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지위에 오른 그 어떤 나라에서도 일본만큼 여성을 여전히 이토록 노골적으로 물품처럼 여기지 않는다. 이중 잣대의 뿌리가 너무 깊은 나머지 어디에서나 당연시되고 그렇기 때문에 이중 잣대를 감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여성을 경제적, 사회적, 성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장치들이 부끄러움 없이 드러나 있고, 누구도 그 정당성에 제대로 된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
남성이 이토록 혜택을 누리는 시스템에서 남성이 시스템에 의문을 던질 리는 물론 없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여성이 자신들에 대한 억압의 정당성에 동참하는 경우도 흔히 보인다. 여성들이 복종하고 견디는 것이다. 혹은 남성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생겨난 업계에 뛰어들기도 한다. 그런 업계의 여성들은 방심하는 사이에 자신들이 상대하는 남성들만큼이나 약자를 착취하는 존재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진심에서건 냉소에서건 어쩔 수 없어서건, 여성들은 시스혐의 부역자가 된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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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전통적으로 국경을 넘는다는 행위를 경계해왔다. 줄곧 자신들의 국경을 단순히 근처에 그어져 있는 선이 아닌, 행위를 제한하는 경계선으로 인식해왔다. - P226

일본에는 일본인이라는 것에 대한 완고한 정의가 존재한다. 일본인은 경계 안에 있고, 나머지는 모두 바곁에 있다. 귀화라는 개념이 있기는 하지만 그 또한 다른 나라들이 귀화를 받아들이는 만큼이나 완고하다. 귀화와 같이 정해진 행정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일본에 살면서 일하는 사람들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 P229

일본의 단어들은 자체적으로 순화되기는 했어도, 진정으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들은 아직 일본의 문도 두드리지 않았다. 정치적 올바름이 가져다준 성취와 그 반면의 끔찍한 불편함 또한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일본은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을 매우 수상쩍게 여긴다. 그러한 경향은 19세기 중반 미국의 군함이 무역의 탈을 썼으나 사실은 누가 봐도 제국주의 착취의 시도라는 목적을 갖고 등장했을 때에 대폭 심화되었다. - P230

일본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을 언제나 자신보다 뒤떨어졌다고 생각했고 이용할 대상으로만 여겼다. 스스로도 제국주의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처지였던 일본은 자신들이 동경해 마지않았던 서구 열강을 모방해서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중국 및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고는 한국을 병합해 이른바 국경을 확장해나갔다.
20세기의 초반에 이런 작업에 성공했던 일본은 식민 지배의 야망을 결국 아시아의 나머지 지역에까지 확대했다. 이런 식으로 타국의 국경을 파괴하던 행위는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슬로건 아래 행해졌다. 이 문구는 서구 열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비로운 일본의 리더십 아래에 아시아를 경제적·정치적으로 통합한다는 생각을 내세우고 있었다.
동시에 일본 국내에서 이 문구는 아시아 대륙으로의 확장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일본(혹은 일본 정부의 일부 인사)은 서양 제국주의의 위험으로부터 아시아의 불행한 나라들을 구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주장을 통해, 일본인과 일본 자본이 침략해들어갈 구실을 찾고자 했다. "아시아는 아시아인에게"가 그때 사용되었던 구호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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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함을 찬양하는 일련의 문화는 다도로부터 탄생했다. 이는 세심하게 낡고, 과시적으로 가난하고, 요란하게 정갈한 식탁과 같은 형태로 드러난다. - P139

일본은 친밀하게 느껴지다가도 어느 순간 딱 잘라 거리를 두는 정도가 다른 나라들보다 강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곤 한다. 일본은 여전히 은밀하기보다 노골적으로 외국인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나라다. - P151

겉으로 잘 얘기하지는 않지만 일본은 한때 자국이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을 열등한 동생 취급했던 과거가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P174

광활한 수경재배 농장과 거대한 유통망을 자랑하는 현대의 일본에서조차 사람들은 여전히 제철 꽃과 제철 음식에 열광한다. 아마도 그렇게 함으로써 덧없음을 찬양할 구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P183

가령 전통 조경사가 여기 있던 바위를 두 가량 이동시키고 대나무 수풀을 1~2미터 정도 뒤로 옮겨서 산이 바라다보이던 조망이 사라졌다고 하자. 일본에서는 이런 인위적 변화의 결과물을 자연 그대로의 정원이라고 부른다. 혹은 일본 전통의 꽃꽂이인 이케바나生花는 꽃을 꺾어다 다른 장소에 가져다놓고 배열한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살아 있는 꽃生花‘이라고 부른다. 꽃은 꺾여서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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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노에는 사이즈가 두 개밖에 없다. 남성용 사이즈와 여성용 사이즈. 기모노가 옷을 입는 사람의 사이즈에 맞추어 디자인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사람을 기모노에 맞추려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 일본인은 성별과 같은 중요한 차이를 빼면 모두 같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진정한 독창성이 흔히 묵살되곤 하는 일본에서 개인의 특성을 살려 맞춤옷을 만든다는 개념은 중시되지 않있다. 그보다는 화합이 만사의 목표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복장에서도 기꺼이 동질성을 드러낸다. - P73

