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는 예전 회사에 다닐 때 함께 근무했던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이라고 해봤자 두 명. 함께 일했던 여직원들이다.
이 두명의 여직원들은 고졸사원이다. 각각 총무부와 경리부에서 소위 말해 시다바리를 7년에서 11년까지 하고 있는 그런 직원들... (한 명은 나와 동갑이다.) 이전 회사가 보수적인 성향이 있어서 더 그렇겠지만, 그들에게는 승진이란 없다. 10년을 일해도 연봉 2천이 넘지 않는 박봉에 언제 짤릴지 모르는 불안감,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까지.... 이제 그들도 결혼이 그들의 미래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35살이 넘으면 자진 퇴사해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그런 남성중심적 분위기에서 아직까지는 잘 버텼다.
어제 대화 중 회사시절 얘기가 나왔는데, 내가 그들에게 잘 대해줬던 것 같다. 계속 그때가 좋았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하긴 나는 그래도 잘해준 편이었다. 괜히 많이 배운 티도 안내고(배운 것도 없지만), 그들을 인정해 줬고, 무시하지 않았고 잘해주려 애썼고, 구별지으려고 하지 않았다. 회사내 성추행 사건이 있었을 때도 나는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려 했으며 도움주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엔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 직원이 나에게 고마워했던 일이 있었다. 물론 그 성추행(미수)범은 승진하며 아직도 잘 다니고 있다.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면 회사 내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는 고졸 사원(이요원 분)에게 직장 상사, 그것도 대졸 여자 상사가 '야간대학이라도 가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저부가가치 인간으로 남아있을꺼냐' 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 영화를 보면서 회사 여직원들이 생각났었다. 그들은 얼마나 행복한 생활을 해나가고 있을까? 그들의 꿈은 뭘까? 세상에 대한 바램은 무엇이고, 세상에 대한 생각은 어떤 것일까? 하는 그런 질문들... 대졸 여직원들과 고졸 여직원들은 제대로 어울리지 못했다. 서로 다른 곳에서 각자 따로 모인다. 대졸 사원들에게는 약간의 우월감이 있었고, 고졸 여직원들에게는 약간의 패배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요즘 드라마 신입사원을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한 여직원이 결혼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더니 대뜸 자신의 부업 이야기를 한다. 결혼이 나를 구제해줄 것 같지도 않고, 언제까지나 꿈도 없이 암울할 것이 틀림없는 나의 미래를 뻔히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 부업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이른바 네트워크 마케팅. 흔히 다단계 판매에 뛰어든 것이다. 나를 포섭(?)하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줄기차게 1시간이 넘도록 그 회사와 그 꿈을 이룬 사람들, 꿈에 대한 자신의 생각, 제품 소개를 너무나 자신있게 줄줄이 늘어놓는 것이다. 평소의 그와는 다른 모습으로...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은 다단계밖에 없다는 그런 얘기를 계속해서 들었다. 난 그 얘기에 동감했다. 그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고, 충분히 동정했다. 그런데 그 사원의 눈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너무나 슬펐다. 세상이 참 당신을 힘들게 하는구나... 싶었다.
다단계를 통해서 큰 돈을 번 사람들을 소개하며 너무나 부러워했고, 자신의 미래를 풍요롭게 가꾸는 것에 대한 열망이 대단히 컸으며, 현 상황에 대한 절박감이 느껴졌다. 심지어 제품을 사용하면서 너무 좋아서 '감동'한다고도 할만큼 제품에 대해서 굳건히 신뢰하고 있었다.
1시간여 강의를 듣고, 나는 큰 관심이 없어 회원가입은 하지 않고, 소비자로 남겠다, 도와주겠다고만 했다. 그 절박하게 떨리는 음성을 들으며 하나도 사지 않겠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동안 다단계에 대해서 색안경을 쓰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고 하는데 그 모습이 추해보이거나 거부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러한 꿈도 가지지 말라고 할 권리가 나에게는 없다.
다만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경직되거나 앞도 못보고 지나치게 물신주의에 빠지거나 지난 과거의 좋았던 기억마저 흐리는 그런 모습만은 없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아무튼 1년만에 만난 작은 모임은 그렇게 끝났다. 찻집을 나와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도중에도 계속되는 다단계 이야기에 당황은 했지만 끝까지 이해하려고 애썼고, 미소로 대답했다. 하지만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헤어질 때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여전히 그들을 믿고 있고, 분명히 변한 모습이지만 실망하지 않고 웃으려 했지만 왠지 모를 씁쓸함이 남아 있음은 부인할 수 없었다.
HS씨, YH씨 ! 잘 살아야 해 ! 그리고 사람사이에 필요한 중요한 원칙만은 우리 잊지 말고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