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읽고 나면 모든 책이 다 시시하다. 그러나 시집만 읽고 있자면 모든 시집들이 다 시시해진다. - P67
두려움과 고통에 대하여 흔쾌하기. 온전히 흔쾌해질 때 찾아오는 자유로움으로 더없이 고요하기. 너무나 고요한 나머지 서늘하다고 느끼기. 너무나 서늘한 나머지 을씨년스럽다고 느끼기. - P68
모든 것을 알려 하지 않음. 전부를 다 적으려하지 않음. 진실은 이런 방식으로만 겨우 소용스러우니까. 정작 하려던 말을 시인은 기꺼이 떠나보낸다. 진실의 텅 비어 있음과 마주할, 준비된 얼굴들을 기다리기 위해서. - P69
시는 인간이 언어로 그을 수 있는 가장 큰 포물선이다. 모르는 장소로, 모르는 사람에게로, 모르는 옛날에, 모르는 미래에 미리 가닿는다. 시는이럴 때 수신자인 동시에 발신자이다. 포물선을 그리며 어딘가에서 소식이 자꾸 도착한다. 어디에서 오는지 잘 아는 것들조차 알던 얼굴을 하고 도착하지는 않는다. - P70
시에겐 공포를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있다. 공포를 공포라고 호명하기를 멈추어보기. 공포의 뒤통수와 손아귀와 손가락 끝의 지문까지 샅샅이 탐구하기. 공포를 견디는 게 아니라 공포를 추적하기. 공포가 깃든 영혼이 종내에는 어떻게 아름다움이 되는지 그 편에 서서 상상하기. 시는 그리하여 유령이 된 채로 유령과 어깨동무를 하려는 마음으로 기꺼이 옮겨간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 P71
사람으로서 시인은 시를 쓰지 않는다. 사람보다 좀 더 다른 무엇이 되어서 시인은 시를 쓴다. 좀 더 다른 그 무엇은 우리가 끔찍해하는 모습일수도 있고 우리가 얕잡아보는 형태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선망하는 얼굴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 얼굴을 시인은 시를 쓰며 계속 계속 좇는다. 그 얼굴을 지나칠 때까지. 지나쳐서 또 다른 얼굴을 만날 때까지. - P72
시는 세상을 너무 잘 반영하므로 오히려 왜소해져 간다. 그렇다고 세상만큼 시가 무기력하다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곧 도래할 세상에 미리 가 있기 때문에 이상한 적극성이 있다. 그래서 지독하게 슬프고 지독하게 읽기가 어려운 것이다. 시인이 가장 끔찍해하는 것은 시가 왜소해지는 일도 아니고 모서리에서 사는 일도 아니다. 다만, 진실의 두께가 왜소해지는 일, 피상적인 환상으로 미래에다 낙관을 덧칠하는 일을 가장 끔찍하게 여긴다. - P73
시는 어쨌거나 홀연한 것이다. ㅡ시가 원래홀연한 것이어서, ‘홀연히, 문득, 갑자기, 불현듯‘ 같은 부사가 시 속에 등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ㅡ 시인은 시를 쓰면서 홀연히 자기 자신의 한계 바깥으로 이동한다. 그러기 위해 무언가 빤히 노려본다. 오래 응시한다. 너무 오래 쳐다봐서처음 발견한 것과 다른 것이 될 때까지 그렇게 한다. 시에게 행과 연이 있는 이유는 이 오랜 응시의 시간을 표시해두기 위해서다. 단숨에 쓰인 시일지라도, 이 오랜 응시와 사색이 있었고 그 끝에서 이루어진 단숨이다. 시인은 그렇게 잠시 자신의 처지 바깥에 놓임으로써 갱생을 도모하는지도 모른다. - P74
