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력갱생‘은 중국의 문화대혁명 경제를 이끈 슬로건으로, 중국이라는 나라의 고립된 처지와 경제발전 전략으로 부족한 자본을 풍부한 노동력으로 대체하려던 마오쩌둥주의의 욕망을 모두 반영한 말이다. - P118

중국은 가난했다. 1978년 1인당 국민소득은 2010년 달러기준으로 859 달러였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평등했다. 혁명은 가장 사치스럽게 살던 계급을 제거함으로써 부의 격차를 줄였다.(중략)
문화대혁명은 평등주의를 강화시켰다. 홍위병의 ‘부르주아‘ 생활방식에 대한 공격은 기존의 국가정책을 강조했을 뿐이다. 자영업자를 반복적으로 규제한 결과,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소비재가 심각하게 부족해졌다. - P119

재화와 서비스에 더욱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이 이제는 부(富)를 대신해서 관료적 직위가 되었다. 그러나 최고 지도자들이 누리는 사치품을제외하고는 관료 특권의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전통적으로 사대부들이 긴 손톱과 긴 가운을 입고 육체노동을 면제받는 것을 과시하던 이 땅에서 육체노동이 찬양받았다. - P120

사회주의는 소비에서 평등주의를 위한 체제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생산 증대를 위한 동력이어야 하는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달성하기는 어렵다. 사회주의 정부는 이러한 긴장을 해소하거나 최소한 모호하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마오쩌둥주의자들은 중국이 아직은 평등주의적 빈곤만을 달성할 수 있는 사회라고 인식하고 개인의 내핍과 검박한 소비를 이상으로 치켜세우면서 더 많은 공공투자를 위한 자금을 마련했다. 그런데 문화혁명주의자들은 종종 이러한 투자를 비효율적으로 배분했다. - P121

유토피아주의와 실용주의의 이분법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은 겉보기에 무엇이든 평등주의적이었지만 끈질기게 발전주의적 의제를 유지했다. - P122

문화대혁명은 경제운동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운동이었다. 마오쩌둥주의의 급진파는 대중매체, 문화, 선전 부문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장악했지만 생산을 감독하는 부처에 대한 통제력은 약했다. - P124

‘자력갱생‘은 마오쩌둥주의의 많은 프로그램이 그렇듯이 가난하고 외진 북서부에 위치한 항전 시기 공산주의 혁명의 수도 옌안의 유산을 이어받았다.(중략) 이제 옌안의 이상은 전국적인 규모로 더욱 정교하게 중화인민공화국에 적용되었다.
또한 마오쩌둥주의시대의 ‘자력갱생‘은 갑작스러운 대외원조 중단에 대한 적응이기도 했다. 1960년 중소분쟁이 격화되자 모스크바는 갑자기 (중국에 파견했던) 6,000명의 고문들을 본국으로 소환했고, 진행중이던 156개의 대형 경제 프로젝트의 작업이 중지되었다. 구소련의 고문들은 프로젝트의 청사진을 가지고 귀국해버렸다. 그렇게 자력갱생은 중국의 유일한 현실적인 진로가 되었다. - P126

마오쩌둥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선언을 혁명적 수사학으로 포장하면서 사회주의가 아니면 무조건 자본주의라는 식으로 암시했다. 그러나 마오쩌둥과 류사오치의 충돌은 최근의 평론가들이 아무리 그러길 바란다고 해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결전이 결코 아니었다. - P127

한편 문화대혁명의 수사학은 순수한 혁명적 의지가 물질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다는, 하늘을 찌르는 전투적인 스타일을 수용했다. - P128

각종 모범 사례가 문화대혁명의 이상을 실현하는 수단이었다면 도시 시민에 대한 사회통제의 기본 요소는 그들의 노동 단위, 즉 그들을 고용하는 직장과 공장이었다. 직장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주택 보조, 의료, 연금, 학교, 휴가, 오락, 버스표 및 기타 서비스 등을 제공했다. 직장이 이처럼 방대한 범위의 필수 서비스를 제공했으므로 노동자의 직장에 대한 의존성이 높았던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 P132

