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몇 시즌 동안 내게 위안이 되어준 유일한 존재는 흔들림없이 나를 지지해 준 사샤였다. 발레단 클래스에 들어갈 때면 사샤는 모두에게 우리 사이를 알리는 동시에 나를 공격하면 가만 있지않겠다는 표시로 내 손을 꽉 잡았다. 다들 사샤를 좋아했고 포용했기에 나를 향한 비웃음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물론 내가 아니라사샤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게다가 사샤는 사회적으로, 직업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까지 대가를 치르게 될 일을단행했다. 바로 드미트리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낸 것이었다. 나를 위해서 누군가와 절교하는 일도 그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내 춤에는 다른 누구에게서도 본 적 없는 신성함이 있다고, 남은 평생 오로지 나하고만 춤출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는 말했다. - P286

사샤 덕분에 나는 분노도 절망도 내려놓고 냉철한 거리를 두며춤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를 냉소주의라고 말하긴 무엇하지만, 어든 나는 계산적으로 변했다. 더는 이상주의적이거나 순진하지않았다. 예전에 나는 내 할 일이 예술에 대한 내 의무를 다하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하면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무용이라는 공간 안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예술 너머의 현실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노력하는 태도는 바뀌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면에서 기민하고 조심스럽고 자기보존적인 사람이 되었고, 심지어 발레를 할때도 그렇게 변했다. 나 스스로는 이런 변화가 불명예스럽다고 느꼈으나, 감독이나 평론가들은 내가 몸과 영혼을, 내 전부를 온전히바칠 때보다 더 큰 보상을 해주었다. 이제 나는 그들이 원하는 모습에 맞춰 춤을 췄다. - P287

그들은 내가 자신감 없이 온순하게, 여리고 순정적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고 약간 우울하게 춤추기를 바랐고, 그런 연기를 하는 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샤는 아무리오만하게 굴어도 용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백이 넘치고 카•리스마 있다고 호평받았다. 그러나 나는 철분 부족인 양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야만 야망으로 가득 찼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대를 나는 점점 더 완벽하게 구현하여, 결국 러시아의 혼을 보여주는 새로운 갈리나 울라노바라는 찬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내 점프는 천사의 날아오름에 비유되었다.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나만큼 가뿐하게, 높이 점프하는 발레리나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리스인의 발은 내 춤이 숭고한 이유이자 비극적 결점을 극복하고 얻어낸 고결한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나는 매 시즌 새로운 주역으로 데뷔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오로라 공주‘, <호두까기인형>의 ‘마리‘, <레이몬다>의 ‘레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라 바야데르>의 ‘니키야‘ 역까지. 라이벌 극단들에게 돌진해서 처부수는 옛 볼쇼이의 거대한 군마들, <스파르타쿠스>의 ‘에이기나‘와 <파리의 불꽃>의 ‘잔느‘도 내차지였다. 소비에트 발레의 노골적인 애국주의에 감동하지는 않았지만 이 작품들의 열광적인 분위기만큼은 좋았다. 여기서는 대부분의 작품처럼 유유한 고명함이 아니라 고된 희생을 나타내야 했는데, 그런 면이 무대 위 내 현실과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이런 공연이 있는 밤이면 관객의 환호가 전장의 함성처럼 메아리쳤다. - P288

사랑은 고집스러운 새
누구도 길들일 수 없지
아무리 불러도 소용없어
한번 싫다면 싫은 거야 (......)

사랑은 집시 어린아이
법이라고는 알지도 지키지도 않네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난 널 사랑하겠어
내가 널 사랑하면, 조심해야 할걸!

