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평범한 사람들 (증보판) - 101예비경찰대대와 유대인 학살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 지음, 이진모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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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철학의 개념 중에서 '성선설'과 '성악설' 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착하게 태어난다는 것이 성선설이고 태어날 때부터 악하게 태어난다는 것이 성악설이다. 천사 같은 아기의 얼굴을 보면 어떻게 성악설을 주장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오랫동안 성선설을 믿어왔다. 그러나 최근 촉법 소년 사건에서 보듯이 어리다고 마냥 착한 것이 아니라 어른 못지 않게 사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그 신념이 흔들리고 있다.


사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처신을 잘 한다기 보다는 그러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정도 이상으로 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도 자기와 가까운 사람에게는 한없이 착하고 다정한 사람인데 자기와 덜 친하면 사람이 바뀌는 것이다.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 양심이 있나 없나 할 정도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제법 볼 수 있는데 그런 것을 보면 진짜 인간은 원래 악한 존재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악한 사람을 욕하기는 오히려 쉽다. 그러나 평소 좋은 모습을 보이다가 특정한 순간에만 악마의 모습을 보인다면 사람들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가 나쁜 사람이 맞는가 나한테는 그 나쁜 면을 숨겼을까. 문제는 숨긴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일 경우다. 평소 주위에 친절하다고 소문난 사람이 어떤 경우에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할 때 두 모습 모두 그 사람의 본 모습인 것이다. 이 책은 그런 평범한 사람들에게 생각지도 않았던 평범한 악의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수 많은 학살이 있어왔지만 제 2차 세계 대전의 '홀로코스트'와 같은 유대인 대량 집단 학살은 없었다. 사실 유럽에서 크리스트교가 확립이 된 이후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민족이라는 오명을 쓴 유대인에 대한 혐오는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그 강도가 덜하고 더하고의 차이일 뿐 유대인을 멸시하는 감정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는데 홀로코스트도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주장이 있어왔다. 그러나 유대인 혐오 사상이 오랫동안 있어왔다고 해서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에는 의문이 따른다. 분명 유대인 옹호자보다는 혐오자가 많았을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별 다른 감정이 없었을 것이다. 


나치의 히틀러가 홀로코스트의 결정권자이지만 그가 수 백만의 유대인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명확한 그의 의도는 아래로 내려가면서 더 구체적이고 더 실제적이고 더 확실한 정책이 되었고 그것을 직접적으로 실행한 사람들은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그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어떤 사람들이었기에 그런 학살에 동참하게 되었을까. 이 책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이 집단 학살에 어떻게 가담하고 그들의 실제 마음은 어떠했는지 실체적으로 규명하는 내용이다.


책은 주로 중년의 노동자 출신인 101예비 경찰 대대 대원 210명에 대한 전후 취조 기록을 발굴하여 심층 분석한 연구물이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어쩌면 선량하면서도 성실한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때로는 어려운 사람을 돕기도 하고 슬픈 일에 눈물 흘리기도 하고 불의에 항의하기도 하는 그야말로 평범한 민주 시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유대인 학살이라는 그 끔찍한 일에 큰 저항 없이 큰 고민 없이 작전을 수행했다. 


문제는 이들이 나치의 세뇌 작업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고 히틀러에 특별히 열광하지도 않았으며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반나치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전을 위해서 특별히 훈련 받고 뽑은 사람들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예비 경찰 대대 인원들을 그대로 동원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작전을 거부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었는데도 소수의 사람들만 안 하겠다고 한 것이다. 


사실 이 임무를 대원들이 처음부터 안 것은 아니다. 갑자기 임무를 하달 하고 싫으면 앞에 나오라고 하니 어리둥절해서 나서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만일 정상적인 양심을 갖고 있었다면 그 뒤에 이어지는 잔혹한 행위에 거부를 했어야 했다. 뒤에 거부한 사람들도 물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다수가 이 작업에 충실히 임했다는 사실이다. 책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학살 작전을 수행한 '전문 살인자'가 되었는지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하고 들여다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의외로 보통 사람들은 권위에 복종하거나 체제에 순응하거나 자신의 직무에 충실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들도 경찰이라는 직무에 충실한 나머지 자신의 일이 어떤 것인지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고 설사 잘못 된 것이라고 느껴도 조직에서 분리될까 혹은 겁쟁이로 몰릴까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반복되는 행위에 익숙해지면서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나서기까지 했다.


평범한 악은 이 101 대대에서만 보였던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수용된 수용소 근처 평범한 주민들에게도 보였다. 주민들은 수용소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이들을 상대로 상업적인 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도망친 유대인들을 밀고 했다. 이들은 수용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았고 결국 유대인들이 죽음을 맞는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침묵하고 방관했다.


유대인의 학살에 참여한 독일인들이나 폴란드인들이 특별히 잔혹한 인종인가? 아니다. 특별히 더 잔학한 인종이란 없다. 그들이나 우리나 다들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더 무서운 사실이다. 우리도 저런 상황이 되면 과연 양심을 지킬 수 있을까. 그들의 평범함이나 우리의 평범함이나 비슷한데 우리는 살인을 거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보이는 악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있어 와서 처음 듣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상 밖으로 더 평범한 사람들이 벌이는 상상 외의 잔혹성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정말 이 정도 까지였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무리 히틀러가 유대인 말살 정책을 세웠어도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동조와 침묵이 있었기에 결국 대학살이 실제로 일어 난 것이다.


이런 책 참 소중하다. 이렇게 심층 분석해서 이야기하니 설득력 있다. 그리고 관련되는 반박과 논쟁에 대해서 수정, 보완하고 있어서 더 신뢰가 간다. 초판본에 비해서 주장의 논거를 더 선명하게 해서 내용을 더 풍부하게 한다.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흘렀지만 아직도 규명할 일이 많다. 더 많은 자료가 공개되어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면 좋겠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엄청난 일을 히틀러에게만 책임 지우는 것은 너무 속 편한 일이다. 그 일에는 수 많은 사람의 협조와 방관이 있었다. 특히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일상의 악'은 언제라도 또 일어날 수 있고 어느 나라 어느 사람들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이 책을 통해서 사람들의 의식을 깨워야 한다. 성악설은 인간이 본래 악한 존재이기에 끊임 없이 성찰하고 법과 규범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것인데 불합리하고 불의한 것에는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교육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양심이고 진짜 민주 시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야 우리 속에 있을 수도 있는 평범한 악을 방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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