마오쩌둥주의의 평등주의적 운동은 중국 사회의 지속적인 물질적 불평등을 제거할 수 없었다. 그중 일부는 지역적 불평등이었다.(중략)
또다른 고질적인 불평등은 농민과 도시 노동자를 나누는 ‘만리장성‘이었다.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으려면 도시 호적에 등록해야 했다. 인구의 5분의 4가 농촌에 거주했고, 농민들은사실상 시골에 갇혀 살아야 했다. - P133

마오쩌둥주의자들조차 농민의 지위를 바람직한 수준으로 높이지는 못했다. 중국의 젊은이들은 노동자와 군인의 일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이 두 직업 중 어느 하나를 얻게 되면 농장 노동을 면할 수 있도록 보호받을 수 있었으므로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신종의 사회적 지위 상승을 의미했다. - P136

중국은 농촌생활을 순수하고목가적인 것으로 이상화하면서도 실제 농민은 경멸하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문화대혁명 시기는 중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친농민적이었지만 공산당이 농민 혁명가들에게 진 막대한 빚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도시의 속물근성을 피할 수는 없었다. - P137

가장 큰 경제적인 성공은 중국의 인적자본을 향상시킨 점이다. 마오쩌둥주의자들은 가능한 한 풍부한 노동력으로 부족한 자본을 대체했는데, 그들은 노동자의 건강과 교육을 개선하고 더 많은 여성들을 일터로 끌어들임으로써 이러한 접근법을 확대했다 - P138

약 200만 명의 농민들이 야심찬 농촌 준의료 네트워크에서 ‘맨발의 의사‘로 훈련받았다. 이 맨발의 의사들은 특별히 장비를 잘 갖추고 있거나 의술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마을 주민들과 함께 일했기 때문에 접근성이 뛰어났으며 거의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는 이전 시기 동안 크게 증가한 농촌 의료서비스에서 가장 칭송받은 부문이었다. - P139

교육 분야에서 이룬 유사한 성과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1964년 중국의 성인 문해율 (15세 이상)은 43퍼센트였으나 1982년에는 65퍼센트로 증가했다.(중략) 중국의 문해력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1965년에서 1976년 사이에 농촌 중학교가 전례없이 15배나 증가했기 때문이다. - P141

1972년부터 1976년까지 대학은 신입생을 국가 입학시험으로 선발하는 대신 지방 관리들이 지원자의 가족 배경과 직장 성과를 바탕으로 후보자를 추천하면 등록시켰다. - P142

기본적인 보건과 교육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노동력의 질이 향상되었고, 여성의 유급 고용이 확대되면서 노동력의 규모가 커졌다. 문화대혁명은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친다"고 주장하며, 전통적인 성차별적 고용 장벽에 맞서 싸웠다. 도시에서는 거의 모든 젊은 여성이 노동 인구에 합류했다. - P143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덩샤오핑의 개혁은 의, 식, 연료, 교육, 장례식 등 ‘5대보장‘을 포함한 중국 농촌의 집단 농업, 교육, 보건, 사회 시스템을 폐지했다. 스스로 해결하도록 남겨진 농촌 가정은 다시자녀를 일종의 노후 보장 시스템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하여 국가는 인구 증가를 제한하기 위해 더욱 가혹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여성은 포스트 문화대혁명 정책의 부담을 떠안았으며, 국영산업이 폐쇄되면서 가장 먼저 일자리를 잃었다. 이 두 ‘개혁‘은 모두 장칭에 대한 공격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여성 혐오의 색채가 강했다. 이에 따라 문화대혁명 시기에 이루었던 여성 문제에서의 진척은 후퇴했다. - P146

자력갱생에는 친환경적인 측면이 있다. 가난은 낭비를 하지 못하게 만들고, 지역 상품의 소비는 수송에 따른 오염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끊임없는 개발 의제는 환경에 악영향을 미쳤다. 자력갱생은 환경적으로 곡물 재배가 유해한 지역까지 포함해 모든 지역사회에 무조건 곡물을 재배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 P147