앙리 메이야크, 뤼도비크 알레비, <카르멘>

1961년 파리, 누레예프가 망명한 후 처음 공연한 날, 관객들은 수천프랑을 꽁꽁 묶은 돈다발부터 방금 벗은 속옷, 코카인이 담긴 작은 봉지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헌사를 무대에 던졌다고 한다. 그리고 물론 쌓이고 쌓이고 쌓인 꽃다발은 매일 밤, 무대 위에 향긋한 기념비를 만들었다.
정확히 50년 후, 사샤와 내가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당연히 여느 때와 똑같은 대우를 받으리라 예상했다. 우리는 무대 위에서만 유명하고 중요한 사람이었다. 늘 일만 하며 살았고, 퇴근하면 나는 포인트 슈즈를 꿰매고, 스트레칭하고, 식사 준비를 하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세관과 도착 터미널을 가르는 유리문 너머로 꽃다발과 포인트 슈즈를 들고서 누군가를 초조하게 기다리는수백 명의 인파, 그리고 목에 언론사 배지를 두른 사진 기자들을 마 - P297

주했을 때 나는 어떤 유명인과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나 보다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경계선을 통과한 순간, 열광하는 그들의함성이 폭포수처럼 내 귀를 채웠다. 나탈리-아! 나탈리아! 사샤! 이것이 무언가의 시작이자 다른 무언가의 끝이라는 설명할 수 없는 예감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맞잡은 손을 더 세게 쥐었다.
계약 조건의 일환으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은 마레 지구의 2층 아파트를 제공했다. 19세기에 지어진 상아색 고급 주택은 버터크림 아이싱처럼 단단하지만 사분사분 가벼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파란색으로 칠해진 예쁜 문을 열고 들어가 층계를 오르면 우리 아파트였다. 내부에는 벽난로가 침실과 거실에 하나씩 있었다. 사샤가 짐을 풀자마자 제일 먼저 두 벽난로 선반에 우리 사진을 진열했고,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나는 무척 감동했다. 거실과 연결된넉넉한 테라스는 담쟁이덩굴이 치렁치렁 늘어져 있었다. 너무 매혹적인 정경이었던지라 분명 에펠탑이 보일 것이라 믿었는데, 막상 나가보니 그렇지 않아 크게 실망했다.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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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니나가 내게 저녁 먹으러 올 생각이없느냐고 묻는다. 이럴 때 혼자 있으면 안 좋다고.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자, 니나가 자기 스카프를 내 무릎에 덮어준다. 그 손길에 택시 안까지 우리를 따라 들어왔던 묘지의 한기가 사라진다. 니나의주변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니나의 영혼을 채워줬고, 니나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보살폈다. 사시나무가 그렇다. 같은 숲에서 자라는 모든 개체가 실제로는 동일한 뿌리를 공유하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인 것이다. 지상의 나무들은 수만 년 전에 싹튼 단하나의 가냘픈 실생에서 꾸준히 복제되며 군락을 이룬다. 한 그루의 사시나무가 인간이 아는 한 죽음도 한계도 없는 불멸의 뿌리로부터 받는 보호와 안정감이 얼마나 깊을지 나는 헤아릴 수 없다. 니나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사랑은 첫 번째 사시나무만큼이나 오래 - P175

되었다. 니나는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사랑을 이제 자녀들에게도전해준다. 그리고 그 사랑을 내게도 조금 나누어 주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니나와 같은 나무가 아니다. 니나에게 초대해 줘 고맙다고 인사한 뒤 호텔 앞에 멈춰 선 택시에서 내린다.
객실 청소원이 널려 있던 빈 잔들을 치우고 이불을 정돈한 단정한 방이 나를 맞이한다. 침대 옆 탁자로 눈을 돌리자 거기 두었던 약통이 보이지 않는다. 공황이 와르르 넘친다. 멍청하게 약을 아무 데나 두고 나오다니. 깔끔하게 정리된 침구를 흐트러뜨리고 베개를 바닥에 내던진다. 그때 욕실 세면대 한쪽 구석에 립스틱과 로션 뒤에 숨어 있는 약통이 보인다. 얼른 집어 들고 흔들어본다. 약이 줄었는지 아닌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언뜻 느끼기에는 지난밤에 본 것만큼 가득 차 있는 듯하다. 나는 불새를 낚아채는 차르처럼 약병을 움켜쥐고서 발코니로 향한다. - P176

