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 브이를 봤다.


요즘 아이들은 20년 뒤에 자신들의 초등학교 시절을 생각할 때 어떤 문화 아이콘들이 생각날지 궁금하지만, 우리 세대에서는 태권 브이가 어린 시절의 좋은 추억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짧고도 강력하고도 인상적인 인트로 부분이 멋진 최호섭의 주제가 또한 멋지지 않은가? 머리가 지나치게 커버린 요즘의 초등학생들에겐 멋도 없는 로봇일지 모르지만 아직 5살밖에 되지 않은 우리 아들에겐 최고의 볼거리였던 모양이다.


30년만에 복원되었다는 태권브이를 보고 난 후 느낌 몇 가지


1. 그 당시는 흡연에 대해서 아주 관대했던 사회였나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멋지고 한국을 대표하는 과학인으로 연출되는 태권브이의 조종사 훈의 아버지 김박사는 검정색 파이프를 엄청 멋있는 폼으로 피운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악의 무리에 대항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 모인 국제회의 석상에 각 국 대표의 책상위에 보이는 것은 볼펜, 종이 그리고 재떨이 이렇게 세 가지다. 영화 넘버 3에서 박상면이 다른 용도로 사용했던 모양과 색깔이 동일한 유리로 된 울퉁불퉁한 재떨이. 디테일 묘사가 상당히 떨어지는 당시 애니메이션 수준으로 볼 때 재떨이의 묘사는 그 당시의 흡연 문화가 보편적이다 못해 필수적임을 보여준다.


2. 훈이가 인조인간 메리에게 보내는 한 마디의 말이 나를 웃겼다. 훈이는 아시다시피 로봇 태권브이의 미혼 조종사.(훈이의 목소리는 놀랍게도 중견 탤런트 ‘김영옥’씨란다.) 메리는 세계적인 물리학자이나 우스꽝스러운 외모를 가진 카프 박사의 미혼의 딸. 메리는 알고 보니 카프 박사가 만든 인조인간. 인조인간 메리는 김박사를 암살하고 설계도를 빼앗는 과정에 개입하지만, 이후에는 착한 인조인간으로 변신해 납치되었던 또 다른 박사의 탈출을 돕는다. 아무튼 메리가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나도 인간이 되고 싶다고 훈이에게 털어놓자 훈이가 대답이랍시고 하는 말 “마음을 착하게 먹으면 너도 인간이 될 수 있어.” 세계적 과학자의 아들 입에서 나온 이런 비과학적인 답변이라니. 아무리 관람대상이 어린이라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는가?

차라리 “인간의 탈을 쓴 늑대들도 많은데, 너처럼 어여쁜 마음을 가진 인조인간들만 지구에 존재한다면 우리 지구는 평화로울 것이야.” 라는 멘트를 날렸더라면.


3. 카프 박사가 지구를 파괴시키는 불한당으로 변한 다음 지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로봇 기지를 건설하는데, 기지가 있는 곳은 바로 이집트의 피라미드. 이집트 피라미드로 가서 로봇들을 가볍게 상대한 후 숨어 있는 피라미드 기지를 폭파한다. 메리가 자폭했는지 로봇태권브이가 파괴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어제 봤는데-.-;) 말이다.

어쨌든 인류 최고의 건축물인 피라미드를 이렇게 파괴한다는 설정에서 인류문화유산 지키기에 대한 개념이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0년대 먹고 살기도 힘든 박정희 시절. 경제 발전과 개발이란 미명 아래 우리 강산과 유산들이 스러져가는 것도 느끼지 못했던 그 시절의 우리 의식을 반영하는게 아닐까?

자폭한 인조인간 메리의 심장부품을 발견하고 안타까워하지만, 피라미드라는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이 자의건 타의건 파괴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만화영화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물론 카프 박사 일당을 없애는 것이 더 많은 문화유산이나 재산을 파괴하는 것을 예방할 수는 있었겠지만, (내가 보기에) 별로 위협스럽지 않은 카프 박사일당을 밖으로 유인하여 섬멸한 후 전진기지로 개조된 피라미드를 다시 복원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어쩌면 피라미드까지도 그들의 기지로 써버리는 극악무도한 악당이란 것을 알리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을까? 내가 감독이라면 차라리 피라미드를 만화 속에 등장시키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4. 악의 무리들의 마스코트는 붉은 별. 머리에까지 붙어있던 붉은 별은 혹시 당시 소련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걸핏하면 이슬람 세력을 영화 속 적으로 묘사하는 정치성 농후한 요즘의 헐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외모 콤플렉스라는 개인적 이유로 악당이 되는 과정을 묘사한 태권브이는 당시로서는 대단한 정치적 중립성이라고 봐도 좋을까? 적국의 지도자를 살찐 갈비를 무지하게 먹어대던 돼지로, 그의 인민군대를 따발총 쏘는 늑대로 묘사했던 똘이장군이라는 불량만화도 있었으니 말이다.


역시 머리가 크면 세상이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초등학교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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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7-01-22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벌써 보셨군요. 저도 보고싶어요. 그런데 어째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열심히 예매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ㅎㅎㅎ

Mephistopheles 2007-01-22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흐...태권브이..^^ 혹자는 마징가 Z의 아류작이라고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조종방법은 좀 틀리답니다.물론 보이스 인식 무기발사체계는 비슷하긴 하지만 주인공 철이의 태권 품새는 100% 인식가능 시스템으로 완벽한 동작구현을 보여주고 있다지요..^^ 단지 무기체계가 마징가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죠..나중에 나온 84태권V는 좀 심할 정도로 일본만화 "잠보트"에 나오는 메카닉 몸체에 머리만 태권V로 바꾼 만행을 저질렀던 기억도 나는군요..^^

엔리꼬 2007-01-23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당근 아이들은 재미없어할지도 몰라요 5-6살 정도만 되어야 몰입할 정도의 분위기입니다..
메피스토님.. 그렇죠.. 인간과 기계의 혼연일체라는 점이 독창적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잠보트라는 첨 듣는 로보트도 아시고,, 여러모로 고수시네요.. 부산 시민회관에서 했던 슈퍼태권V도 봤던 기억이 나네요. 엥 그땐 중학생이었네?

2007-01-23 2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엔리꼬 2007-01-24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마치 38선 넘어 접선하러 온 간첩같다고 느낌을 말씀드리면 실례겠지요? 아, 그리고 감사합니다. 송구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