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일을 정말 잘하고 싶어서 걷기를 감행하는 것 중에 가장 나쁜 경우는 건강해지기 위해서 걷는 것이었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집에만 있다가는 점점 더 늪에 빠져드는 느낌에서 헤어 나올길이 없다 싶을 때 무릎에 용기를 불어넣고 기립하여 외투를 꺼내 입고 현관으로 걸어간다.
신발을 신고 걷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성큼성큼 보폭을 크게 하고서 걷는다.
얼마를 걸었을까 하고 핸드폰 속 앱을 클릭하고 확인해본다. 그리고 믿을 수 없어 한다. 좀 더걷기로 한다. 그래도 또 금세 지루해진다. 신발을잘못 신고 나왔나 싶을 만큼 발바닥이 아려올 때까지, 지난번보다 더 먼 곳까지 가보아야지 하면서 또 걸어본다. 체내 에너지가 부족해서 이런가하면서 편의점에 들러 이온 음료를 사서 벤치에 - P21
잠시 앉아본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거리의 상점들을 무관한 마음으로 흘낏대어본다.
너무 걸으면 집으로 돌아가 오늘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수 있으므로 기운을 남겨놓아야 한다며 집으로돌아가기로 결정을 한다.
같은 길은 지루하니까 다른 길을 선택해서골목골목을 걷는다. 폐업한 가게와 신규 오픈한가게를 지나치고 세탁소에 들러 세탁물을 찾고 반찬가게에 들러 반찬들을 사서 양손 가득 들고 집으로 들어온다.
이 정도면 오늘은 정말 훌륭했어. 뿌듯해하지만 그래 봐야 언제나 칠천 보에서팔천 보 정도를 기록할 뿐이다. 이 정도가 나의 체력으론 최대치겠구나 싶어진다. 그럴 땐 피곤하지만 곯아떨어지지는 않는, - P22
얕은 잠과 쪽잠으로 이어지는질 나쁜 수면을 취한다. 다음 날 아침, 수상한 꿈을 온몸에 잔뜩 묻힌채로 찡그리며 이불을 걷고 일어난다. 찌뿌둥한 몸을 강제해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신다.
걷는 일을 정말 잘하고 싶어서 걷기를 감행할 때 정말 좋은 방법은쇼핑을 하러 나가는 것이다.
오늘은 돈을 왕창 써볼까 하면서 바깥으로나갈 때는 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충전이 된다. 에너지가 올라가고 설렘까지 끼어든다. 즐거워서 저절로 걸음도 빨라진다. 가게가 즐비한 거리로 찾아간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텅 빈 가방 속에 장바구니를 하나 더 넣는다. 초콜릿을 사고 감자칩을 사고 핸드크림을 사고, 감기에 효과가 좋다는 티백을사고 양말을 산다. 무거운 걸 들고 돌아다닐 수는 - P23
없으므로 생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야지 한다. 편집숍에 들어가서 향수 냄새를 맡아보고, 털모자를 써보고, 가방을 메보고, 마음에 드는 색깔코너에서 패딩점퍼나 코트 같은 것을 꺼내어 거울앞으로 가져가 몸에 대본다. 매대에 전시된 잡지들을 펼쳐보다 다시 향수 코너에서 다른 향수 냄새를 맡아보고 다른 털모자 써보고∙∙∙∙∙∙. 편집숍이 좁은 공간은 아니라 해도 그곳에서만 천 보를 넘게걸을 수 있다는 게, 천보를 전혀 지루하지 않게 걸을 수 있다는 게 즐거워서 문구점에도 들른다. 대형 문구점일수록 좋다. 펜들이 많이 구비된 곳일수록 좋다. 하나씩 그립감을 체험하고 하나씩 필기감을 체험하며 조금씩 조금씩 매장을 맴돈다. 크리스마스관련된 전시 코너에서 카드에 그려진 천사들과 아기 예수를 음미하다가 데스크 용품 코너에서는 더 오래 머문다. 스테이플러를, 테이프 디스펜서를, 수동 연필깎이와 자동 연필깎이를 직접 만져보고 집에 있는 것들과 사용감을 과학적으로 비교해본다. 세상에 이렇게나 다양한 자와 이렇게나 다 - P24
양한 클립과 이렇게나 다양한 종이와 이렇게나 다양한 붓이 있다는 것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처럼 구경한다. 최종적으로 백화점 지하의 음식 코너로 진입을 한다. 음식을 직접 만들어 파는 코너보다는 세계 각국의 온갖 소스와 치즈, 그리고 와인과 맥주, 그리고 잼과 향신료 등을 파는 코너로 간다. 무화과잼이나 작은 병에 든 후무스 같은 것을골라서 장바구니에 넣는다. 이제 빵을 사고 생수를사서 숙소로 돌아가면 된다. 그 정도의 동선이면이만 보 정도는 충분히 넘긴다. 이만 보를 걸으면서 한 번도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언제나 새삼스럽게 감동적이다.