볼쇼이 감독의 호의로 메트로폴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 이후로 수년간 세계 곳곳으로 투어를 다녔지만, 그 첫날만큼 감미로운 침대에서 잠든 적은 없었다. 대리석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푹 담그고 목욕한 뒤, 비할 데 없이 보드라운 시트와 베개가 밀푀유처럼 차곡차곡 겹친 침상에 몸을 파묻었다. 어찌나 행복하던지 잠드는 순간까지도 내 입가에는 미소가 남아 있었다. 이런 일이영화에나 나오는 상투적 상황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깨달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덕분에 비행기를 타고집으로 돌아온 다음 마린스키 극장으로 향했다. 이반 스타니슬라비치는 그의 사무실에서 실시간 카메라를 통해 여러 개의 리허설을 동시에 살펴보고 있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의자를 화면에서 돌리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브라바, 나타샤. 아주 잘했어." - P191

"아뇨, 뭐라고 하셔도 저는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예요." 내가 말했다. 그리고 이건 이미 위에서 결정된 사항이래요. 아시잖아요."
이 말은 이반 스타니슬라비치의 인내심을 마침내 바닥나게 했다. 그는 이따금 일어나는 반발을 즐기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적정선을 넘어가지 않을 때의 이야기였다. 무용수가 자신에게 버림받는대신 자발적으로 자기 곁을 떠나는 걸 그는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또한 볼쇼이 극장의 총감독 알리포프가 자신의 뒤에서 음모를 꾸몄으며 영향력 싸움에서 그에게 졌다는 사실에 이반 스타니슬라비치는 결정타를 맞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으름장뿐이었다. ‘오늘 여기서 나가면, 두 번 다시 마린스키 극장에 못 돌아올 줄알아. 자네가 이 건물에 출입도 못 하도록 내가 직접 나설 거야." "
그를 향한 아무런 애정이 없는데도, 이런 말을 들으니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물이 차올라 애써 삼켜야 했다. 지난 4년간 내 젊음과수백 번의 공연을 바쳤지만, 결국 그와 마린스키 발레단에게 나는아무것도 아니었다. 대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시 침착해졌을 때,
내 목소리는 상처받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 P192

십 대에서 이십 대까지의 아름다움은 남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러다 서른을 넘어가면서부터 그 반대로 남에게 무엇을 주느냐에따라 외모가 달라진다. 생김새만으로도 자기 자신에게, 세상에 뭘베푸는지 알 수 있다. 학창 시절과 발레단 초창기 때 안드류샤는 불공평할 만큼 잘생긴 미남이었다. 한층 더 깊어진 눈매와 여유로운미소, 단단한 몸매까지 모든 면에서 그의 외모는 이전보다 더 느긋하고 안정적이다. 이는 그동안 그가 자신과 타인에게 아낌없이 베풀었음을 말해준다. 다정하고 충실하게 행동하고 열심히 일하면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인 셈이다. 내 칭찬에 그가씽긋 웃지만, 그의 얼굴에는 내 관심을 의식하는 여느 남자들의 얼굴에 비치던 자만의 기색이 조금도 스치지 않는다. - P194

아파트에서 나와 보도에 선다. 늦은 시간이고 주택가라 거리는한적하다. 때 이른 찬 바람이 내 몸을 휘감고 지나가더니 나뭇가지에 달린, 아직 푸르른 이파리를 뜯어낸다. 니나의 집에서 느꼈던 안정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일순간에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든다. 이 구역에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다. 아침에는 적당히 따뜻해 보였던 면 티셔츠 속에서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두근거린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고 온몸은 바들바들 떨린다. 가방에 든 웜업 스웨터를 걸쳐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옷을 꺼내 입은 뒤, 쪼그려 앉아공처럼 웅크린다. 부상, 실패, 중독에 대한 두려움에 더해, 이제 절대적인 피로가 나를 압도한다. 그것은 맨손으로 등반해야 하는, 하늘만큼 높은 빙벽이다. 마치 마라톤을 완주하자마자 "자,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라는 말을 듣고 또 듣는 선수처럼 나는 너무나 지쳤다.
휴대폰이 진동한다. 주머니 밖으로 꺼내 밝은 화면을 보자 휴대폰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이자 진짜 친구처럼 느껴진다. 드미트리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읽는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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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서 이모는 조만간 다시 와서 수다도 떨고 의상도 입어보겠다고 말한 뒤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이모가 나가자마자 엄마가 나를 부르더니 따귀를 때렸다. 딱 한 대. 내 버릇을 고쳐주기 위한 체벌이라는 걸 알게 하려는, 제멋대로 굴면 안 된다는 걸 가르치려는한 때였다. 얼마 뒤, 엄마는 나를 꼭 안아주며 내가 미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날 사랑해서 때린 것이라고 말했다. 엄마의 말을, 삐걱거리는 침대의 따뜻함을, 피곤함을 이기고 호수 물에 담기는 노처럼쉼 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엄마의 부드러운 손길을 믿었다. 눈 뜬채 잠드는 날도 있을 만큼 바쁘고 피로한 일상에 절어 있으면서도엄마는 몇 시간이고 내 머리칼을 만져주었고, 그러면 나는 엄마가그 손으로 나를 때렸다는 사실을 잊었다. 용서. 그것이 내가 아는사랑이었다. 그러나 그게 행복은 아니었다. - P36

