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니나가 내게 저녁 먹으러 올 생각이없느냐고 묻는다. 이럴 때 혼자 있으면 안 좋다고.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자, 니나가 자기 스카프를 내 무릎에 덮어준다. 그 손길에 택시 안까지 우리를 따라 들어왔던 묘지의 한기가 사라진다. 니나의주변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니나의 영혼을 채워줬고, 니나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보살폈다. 사시나무가 그렇다. 같은 숲에서 자라는 모든 개체가 실제로는 동일한 뿌리를 공유하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인 것이다. 지상의 나무들은 수만 년 전에 싹튼 단하나의 가냘픈 실생에서 꾸준히 복제되며 군락을 이룬다. 한 그루의 사시나무가 인간이 아는 한 죽음도 한계도 없는 불멸의 뿌리로부터 받는 보호와 안정감이 얼마나 깊을지 나는 헤아릴 수 없다. 니나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사랑은 첫 번째 사시나무만큼이나 오래 - P175
되었다. 니나는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사랑을 이제 자녀들에게도전해준다. 그리고 그 사랑을 내게도 조금 나누어 주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니나와 같은 나무가 아니다. 니나에게 초대해 줘 고맙다고 인사한 뒤 호텔 앞에 멈춰 선 택시에서 내린다. 객실 청소원이 널려 있던 빈 잔들을 치우고 이불을 정돈한 단정한 방이 나를 맞이한다. 침대 옆 탁자로 눈을 돌리자 거기 두었던 약통이 보이지 않는다. 공황이 와르르 넘친다. 멍청하게 약을 아무 데나 두고 나오다니. 깔끔하게 정리된 침구를 흐트러뜨리고 베개를 바닥에 내던진다. 그때 욕실 세면대 한쪽 구석에 립스틱과 로션 뒤에 숨어 있는 약통이 보인다. 얼른 집어 들고 흔들어본다. 약이 줄었는지 아닌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언뜻 느끼기에는 지난밤에 본 것만큼 가득 차 있는 듯하다. 나는 불새를 낚아채는 차르처럼 약병을 움켜쥐고서 발코니로 향한다. - P176
볼쇼이 감독의 호의로 메트로폴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 이후로 수년간 세계 곳곳으로 투어를 다녔지만, 그 첫날만큼 감미로운 침대에서 잠든 적은 없었다. 대리석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푹 담그고 목욕한 뒤, 비할 데 없이 보드라운 시트와 베개가 밀푀유처럼 차곡차곡 겹친 침상에 몸을 파묻었다. 어찌나 행복하던지 잠드는 순간까지도 내 입가에는 미소가 남아 있었다. 이런 일이영화에나 나오는 상투적 상황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깨달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덕분에 비행기를 타고집으로 돌아온 다음 마린스키 극장으로 향했다. 이반 스타니슬라비치는 그의 사무실에서 실시간 카메라를 통해 여러 개의 리허설을 동시에 살펴보고 있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의자를 화면에서 돌리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브라바, 나타샤. 아주 잘했어." - P191
"아뇨, 뭐라고 하셔도 저는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예요." 내가 말했다. 그리고 이건 이미 위에서 결정된 사항이래요. 아시잖아요." 이 말은 이반 스타니슬라비치의 인내심을 마침내 바닥나게 했다. 그는 이따금 일어나는 반발을 즐기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적정선을 넘어가지 않을 때의 이야기였다. 무용수가 자신에게 버림받는대신 자발적으로 자기 곁을 떠나는 걸 그는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또한 볼쇼이 극장의 총감독 알리포프가 자신의 뒤에서 음모를 꾸몄으며 영향력 싸움에서 그에게 졌다는 사실에 이반 스타니슬라비치는 결정타를 맞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으름장뿐이었다. ‘오늘 여기서 나가면, 두 번 다시 마린스키 극장에 못 돌아올 줄알아. 자네가 이 건물에 출입도 못 하도록 내가 직접 나설 거야." " 그를 향한 아무런 애정이 없는데도, 이런 말을 들으니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물이 차올라 애써 삼켜야 했다. 지난 4년간 내 젊음과수백 번의 공연을 바쳤지만, 결국 그와 마린스키 발레단에게 나는아무것도 아니었다. 대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시 침착해졌을 때, 내 목소리는 상처받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 P192
십 대에서 이십 대까지의 아름다움은 남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러다 서른을 넘어가면서부터 그 반대로 남에게 무엇을 주느냐에따라 외모가 달라진다. 생김새만으로도 자기 자신에게, 세상에 뭘베푸는지 알 수 있다. 학창 시절과 발레단 초창기 때 안드류샤는 불공평할 만큼 잘생긴 미남이었다. 한층 더 깊어진 눈매와 여유로운미소, 단단한 몸매까지 모든 면에서 그의 외모는 이전보다 더 느긋하고 안정적이다. 이는 그동안 그가 자신과 타인에게 아낌없이 베풀었음을 말해준다. 다정하고 충실하게 행동하고 열심히 일하면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인 셈이다. 내 칭찬에 그가씽긋 웃지만, 그의 얼굴에는 내 관심을 의식하는 여느 남자들의 얼굴에 비치던 자만의 기색이 조금도 스치지 않는다. - P194
아파트에서 나와 보도에 선다. 늦은 시간이고 주택가라 거리는한적하다. 때 이른 찬 바람이 내 몸을 휘감고 지나가더니 나뭇가지에 달린, 아직 푸르른 이파리를 뜯어낸다. 니나의 집에서 느꼈던 안정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일순간에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든다. 이 구역에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다. 아침에는 적당히 따뜻해 보였던 면 티셔츠 속에서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두근거린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고 온몸은 바들바들 떨린다. 가방에 든 웜업 스웨터를 걸쳐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옷을 꺼내 입은 뒤, 쪼그려 앉아공처럼 웅크린다. 부상, 실패, 중독에 대한 두려움에 더해, 이제 절대적인 피로가 나를 압도한다. 그것은 맨손으로 등반해야 하는, 하늘만큼 높은 빙벽이다. 마치 마라톤을 완주하자마자 "자,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라는 말을 듣고 또 듣는 선수처럼 나는 너무나 지쳤다. 휴대폰이 진동한다. 주머니 밖으로 꺼내 밝은 화면을 보자 휴대폰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이자 진짜 친구처럼 느껴진다. 드미트리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읽는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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