이처럼 방어적이고 때로는 편집증적이기까지 한 모습은 문화대혁명의 경제정책에 만연해 있었다. 자력갱생은 외세의 침략에 대한 현실적인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때 중국공산당은 시민들에게 "땅굴을 깊게 파고 곡물을 곳곳에 저장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중국의 운송 시스템에 대한 구소련의 공격을 견디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 P149

삼선건설의 종식과 함께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지지를 얻어 경제정책의 대전환을 주도했는데, 서방에서 11개의 대규모 비료 공장을 수입(플랜트수입)하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저우언라이가 ‘4대 현대화‘를 선언한 연설은 문화대혁명 말기의 모험적인 시도였다. 마오쩌둥에서 덩샤오핑으로의 경제 전환은 문화대혁명 이후가 아니라 문화대혁명 기간중에 시작되었으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마오쩌둥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였다기보다는 점진적인 거부였다고 할 수 있다. - P149

마오쩌둥주의의 발전이 없었다면 덩샤오핑의 ‘기적‘은 없었을 것이다. 덩샤오핑 경제개혁의 토대가 된 문화대혁명의 성과에는 높아진 문해율과 개선된 보건, 다수확 쌀 품종, 마오쩌둥주의의 노동 동원으로 건설된 관개 및 수송 프로젝트 등이 있다. 공업 인프라는 종종 비효율적으로 구축되었지만 문화대혁명 이후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유산을 제공했다. 덩샤오핑은 외채로부터 자유로운 경제를 물려받았다. - P150

개혁이 실제로 1978년이 아닌 1971년에 시작되었는지를 묻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질문이 아니다. 덩샤오핑이 1978년이라는 연도를 고집한 이유는 시장 개혁으로 전환하면서 생긴 불미스러운 일을 일부 정당화하기 위해 문화대혁명 10년 동안의 모든 정책을 (자신이 시행한 정책까지 포함하여) 나쁘게 보이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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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직전에 마오쩌둥은 문화부가 ‘죽은 미라의 부서‘가 되었다고 불평했다. 중국의 문화유산이라는 죽은 미라는 이제 홍위병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 P84

홍위병의 초기 전성기와 더 길었던 통제 및 통합 기간 사이에는 단절이 존재한다. 후기의 정책은 전통 예술이나 외국 예술의 역할을 제한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작품으로 대체하는 데는 훨씬 덜 성공적이었다. - P85

홍위병들은 혁명의 적으로 의심되는 집을 수색했는데, 베이징의 10만여 가구 이상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급습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많은 시민들이 범죄 혐의를 받을 수 있는 일부 소장품들을 선제적으로 파기했다.(중략) 젊은 반군들이 파괴한 국보급 문화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족보, 그림, 서적, 녹음 기록, 종교적 성상(聖像) 등 많은 개인적인 물품들도 영원히 사라졌다. - P86

다수의 홍위병들은 ‘흑오류‘를 습격하는 일에찬성하거나 참여하지 않았다. 또한 교사와 학교 관계자들에 대한 폭력에 혐오감을 느낀 사람들도 많았다. 국가 역시 주요기념물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 P86

‘사구‘와 함께 그물망에 걸린 것은 1911년부터 1949년 (중화민국) 시기의 수입 서적과 음악 및 중국산 근대식 제품을 포함한 부르주아 예술의 상징물이었다. 소비에트 블록(the Soviet bloc, 구소련 및 친소 동구권)과 관련된 작품은 수정주의로 비난받았다. 처음부터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짙었던 문화대혁명의 대중 동원 단계는 중국 사회의 얕은 내부에 늘 잠재해 있던 토착주의적(자국문화 중심주의적) 성향을 밖으로 이끌어냈다. - P87

사구 반대운동과 병행하여 혁명 예술 제작 러시가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는데, 특히 음악원과 미술원 소속의 홍위병 학생들이 이를 주도했다. 실력보다는 (혁명적) 열정이 더 중요했지만 그래도 독자들을 더 잘 끌어들일 수 있도록 종종 가장 뛰어난 학생 서예가들이 뽑혀 대자보를 작성했다. - P91