다행히 엄마는 광장에서 눈물을 터뜨리지 않았다. 정직하고 자비롭게 대답해 줘 고맙다고 파벨에게 꼿꼿이 인사했다. 파벨도 뜻밖의 선심을 베풀었고, 수년 전 처음 만나 겨우 며칠 본게 전부인 엄마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의 아내는 마린스키 극장에서 분장사로 일하는 지인을 알고 있었고, 그 연줄로 엄마에게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재봉사 일자리를 얻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이 세상에 불확실성만큼 고통스러운 게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게 되었다. 누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누가 곁에남을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홀로 남겨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먼저 떠나는 것이다.
밤이 되어 침대에 누울 때면 나는 다른 여자애들처럼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하는 상상 대신 어디론가 떠나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내가 꾸었던 꿈은 니콜라이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게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이 신문과 사진에서만 내 얼굴을 볼 수 있을만큼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 P40

니나를 만나기 전까지 내겐 진정한 친구가 없었다. 학교에 다닐 때도 나는 늘 혼자였다. 친구를 사귀기 싫어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어딘가 다르다는 걸 다른 여자애들이 본능적으로 감지한 탓이었다. 그 아이들은 새끼 양 같았다. 나긋나긋하고 예쁘고 명랑했고, 사소한 것에도 쉽게 만족했으며, 무리를 지으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내게는 이런 사랑스러운 자질이 없었다. 나는 예쁘지도, 부유하지도, 쾌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눈에 띄게 똑똑하지도 않았다. 어릴 때도 나는 진지하고 우울했다. 타고난 강박을 쏟아부을 대상을 아직 찾지 못해 늘 초조해하다가 제풀에 지쳐버리기 일쑤였다.
나중에는 그 덕을 보긴 했지만, 초등학생 땐 그런 성격이 친구를 만드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난 점심을 혼자 먹지 않으려부단히 애를 써야만 했다. 나는 조명을 조절하듯 내 눈의 조도를 낮추었고, 아이들이 농담을 하면 그냥 웃었다. 때로는 잔불처럼, 때로는 마그마처럼 내 안에서 타오르는 무언가를그렇게 꼭꼭 숨기고 지냈다. - P47

그 순간 나는 레즈니코프 부부가 세료자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를 알아챘다. 세료자는 어린 나이에도 뛰어난 재능을 드러냈다. 그리고 재능만 있으면 아버지가 우체부는 어머니가 실팍한 몸집에유행에 뒤떨어지는 차림을 하든, 부자들의 귀여움을 받을 수 있었다. 부자들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가 뭘 먹고 마시긴 했는지신경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부럽지는 않았다. 내 가슴에 큰불을 지핀 건 바로 빙글빙글 회전할 때 세료자의 얼굴에 비친 표정이었다. 그를 본 순간, 내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내 내면의 화염은 세료자의 재능 같은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내 불꽃은 한낱 욕망이었다. - P54

