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을 팝니다 - 사회학자의 오롯한 일인 생활법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아는 한 고령자 커뮤니티에서는 자기소개를 할 때 과거의 직업이나 경력 같은 것은 이야기하지 않고 또 묻지도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다. 모든 이가 이미 현역에서 물러난 사람들이다. "바깥세상에서는 어떤 분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곳에서는 모두가 이름 없는 사람이다.

자기소개 대신 현재 열중하는 취미에 관해 이야기한다. "유화를 그리고 있어요." "아마추어 오페라 서클에 가입한 후로는 일 년에 한 번 있는 공연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어요," "도예를 하고 싶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친해지면 더 이상 취미나 특기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우에노 씨 그건 말이죠, 구실을 만들기 위한 취미이기 때문이에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아니에요."라고 가르쳐준 고령 친구가 있다. 그 말이 내 안에서 깊게 울렸다.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도 직함이나 지위로는 잴 수 없는 그 사람의 모습, 행동, 말투, 움직이는 방식...... 결국 그 사람의 풍채가 그 사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은 그러한 풍채가 훌륭한 사람인 것이고, 다시 만나 사람을 함께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 역시 그런 좋은 느낌을 주는 이들이다.

타인을 볼 때...... 우리는 그 사람이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를 기준으로 '무엇무엇을 한 누구누구'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나 자신도 종종 '무엇무엇을 한 우에노 씨' 같은 눈길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 사귀는 것은 그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 그리고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인품이다.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함께 있는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이와는 식탁을 같이하고 싶지 않다. 과거의 지위나 실적이 현재 이곳에서의 무례함과 오만함을 면죄하지 않는다.

그의 풍채를 통해 그 사람이 과거에 헤쳐온 전쟁과 수많은 고뇌를 추측해본다. 자세히 묻지는 않지만, 이러하고 저러한 일이 있은 결과로 그 사람의 '지금'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느낀다. 그리고 문득, 그때 당시에 만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감개가 스친다. 경험과 시간으로 단련된, 닳고 닳은 가죽 수첩의 표지처럼 둔한 광택을 띤 채로 그 사람이 내 눈앞에 있다. 나는 다만 그것을 마음껏 향유하기만 하면 된다.

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가! (217-218)






한 박사님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외국인이지만 한국에서 오랜 생활을 해서 한국어를 아주 잘 하는. 아무래도 일이 일이니만큼 그 역시 한국의 대학에 업을 두고 있는 입장이지만 제일 싫은 건 역시 개저씨들. 이라고 해서 까닭을 물었다. 다 설명충들이야. 같이 모여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들은 빵 터졌다. 뜬금포로 스승은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물어보니 여든이 가까워오는 이들 중에 그렇게 오래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귀기울여 듣는 이는 처음이었어. 아니다, 여든이라는 나이와 무관하게 나이라는 제한선을 없애고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그토록 잘 들어주는 이는 처음이었어, 라는 말에 또 다들 침묵하면서 고개를 끄덕끄덕. 함께 하는 동안에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고 배려하지 못한다는 문장에 밑줄. 다시 보고 싶다, 다시 함께 만나 커피를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싶다, 다시 만나 눈을 맞추고 싶다, 다시 만나 그 목소리를 듣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들게 하는 이들은 세상에 그다지 많지 않다. 이런 시간들이 서로에 대한 이해와 오해와 더불어 쌓이고 쌓여 친분이 다져지고 관계가 형성된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과는 함께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언제 어디에서나 만나는 그 누구일지라도. 경계를 정해 딱딱하고 차갑게 대하는 것도 별로지만 지나치게 살갑게 다가와 혀에 꿀을 바르고 당장 집어삼킬듯이 구는 인위적인 다정함도 구역질을 일으키게 만든다. 사는 일은 쉽지 않고 사람을 사귀는 일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책 속으로만 파고드는 것도 별로인 건 마찬가지. 책이 아무리 흥미롭고 좋다 해도 사람이 줄 수 있는 걸 책이 줄 수는 없다. 까다롭군. 며칠 전 술자리에서 곧 환갑을 맞이하는 언니가 이제 모든 게 끝나버린 것만 같아, 몸도 마음도, 곧 정년인데, 라는 말을 해서 다들 아니야, 아니야, 이제 시작이야, 라면서 응원을 하며 그녀의 다음 행보를 듣고싶어 했다. 언니는 부끄러워하면서 이런 걸 하고 싶고 저런 걸 계획하고 있고 또 이런 걸 하려고 해, 라고 주저하며 이야기를 하다가 신나서 말을 이어갔다. 우에노를 읽는 동안 주변의 많은 이들이 떠올랐다. 더불어 소소한 이야기들도 기억에 남는 건 꼭 남기도록 하자, 이 마음도. 무례하지 않은 인간이 되도록 하자. 다른 이들에게도, 그리고 이 지구에게도.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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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4-15 1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드는 생각 중에 나이가 들수록 어려운게 ‘타인에게 무례하지 않기‘라는 생각을 좀 많이 하게 됩니다. 젋을 때는 농담으로 넘어가 지거나 좀 튀지만 귀엽네라거나 이런 식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이 모두 나이가 들면 무례함이 될수 있더라구요. 항상 조심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지만 나는 너가 아니니 상대가 저의 말에 어떻게 느끼는지는 사실 알 수 없는거잖아요. 이래서 나이가 들면 사람을 새로 만나는게 쉽지 않구나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