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 지위 협정에서 일본의 지위는 종종, 이를테면 명백한 미국의 괴뢰이자 수도 주변의 일부 지역만 실효 지배하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지위보다도 낮다. 또 아직도 북한과 전쟁 상태(휴전 중)에 있는 한국 정부보다도 낮다. 이런 상황이 특히 오키나와에서 미군 관계자들에 의한 중대 범죄가 빈번히,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음은 말할 것도없다. 이런 비교는, 일본의 대미 종속의 이유가 미일 간의 현실적인 격차(단적으로는 군사력의 격차)에 있는 것도 아니고, 군사적인 긴급함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 P66

일본의 대미 종속에서 달리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바로 종속 사실이 보이지 않게 감춰져 있고 부인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같은 불가시성을 조장하기 위해 종속 사실은 ‘온정주의의 망상‘이라는 오블라투로 감싸여 있다. - P67

친미 보수 세력이 지배하는 정부와 그것을 돕는 미디어 기관은 단 하나의 명제를 국민에게 주입하려 하며, 그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미국은 일본을 사랑한다‘는 명제를, 물론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은 일개 동맹국에 지나지 않으며, 그런 명제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 P68

이런 ‘일본을 사랑하는 미국이라는 명제가 대일본제국의 천황과 국민의 관계를 정의한 명제와 닮은꼴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일본제국은 ‘천황 폐하가 그 적자(백성) 인 신민을 사랑한다‘는 명제 위에 우뚝 서서 그 사랑에 응하는 것 - 거기에는 폐하가 결정한 전쟁‘에서 기꺼이 죽는 것도 포함된다 - 이 신민의 의무이고 명예이며 행복이라고 강변했다. 이런 이야기는 강력한 국민 동원 장치로 기능했으며, 동시에 파멸적인 전쟁 상황 아래서도 어떻게든 희생을 줄이려는 합리적인 발상을 날려버렸다.
그 끝에 찾아온 패전의 결과 대일본제국의 천황제는 폐지됐다. 아니, 폐지돼야 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현실에서 보고 있는 것은 ‘천황 폐하의 적자‘와 닮은꼴인 미국은 일본을 사랑한다‘는 이야기의 망령과 그 망령이 지금도 살아 있는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이상한 모양새다. ‘국체‘는 잔해로 변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국민의 정신과 생활을 강하게 규정하고 있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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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 전전의 일본은 ‘천황제 국가였다‘고 다들 얘기한다. 그리고 전후의 민주화는 전전 일본의 이런 측면에 대한 부정을 의미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천황제는 상징 천황제로 바뀌어 존속됐다. - P62

천황의 의도에 따르기 위해 미일 안보조약이 현저하게 불평등한, 실질적으로는 점령의 지속을 규정하는 대체물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중략)
쇼와 천황이 제시한 방향으로 전후 일본의 체제 존재 방식이 결정되면서 야기된 문제의 심각성이다. 그 지침에는 오키나와의 점령 상태를 장기간 지속시킬 것을 천황이 미국 쪽에 의뢰했던 1947년의 ‘오키나와 메시지‘도 중대한 요소로 포함돼 있다.
- P63

도요시타는 쇼와 천황이 적극적으로 미국을 맞아들인 가장 큰 동기가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혐오였다고 본다. 동서 대립이 격화하는 가운데 쇼와 친황은 나라 안팎에서 가해질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는 수호신으로 미국의 군사적 주둔을 요청했다. - P64

요컨대 나는, 미일 안보 체제를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삼는 전후 일본의 대미 종속 체제(영속 패전 레짐)를 전전과의 연속성을 지닌 전후의 국체라고 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국체‘는 사어가 됐을지언정 죽은 것은 결코 아니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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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총리의 전후 레짐으로부터의 탈각‘이라는 슬로건과는 반대로, 자민당 정권이 하고 있는 것은 동서 냉전이라는 토대를 잃고 공중에 떠버린 레짐을 필사적으로 유지하는 일이다. 아베 신조가 자칭하는 ‘보수주의‘란, 이 우매한 자를 두 번이나 총리 지위에 앉힌 권력 구조를 수단을 가리지 않고 ‘보수한다 (지킨다)‘는 지침에 지나지 않는다. - P57

