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전화를 거는 마땅한 방법이 있고, 쇼핑을 하는 마땅한 방법이 있고, 차를 마시는 마땅한 방법이 있고, 꽃꽂이를 하는 마땅한 방법이 있고, 돈을 빌리는 마땅한 방법이 있다. 절대적인 형식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추구된다. 사회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사회활동의 형식을 따라야만 한다. 다른 나라들도 무질서한 삶에 어떤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나름의 의례를 갖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이것이 행위의 예술이 된다. 일본어를 보면 이것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형식적인 관용구가 많이 쓰인다. 만나고 헤어질 때 사용하는 관용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구할 때, 슬픔을 표현할 때, 화를 내거나 놀라움을 나타내거나 심지어 사랑을 표현할 때조차 사용되는 관용구가 있다. - P17

일본인들은 평균이라는 것에 안도하고 평범함을 정상으로 여긴다. 서양인들도 마찬가지로 제약을 받지만, 제약을 뛰어넘으려 하고 평균이나 평범함에서 그 어떤 위안도 얻지 못한다. 일본인들은 자연 안에서 그리고 사회적 의무 안에서 자신이 무언가 더 큰 존재의 일부라는 소속감을 찾는다. 때로 이를 통해 자신의 개별성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에 반해 서양인들은 개인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개념이 강하고, 그렇기 때문에 쉽게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 P28

흔히들 지적하듯 파친코에는 중독성이 있다. 일단 파친코를 하게 되면 아주 많이 하거나 하더라도 거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물론 열차 시각을 기다리거나 약속에 늦는 친구를 기다리면서 파친코를 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는 중독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술병을 찾듯 파친코 업소를 찾는다. 그렇게 중독된 수백만 사람의 존재가 국가 차원의 우려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사람들이 파친코의 영향을 전혀 해악이라고 여기지 않거나, 아니면 파친코의 영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 P64

일본인들이 잃은 것은 천황도 아니요. 천황이 갑자기 보통 인간으로 격하되어 생긴 상실도 아니다. 일본이 상실한 것은 천황과 천황의 질서정연한 전전의 제국이 상징하던 그 모두다. 일본이 상실한 것은 확실성이다. 확실성이라는 것이 무엇이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전후의 새로운 세계에는 과거의 확실성을 대체할 만한 것이 없었다. - P66

술집에 있는 사람들처럼 파친코 업소에 있는 사람들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고통이 아니라 일종의 희열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은 지금 하는 일이 무슨 의미인지를 걱정하지 않은 채, 무언가에 몰두하는 쾌락의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걱정근심을 꺼버리는 방법을 배웠다. - P67

파친코의 진정한 목적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소멸이다. 자기 소멸은 지극한 쾌락의 경지다. 이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그 상태가 무한히 계속된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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