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청 명
황하도 맑아진다는 청명날 강머리에 나가 술을 마신다 봄도 오면 무엇하리 온 나라 저무느니 버드나무에 몸을 기대 머리칼 날려 강변에 서면 저물어 깊어가는 강물 위엔 아련하여라 술취한 눈에도 물 머금어 일렁이는 불빛
우리들의 그리움은
우리들의 믿음은 전쟁이 지나간 수수밭 죽은 내 형제의 머리맡에 미군이 벗어놓은 군화 속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소망은 끝끝내 결재되지 않을 보수정당의 서류함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사랑은 알 수 없는 기도와 못다 한 노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들의 울음은 이 봄에 생생하게 피어날 보리밭에 있고
시퍼렇게 시퍼렇게 물어뜯긴 선창과 파리하게 떨고 있는 공장의 캄캄한 불빛 속에 있어
우리들의 사랑은 다시금 순환하는 계절의 저 눈밭에 봄이 와서 붉게 피어날 진달래와 참호 속에 얼어붙은 젊은 기침과 돌이킬 수 없는 절망 속에 싹터
그리움은 이다지도 시퍼렇게 멍든 풀잎으로 너와 나의 가슴 속에 수런대는가
오오 민주주의여
용산시장에서 어느 여성근로자의 일기
공장은 문을 닫았다 가진 것이라곤 노동밖에 없는 우리 꼬쟁이의 모가지는 열두 개 상처마다 옹근 매듭 아리고 쓰리어라 눈물 고인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모두들 열심히 살아가자며 용산시장 골목길을 빠져나가네 어디서들 이렇게 흘러왔는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등을 떠밀고 떠밀리며 듣는 저 아우성과 발끝마다 질척이는 비릿한 냄새 철교 위를 지나는 기차소리는 멀고 먼 고향길을 달려가는가 용산시장의 공기는 끈끈하여 차마 우리의 발길을 붙드는구나 노동밖에는 팔 것이 없는 우리 꼬쟁이의 모가지는 열두 개
저마다 자기들의 상품을 놓고 내일을 향해 외쳐대는 아우성이 어쩌면 재미있는 노래일 수 있으련만 삶이란 역시 힘겨운 것일까 노동판에서 돌아와 지게를 받치고 국수그릇 앞에 쭈그려 앉은 저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이제 어디다 대고 무릎을 꿇어야 하나 처음엔 쳐다보기도 싫던 그 모습 어느덧 아버지의 얼굴로 떠오르며 모두들 그렇게 꺾여서는 안되느니 힘을 합쳐 열심히들 살아가라고 당부하면서 눈물 속에 흐려지면서
길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붉은 꽃
어디쯤일까 어디쯤일까 그리움 가는 길에 발돋움하고 누구를 향한 마음에 이렇게 몸부림쳐 붉은 꽃일까 먼발치로 사라지는 세월을 두고 한세상 마당귀에 불을 지르네
눈 덮인 산길에서
눈이 내리네 바람 맞서 울고 섰는 나무들이 눈에 덮이네 그대와 걷던 산길 북한산 기슭의 그 외딴 숫막 함께 앉던 그 자리에도 눈이 내려 쌓이네 한 해가 저물고 또 한 해가 와도 굳은 맹세 변함 없건만 괴로워라 지금 여기 없는 그대를 위해 나는 술잔을 채울 뿐 눈이 오는 날은 울고 싶어라 그러나 기약한 그날은 갑자기 눈처럼 오는 법이 없기에 빛나는 아침을 위해 나는 녹슨 칼날을 닦으리
|