여기에는 ‘아시아의 선진국은 일본뿐이어야 한다‘는, 전후의 ‘평화와 번영‘이라는 밝은 비전 뒤에 감춰진 어두운 바람이 있다. 그것은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인들이 품어온 유럽과 미국을 향한 열등감과 다른 아시아 국가의 국민에 대한 인종차별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패전을 부인함으로써 그런 심정과 바람을 전후까지 연장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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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후 일본에서 ‘경제성장‘은 ‘풍요로워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이코노믹 애니멀(경제 동물)‘이라는 욕을 듣고, 과로사로 세계를 경악시키면서까지 추구해야 할 그 무엇이었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패전이라는 거대한 좌절에서 민족이 재기했다는 전후 일본의 신화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 P53

초강대국이 초강대국다운 이유는 쇠퇴 국면에서도 그비용 청구서를 타국에게 돌릴 수 있다는 점에 있다. - P55

전후의 일본인들에게 경제성장은 국가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었기에 영원히 지속시켜야만 했다. 따라서 성장의 정지는 순수하게 경제적인 곤란뿐만 아니라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했으며, 그 때문에 오히려 불가능한 신화에 대한 집착이 생겨났다.
경제 침체 이유 중 하나인 급격한 인구 감소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대책을 취하지 못한 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인한 재난에서 다시 일어선다는 부흥의 상징을 도쿄에서 열릴 올림픽 게임이나 오사카에서 유치하려는 만국박람회에서 구하는 사태가 그 뒤집힌 의식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 P56

대미 종속과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고립은 다른 사안이 아니다. 그것은 냉전 시대부터 동전의 양면처럼 기능해온 것이고, 영속 패전 레짐의 근간과 같은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뒤 아시아에서 ‘미국의 첫째가는 부하‘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침략과 식민 지배라는 어두운 역사와 대면하는 일을 최소한의 땜질만으로 넘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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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사고의 발생 경위를 살펴보자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국책이 추진되는 방식에서 민주주의 따위는 눈곱만큼도 작동하지 않았음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요컨대 전후 민주주의 사회의 ‘민주주의‘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 사고는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 일본은 자신들의 땅을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손상시켰다.
하지만 일본 사회의 대세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오히려 정색하고 뻣뻣하게 나가는 쪽을 택했으며, 거기에 어울리는 정치 지도자가 아베 신조였다. 그가 상징하는 정치권력의 행태는 이런 모순을 정직한 방식으로 풀기는커녕 모순적인 체제를 모든 수단을 동원해 사수하는 것이었다. - P34

"천황의 기도가 잠시라도 단절돼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 기도에 ‘국민의 안녕과 행복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기도의 차원에서 천황은 국민의 행복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고 있다. 일본 국민이 행복해지는 것도, 불행해지는 것도 천황의 기도 여하에 달려 있다고.
이런 사고는 근대적인 사고의 틀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아키히토 전 천황의 사상이 품고 있는 의고주의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 P41

더글러스 맥아더가 깊이 자각했듯이, 미국이 구상한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는 천황제라는 그릇에서 군국주의를 빼버리고 대신에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알맹이를 주입한 것이다. 즉, 대미 종속 구조 아래 천황의 권위가 있고, 다시 그 아래에서 전후 민주주의가 영위된다고 규정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상징 천황제는 큰 틀인 대미 종속 구조의 일부로서 설계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P45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상징 천황제를 어떻게든 지켜내야 한다는 아키히토 전 천황의 호소는, 한편으로는 패전을 계기로 미국의 개입 아래 제도화된 것을 지켜내야 한다는 호소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 저 말씀은 자기목적화한 대미 종속의 영속화가 지금과 같이 전후 민주주의 전체를 갉아먹고 있는 상황 속에서, 천황의 상징 작용이 상징하는 것이 ‘국민 통합‘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는 통합을 유지 내지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위기의 근원인 전후 일본의 이상한 대미 종속을 끝장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 P45

아마도 일본은 세계 역사에서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터무니없이 기묘한 패전, 즉 어떤 패배를 당했는지 패배자 자신이 자각하지 못해 거기서 탈출할 수 없게 된 이상한 패배를 경험하고 있고, 이제 그것이 표면화됐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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