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정확히는 그제 저녁, 예술의 전당 근처의 우아한 식당에서 부서 회식을 하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자상한 인상의 한 아저씨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바로 황인용 아저씨. 60이 다 되셨거나 넘으셨을 나이지만 소년같은 그 모습이 어찌나 인상적이던지... 멋진 목소리 또한 여전했다. 패션감각도 여전하시고..

나는 싸인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반사적으로 메모지를 찾았고, 내 눈에 띈 것은 근사한 종이로 만든 테이블 위의 한장짜리 메뉴판(정확히는 메뉴판이라기보다 오늘의 특선 메뉴를 적은 종이). 레스토랑분들께는 죄송했지만, 황인용 아저씨 급에게 싸인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드물 뿐더러 조그만 메모지 조각에 싸인을 청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메뉴판의 뒷면을 이용하기로 했다.



(절대 이런 비싼거 먹지 않았다...)

그가 잠시 외부 화장실에 나갔을 때 따라 나갔다가 그가 돌아오자 수줍게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 영팝스때부터 팬이었습니다. 싸인 한장 부탁드립니다."

30대 중반의 한 아자씨가 갑자기 고백과 함께 싸인을 부탁하니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그것도 화장실 앞에서 말이다. 그래도 역시 매너리스트답게 '싸인한지 오래되었다'면서도 정성껏 이름을 묻고 어설프지만 싸인을 해주신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상기된 표정으로 테이블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반응이다. 어쩜 이리 입이 귀에 걸렸다는둥, 그렇게 좋아하느냐는둥. 나는 그들에게 '내 중학교 시절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었던 인물'이라고 적당히 과장이 들어간 말을 건네니 또다시 놀란다.

영혼이 피폐했었던  중학생 시절.  철없어서 행복하기만했던 국민학생 시절을 지나 살벌한 학교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던 그 시절......  좋은 선생에 대한 기억은 커녕 지금껏 제대로 기억나는 선생도 없는 그 암울했던 시절...

나에게 음악이 없었더라면 견디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땐 시대의 대세이기도 했지만 팝송에 푹 빠져버렸고, 빌보드 차트를 외우다시피 했었다. 얼마나 공부를 등한시했으면, 지금은 S대를 나와 모 국가기관에서 잘나가고 있는 한 친구가 당시 내게 주었던 크리스마스 카드에 '제발 팝송 좀 그만 듣고 공부하자'란 덕담이 써있었을까...

가요가 지리멸렬했던 시절, 팝송은 젊은 영혼들의 마음을 후벼팠고, 라디오는 세련된 팝송들의 선율로 넘쳐났다. 그 선봉에 8시 kbs fm 황인용의 영팝스가 있었다.

저녁 8시, 빨간 내 라디오에서 척 맨지오니의 프루겔 혼 연주 'Give It All You Got'이 흘러나오고 곧이어 '황인용의 여엉~ 팝스'가 음악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오프닝을 장식하면, 나는 문을 꼭 닫고 음악세계에 빠져들었다. 공부안하냐는 부모님의 잔소리에 '음악을 듣지 않으면 공부가 안된다'는 지금 생각하면 전혀 근거없는 이론을 들이대며 끝까지 라디오를 놓지 않았다.

그때 들었던 노래들이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지금도 그 시절의 노래들을 들으면 혼자 히죽 미소짓고 하는 것을 보면, 팝을 사랑했던 그 시절이 상당히 즐거웠었나보다.

어제는 예술인들로 보이는 이들과 함께 행사 준비를 위해 모인 것으로 보였다. 더이상 음악 위주의 FM에서 DJ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기는 힘들겠지만, 여전히 음악계, 예술계에 몸을 담고 활동을 하시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다.

얼마전 파주 헤이리에 근사한 카페를 차린 모습을 사진을 통해 봤다. 운이 좋다면 그곳에서 황인용 아저씨가 직접 골라주신 음악을 그의 혼이 담긴 멋지고 근사한 스피커를 통해 들을 수도 있다. 그의 작품 해설을 직접 들으면서 마시는 커피는 얼마나 달콤할까....

어느 홈쇼핑 채널의 조악한 화면에서 제품의 효능을 설명하는 그의 모습을 더이상 보고 싶지는 않다.  풍부한 지식과 좋은 매너, 특유의 재치와 멋진 목소리를 유익하게 활용했으면... 그를 통해 세상에 덜 알려지고 숨어있는 보석과 같은 노래들을 멋들어지게 소개받고 싶다.

 

* 나에게는 추억이 있는 그 시절이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고통의 시간이었겠다. 아직 내가 잠들지 않았으니 오늘은 5월 17일이라고 믿고 싶다. 이 촐싹대고 붕 뜬 글이 18일에 쓴 글이 아니라 생각하니 마음속에 있는 부담은 조금 더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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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inara 2005-05-18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저도 황인용아자씨 좋아아하는데..
요즘 예전의 스타들이 조악한 홈쇼핑 게스트로 나오는거 보면 마음이 짠~~하죠?
돈은 얼마나 받고 하는건지...

날개 2005-05-18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인 받은거 코팅해놔야겠습니다..^^ 축하드려요~

마냐 2005-05-18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촐싹대고 붕 뜬게...정말 좋아요. 님이 좋아서 폴짝거리는 모습이 보이는 거 같아 덩달아 신나잖아요. 추억도 함 꺼내주고...^^

암튼, 뜬금없지만....^^;; 그린야채를 즐겨먹는 현대인들의 고급샐러드....라는 설명은 좀 깨는군요.

엔리꼬 2005-05-18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나라님.... 아마 그 광고가 허리 디스크 제품이었을텐데... 실제로 그 분이 그 제품을 사용해서 나았기 때문에 광고를 하지 않았을까... 그냥 그렇게 생각해버렸습니다.
날개님.. 안그래도 코팅 생각 했었어요.... 감사합니다.
마냐님... 파주에 가면 볼 가능성도 크지만 이렇게 갑작스런 만남이라 더 뜻깊었어요.. 저도 '그린야채를 즐겨먹는 현대인들의 고급샐러드'라는 표현보고 웃긴다고 사람들한테 이야기했어요... 근데 너무 비싸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