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믿음보다는 배반에 기댄다는 걸 너무 오래 믿어왔다. 문학은 확신보다는 불안에 기댄다는 걸 너무 오래 확신해왔다. 문학은 내 이야기를 말하려는 욕망보다는 너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욕망에 기댄다는 걸 너무 오래 말해왔다. 믿음이 아닌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닌가. 확신이 아닌 것을 확신하는 것은 확신이 아닌가. 너의 이야기를 듣겠다고 계속해서 말하는 것은 말하기가 아닌가. 모순 속에 갇혀 고착돼 있는 문학에게 어떤 생명력이 깃들 수 있을까. - P89
문학이 한 시대의 명민한 증인으로 존재한다고 하자. 누구의 증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 누구의 손끝에서 가장 예민한 증언이 태어나고 있을까. 그자는 문학장의 이너서클에 있을까. 아닐 것같다. 아무래도 문학인의 세계는 성 같다. 내부가있고 외부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내부에 있는 사람이 맞는 것 같다. 내부에 있는 사람이 문학에 대해하는 이야기는 누가 듣게 될까. 나는 누가 읽기를바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걸까. 내부는 아닌 것 같다. 이 성 바깥을 상상한다. 우선, 성벽 바깥은 해자로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아무나 이성 안에 들여놓지 않기 위해서 문지기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 성안으로 들어오려면 출입증을 보여주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 바깥에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쓰기 위해 모이는 사람과 읽기 위해 모이는 사람. 어디선가 누군가가 무언가를…… - P90
문학장은 완고하고 폐쇄적이다. 문학 하는 우리의 환경을 둘러볼 때의 내 감회는 폐소공포증과 흡사했다. 내가 선택한 나의 환경이 언젠가는 내게 이런 유의 공포를 주는 공간으로 체감될 거라는 걸 설마 나는 몰랐을까. 잘 알고 있었으리라. 그걸 견딜 힘과 새로운 방법에 골몰할 줄 아는 힘을 얻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었다.
문학적이라 여겨왔던 것들과 매혹되어 수용해왔던 문학적 공기를 모두 해독解毒하고 난 이후의 진공 상태를 상상하며 살아가다 보니, 시 쓰는 힘에 의해서보다는 시 쓰는 부력에 의해서 부유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런 상태라면, 출구라든가, 개방감이라든가, 숨구멍 따위는 필요하지가 - P91
않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꿈꿔본 적 없었던 문학적 자아와 맞닿은 채로. 생각지 못했던 방식으로 오랜 이 폐소공포증을 나는 벗어나는 중이다. - P92
"나는 어째서 이 시집이 별로인가?"에 봉착해서 무척이나 답답해하던 그 시절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항상 머릿속에 맴돌았고 암담한 느낌마저들었다. 누구의 안목도 믿지 않은 채로, 아무도 좋다고 말해준 적 없는 시집을 찾아 헤맸다. 쉽게 찾아지지 않았지만 그런 시집을 가까스로 만났다. 아주아주 마음에 들었다. 너무 좋아서 얼굴이 빨개질 정도였다. 너무 기뻐서 시집을 꼭 껴안고 어디 잠시 숨어 있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 시집은 그때 이후 줄곧 유일한 ‘나만의 시집‘이다. 1991년에초판이 발행되었고, 지금은 구하기 쉽지 않은 시집이다. 시인은 이후로 시집을 더 이상 출간하지않은 것 같고, 이 시인을 만난 적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만나본 적이 없다. 이 시인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수십 년 동안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 P104
한편 정도를 인용해볼까 싶어 시집을 펼쳐읽다가 꼬박 하루가 갔다. 시인의 숨결이 너무 부드럽고 너무 진지해서, 시집 속에서 한 편을 꺼내었다가는 이내 그 문장이 바스러질 것만 같다. 그런 시집이 있었다. 도대체 어떤 시집이냐고 누군가가 정말 궁금해한다면, 직접 만났을 때나 ㅡ여러 번 고민을 좀 해본 후에 귓속말로나ㅡ알려줄 생각이다. - P105
기억은 골똘하게 집중할 때만 가까스로 완성에 가까워진다. 향후 반복해서 상기하는 것으로써 어쩔 수 없이 변형된다. 변형된 기억은 종내 완고해진다. 섬세함은 유실되고 이데올로기가 덧입혀지기 십상이다. 좋은 소설은 기억하고 있던 것을 되새김질하듯 기록하지 않는다. 비어 있던 기억의 구멍들을 두터운 진실들로 채워나가기 위하여기억하지 못했던 기억들을 비로소 소환하거나 발명한다. 기억술이 뛰어나서라든가 소중히 기억해오던 것을 마침내 기록하기 위하여 집필을 시작한걸로 짐작되지 않는다. 기억을 기억의 상자 속에서꺼내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길목에서 기억을 불현듯 마주치는 일과 같아진다. 순일하게 시선을 집중하는 것으로써 단 하나의 이야기가 생겨난다. 마침내 시간이 낯설게 소 - P108
환될 때 우리가 우리 삶에 미묘한 애착을 장착할수 있다는 것을 조용조용 알려준다. 애착해보지못했던 애착, 애착이 될 수 있으리라 상상해본 적없는 애착, 애착해야 한다고 주장되어온 것들의뒤에서 발견되기만을 기다려온 애착. 다른 장소를 꿈꾸지만 다른 시간을 만나는여행처럼, 내 삶이 마치 거기에 있어온 것처럼 여겨질 때야 나는 여기에 온전히 있을 수가 있다. 익숙한 시간이란 건 내게 있어본 적 없다. 서툴렀고 어리석었으나 좋았다.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그 어떤 사건도 사소한 적이 없었고, 세세한 일들을 잊지 않고 싶은 일들로, 열심히 기록해두고는 했다. 세세함은 항상 내게 힘이 된다. 세세히 기억한다는 것은 기억하던 대로 기억하는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커다란 힘이 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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