질문 앞에 서 있다. 누군가에겐 자명한 것이지만 누군가에겐 혹독한 질문이다. 누군가는 탐닉하듯 섭렵해온 세계관들을 전면 수정하지 않으면 질문에 동참할 자격조차 없을 질문. 그 질문에다 어깨를 걷고 그물코 하나만큼의 새로운 질문을 꺼낼때야 새로움을 향유할 자격이 생길 질문. 이 자격을 얻기 위한 선행 작업 없이 이 질문에 동참한다면, 질문을 둘러싸고 생성되고 있는, 미약하고 희미한 세계를 바스러뜨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차근차근 준비하고 가담하여 질문을 통과하기. 다른 시작 앞에 도착하는 기쁨-혹은 두려움을 획득하기. - P75
여리디 여린 감수성을 낱낱이 기억해 자주 세세히 돌보기. 추억을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감수성을 기억하는 기술로써 지난 경험들을 만끽하며지내기. 지난날의 좌절과 좌초의 고통들을 기억함으로써, 그것을 얇디얇게 저며놓음으로써, 흔들리는 현재의 기우뚱한 면에 괴어 균형을 잡기. 그렇게 하여 현재를 바로잡기. 나는 이것이 기억술이라고 믿고 있다. 시의 기술이라고도 여긴다. 그리하여 윤리에게 시를 적용해보는 방식이 아닌 시에서부터 새로운 곁가지의 윤리들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한다. - P76
육체의 진짜 꿈을 알고 싶다. 육체가 사랑을통해서 세례받고 싶어 하며 언어를 통해서 세례의 꿈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더 잘 느껴보고 싶다. 혼자의 몸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착하거나 누군가로부터 도착된 몸. 육체에 깃든 모든사연들이 총망라되어 있는 시의 언어를 상상한다. 재촉 없이 연하게. 세세하게. - P77
내가 쓰게 될 다음 시 앞에서 나는 늘 더 불안하다. 더 크게 불안하다. 더 크게 불안해하고 싶어한다. 더 크게 불안해질 때까지 시 쓰기를 지체하며 시의 첫 줄을 기다려본다. 온전히 이해되고 나면 불안이라는 것조차도 안온해지니까. 익숙했던 불안으로부터 졸업하여 더 거대하고 더 깊은 불안으로 옮겨가기 위한 서곡을 짓는 마음으로 시집을 묶는다. 식은땀을 영원히 흘린다 해도, 꾀죄죄하고 피로한 얼굴이어도, 세계의 가장자리를 두루 발로디딘 자의 땀자국이 나의 얼굴이기를. - P78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차갑게 구분할 때 태연스러운 어법이 탄생한다. 세상모든 생물체들을 풍경 혹은 은유로 배치하지 않을것. 내가 곧 다시 그로 탄생할 것에 대해서만 촉수가 정수리에서 뻗어 나올 때까지 가까워질 것. 이 연결감을 욕망하고, 이 연결의 담당 기관이 온통 육체여야 한다는 것을 긴박하게 느낄 것. 이럴 때 능청스러울 정도의 태연한 태도가 발생한다는 걸 잊지 말 것. - P79
시적인 재능은 시 속의 문장으로 구현되는것이 아니라, 말해야 할 것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냉정하게 구분해내는 데에 있다. 말하기 시작한 것에 관하여는 거침이 없어야 한다. 거침없음은 부러 드러낼 필요가 없다. 고양을 드러내는도 조급한 면이 있다. 반드시 단호함에 의해서 작동되어야 한다. - P80
카프카를 만나러 가서, 카프카보다는 카프카를 기념하는 방식을 만나고 왔다.