"엄마, 나 할 수 있어. ‘오데트‘‘도 출 수 있고, 난 다 할 수 있어."
나는 조용히 말했지만, 엄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어, 나타슈카 프리마 발레리나는 10년에한 번 태어난단다." 그 말이 주는 쓴맛을 중화하려는 듯 엄마는 찻잔에 잼을 한 숟가락 더 넣고 휘휘 저었다. 씁쓸한 건 엄마의 말뿐이 아니었다. 엄마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시선이 쓰디썼다.
그날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그러니까같은 학교 아이들, 선생님들, 심지어 엄마까지도 나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우주의 광활하고 검은 공허처럼 무한하고 중대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나는고양이, 빗, 주전자처럼 아주 하찮고 평범한 존재였고, 그런 내가 다른 것이 되려는 생각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 P55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 생각나는 사람 아닌가.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다. 멋진 남자, 멋진 여자들과 친밀함을 나누고, 웃고, 서로호의를 보였으며, 좋은 시간을 함께했다. 그러나 다음 극장에서 새로운 일정을 시작하고 나면 더는 그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몇달 동안 내 상상을 완전히 사로잡은 이들도 있었지만, 헤어지고 나면 더는 그들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은 내 안에어떤 공간도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내머리와 가슴에 큰 공간을 차지한 채 몇 년을, 어쩌면 평생을 떠나지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내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 자리를 잡기 때문에나 자체가 사라지지 않고서는 그들을 떠나보낼 수 없다. 나는 어린 시절 친구들을 자주 떠올리는데, 그렇다고 그때의 관계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니다. - P77

"생각해 보니, 우리가 이미 경험한 일 같은 건 없네." 내가 캐머마일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모든 게 새로우니까. 그냥 순간순간 다가오는 대로 살아가야 할 뿐이지."
소피야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굳이 마음을 다잡기 위한 전략을 세울 필요 없어. 넌 그냥 타고난 대로 하면 돼. 언제나 뛰어나잖아. 항상 다른 사람의 기대,
아니 스스로의 기대에도 못 미치는 게 어떤 기분인지 너는 몰라."
인생의 아이러니. 소피야는 이상적인 몸을 타고난 데다가 전직무용수의 딸이었다. 소피야의 어머니는 코르 드 발레까지밖에 못갔다고 하더라도 볼쇼이 발레학교에서는 손꼽히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소피야의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소피야에게 주어진 조건에 그가 부응해 주길 기대했다. 반면 나는 늘 모든이에게 과소평가되었고, 그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한 결과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런 경험이 너무도잦아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때마다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내 확신은 오히려 한층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혼자서 빙긋 미소 짓게 되었다. 우리 친구 무리 외에는 특별히 내가 잘되길 바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 P97

수업 시작 전에 해변에 다녀오자고 내가 제안했지만, 니나는 싫다고 했다. 결국 니나는 방에서 낮잠을 자며 쉬기로 했고, 세료자와나만 나가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강한 햇빛이었다. 태양은 울창한 수림이 드리운 그늘 밖의 모든 곳과 우리 발밑의 돌길을 하얗게 표백했다. 남쪽 나라의 눈부심에 익숙해지고 나자, 바르나가 피터보다 수천 년이나 더 오래된 도시라는 사실에 탄복했다. 이 도시의 담장, 길, 성당 모두 고대에 지어진 것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창턱에서 벽을 타고 흐드러진 붉은 꽃처럼 여유 있었다. 바르나에서는 돌, 종소리, 시간의 무게처럼 무거운 것들은 더 무겁게느껴졌고 나무 그늘, 장미 향기, 아이들의 웃음소리, 내 발처럼 가벼운 것들은 더욱 가볍게 느껴졌다. 드디어 처음으로 내가 누군지를 증명했다고 생각하니 두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듯했다. 떠나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지니, 내 세상에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듯한 예감을 받았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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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혜JUHEA KIM「작은 땅의 야수들로 톨스토이문학상을 수상한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1987년 인천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프린스턴대학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하고, 2016년 문예지 《그란타>에 단편소설 「보디랭귀지Body Language」를 발표하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을 비롯해 수필과 비평 등을 <인디펜던트>를 포함한여러 매체에 기고했고,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 최인호의 단편소설 「이 지상에서 가장 큰 집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2021년, 대한민국의 역사를 장대한 스케일로 펼쳐낸 장편소설 데뷔작 『작은 땅의 야수들』을 펴냈다. 한국의 역사를 전 세계 독자에게 알리는 동시에 자연 파괴, 전쟁, 기아를 맞이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의미 있게살아야 하는지 제시하는 이 소설은 6년에 걸쳐 집필한 대작으로, 2022년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문학 작품에 수여하는 데이턴문학평화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2024년 톨스토이 재단이 주관하는 러시아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야스나야 폴랴나상(톨스토이문학상)을 받았다. 전 세계 14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TV 시리즈로 제작 중이다.