1967년 2월이 되자 당 중앙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경험을 교환하기 위해 외부로 나가는 것을 완전히 중단해야 한다"고 선언하며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다. 예술가들은 즉시 자신의 원래의 학교와 일터로 돌아가 노동자, 농민, 군인들을 위한 혁명 예술을 준비해야 했다. - P91

사실 중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홍위병들이 크게 실망할 만한 문화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전통 가극과 옛 소설을 좋아했고, 서예가로서 자신의 평판을 자랑스러워했으며 다른 옛 혁명가들과 시를 주고받기도 했다.(중략)
마오쩌둥은 뾰족한 구두나 바이올린 연주에 발끈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제대로 중국 문화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기를 바랐다. - P92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예술의 진작振作)을 자신의 아내인 전직 여배우 장칭에게 맡겼고, 그녀는 일련의 모범극을 조직했다. 장칭은 문화부장이던 위후이융을 비롯해 경험이 많은 가수, 무용수, 작곡가 그룹과 함께 일하면서 일종의 프로듀서 역할을 수행했다. 이 작품들은 오케스트라와 발레 등 서양의 요소를 선택적으로 도입하여 예술을 현대화하려는 예전부터의 흐름에 동참한 것이었지만, 다른 점은 오락이 아닌 혁명을 위해서였다.(중략) 장칭은 문화대혁명이 홍위병을 강제 해산시키던 1967년 5월에 전국적으로 8개의 모범극 작품군을 선보였다. - P93

그녀는 홍위병운동이 끝날 무렵 조성된 유리한 상황을 이용해 가장 극단적인 문화민족주의를 막았다. 장칭은 홍위병이 부르주아적이라고 공격한 해외에서 수입된 두 가지 예술 형식, 즉 유화와 피아노 음악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했던 것이다. 장칭은 이 두 가지 형식이 중국 예술을 탈바꿈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보았다. - P94

사실 해외에서 들어온 서양 회화와 음악은 문화대혁명 기간 내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서양 예술의 기본 방법과 소재를 혁명을 위해 정화하여 활용하는 것에 대해 아무도 문제삼지 않았다. - P95

새로운 가극에서 더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작품의 내용이었다. 전통 가극은 고대 왕조의 전설에 나오는 도덕적인 이야기를 강조한 반면, 새로운 가극작품들은 혁명시대에서 교훈을 끌어내며 현재를 배경으로 삼았다. - P96

급진주의자들이 혁신을 위해 공연예술을 선택한 이유는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문학은 권력과 가장 밀접한 예술이었으므로 그들의 적대자들이 더 견고하게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극 분야에서 권력을 잡는 것이 더욱 쉬웠을 뿐만 아니라 장칭은 배우 출신이라는 배경 덕분에 (다른 예술분야라면 그녀가 가지지 못했을) 무대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중국 가극은 문학보다 훨씬 대중적인 장르이기 때문에 포퓰리즘 개혁에 더 적합했다. 마지막으로 가극은 소설이나 시와는 달리 아마추어 버전이나 영화 버전 등으로 다양하게 변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선택은 문화대혁명의 예술에 즉각적인 활력과 정치적 방향성을 부여했다. - P96

중요한 것은 문화대혁명이 급진적인 새로운 예술을 요구하면서도 오랜 전통을 일부 활용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원칙이 지고지상의 위치를 차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 P97

중국에서는 메시지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이 전통적으로 주를 이룬다. 중국의 예술가들은 유급 선전원이든 정권에 대한 반체제 비평가든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자신의 예술이 당연히 공공생활에 대해 논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98

문화대혁명은 전문 예술가들의 엘리트주의를 경멸하면서 아마추어 숭배를 부추겼다. 급진주의자들은 노동자, 농민, 군인들도 예술가와 공연자가 될 수 있고, 그들의 참여가 새로운 혁명 문화를 추동할 것이라고 상상했다. - P98

