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을 팝니다 - 사회학자의 오롯한 일인 생활법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아는 한 고령자 커뮤니티에서는 자기소개를 할 때 과거의 직업이나 경력 같은 것은 이야기하지 않고 또 묻지도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다. 모든 이가 이미 현역에서 물러난 사람들이다. "바깥세상에서는 어떤 분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곳에서는 모두가 이름 없는 사람이다.

자기소개 대신 현재 열중하는 취미에 관해 이야기한다. "유화를 그리고 있어요." "아마추어 오페라 서클에 가입한 후로는 일 년에 한 번 있는 공연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어요," "도예를 하고 싶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친해지면 더 이상 취미나 특기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우에노 씨 그건 말이죠, 구실을 만들기 위한 취미이기 때문이에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아니에요."라고 가르쳐준 고령 친구가 있다. 그 말이 내 안에서 깊게 울렸다.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도 직함이나 지위로는 잴 수 없는 그 사람의 모습, 행동, 말투, 움직이는 방식...... 결국 그 사람의 풍채가 그 사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은 그러한 풍채가 훌륭한 사람인 것이고, 다시 만나 사람을 함께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 역시 그런 좋은 느낌을 주는 이들이다.

타인을 볼 때...... 우리는 그 사람이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를 기준으로 '무엇무엇을 한 누구누구'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나 자신도 종종 '무엇무엇을 한 우에노 씨' 같은 눈길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 사귀는 것은 그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 그리고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인품이다.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함께 있는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이와는 식탁을 같이하고 싶지 않다. 과거의 지위나 실적이 현재 이곳에서의 무례함과 오만함을 면죄하지 않는다.

그의 풍채를 통해 그 사람이 과거에 헤쳐온 전쟁과 수많은 고뇌를 추측해본다. 자세히 묻지는 않지만, 이러하고 저러한 일이 있은 결과로 그 사람의 '지금'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느낀다. 그리고 문득, 그때 당시에 만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감개가 스친다. 경험과 시간으로 단련된, 닳고 닳은 가죽 수첩의 표지처럼 둔한 광택을 띤 채로 그 사람이 내 눈앞에 있다. 나는 다만 그것을 마음껏 향유하기만 하면 된다.

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가! (217-218)






한 박사님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외국인이지만 한국에서 오랜 생활을 해서 한국어를 아주 잘 하는. 아무래도 일이 일이니만큼 그 역시 한국의 대학에 업을 두고 있는 입장이지만 제일 싫은 건 역시 개저씨들. 이라고 해서 까닭을 물었다. 다 설명충들이야. 같이 모여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들은 빵 터졌다. 뜬금포로 스승은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물어보니 여든이 가까워오는 이들 중에 그렇게 오래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귀기울여 듣는 이는 처음이었어. 아니다, 여든이라는 나이와 무관하게 나이라는 제한선을 없애고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그토록 잘 들어주는 이는 처음이었어, 라는 말에 또 다들 침묵하면서 고개를 끄덕끄덕. 함께 하는 동안에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고 배려하지 못한다는 문장에 밑줄. 다시 보고 싶다, 다시 함께 만나 커피를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싶다, 다시 만나 눈을 맞추고 싶다, 다시 만나 그 목소리를 듣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들게 하는 이들은 세상에 그다지 많지 않다. 이런 시간들이 서로에 대한 이해와 오해와 더불어 쌓이고 쌓여 친분이 다져지고 관계가 형성된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과는 함께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언제 어디에서나 만나는 그 누구일지라도. 경계를 정해 딱딱하고 차갑게 대하는 것도 별로지만 지나치게 살갑게 다가와 혀에 꿀을 바르고 당장 집어삼킬듯이 구는 인위적인 다정함도 구역질을 일으키게 만든다. 사는 일은 쉽지 않고 사람을 사귀는 일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책 속으로만 파고드는 것도 별로인 건 마찬가지. 책이 아무리 흥미롭고 좋다 해도 사람이 줄 수 있는 걸 책이 줄 수는 없다. 까다롭군. 며칠 전 술자리에서 곧 환갑을 맞이하는 언니가 이제 모든 게 끝나버린 것만 같아, 몸도 마음도, 곧 정년인데, 라는 말을 해서 다들 아니야, 아니야, 이제 시작이야, 라면서 응원을 하며 그녀의 다음 행보를 듣고싶어 했다. 언니는 부끄러워하면서 이런 걸 하고 싶고 저런 걸 계획하고 있고 또 이런 걸 하려고 해, 라고 주저하며 이야기를 하다가 신나서 말을 이어갔다. 우에노를 읽는 동안 주변의 많은 이들이 떠올랐다. 더불어 소소한 이야기들도 기억에 남는 건 꼭 남기도록 하자, 이 마음도. 무례하지 않은 인간이 되도록 하자. 다른 이들에게도, 그리고 이 지구에게도.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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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4-15 13: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드는 생각 중에 나이가 들수록 어려운게 ‘타인에게 무례하지 않기‘라는 생각을 좀 많이 하게 됩니다. 젋을 때는 농담으로 넘어가 지거나 좀 튀지만 귀엽네라거나 이런 식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이 모두 나이가 들면 무례함이 될수 있더라구요. 항상 조심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지만 나는 너가 아니니 상대가 저의 말에 어떻게 느끼는지는 사실 알 수 없는거잖아요. 이래서 나이가 들면 사람을 새로 만나는게 쉽지 않구나하기도 합니다.