첫 소설에서 자신의 ‘뿌리(모국)‘를 다루었던 작가의 다음 주제는 ‘예술‘로 향한다. 2024년에 출간한 두 번째 장편소설 『밤새들의 도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파리를 배경으로 천재적인 발레리나의 사랑과 욕망, 구원을 그린다. 출간 즉시 리즈 북클럽 도서로 선정되었고, <보그> <하퍼스 바자》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 ‘올해의 책‘에 올랐다.
2025년에는 단편집 『세상끝의 사랑 이야기A Love Storyfrom the End of the World』를 출간할 예정이다. 한편 20여년간 비건, 동물보호, 친환경 운동을 이끌어온 작가는 현재 비영리 단체인 한국범보전기금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야생 호랑이와 표범의 한반도 복원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juheakim.com

2년 전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 후 무대를 떠난 세계적인 발레리나 나탈리아 레오노바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그곳에는 그를 무너지게 했던 연인들, 끝내 버리지 못한 욕망이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가장 높이 올리고 다시 밑바닥으로 끌어내린 사람들 앞에서 그는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 길은 재기일까, 또 다른 추락일까.
「작은 땅의 야수들로 톨스토이문학상을 받은 김주혜의 두 번째 소설 「밤새들의 도시는 삶이라는 예술에 바치는 헌사다. 시련 속에서도 끝내 품위를 잃지 않는 인간의 숭고함에 대한 비유이자, 깊은 상처를 감내할 만큼 간절한 순간을 지나온 우리 모두의 찬란한 삶에 대한 은유다.

나를 죄인이라고 부르고,
악랄하게 조롱하라.
나는 너의 불면증이었고,
너의 슬픔이었으니.

안나 아흐마토바, <작은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동이 틀 때까지
그 불이 나를 둘러싼 듯하였네.
그리고 나는, 그 눈동자의 색깔을
끝내 보지 못했다네.
모든 것이 떨며 노래하고 있었지.
그대는 내 친구였나, 적이었나?
그때는 겨울이었나, 여름이었나?

안나 아흐마토바, <파편>

보드카를 따른다. 그 맛은 한밤중에 옛 도시로 날아갈 때 느끼는 묘한 간절함과 같다.
동그스름한 비행기 창문 너머의 구름 사이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불빛이 찬란히 어른거린다. 그렇지. 백야의 계절이다. 은색 상공에서 점점 낮아져 밤하늘보다 더 밤하늘 같은 육지로 향하다 어느 순간, 별밭으로 고꾸라지는 느낌이 든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후, 천천히 다시 뜬다. 이 도시는 지극히 익숙하면서 동시에 낯선곳이다. 한때 사랑했던 이의 얼굴처럼.
옛사랑과 우연히 마주쳤다고 치자. 공원에서, 아니면 공연장의 오케스트라석과 파테르석 사이 계단참에서 인터미션이 끝나 - P13

기 전에 서둘러 사 온 샴페인 한 잔을 손에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데,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옛 연인의 얼굴이 보인다. 그의 이목구비는 달라졌는데, 변치 않은 표정 때문에 그를 알아본다. 순간, 그사람일 리 없다는 의구심이 손바닥에 가시처럼 박히지만, 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내 받아들인다. 그를 훑어보는 동시에 지금 그의 눈에 비치는 모습이 어떨지 곱씹는다. 화장은 잘되었는지, 머리는 잘 만져졌는지, 옷을 입고 나오기 직전에 생각나서 굵은 알반지와 귀걸이를 착용했는데, 참 다행이다. 눈을 맞출까, 차갑게 무시하고 지나갈까, 미소를 지을까, 인사라도 건네야 하나,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사이 닳은 대리석 계단 위에서 서로를 스쳐 지나가고, 인터미션의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린다. 샴페인의 김이 빠지는 데 걸리는 것보다도 짧은 시간에 다 끝나버렸다. - P14