등에 날개를 달고 모빌이 되어 있는 페소아인형, 디자인이 좋은 수첩의 표지가 되어 있는 폐소아. 페소아를 만나러 왔다가 페소아를 낭비하는도시를 만나고 왔다. - P81
멜랑콜리, 히스테릭, 광기. 이런 말들로 규정되어온 여성의 시는 광기 그 자체가 현실임을 항변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광기의 몸짓을 빌리지않으면 설득이 불가능한, 두텁고도 정교한 이 폭력적인 세계를 가리키고 드러내기 위한 입장이기도하다. - P82
하나의 단어는 이미 문장을 탑재한다. 하나의 단어에 이미 탑재된 문장의 가짓수야 많겠지만, 하나의 단어가 적히자마자 문장은 어느 정도는 갈 길이 정해진다. 그렇게 완성된 하나의 문장은 점잖고, 보드랍다. 단어는 저마다 들뜸 없이 안착해 있어 편안하게 읽는 이에게 소화된다. - P83
점잖고 편안한 단어들이 자신을 마중 나온문장을 배반하고 제멋대로 제자리가 아닌 것만 같은 자리로 옮겨가는 일. 이런 일을 밤낮으로 전담하는 이가 시인이다. 하나의 단어가 놓인 하나의문장이 우리가 생각해오던 관습적인 영역 바깥에놓이기를 희망하는 것. 그 의아함을 유발하는 것. 의아함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매끈하게 안착된 - P83
문장보다 더 미묘한 차이와 더 교묘한 은닉들을더 정확하게 가리킬 때가 있다. 이럴 때 시는 시다워진다.
단어의 뜻과 소릿값과 모양새 모두를, 난생처음 감각해본 듯한 생경함은 시인의 시선이 지닌힘이다. - P84
기체처럼 존재하는 것들을 가시화하고, 기체가 서서히 영글어 액체로 뭉쳐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고체처럼 가시화되는 순간에, 문장은 다시 기체로 돌아간다. 단일한 뜻이 아닌 또 다른 뜻과 겹쳐지고 연루되면서 고형화를 거절하면서.
시를 감각하는 일은 그래서 언어를 감각하는일이며, 언어를 감각하는 일은 언어가 태어나기이전 상태에다 더듬이를 담그는 일이다. 그 더듬이는 결국 이 세계의 뒷면을 감각하기 위한 투시력이기도 하다. 시로 인해서 세계는 투과된다. - P85
어떤 시가 몇 줄에 걸쳐 해놓은 말을 어떤 지루한 책은 겨우 두께로 감당하고 있다. 시집을 읽고 나면 모든 책이 강압적이다. 어떤 시가 몇 줄에걸쳐 사이사이 은닉해둔 말을 어떤 지루한 책은기어이 까발려 낱낱이 박제해 놓는다. 시인은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단지 못다 한 말을 신뢰한다. 시인은 이해력을 불신한다. 상상력을 우선시한다. 상상력이 부재하는 이해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상상은 이해보다 더 오차 없는 이해의 방식이라는 것을, 시는 몇천 년에 걸쳐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조용히 외쳐왔다. - P86
일곱 살 즈음이었을 때다. 서랍장을 열어 엄마가 가지런히 개어둔 옷들을 낱낱이 뒤져댔다. 아무리 뒤져도 내가 찾는 옷은 없었다. 엄마는 얼른 옷을 챙겨 입으라고 등 뒤에서 재촉을 했고, 나는 내가 찾는 옷의 이미지를 엄마에게 설명하며도움을 청했다. 엄마는 이상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옷은 내가 네 살 때 입던 옷이었다고 말했다. 이젠 옷이 작아져서 입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내가커져서 그 옷을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옷이 작아져서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된 것이라고. 서랍장에 고이 있던 옷이 어떻게 스스로 작아질 수 있는지에 대해 나는 생각했다. 엄마의 인내 어린 설명과 설득에 의해 나는 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겨우 이해했다. - P87
그때 내 등 뒤에 서 있던 엄마의 표정으로 누군가에게 시에 대한 이야기를 건넨다. 시가 너무 작다는 이야기를. 혹은 작아졌다는 이야기를.
시가 작아진 것은
우리가 커다래졌기 때문이라는 걸 당신이 자라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럭무럭 크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이 찾던 그 시는 아직 이 세계에 없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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