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꾼 매력적인 여성의 힘을 가리키는 말로 남자들에게 인기 많은 여자를 ‘여자력이 높다‘라고도 한다. - P272
나는 2000년대 초반에 한국에 유학하자마자 한국에서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쓸데없이 웃는 표정을 보이면 마음이 있다고 오해를 받기 십상이었다. - P276
일본 맥도날드에는 다른 나라에 없는 메뉴가 있다. ‘스마일 0엔‘이다. 맥도날드라고 하면 ‘스마일 엔‘을 떠올릴 정도로 유명하다. (중략) 항상 손님을웃는 얼굴로 환영한다는 의미로 ‘스마일 엔‘이라는 메뉴가 추가됐다. 실제로 손님이 "스마일 주세요"라고 하면 종업원은 공짜로 웃어 준다. - P277
나는지금 시대의 스마일 0엔에는 거부감을 느낀다. 한국에서 그런 메뉴를 추가하겠다고 하면 아마 반대하는 의견이 훨씬 많을 것이다. 한국 친구에게 스마일 0엔에 대해 의견을 물어보면 대부분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런 것을 허용하는 일본이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이다. "한국에서는 시대적인 변화가 아니라 1980년대였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서 자체가 일본과 다르다는 것이다. - P279
이렇게 미숙한 상태의 아이돌이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일본 팬들의 취향이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일본 K-POP 팬들의 취향을 봐도 그렇다. (중략) 전체적으로 일본에서는 여성 아이돌은 멋있는 아이돌보다 귀여운 아이돌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 P282
조남주의 페미니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일본에서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일본 여성 독자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자신이 겪어 온 볼합리한 일들에 대해 되돌아보게 했기 때문이다. - P284
헤이세이 천황이 생전에 퇴위한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죽음을 둘러싸고 일본 사회가 정체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쇼와 천황 때가 그랬다. 1988년 가을부터 쇼와 천황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축제 같은 행사가 잇따라 취소됐다. 방송에서는 오락 프로그램이 사라졌다. 쇼와 천황이 서거했을 때는 천황에 관한 프로그램 일색이 됐다.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일본 전체의 분위기가 침체되는 상황을 막고 싶었던 것이다. - P210
헤이세이 천황은 ‘평화주의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11차례나 오키나와를 방문한 것도 그런 이미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키나와는 태평양 전쟁 말기에 큰 피해를 입었던 곳이다. 그의 아버지 쇼와 천황은 전국을 순행하면서도 한 번도 오키나와를 방문하지 않았다. 헤이세이 천황은 1975년 황태자였을 때 처음 오키나와를 방문했다. (중략) 일본에도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작아진 데에는 헤이세이 천황이 보여 준 평화 지향적 태도도 큰 역할을 했다. - P213
그런데 한국에서는 천황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기본적으로는 천황의 ‘전쟁 책임‘이라는 관점에 집중해서 보도한다. 한국 언론 입장에서는 당연할 수 있지만, 그러다 보니 일본 국민들의 감정을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사건이 일례다. 이 사건이후 한일 관계가 급격히 악화됐다. - P214
천황의 존재감은 시대에 따라 많이 달라졌다. 특히 에도시대 말기부터 존재감이 커졌다. 에도 시대는 쇼군을 정점에 둔 봉건 사회였고 천황의 존재감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계급이 명확했고 사무라이가 제일 높았다. 역사 시간에‘사농공상‘이라고 배우는 계층 구분이 있다. 위에서부터 무사(사무라이), 농민, 장인, 상인의 순이다. (중략) 한국에서도 ‘사농공상‘이라는 말을 쓰지만 한국에서 ‘사‘는 무사가 아니라 선비라고 들었다. 이는 아주 큰 차이다. - P217
나는 천황에게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았던 것이 한국을 포함한 전쟁과 식민 지배로 피해를 입은 나라들과 지금까지 불편한 관계가 이어지는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이 패전한 뒤 80년이 지나 버린 현재로서는 천황제를 부정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다. - P224