진정한 예술가가 무대에 올랐을 때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것은 그의 춤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다.
10시 45분. 신발이 가득 담긴 가방을 챙겨 들고 마린스키로 가는 택시를 잡는다. 차에 탈 때 시선이 간 하늘은 우윳빛 구름을 짙게 드리워, 마치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진주알 안에 있는 듯하다. 광장을 가로질러 걷고 있을 때 이제 막 구름을 뚫은 한줄기 햇살이 피스타치오색의 웅장한 극장을 환하게 비춘다. 그 모습에 속이 울렁거리고 숨이 가빠져서 하마터면 걸음을 멈출 뻔했다. 근육에 각인된 기억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말 알고 싶다. 과연 내 기억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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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소설가 이야기 수집가
서울대 국문학과에 진학하여 박사과정을 수료할 때까지 신화전설 민담 소설을 즐겼다. 고향 진해로 돌아가 장편작가가 되었다. 해가 뜨면 파주와 목동 작업실을 오가며 이야기를 만들고, 해가 지면 이야기를 모아 음미하며 살고 있다.
장편소설 『거짓말이다」 「목격자들」 「조선누아르」 「혁명」 「뱅크」「밀림무정」 「조선마술사」 「아편전쟁」, 산문집 『아비 그리울 때보라」 읽어가겠다」 「독서열전」 「원고지」 「천년습작 등을 썼다.
영화 <조선명탐정> <가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황진이><천둥소리>의 원작자이다. 문화잡지 1/n을 창간하여 주간을맡았고, 콘텐트기획사 ‘원탁‘의 대표 작가이다.

오래전부터 엄마에 관해 쓰고 싶었다.
내 나이 서른살에도, 마흔살에도, 엄마의 삶이 궁금했다.
그때는 써야 할 이야기가 넘쳤으므로, 엄마는 자꾸 밀렸다. 언제나 내뒤에서 계실 거니까. 이번이 아니라도, 곧 돌아와 쓰면 된다고 스스로를합리화했다. 한번 미루니 두서너 해가 휙휙 지나갔다. 그렇게 나는 장편작가가 되었고 등단 20년이 지났지만, 엄마의 삶을 오래 들여다보며 문장으로 옮기진 못했다.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금방 옮길 수 있다고 자신했다. 너무 늦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이. - P8

기다린다는 말이 견딘다는 뜻임을 국민학교 6학년 때 처음 알았다. 단편에서도 썼듯이, 그해 나는 창원시 웅남국민학교에서 마산시 봉덕국민학교로 전학을 했고 폐결핵에 걸렸다. 다행히 전염성은 아니라서 휴학하진 않았지만, 체육 시간엔 언제나 혼자 남아 빈 교실을 지켜야 했고, 달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느릿느릿 걸으며 병이 완쾌될 때까지 1년을 기다렸다. 그때 나는 견뎌야 했다. 친구들처럼 운동장을 맘껏 달리고 싶은바람을 꾹꾹 눌러야 했던 것이다. 점심시간이나 체육 시간에 땀 냄새 풀풀 풍기며 들어오는 친구들을 피해 미리 뒤뜰로 나가 걸었다. 나무와 벤치 사이를 서성거렸다. 기다린다는 것은 견딘다는 뜻이고 견딘다는 것은 ‘혼자‘ 견딘다는 뜻임을 그때 또 깨달았다.
졸업을 며칠 앞두고 엄마와 함께 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내 가슴을 찍은 엑스레이 사진을 곰곰이 들여다보더니, 완쾌 판정을 내렸다. 더이상약을 먹을 필요도 없고, 달리기를 금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나는 병원을 나서자마자 집까지 달려가고 싶었다. 버스를 타도 열두 정거장이넘는 먼 길이지만, 그날은 달리고 또 달려도 지칠 것 같지 않았다. 발뒤꿈치를 들고 무릎을 구부리며 엄지발가락에 힘을 실어 달려나가려는 순간, 작은 울음이 뒤통수에 닿았다. 돌아보니, 엄마가 오른손바닥으로 입을 막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견디며 기다리는 동안, 엄마는 그런 나를 ‘혼자‘ 바라보며 견디고 기다렸던 것이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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