수이 2026-04-15 20:30   좋아요 2 | URL
음 우에노 지즈코 언니의 말씀은 좀 다른 방향으로 다가왔어요. 흥미로운 사람들은 정말 많고 다정하고 예의 바른 이들도 많아 새롭게 친구를 사귀는 일은 언제나 즐겁기만 하다_라는 주장. 나이가 들면 그만큼 세상 보는 눈도 드넓어지고 깊이도 생기고 그래서. 의도치 않게 무례하게 구는 경우는 여러 가지로 생기는 거 같아요.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하지만 그 의도가 무관하게 무례함이 느껴지는 경우라면 거리를 두는 게 옳다고 여겨요. 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니까요. 언니 말씀을 듣고 보니 생각나는 에피소드 하나. 진실한 친구, 참된 우정이라고 여기면서 오랜 시간 알고 지낸 남자사람친구가 있었어요. 이혼을 하고난 후 외국에 있는 남자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날인가 아 기다리는 일은 정말 지루하고 비참해, 라고 투덜거렸어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나랑 연애 하자, 그 남자 오기 전에, 그리고 너만 좋다면 난 무관하니 걔랑도 연애하고 나랑도 하자, 라고 하더군요. 그때 느낀 수치와 모욕감이 핏줄을 타고 끓어올랐어요. 그리고 조용히 그 친구에게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하고 조용히 절연했어요. 무례하구나, 참으로. 라는 생각과 더불어 우리의 20년 넘는 우정이 이런 식으로 파탄이 난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어요. 시간이 얼추 흐르고보니 자유롭게 사랑을 하고 싶었나 보다, 라고 넘겼지만 무례한 인간, 이라는 생각은 변함없어요. 저도 인간인 지라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무례하게 군 경우도 잦았을 거 같아서 반성하면서 좀 예의를 지키며 사람들과 친해지도록 하자 그런 다짐을 했습니다!

잉크냄새 2026-04-15 2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국 남성들이 은퇴 후 무너지는 건 명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문화 심리학자의 말이 떠오르네요.

수이 2026-04-15 20:36   좋아요 2 | URL
다른 문화가 새롭게 생기지 않을까요? 그들이 위기 의식을 느낀다면 또 다른 방향으로 생산적인 길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명함 없이 서로가 서로를 마주할 때 동등한 입장에서 주고받을 것들이 있다면요. 계급장 떼고 함께 할 것들이 많아지면 또 다른 교류의 장이 생기지 않을까 합니다.

책읽는나무 2026-04-16 07: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무엇을 하는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인 내가 중요하다!
오늘의 깨달음이군요.
저는 어떤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에(돈을 버는 일?) 약간의 죄책감? 그런 게 좀 있어요. 주변사람들의 반응이 늘 그래왔어서 어느순간 나를 소개할 때 좀 부끄러워하면서 전업주부라고 말하곤 하죠. 이게 참 잘못된 생각인 줄 알면서도 왠지 나의 무능력함을 드러내는 듯한 생각도 들거든요. 근데 또 나 또한 타인을 대할 때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 사람인지가 궁금해하고 있으니….참🙄🥹
암튼 그래서인지 우에노 지즈코의 말들이 많이 와닿네요.^^
무례함에 대한 정의를 떠올리면서 어제 밖에 나가 나눈 대화 중 불쑥 내뱉었던 나의 말에 상대방의 놀란 눈을 바라보며 내가 실수했군! 하고 돌아왔었는데 그건 실수가 아니라 무례함이었구나! 깨달았네요.
이렇게 또 하나의 깨달음을 알려주시니 경지에 이르고 계신 게 맞아요.ㅋㅋㅋ