마오쩌둥주의운동의 아마추어 이상은 예술을 오락적인 즐거움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예술은 그러한 수정주의적 입장을 취하기에는 너무 진지했다. - P99

문화대혁명은 장식과 복잡함, 수월한 기교를 내세우는 중국 미학에 대해 대부분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의 예술은 지나치게 금욕적이어서 유희적인 감각을 전달하기 어려웠다. 특히 전통 수공예품에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 P100

마오쩌둥주의 예술은 과거를 이상화하여 보는 중국 전통과 확실히 단절했다. 중국의 관념은 고대 황금시대에서 이상을 찾는다는 점에서, 진보에서 이상을 찾으므로 미래가 (지금보다)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서구의 관념과 대조적이다. 이 지점에서 마오쩌둥주의자들은 중국의 전통을 봉건적 가치를 담는 그릇으로 보고 그 무게를 혐오하는 5.4 전통에 동참했다. - P102

마지막으로 문화대혁명 예술이 전통적인 성차별을 거부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많은 작품에 강한 여자 주인공들이 눈에 띄게 등장하는데, 이는 여성을 지도자급 위치에 포괄시키려는 문화대혁명의 노력을 강조했다. - P103

예술 개혁은 정치적 통제 시스템이기도 했다. 이 말은 (중략) 사람들이 온 나라가 참여하는 활동에 자신도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더욱 강하게 가질 수 있도록 예술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104

문화에 대한 마오쩌둥주의적 중앙 통제 덕분에 당 중앙은 국가가 실제 보증할 수 있는 정도보다 훨씬 더 통합되어 있는 것처럼 묘사할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은 인종, 경제, 심지어성별 차이까지 표면적으로 동질화시켰다.(중략) 행정 혼란과 경제 분권화의 결과로 인해 지역마다 특색에 맞게 변형된 문화가 사실상 재등장하고 있었는데, 베이징에서 유입된 시끄럽고 고집스러운 문화가 대중들이 이런 지역 문화에 관심을 쏟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 P107

많은 이들이 정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예술을 포기하기도 했다. 중국의 위대한 두 작가인 첸중수와 선충원은 1949년에 펜을 내려놓았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공개적으로 작품 의뢰를 거부할 수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많은 예술가들은 현실적으로 글이 써지지 않고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처신하는 편이 현실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P113

문화대혁명 이전을 돌이켜보면 문화대혁명은 ‘봉건적‘ 가치의 무거운 짐을 거부하는 급진적 현대화라는 기존의 강력한 ‘5.4의 기획‘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은 보다 극단적인 5.4 운동가들이 주장한 완전한 서구화도 포기했다. 대신 마오쩌둥주의자들은 서구의 기술로 뒷받침되는 중국 민족주의를 배양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문화대혁명은 균질화된 문화 관객층을 중국에 탄생시켰다. 이들은 교훈적인 메시지로 연마되었으며, 지역이나 계급 또는 종족성에 주로 호소하는 틈새시장을 배제하도록 형성되었다. 이후 이 관객층은 상업화된 대중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되었고, 현대화라는 기치 아래 기술혁신에 대한 추구가 계속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문화대혁명이 정치생활에서 지식인의 특권적인 역할을 무너뜨리는 타격을 가했다는 점이다. 이후 시장화라는 쉼없는 망치질은 지식인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켰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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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은 중국 정치에 대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안에는 이상주의, 집단폭력, 음모, 사회적 네트워크, 관료적 일상, 정치범 수용소, 탄원, 선심 정치, 대중연출, 뒷거래, 군사 쿠데타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관행들은 평상시 중국 정치의 통상적인 작동을 과장하고 왜곡한 것이었다. 연극성, 마오쩌둥 숭배, 반란, 규율, 파벌주의는 그 시대의 정치적 복잡성을 보여주는 주제이다. - P52

문화대혁명의 정치는 의식적인 연극성이 강했다. 운동의 주연들은 대중을 앞에 두고 역사라는 무대 위에서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행동했다. - P53

