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의외로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일본에서 부부동성(夫婦同姓)은 법적 의무다. 남편이 아내 성으로 바꿔도 되지만 어쨌든 부부라면 같은 성을 써야 한다. 실제로 95퍼센트는 아내가 남편 성을 따른다. 나는 2000년대 초반에 법대를 다녔는데 당시에도 부부별성을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논의가 오래전부터 있었고, 곧 실현될 거라고 배웠다. ‘내가 결혼할 때는 부부별성이 되어 있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바뀌지 않았다. 결혼 후 10년 이상 지났지만 지금도 일본은 부부동성이다. - P252

가부장재의 잔재는 사실 부부의 호칭에도 드러난다. 남편은 옷또(夫), 아내는 쓰마(妻)다. 하지만 많은 남성들은 밖에서 아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요메 (嫁)라고 한다. 요메는 며느리라는 뜻이라 남편이 이렇게 칭하는 것은 잘못된 사용법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남성이 많다. 반대로 아내가 밖에서 남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슈진, 또는 단나라고 하는 여성이 많다. 둘 다 ‘주인‘이라는 뜻이다.
남편 밑에 아내가 있다는 것이다. 관습적인 표현이지만 들을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말이다. 옛날에는 전업주부가 많았고 이혼도 적었지만, 지금은 많은 여성들이 결혼 후에도 일을 계속하고 이혼도 흔하다. 이제 부부동성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 P253

이렇게 오랫동안 선택적 부부별성제가 실현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여성의 인권을 가볍게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부별성에 반대하는 보수파는 부부동성이 일본 고유의 제도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부부동성이 법으로 규정된 것은 1898년이다. (중략) 1868년에 메이지 시대가 시작되어 모든 사람들이 성을 갖게 된 후에도 부부별성이 일반적이었다. 1898년에 부부동성을 규정한 것은 메이지 시대가 시작한지 30년 지난 시점이다. 오히려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 국가를 따라 도입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면에서 서양화가 진행된 시기였지만, 특히 부부동성은 가부장제를 통해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기 쉽게 만드는 데 유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 P254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일본 정부에게 선택적 부부별성제 도입을 2024년 10월까지 네 번 권고했지만 여전히 따르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국민들 사이에 여러 의견이 있는 사안이며 앞으로충분히 검토하고 대응하겠다"고 답했다. 네 번째 권고를 받을 때까지 충분히 검토할 시간은 있었으니, 앞으로도 적극적인 대응은 기대하기 어렵다. - P256

나는 신문 기자가 될 때까지 일본에서 그렇게 성범죄가 많은지 몰랐다. 거의 보도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2022년 강제 성교 등으로 가해자가 체포, 기소된 것은 1,655건이나 되고, 그중 피해자가 20대 이하인 경우가 80퍼센트를 차지한다. 그런데 가해자가 유명인이거나 강간 살인처럼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가아니면 대부분 보도되지 않는다. 신문사에서는 "피해자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들었지만 납득이 가지 않았다. - P257

나카이 사건을 ‘트러블이라고 보도한 일본 언론도 문제다. 나카이와 여성 사이에 트러블이 발생했다고 하면 보통시청자나 독자는 무슨 트러블인지 궁금해할 것이다. 일본 뉴스를 보는 한국 지인은 "도대체 어떤 트러블이냐"고 여러 번 나에게 물어봤다. 한국에서는 ‘성상납‘이라고 보도하고 있는 사이에도 일본에서는 계속 ‘트러블‘이라는 말을 썼다. 가해 당사자가 숨기려고 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왜 언론사가 사건의 본질을 숨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P259

나카이 사건은 원래 ‘개인적 트러블‘로 덮으려던 사건이다. 후지TV가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한 이유는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의 지적 때문이었다. 후지TV의 주주인 미국 펀드가 후지TV에게 조사를 요구한 것이다. 해외에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적절한 대응을 기대하기 어렵다. - P261