수이 2026-04-16 07:24   좋아요 2 | URL
이게 참 애매한 거 같긴 해요.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의를 갖춰 서로를 대하잖아요. 그런데 서로 알아갈수록 실수나 무례를 저지를 확률이 높아지고. 하지만 그런 걸 하나하나 따지다가는 하고싶은 말은 하나도 못할 것도 같고 사는 건 역시 쉽지 않군 깨닫습니다. 언니가 경제적 활동을 하지 않으시는 거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 활동의 가치를 경제적인 걸로 환산해야 한다는 실비아 언니 이야기는 진실로 옳구나 여겨요. 전혀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경제적으로 환산하자면 언니는 억대 연봉을 받으셔야 합니다. 우에노 언니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아무리 억대 연봉을 받고 수십억을 벌어도 계급장(잉크냄새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명함)을 떼고난 후에는 모두 동등한 인간들이니까 경제적인 건 그냥 부수적인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왔다갔다 합니다. 계급장이 있건 없건 경제적인 능력이 뛰어나건 낮건 무관하게 있는 그대로 서로에게 예의 바르게 대하는 건 필요한 일. 오늘은 무례를 좀 덜 범하면서 살아가면 좋겠지만;;; 늦잠 자서 이제 밥 먹어요. 오늘도 좋은 날! :)

단발머리 2026-04-16 2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전의 일들, 과거의 직업, 경력을 모두 떼어놓고 이야기할 때, 높고 귀하고(?) 화려했던 일을 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이 당황스러울 것 같네요. 그러니깐 그런 계급장을 모두 떼고 이야기하자 했을 때, 명찰이나 감투나 이런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느끼는 ‘당연함‘이 그들에게는 황당함이 될 수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무례하지 않으면서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게 좋을 거 같긴 해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가 중요하긴 하죠. 그래도 가끔 금을 밟으면서 해주는 조언이 사랑을 담고 있다면 그것도 나름 괜찮기는 한데.... 그걸 판단할 사람은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니깐요.
사람의 일이란.... 참 어려운 일이 맞네요.

수이 2026-04-23 08:04   좋아요 0 | URL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 감투 그러니까 계급장이 그들에게는 전부일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데 그 전부를 순식간에 날려버릴 수 있는 수치스러운 일을 왜 양심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까? 그 생각을 잠깐씩 하곤 합니다. 저 역시 그 좋은 명찰이나 감투에 대한 욕망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걸 빌미로 악을 자행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면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을 거 같아요. 무례하지 않으면서 다정한 태도를 어리석게 보면서 마구 비웃은 까닭도 알 수 있겠고. 아침입니다. 태양 앞에서 떳떳한 인간이 되기란 역시 쉬운 일은 아닌건가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출근 잘 해요!
 







1943년에 태어난 엘케와 1948년에 태어난 우에노의 글을 번갈아 읽는 동안 얼음이 들어간 커피를 마시고 싶어 갈등하다가 뜨거운 물을 끓여 커피알갱이를 녹여 검은색 물로 만든 후 희가 만들어준 마들렌을 입 속에 넣어보았다. 너무 맛있다. 산책을 하는 동안 희가 한 이야기를 더듬고 있다. 아사나를 행하는 동안 아무래도 아상을 벗어던지고 수행을 하는 입장이니까 욕망도 버려야 하고 자연스럽게 여성화되지 않을까, 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나 보다. 그녀가 말한 여성화와 억압에 대해서. 아사나를 행하는 동안 나는 철저하게 한 마리 짐승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인간이 되려고 무진장 애를 쓰는 한 마리 짐승이로구나 하는 마음. 물론 이건 내 집중력이 얕디 얕아서 더 그러한 걸 수도 있겠지만. 이번 여름에는 좀 더 많은 것들을 알아가겠구나. 어깨 가동성이 서서히 넓어지고 있다. 욕심을 내서 무리를 해서 조금 더 가볍게 뒤로 보내고 싶지만 그 전에 멈춘다. 무조건 호흡이 먼저다. 호흡이 거칠어지면 거기에서 한 호흡만 더 가보고 고통이 느껴져서 숨을 쉬지 못하겠으면 오늘은 딱 거기까지야, 라는 스승의 말을 몸 안에 문신처럼 새겨놓는다. 경계를 명확하게 가로지르지 않아도 되는구나, 이 사실을 우에노 언니 에세이를 읽는 동안 확연히 깨닫게 된다. 역시 이 정도로 싸돌아다니는 건 좋은 일이로구나, 경계 없이. 라고나 할까. 봄이라서 그런지 '억누를 수 없는 생명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살아라 5월은 푸르른 바람의 색깔 - 준로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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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6-04-14 2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아~~ 우에노 책을 이렇게 주르르.... 우에노 읽기, 이렇게 이름 붙여도 될 거 같아요.
저는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를 찜콩합니다.