걷는 일을 가장 잘할 수밖에 없는 때는 마음이 괴로운 경우이다. 마음의 응어리들이, 괴로움들이, 번잡한 걱정들이, 끝없이 불길하게 이어지는 번뇌들이, 먼데로부터 차곡차곡 도착해 온 울분들이 - P25
온몸에 꽉 차 있을 때마다 나는 오래 걸었다.
응어리들이 풀어지고 괴로움들이 사그라들고 걱정들이 잦아들고 번뇌들이 가시고 설움들을물리칠 때까지, 하던 생각을 또 하고 고개를 젓고 주먹을 꽉쥐고 한숨을 푹푹 쉬고 괜히 이마의 머리칼을 쓸어올리고 이 모든 동작들을 나도 모르게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나는 모르는 동네에 도착해 있었다. 오늘은 만 오천보 정도를 걸었다. 견딜 만했다는 뜻이다.
길모퉁이에서 정수리에서 신발 뒤축에서, 불균형했던 것들이 안정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건물들의 기둥과 간판들이 겨우 수직 - P26
과 수평을 되찾는 것처럼.
집에 돌아와 욕조에 물을 받고 목욕용 소금을 풀고 들어가 누웠다. 물방울이 피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성스럽게 바디로션을 바르고 새로 빨아놓은 잠옷을 입고서 수면제의 도움 없이 깊은 단잠을 잤다.
지난 2022년 10월 30일은 삼만 보를 넘게 걸었다. 숙소에 돌아와 어지간히 걸었겠다 싶어 앱을켜니 ‘움직이기 신기록 배지‘가 화면 가득 뱅글거리며 나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 앱을 사용한 지 꽤 오래되었는데 삼만 보를 넘긴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뉴스 - P27
를 보고, 우리에게 또다시 일어난 참사를 목격하고, 너무 멀리서 접한 소식이라 실감이 덜한 것인지 너무 믿어지지 않는 소식이라 실감이 덜한 것인지, 실감이 당도하기도 전에 비참과 참혹과 비탄이 익숙하다는 듯 엄습해 왔다. 무언가를 할 수도, 무언가를 안 할 수도 없는 이른 아침에 핸드폰을 손에 들고 뉴스들을 클릭해 읽으면서 숙소 앞 드넓은 공원을 몇 바퀴를 돌다가 어딘지 모를 동네까지 걸어가게 되었다.
핼러윈 장식을 해놓은 상점들, 핼러윈 행사를 안내하는 포스터들을 지나치며 열심히 걸어갔다.
그렇게나 열심히 걸었지만 어딘가에 당도하지는 않았다. 다만 돌고 돌고 돌았다. 돌고 돌고 돌고 또 돌아서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 P28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답답함에 휩싸였던 것은, 내가 멀리에서 그 소식을 접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국가 애도 기간이 재빠르게 선포된 이후부터……. 나는 렉에 걸린 듯한 상태로 먼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비애마저 국가가 빼앗아갔다고 생각했다. 국가 애도 기간은 짧게 종료됐다. 나의 애도는 시작도 못 했다. 우리의 애도는 시작도 안 했다. 애도는 많은 경우 종료되지 않는 세계이다. 영원히 현재에 있다. 해가 바뀌고 또 해가 바뀌고 다른 참사와 재난이 닥쳐도, 오히려 새로운 재난 앞에서 되살아난다. 우리는 올바른 애도를 하고 싶다. 그릇된 삶 속에서도 올바른 애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도. - P45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지하 1층 엘리베이터로 향할 때 나는 커다란 거울 앞에 일부러 가서섰다. 거울 속에 있는 사람은 내가 분명했지만, 내가 모르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도 오랫동안 되고 싶지 않아 해온 엄마의 모습 같기도 했고, 내가 십수 년 동안 외면해온 진짜 내 모습 같기도 했다. 그 사람은 거울 속에서 오래 나를 기다려온 것 같았다. 아니, 늘 거기서 나를 지켜보다가 오늘 불현듯 나에게 자기 존재를 들켜버린 듯 보였다. 내가 그런 모습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없게 된 날, 나는 4층으로 올라가 바쁜 사람처럼씩씩한 동작으로 엄마의 사물함에 기저귀를 넣어두고, 보호자용 간이 침대에 걸터앉아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습관처럼 시를 썼다. - P62
그때 나는 거울 앞에 서야 하고 거리감을 확보해야만 한다. 거리감을 확보한다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잔인하고 매정하고 이기적임을 나는 안다. 그리고 잔인하고 매정하고 이기적인 것이 잔인하지 않고 매정하지 않으며 이기적이지 않은 상태를 어떤 방식으로 핍박하는지를 나는 안다. ‘엄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걸 의식적으로 삼가기로 한 나의 결정을 나는 현명했다고 여긴다. 어떤 점에서? 도의적인 딸로서? 엄마로부터 가장 강력한 억압을 받아온 한 여성으로서? 아니면 미학적으로 좀 더 나은 시를 쓰고 싶은 욕망을 가진 시인으로서? 아니다. ‘엄마‘라는 단어에 내가 이미 포함되어 있어서다. ‘나‘ 라는 주어가 ‘엄마‘라는 자격을 이미 획득하고 있어서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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