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사고의 발생 경위를 살펴보자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국책이 추진되는 방식에서 민주주의 따위는 눈곱만큼도 작동하지 않았음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요컨대 전후 민주주의 사회의 ‘민주주의‘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 사고는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 일본은 자신들의 땅을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손상시켰다. 하지만 일본 사회의 대세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오히려 정색하고 뻣뻣하게 나가는 쪽을 택했으며, 거기에 어울리는 정치 지도자가 아베 신조였다. 그가 상징하는 정치권력의 행태는 이런 모순을 정직한 방식으로 풀기는커녕 모순적인 체제를 모든 수단을 동원해 사수하는 것이었다. - P34
"천황의 기도가 잠시라도 단절돼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 기도에 ‘국민의 안녕과 행복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기도의 차원에서 천황은 국민의 행복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고 있다. 일본 국민이 행복해지는 것도, 불행해지는 것도 천황의 기도 여하에 달려 있다고. 이런 사고는 근대적인 사고의 틀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아키히토 전 천황의 사상이 품고 있는 의고주의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 P41
더글러스 맥아더가 깊이 자각했듯이, 미국이 구상한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는 천황제라는 그릇에서 군국주의를 빼버리고 대신에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알맹이를 주입한 것이다. 즉, 대미 종속 구조 아래 천황의 권위가 있고, 다시 그 아래에서 전후 민주주의가 영위된다고 규정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상징 천황제는 큰 틀인 대미 종속 구조의 일부로서 설계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P45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상징 천황제를 어떻게든 지켜내야 한다는 아키히토 전 천황의 호소는, 한편으로는 패전을 계기로 미국의 개입 아래 제도화된 것을 지켜내야 한다는 호소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 저 말씀은 자기목적화한 대미 종속의 영속화가 지금과 같이 전후 민주주의 전체를 갉아먹고 있는 상황 속에서, 천황의 상징 작용이 상징하는 것이 ‘국민 통합‘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는 통합을 유지 내지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위기의 근원인 전후 일본의 이상한 대미 종속을 끝장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 P45
아마도 일본은 세계 역사에서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터무니없이 기묘한 패전, 즉 어떤 패배를 당했는지 패배자 자신이 자각하지 못해 거기서 탈출할 수 없게 된 이상한 패배를 경험하고 있고, 이제 그것이 표면화됐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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