수이 2026-04-15 09:19   좋아요 1 | URL
언니의 에세이는 또 에세이대로 즐겁고 잼나서 시간이 휙휙 지나가더군요. 저는 이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로 ^_________^;;;;

단발머리 2026-04-15 09:24   좋아요 1 | URL
😋😜😘🥳😎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서 하우스메이드 3권을 슬렁슬렁 좀 읽고 일디코 엔예디 감독의 [침묵의 친구]를 보고 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몸이 정화되어가는 느낌은 오랜만인지라 옆에 앉은 사람이 좀이 쑤셔 어쩔 줄 모르겠다는듯 계속 몸을 움직였음에도 짜증내지 않았다. 다만 에티켓은 그 나이 정도면 좀 지켜주면 좋겠다. 불이 켜지고 보니 얼추 마흔은 넘어보이던데. 젊은이들은 거의 없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년들과 중장년층이 대개였다. 씨네키드로 보이는 젊은이들 서넛 정도만 보였고. 만일 내가 그 나이에 그러니까 십대나 이십대여서 뭐 삼십대라고 해도 좋으니 그때 이 영화를 봤다면 얼마나 이 모든 것들을 최대한 흡수하려고 했을까 그건 모르겠다. 나이가 드니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받아들여지는 건 이런 거구나 다시 오늘 경험으로 느꼈다. 나이 많은 게 삶에 있어서 독이 된다고 여기면 그쪽만 보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젊어지려고 하는 것도 같고. 사이보그가 아니니까 아무리 젊어지고싶어 발악을 하며 운동을 하고 몸에 좋은 것들만 먹는다고 해도 찰나가 오면 모든 것들이 멈추기 마련이다. 영화를 보고 돌아와 집에 있는 초록이들 모두에게 그리고 내 껌딱지 고양이에게 눈을 맞춰주며 사랑을 속삭였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러니까 그 현상들에 대해서. 마음길이라는 게 눈에 훤하게 보여서 오고가는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고 그렇다면 그걸 알고 싶다, 보고 싶다, 알리고 싶다, 보여주고 싶다. 아유르베다를 읽던 와중에 각 도샤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고 그런 게 꽤 중요한데 그걸 자꾸 거스르려고 하는 현상들이 발생해서 문제가 발생하고 오해의 소지가 생겨 질병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물론 아직 배우는 입장이니 섣불리 해석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가는 와중에 궁금한 것들이 있으면 궁금한 것들이 있는대로 호기심이 생기면 호기심이 있는 그대로 물어보는 것이 더 좋다. 시대는 다르고 등장하는 인물들도 모두 다 다르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수많은 시간을 보낸다. 은행나무가 그 중심에 자리하고 그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이들.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존재에게 기대면서 내 마음을 알아달라거나 내게 사랑을 달라는 요구도 집착도 없이 그저 기대고 있다가 아 이건 뭐지 싶어 고개를 들어 찬란한 나뭇잎을 바라볼 때. 1832년부터 코로나가 한창 유행한 2020년까지. 그러니까 약 200여년을 살아온 거대한 나무와 접점을 가졌던 세 명의 인물들 이야기. 일흔이 넘은 노감독이 보여주고자 한 게 뭘까? 슬픔도 고통도 없이 전혀 다른 종인 인간과 식물이라는 두 존재가 서로를 발견했을 때 그 기쁨과 그 온전한 일체감에 대해서. 양조위 오빠가 나체로 등장해서 순간 깜놀했다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의 인간과 역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이니 이런 식으로 그려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서로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인간관계도 흔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차단하는가 하면 그러지도 않아. 오해와 이해가 뒤섞여 엮어나가는 흐름도 좋았다. 적이 친구가 되었다가 친구가 적이 되는 게 인간사에 왜 자주 일어나는지. 이해가지 않던 부분도 다시 보면 이해가 살짝 될 수도. 누군가의 어릿광대가 될 필요는 없다. 영화 다 보고 해 쨍쨍할 때 신나서 걷는 동안.














