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혜JUHEA KIM「작은 땅의 야수들로 톨스토이문학상을 수상한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1987년 인천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프린스턴대학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하고, 2016년 문예지 《그란타>에 단편소설 「보디랭귀지Body Language」를 발표하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을 비롯해 수필과 비평 등을 <인디펜던트>를 포함한여러 매체에 기고했고,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 최인호의 단편소설 「이 지상에서 가장 큰 집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2021년, 대한민국의 역사를 장대한 스케일로 펼쳐낸 장편소설 데뷔작 『작은 땅의 야수들』을 펴냈다. 한국의 역사를 전 세계 독자에게 알리는 동시에 자연 파괴, 전쟁, 기아를 맞이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의미 있게살아야 하는지 제시하는 이 소설은 6년에 걸쳐 집필한 대작으로, 2022년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문학 작품에 수여하는 데이턴문학평화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2024년 톨스토이 재단이 주관하는 러시아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야스나야 폴랴나상(톨스토이문학상)을 받았다. 전 세계 14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TV 시리즈로 제작 중이다.

첫 소설에서 자신의 ‘뿌리(모국)‘를 다루었던 작가의 다음 주제는 ‘예술‘로 향한다. 2024년에 출간한 두 번째 장편소설 『밤새들의 도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파리를 배경으로 천재적인 발레리나의 사랑과 욕망, 구원을 그린다. 출간 즉시 리즈 북클럽 도서로 선정되었고, <보그> <하퍼스 바자》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 ‘올해의 책‘에 올랐다.
2025년에는 단편집 『세상끝의 사랑 이야기A Love Storyfrom the End of the World』를 출간할 예정이다. 한편 20여년간 비건, 동물보호, 친환경 운동을 이끌어온 작가는 현재 비영리 단체인 한국범보전기금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야생 호랑이와 표범의 한반도 복원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juheakim.com

2년 전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 후 무대를 떠난 세계적인 발레리나 나탈리아 레오노바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그곳에는 그를 무너지게 했던 연인들, 끝내 버리지 못한 욕망이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가장 높이 올리고 다시 밑바닥으로 끌어내린 사람들 앞에서 그는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 길은 재기일까, 또 다른 추락일까.
「작은 땅의 야수들로 톨스토이문학상을 받은 김주혜의 두 번째 소설 「밤새들의 도시는 삶이라는 예술에 바치는 헌사다. 시련 속에서도 끝내 품위를 잃지 않는 인간의 숭고함에 대한 비유이자, 깊은 상처를 감내할 만큼 간절한 순간을 지나온 우리 모두의 찬란한 삶에 대한 은유다.

나를 죄인이라고 부르고,
악랄하게 조롱하라.
나는 너의 불면증이었고,
너의 슬픔이었으니.

안나 아흐마토바, <작은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동이 틀 때까지
그 불이 나를 둘러싼 듯하였네.
그리고 나는, 그 눈동자의 색깔을
끝내 보지 못했다네.
모든 것이 떨며 노래하고 있었지.
그대는 내 친구였나, 적이었나?
그때는 겨울이었나, 여름이었나?

안나 아흐마토바, <파편>

보드카를 따른다. 그 맛은 한밤중에 옛 도시로 날아갈 때 느끼는 묘한 간절함과 같다.
동그스름한 비행기 창문 너머의 구름 사이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불빛이 찬란히 어른거린다. 그렇지. 백야의 계절이다. 은색 상공에서 점점 낮아져 밤하늘보다 더 밤하늘 같은 육지로 향하다 어느 순간, 별밭으로 고꾸라지는 느낌이 든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후, 천천히 다시 뜬다. 이 도시는 지극히 익숙하면서 동시에 낯선곳이다. 한때 사랑했던 이의 얼굴처럼.
옛사랑과 우연히 마주쳤다고 치자. 공원에서, 아니면 공연장의 오케스트라석과 파테르석 사이 계단참에서 인터미션이 끝나 - P13

기 전에 서둘러 사 온 샴페인 한 잔을 손에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데,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옛 연인의 얼굴이 보인다. 그의 이목구비는 달라졌는데, 변치 않은 표정 때문에 그를 알아본다. 순간, 그사람일 리 없다는 의구심이 손바닥에 가시처럼 박히지만, 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내 받아들인다. 그를 훑어보는 동시에 지금 그의 눈에 비치는 모습이 어떨지 곱씹는다. 화장은 잘되었는지, 머리는 잘 만져졌는지, 옷을 입고 나오기 직전에 생각나서 굵은 알반지와 귀걸이를 착용했는데, 참 다행이다. 눈을 맞출까, 차갑게 무시하고 지나갈까, 미소를 지을까, 인사라도 건네야 하나,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사이 닳은 대리석 계단 위에서 서로를 스쳐 지나가고, 인터미션의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린다. 샴페인의 김이 빠지는 데 걸리는 것보다도 짧은 시간에 다 끝나버렸다. - P14

진정한 예술가가 무대에 올랐을 때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것은 그의 춤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다.
10시 45분. 신발이 가득 담긴 가방을 챙겨 들고 마린스키로 가는 택시를 잡는다. 차에 탈 때 시선이 간 하늘은 우윳빛 구름을 짙게 드리워, 마치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진주알 안에 있는 듯하다. 광장을 가로질러 걷고 있을 때 이제 막 구름을 뚫은 한줄기 햇살이 피스타치오색의 웅장한 극장을 환하게 비춘다. 그 모습에 속이 울렁거리고 숨이 가빠져서 하마터면 걸음을 멈출 뻔했다. 근육에 각인된 기억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말 알고 싶다. 과연 내 기억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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