자기 업무는 끝났을지라도 동료들과 사무실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룹의 일원이라는 점이 중요하기 때문에 혼자만의 이기적인 일정을 위해 서둘러 퇴근하는 행위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조직의 시간표에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사무실에 남아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은 전혀 아니며, 남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 P115

일본의 직장인들이 서양에서 업무라고 부르는 것 자체에 붙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적다. 일본의 그 악명 높은 업무 효율은 시간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일본의 효율은 조직 내 갈등이 없다는 사실과 조직 내 경쟁은 넘쳐나지만, 미국인들과 대부분의 유럽인으로서는 거의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일본인들이 사상적 단결을 한다는 데서 힘을 발휘한다. - P116

서양과 비교하면 일본의 마약 문제는 아주 작다. 하지만 망가와 워크맨의 효과는 마약이 가져다주는 효과와 어느 정도 비슷한 면이 있다. 두 경우 다 현실세계가 차단되고, 중독되면 현실세계보다 환각으로 인한 가짜 세계를 선호한다. 여기서 또 하나의 유사점이 있다. 망가와 워크맨도 중독된다. 대한 ‘현실‘이 훨씬 더 즐겁기 때문이다. - P126

오랜 세월 일본에서 비판의 표현은 침묵을 통해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비판할 일이 있으면 반응하기를 거부한다. 침묵의 비판이 내는 소리는 더 크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비판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젊은 세대는 입을 닫고, 눈을 망가에 몰입시키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모든 감각을 차단하고 있다. - P127

분명한 의사표현을 하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는 대중이야말로 모든 사회와 따라서 모든 정권의 집단적인 소망에 대한 답이다. 그런 사회의 이상적인 시민들은 무조건적 화합이라는 이상에 모두 동의하고, 모두 소극적인 방식으로 기여한다.
하지만 대열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리고 사람들이 전체주의적 방식에 의문을 던지면서 그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의식 있는 단체와 개인들(나가시마 오시마 감독, 나가사키 시장, 내가 탔던 택시의 기사)의 숫자와 목소리가 커져만 간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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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전화를 거는 마땅한 방법이 있고, 쇼핑을 하는 마땅한 방법이 있고, 차를 마시는 마땅한 방법이 있고, 꽃꽂이를 하는 마땅한 방법이 있고, 돈을 빌리는 마땅한 방법이 있다. 절대적인 형식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추구된다. 사회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사회활동의 형식을 따라야만 한다. 다른 나라들도 무질서한 삶에 어떤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나름의 의례를 갖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이것이 행위의 예술이 된다. 일본어를 보면 이것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형식적인 관용구가 많이 쓰인다. 만나고 헤어질 때 사용하는 관용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구할 때, 슬픔을 표현할 때, 화를 내거나 놀라움을 나타내거나 심지어 사랑을 표현할 때조차 사용되는 관용구가 있다. - P17

일본인들은 평균이라는 것에 안도하고 평범함을 정상으로 여긴다. 서양인들도 마찬가지로 제약을 받지만, 제약을 뛰어넘으려 하고 평균이나 평범함에서 그 어떤 위안도 얻지 못한다. 일본인들은 자연 안에서 그리고 사회적 의무 안에서 자신이 무언가 더 큰 존재의 일부라는 소속감을 찾는다. 때로 이를 통해 자신의 개별성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에 반해 서양인들은 개인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개념이 강하고, 그렇기 때문에 쉽게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 P28

흔히들 지적하듯 파친코에는 중독성이 있다. 일단 파친코를 하게 되면 아주 많이 하거나 하더라도 거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물론 열차 시각을 기다리거나 약속에 늦는 친구를 기다리면서 파친코를 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는 중독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술병을 찾듯 파친코 업소를 찾는다. 그렇게 중독된 수백만 사람의 존재가 국가 차원의 우려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사람들이 파친코의 영향을 전혀 해악이라고 여기지 않거나, 아니면 파친코의 영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 P64

일본인들이 잃은 것은 천황도 아니요. 천황이 갑자기 보통 인간으로 격하되어 생긴 상실도 아니다. 일본이 상실한 것은 천황과 천황의 질서정연한 전전의 제국이 상징하던 그 모두다. 일본이 상실한 것은 확실성이다. 확실성이라는 것이 무엇이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전후의 새로운 세계에는 과거의 확실성을 대체할 만한 것이 없었다. - P66

술집에 있는 사람들처럼 파친코 업소에 있는 사람들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고통이 아니라 일종의 희열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은 지금 하는 일이 무슨 의미인지를 걱정하지 않은 채, 무언가에 몰두하는 쾌락의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걱정근심을 꺼버리는 방법을 배웠다. - P67

파친코의 진정한 목적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소멸이다. 자기 소멸은 지극한 쾌락의 경지다. 이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그 상태가 무한히 계속된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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