개봉하게 되면 시간이 날 적마다 두 번 더 보러 가기로 했다. 태양이 아스팔트를 들끓게 만들기 전까지는 그래도 상영하지 않을까 싶다. 보는 동안 요가 풀로 연달아 세 시간 정도 한 느낌과 비슷한 충만감을 얻었다. 함께 요가를 하는 도반님 한 분이 우리중에 제일 아상이 강해, 라고 말했다. 여기 모인 이들 중에 아상이 강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반문하니 그래도 그대가 제일 강해, 라고 이야기해서 웃겨서 나만큼 그대도 강하잖아, 라고 말하니 아니야. 제일 쎄. 아상의 퀸이야, 라고 말했다. 그럼 어디 이 아상의 퀸이 아상으로 해탈을 해보도록 하지, 라고 말했더니 도반님이 막 웃었다. 우리가 처음 만나 서로 어색해하며 반갑습니다, 눈맞춤을 한 게 불과 1년 전이거늘 땀범벅에 머리는 산발을 하고 서로에게 아상이 너무 강해서 해탈하기 글렀어 쯧쯧, 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웃겼다. 스승들이 들으면 꼴값들 한다, 라고 하시겠군 속으로 생각했다. 에너지의 흐름에 대해서도 자주 이야기를 주고받곤 하는데 왜 난 그 선생님 아사나를 들어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지 모르겠어요, 해서 그걸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직접 물어보니 그건 그냥 흐름인데 어떻게 설명을 하나, 라는 들으나 마나 한 대답을 들었다. 영화 장면들 장면들마다 임레 케르테스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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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4-13 22: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해탈의 경지에 이르셨나이까?
아상이 강하다고 해도 왠지 해탈의 경지에 이르셨을 듯한 느낌이 팍 오네요.ㅋㅋㅋ

수이 2026-04-14 10:33   좋아요 2 | URL
제 나이 쉰이니까 해탈까지 다다르려면 앞으로 1500년 정도 더 살아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죽고 다시 태어나고 또 죽고 또 태어나고 이런 걸 몇 번 해야.....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순간 알았습니다. 그런 날은 오지 않겠군 이 사실을 ㅋㅋ
 
The Housemaid Is Watching (Paperback)
Anonymous / Poisoned Pen Press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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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이 보는 것이 진실되다고 느끼는 편협한 존재이다. 보이는 그대로가 모두 사실이니 진실되다고 느끼는 것이고 잃어가는 것들은 늘어간다. 하여 인간이 왜 두 눈을 가지고 있는지 하여 제3의 눈이 왜 필요한지 그걸 다시 한번 알게 됐다. 삶에서 정말로 필요한 것들은 무형무색의 것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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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4-12 2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직 3권은 읽어보질 못했는데 제3의 눈이라….수이 님의 백자평을 읽으니 뭔가 막 상상이 되는 것 같아요.^^

수이 2026-04-12 21:52   좋아요 2 | URL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들을 우선적으로 보게 되는구나, 이걸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느꼈어요. 보이지 않는 너머에서 거대한 흐름이 일어나는데도 그저 편협되게. 밀리는 막판에 흐름을 바꾸는 역할이 탁월하구만, 이것도 또 ^^

단발머리 2026-04-12 2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이님 백자평이랑 이 책의 표지가 아주 딱이네요. 자신이 본 게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머리 속으로는 아는데, 자신의 경우에 대입하기는 어려울 거 같아요. 영원히.... 인간은 어느 정도 가려진 세계만을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진실의 단면만...

수이 2026-04-12 21:54   좋아요 1 | URL
진실의 단면만 알아야 다치지 않으니까 혹은 비교적 편하게 살 수 있으니까 그런 것도 같아요. 가려진 세계만 보고 살아가기에는 너무 호기심이 많아서 좀이 쑤실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말 부분 혈압 올라서 뒷목 잡고 읽었습니다.
 
갱년기 요가 - 한 권으로 완성하는 갱년기 리셋 솔루션
산토시마 가오리 지음, 한귀숙 옮김 / 버터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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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스승 왈, ˝쓰지 않으면 잃는 법˝이라며 스퀏을 꼭 하라고 강요하셨다고. 내 스승 왈, ˝인간은 백만불짜리 몸을 갖고 있지만 그 몸의 가치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갱년기 맞춰 테크닉에 대한 정보 좀 얻고자 했고 소소하게 몇 가지 얻어서 간다. 몸은 애초에 공존하기 위해 있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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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1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26-04-12 20:33   좋아요 2 | URL
하하하 정말 비슷하게 들리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