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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심장 - 이지상 시베리아 횡단기
이지상 지음 / 북하우스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내가 시베리아 횡단을 해보고 싶다고 처음 생각한 건 초등학교 때였다. 집에 있던 백과사전을 뒤지다가 시베리아횡단열차 안에서 찍은 듯한 시베리아의 침엽수림 사진을 보고 시베리아에 대한 묘한 매력을 느꼈다. 초등학생의 감성치고는 좀 유별난 듯 하지만...어쨌건 아직도 시베리아 횡단은 나에게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여행중 하나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의 종주국이었던 러시아는 우리에게 알기 힘든 나라였다. 시베리아로 대변되는 추운 나라, 철의 장막 크렘린, 인류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문화 예술, 세계의 역사를 바꿔버린 러시아 혁명, 1세기도 못채우고 몰락한 결말...이라는 정도..
시대가 변해서 이데올로기의 장벽이 무너진 지금, 옛날보다야 여행하기가 훨씬 수월해졌겠지만, 아직도 시베리아 횡단은 언어, 기온, 시간, 안전 문제 등으로 결코 만만하진 않은 여행이다.
이 책은 작가가 '혼자서, 배낭을 메고, 눈덮인 겨울에 떠난', 32일간의 시베리아 횡단기이다. 적재적소에 실려있는 여러 사진들도 좋고, 부록으로 제공되는 각종 여행정보는 간단하나 꽤 실용적이다. 러시아를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꼭 읽어봐야 할 정보일 것이다.
거창한 여행은 아니다. 작가가 책의 말미에도 썼지만, 작가는 러시아의 문화, 역사, 사회, 종교 등에 대한 얘기를 많이 썼다가 꼭 필요한 것만 제외하고 다 잘라냈다고 한다. 보다 자세한 러시아의 문화, 역사 등은 그 방면의 전문가가 쓰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 작가는 여행 중 겪은 사소한 얘기들을 많이 썼다고 한다.
심오한 학문적인 견해 없이도 여행좋아하고 러시아 문화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안하게 작가의 여행에 동참할 수 있다. 좀 인간적인 책이라고 할까? 그래서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많다. 러시아인, 북한인, 한국인과 얼굴이 거의 똑같은 부랴트족, 시베리아 횡단열차안에서 만난 여행자들, 길가다가 마주친 사람들, 호텔이나 가게에서 스쳐지나간 사람들...이유없이 적대감을 갖고 기분나쁘게 대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어려운 환경에도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떠나오는 날에는 러시아 불량배 2명이랑 격투까지 했다.
모스크바의 한 호텔에서 영어를 썼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한 후 작가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다음과 같이 썼다. '훗날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러시아 사람들 가슴속에는 열등감과 자존심이 같이 도사리고 있다고 한다. 밀려오는 서구 상품을 부러워하고 또한 그 앞에서 자신들의 몰락한 처지를 실감하며 스스로를 수치스러워하나, 동시에 옛날의 영광을 잊지 못하며 자존심을 내세우고 싶은 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엄하다. 그래서 러시아 사람들은 때로는 심한 열등감을 느끼고 때로는 필요 이상의 자부심을 내세운다.' (258쪽) 이 부분이 러시아 사람들의 현실을 반영하는 가장 적절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당장 지금은 수세기에 걸친 억압과 빈곤과 무너진 이데올로기의 잔해 밑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지만 작가는 그 와중에 희망을 본다. 그 희망은 꽃이 끊이지 않는 도스토에프스키나 차이코프스키의 묘비 앞에서도 보이고 치열한 삶의 의지를 발산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