일본에서는 언론이 문제를 파악해도 보도하지 않고 감추는 일이 적지 않은 듯하다. 일본 국민이 목소리를 내는 것에 소극적인 배경에는 일본 언론의 책임도 있다. - P263

2024년 10월에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선택적 부부별성제 도입을 권고했을 때 일본 정부는 또 다른 권고도 받았다. 황위 계승에 대해서 남성만 계승하게 돼 있는 황실전범을 개정하도록 권고받은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 권고를 사실상 거부했다. 부부동성도, 남성만 황위를 계승하는 것도 결국 같은 뿌리인 가부장제에 기인하는 것 같다. - P264

천황은 헌법상 ‘일본국의 상징‘이다. 일본국의 상징인 천황이 남성이어야 한다는 것은 헌법이 규정한 남녀평등과 모순되지 않을까? - P265

2024년 세계 경제 포럼이 발표한 젠더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146개 국가 중 일본은 118위였다. 한국은 94위로 양국이 다 낮지만 일본이 더 심각하다. 경제, 교육, 보건, 정치 네 가지 분야 중 일본은 정치 분야가 특히 낮다.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낮아서인데 초대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 이후 이시바 시게루(石破茂)까지 65명 중 여성은 단 한명도 없다. 결국 부부별성제 도입이나 여성 천황에 소극적인 정부의 구성원은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 P266

일본국 헌법 제1장 제1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그 지위는 주권이 있는 일본국민의 총의에 따른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성 천황에 대해서는 정부가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이 논의해서 정해야 한다. 여성 천황을 용인하자는 의견이 81퍼센트라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는데 유엔의 권고를 정부가 거부하는 것은 헌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P268

한국 남자를 만나고 나서 가장 많이 변한 건 자기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일본 여자들은 불만이 있어도 일단 참는 경우가 많다. 불만을 표현하는 법을 잘 모른다. 상대방이 알아서 눈치채기를 기대하고, 싸우지 않고 해결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건 한국 남자 친구한텐 통하지 않았다. - P271

일본 여자는 순종적이고 여성스럽다고 생각하는 한국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이를 전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일본 여자들은 여성스러움을 어느 정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여자력‘이라는 말이 있는데, 외모나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꾼 매력적인 여성의 힘을 가리키는 말로 남자들에게 인기 많은 여자를 ‘여자력이 높다‘라고도 한다. - P272

나는 2000년대 초반에 한국에 유학하자마자 한국에서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쓸데없이 웃는 표정을 보이면 마음이 있다고 오해를 받기 십상이었다. - P276

일본 맥도날드에는 다른 나라에 없는 메뉴가 있다. ‘스마일 0엔‘이다. 맥도날드라고 하면 ‘스마일 엔‘을 떠올릴 정도로 유명하다. (중략) 항상 손님을웃는 얼굴로 환영한다는 의미로 ‘스마일 엔‘이라는 메뉴가 추가됐다. 실제로 손님이 "스마일 주세요"라고 하면 종업원은 공짜로 웃어 준다.  - P277

나는지금 시대의 스마일 0엔에는 거부감을 느낀다. 한국에서 그런 메뉴를 추가하겠다고 하면 아마 반대하는 의견이 훨씬 많을 것이다. 한국 친구에게 스마일 0엔에 대해 의견을 물어보면 대부분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런 것을 허용하는 일본이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이다. "한국에서는 시대적인 변화가 아니라 1980년대였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서 자체가 일본과 다르다는 것이다. - P279

이렇게 미숙한 상태의 아이돌이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일본 팬들의 취향이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일본 K-POP 팬들의 취향을 봐도 그렇다. (중략) 전체적으로 일본에서는 여성 아이돌은 멋있는 아이돌보다 귀여운 아이돌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 P282

조남주의 페미니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일본에서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일본 여성 독자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자신이 겪어 온 볼합리한 일들에 대해 되돌아보게 했기 때문이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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