엘리트 정치 측면에서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던 세 사람에게 개인적·정치적 파멸을 초래했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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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 중국공산당은 노동자, 농민, 군인의 덕목을 가장 중요시하는 좌경적 시기와 지식인, 회사원, 상점 주인, 기타 ‘소부르주아‘ 시민까지 확대한 포괄적 개념의 ‘노동 대중(勞動群衆)‘을 강조하는 보수적 시기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마오쩌둥의 당내 경쟁자들이 훨씬 더 절충적인 경제정책을 용인하거나 장려하던 시기에 계급투쟁을 잊지 말라는 요구는 마오쩌둥의 좌경주의를 상징했다. - P27

문화대혁명의 11년간은 일반적으로 일관된 시기로 취급되지만 우리는 이를 서로 매우 다른 두 단계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중략) 중국의 미완의 혁명인 문화대혁명은 대중 동원의 첫 단계에서 마오쩌둥의 경쟁자들을 권력에서 성공적으로 축출했다. 문화대혁명의 두 번째 단계는 1968년부터 1976년까지 지속되었는데, 협상과 무력으로 조반 세력들을 통제하면서 새로운 마오쩌둥주의 질서를 공고히 했다. 혁명 뒤에는 억압이 뒤따랐다. 재조직된 당은 1966년의 반란군을 진압했다. - P31

문화대혁명의 원인에 대해서는 (1) 정치 엘리트 내부의 갈등, (2) 중국 사회 내부의 긴장, (3) 중국의 국제적 위치 등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 P43

문화대혁명이 한창 진행중일 때 마오쩌둥을 혁명 대중을 위해 싸우는 위대한 전사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마오쩌둥 사후, 특히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마오쩌둥은 자신의 이기적인 야망을 위해 혼란의 씨앗을 뿌리는 데 혈안이 된 괴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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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를 전달하는 미디어에는 여러 조건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사람들 대부분이 편리함과 가격만으로 그 미디어의 우열을 정합니다. 그런데 미디어에서 정말로 중요한 요소는 ‘세월과 비바람을 견뎌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와 ‘누구든 원한다면 손수 만들 수 있는가‘, 두 가지가 아닐까요.
그 점에서 인류는 종이책보다 더 나은 것을 아직 발명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 P116

읽고 싶어지면 그때 바로 사서 읽을 수있습니다. 그것이 전자책의 가장 큰 장점이지요. 하지만 저는 책이란 미리 사 두어야만 교화적으로 기능한다고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읽고 싶은 책‘을 사지 않습니다. ‘언젠가 읽어야 할 책‘을 사지요. ‘언젠가 읽어야 할 책‘을 읽고 싶다고 느끼고 읽을 수 있을 만큼의 문해 능력을 갖춘, 언젠가는 충분히 지성적·정서적으로 성숙한 자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모종의 책을 책장에 꽂도록 이끕니다. - P118

그런데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이야기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책을 고르는 것과 비치하는 것에 자신의 지적 정체성이 걸려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지금 읽고 싶은 책‘과 ‘당분간은 읽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언젠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책‘과 ‘읽을 마음은 없지만 내가 읽었다고 사람들이 생각해 주길 바라는 책‘은 같습니다. - P125

책의 본질은 ‘언젠가 읽어야 한다는 관념‘ 위에 있습니다. 출판 문화와 출판 비즈니스는 이 ‘허‘의 수요를 기초로 존립합니다. - P126

책이라는 것은 사유재산이 아니라 공공재입니다. 책은 읽어도 줄지 않고 ‘물건‘으로 독점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책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은 본질적으로 ‘열린‘ 공간입니다. - P129

지속 가능한 공동체의 바탕은 사적 이해利害가 아닙니다. 내가 공동체에 낸 돈과 서비스만큼 ‘보상‘을 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으로는 코뮌이 성립할 수 없지요. 코뮌이 존립하려면 먼저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공공재‘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래서 코뮌의 초기 성립 조건에는 반드시 ‘제 호주머니를 터는 것‘이 포함됩니다.
구성원 전부가 사재의 일부를 내고 개인의 이익 중 일부를 포기해야 비로소 ‘공공‘이 성립합니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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