천황이란 존재는 신화와 실화가 섞인 것이다. 그런데 진무 천황이 실제로 있었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도 의외로 많을 수 있다. 왜냐하면 진무 천황의 묘가 나라현 가시하라시(橿原市)에 있기 때문이다. (중략) 진무 천황의 묘가 지금의 장소로 확정된 것은 에도 시대 말기인 1860년대다.서구 열강 국가들이 몰려오는 속에서 천황의 정통성을 확립함으로써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제시하려고 했던 것 같다. - P226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1867년에 정권을 천황에게 반납하고 메이지 천황이 즉위한 후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에도 막부를 타도하고 성립된 메이지 정부는 천황의 존재를 통해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천황을 사람의 모습을 한 신 ‘아라히토가미(現人神)‘로 신격화했다. 그런데 메이지 초기에는 천황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많아 지방을 순행하면서 천황의 존재를 알리기도 했다. 천황은 근대화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앞장서서 양복을 입고 소고기를 먹는 등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며 일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 P230
정리하면 신화로부터 시작한 천황이 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헤이안 시대까지, 쇼군이 정치의 중심이 된 것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다. 메이지 시대 이후다시 천황이 정치의 중심이 됐다가 1945년 패전을 거쳐 주권자는 국민, 천황은 상징이 됐다. - P233
<기미가요>‘에서 ‘기미(君)‘는 ‘천황‘을 뜻한다. 즉 천황을 찬양하는 노래다. 원래가사는 10세기의 와카(和歌)에서 유래했고 ‘기미‘는 ‘그대‘라는 뜻으로 천황과는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메이지 이후에 주권자인 천황의 치세가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기원하는 가사로 해석되었다. 패전 후 주권자가 국민으로 바뀐후에도 여전히 <기미가요>가 국가로 남은 것에 불편함을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 P236
왜 애국심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지 생각해 보면, ‘나라를 위해‘라는 명분으로 전쟁터에 나가 죽이고 죽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중략)2021년 세계 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조국을 위해 싸우겠습니까"라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한 비율이 가장 낮았던 나라가 일본이다.(중략) - P-1
그런데 2006년 교육기본법 개정으로 ‘애국심 조항‘이 추가됐다. "국가와 향토를 사랑하는 태도를 함양한다"는조항이다. 애국심을 교육의 목표로 정하는 것에 반대하는목소리는 적지 않았다. 가치관을 국가가 법률로 강요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P238
전전(戰前)과 전후(戰後)에 많은 변화와 단절이 있었지만, 이어지고 있는 것도 많다. 그중 하나는 ‘재벌‘이다. 일본에서는 전후 GHQ (연합군 최고사령부)로 인해 재벌이 해체됐다.재벌이 군국주의에 가담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야스다 등 재벌에 대한 일족의 지배력이 배제됐다. 이를 교과서에서는 ‘재벌 해체‘로 표현한다. - P239
아소의 지역구는 후쿠오카다. 이곳에서 아소는 세습의원이며 재벌가다. 아소의 전직은 아소 시멘트 사장이다. 아소 시멘트는 아소 그룹의 핵심 기업이다. 아소 그룹은아소 다로의 증조부 아소 다키치가 시작한 아소탄광이 원류다. 식민지배 당시 조선인 강제 동원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회사다. - P242
국회 의원은 그 지역의 대표이므로 누가 당선되었을 때 지역에 이득이 있을지도 유권자가 판단할 수 있다. 아소 다로 전 총리가 아무리 실언을 되풀이하고 한자를 못 읽어도 그래도 아소 재벌가다. 여기에 여당인 자민당의 핵심정치인 중 하나다. 야당 의원보다는 지역에 이익을 더 줄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 P243
아소는 탄광왕의 증손, 아베는 만주국의 실권자였던 전범의 손자다. 그런 배경이 강제 징용 문제나 난징 대학살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 - P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